조 명희 문학관 & 정송강사 탐방
음성 금왕에서 시 낭송 열린 예배를 마친후,진천에 있는 포석 조 명희 문학관과 송강사를 찾아 문학 기행의 길을 떠났다.
포석문학관을 찾은 문학기행에 오른 우리는,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오 만환 선생의 안내를 받으며 포석 문힉관에 관한 자상한 설명을 듣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오 만환 선생은 오래전 부터 우리 일행과 알고 지내는 지인으로써, 전에는 선정고등학교에 재직하기도 했었고,현재는 진천 문인협회 회장과 망향의 시단 대표를 맡고 있기도 한 분이다.
포석 문학관을 두루두루 돌아 보고,다음에 찾아간 곳은 체육센터가 있는 문학공원이었다.
문학공원까지 돌아본 다음 우리 일행은, 송강 정철 선생의 묘소와 사당이 있다는 정송강사(鄭 松江祠)를 찾았다.
천안과 진천의 경계에 위치한 환희산 자락에 있는 송강 정철의 묘소는 우리나라 대표적 명당중 하나라고 한다.
명당이라는 말에 더욱 구미가 당겼는데,막상 현장에 가보니 비가 오던 터라 가볼수는 없었고....
묘소와 사당이 있는 이곳은 고기가 숨어 있다는 어은마을과 고기가 날아갔다고 하는 비어산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전국에 어은마을이란 지명은 퍽이나 여러곳에 있기도 하다.
어은리란 지명은 충남 논산 연산면 어은리를 비롯해서,순창 복흥면 어은동,임실군 삼계면 어은리, 전북 태안과 군산 옥구,경북 영천의 어은리와 장흥 관산과 합천 삼가면등 수많은 어은리란 지명이 나오는데,이런 지명이 생겨난 것은 한때 쫒겨 났던 사람들의 피신처가 되었던 때문이라 보면 될듯 싶다.
포석 조 명희 문학관
오 만환 선생의 해설을 들으며....
포석 조명희 의 생가 조감도
조 명희는 어떤 사람인가?
포석(호) 조 명희는 1920년대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목적의식적 단계로 발전시켰으며 소련 망명 후 재소한인 문학 건설에 힘썼다.
1919년 일본 도요대학 동양철학과에 입학하면서 새로운 사상을 접하게 되었고, 친구들과 시 창작 및 연극공연을 전개했다.
필명은 적로(笛蘆). 가난한 양반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방황하다 3·1운동에 참가해 투옥되기도 했다.
1919년 일본 도요대학[東洋大學] 동양철학과에 입학해 어렵게 고학을 하면서 새로운 사상에 접하게 되었고, 이때 친구들과 시 창작과 연극공연을 전개했다고 한다..
1925년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에 가담하여 이 기영,·한 설야 등과 마르크스주의 공부모임을 만들었다.
1928년 8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소련으로 망명한 뒤로는 한인촌 교사로 일했고, 연해주 한인신문 〈선봉〉과 잡지 〈노력자의 조국〉 등에 글을 발표하였다.
1934년 소련작가동맹의 원동(遠東) 지부 간부를 지냈으나, 스탈린의 탄압정책의 와중에서 일본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총살당했다.
1988년 중앙 아시아 한인 거주지역인 타슈켄트에 문학기념관이 세워졌다.
일본에서 귀국한 후 희극 〈김영일의 사〉(동우회, 1921. 7)·〈파사 婆娑〉(개벽, 1923. 11~12)를 발표하고, 1924년 '적로'라는 필명으로 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펴냈다. 〈김영일의 사〉에서는 도쿄[東京]유학생들의 가난과 사상적 갈등을 나타냈고, 〈파사〉에서는 은나라 주왕의 잔인한 학정을 그려냈다.
두 작품 모두 바람직하지 못한 인간을 다루었으나 설명이 충분하지 못하고 관념적이다.
이어 소설 〈땅속으로〉(개벽, 1925. 2~3)·〈R군에게〉(개벽, 1926. 2)·〈농촌사람들〉(현대평론, 1927. 1)·〈낙동강〉(조선지광, 1927. 7)·〈아들의 마음〉(조선지광, 1928. 9) 등을 발표해 프롤레타리아 소설의 형성과 발전에 공헌했다.
