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 제목을 