이 소설들에서는 초기의 시나 희곡에서 보여주었던 낭만적이고 관념적인 표현에서 벗어나 사실주의에 입각해 일제강점기의 지식인의 고뇌, 농촌의 궁핍, 노동자·농민의 계급적 연대와 사회주의 이상을 담아냈다.
포석의 대표작으로는 낙동강이란 작품이 있기도 하다.
책을 선물로 선사하는 장면
화랑 체육관
문학공원
송강 정철의 묘소와 사당이 있는 곳
진천군 문백면은 조선 말기 문방면(文方面)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백락면(白洛面)의 15개리, 덕문면(德文面)의 차상리, 청안군 서면의 소백암리를 병합하여 문방의 ‘문’자와 백락의 ‘백’자를 따서 문백면이라 하였다.
봉죽리는 백락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어은리(漁隱里)·봉암리(鳳岩里)·대상리(垈上里)·석보리(石洑里)·옥산리(玉山里) 일부를 병합하면서 이루어진 마을이며, 어은 마을은 달리 은골이라고도 한다.
연일정씨를 대표할 만한 인물은 단연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이다.
송강 정철(1536~1593)의 본관은 연일(延日),자는 계함(季函),호는 송강(松江)으로 돈녕 부판관 정유침(鄭 惟沈)의 아들로 서울 장의동(현재 종로구 청운동)에서 태어났다.
명종 17년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고,지평을 거쳐 승지에 올랐으나 동인과로의 불화로 사직하였다가 다섯달후 다시 기용되어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다.
관동별곡은 이때 지어진 작품이며,관찰사 이후 대사헌이 되기도 하였으나, 동인의 공격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나 전라도 담양에 머물면서 많은 단가와 가사를 남기게 되었다.
선조 23년(1590)좌의정에 올랐으나, 다음해 세자 책봉문제로 임금의 노여움을 사 탄핵을 당하여 강계에 괴리 안치되었는데,임진왜란으로 풀려나 제찰사의 직을 맡아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오던중, 다시 탄핵으로 체직되어 강화도 해안의 허름한 초옥에 홀로 기거하며, 굶주림과 영양실조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진천은 송강 정철과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었으나, 1665년(현종 6) 묘소를 경기도 고양에서 진천으로 이장하면서 연일정씨의 진천 세거지가 시작되었다.
그해 손자 정포(鄭浦)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문백면 봉죽리 환희산(歡喜山)[402.3m] 동쪽에 잡아 준 자리로 송강 정철의 묘소를 이장하고 사당과 신도비 등을 건립하였다.
한편 정철의 손자 문절공(文節公) 정양(鄭瀁)[1600~1668]이 1658년(효종 9) 진천현감으로 부임한 것이 인연이 되어 세거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정양은 강릉부사를 지낸 정종명(鄭宗溟)의 아들로 1618년(광해군 10) 진사시에 합격하여 여러 관직을 거친 뒤 1668년(현종 9) 장령에 올랐으나 같은 해 세상을 떠났다.
정철의 현손인 정치(鄭治)는 천거로 관직에 나아가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내다가 1659년(현종 즉위년) 예송 때 문백면 봉죽리 어은마을로 낙향하였다.
정철의 8대손 정재경(鄭在褧)[1781~1858]은 과거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1825년(순조 25) 『상산지(常山誌)』를 편찬하였고, 1851년에는 김유신(金庾信)의 위패를 모신 죽계사(竹溪祠) 중건을 주도하였다.
봉죽리 서쪽에 솟은 환희산과 국사봉이 남북으로 충청남도와 경계를 이루고, 남류하는 미호천(美湖川) 지류 주변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어은마을은 정송강사(鄭松江祠)에서 흐르는 지천을 따라 내려오면서 북쪽으로 트인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상산 8경 어은 계곡
상산이란 진천의 옛 지명.
이곳까지 가 보고 더 이상 들어가지 못했다.
송강 정철의 묘소
비가 온 터라 실제 가보지는 못하여 차용한 사진임.
묘소가 2기인데 정철의 묘소는 위에 있는 곳이며, 아래는 둘째아들 종명의 묘소란다.
송강 기념관
온시 숨터/시가 1만권이 있다는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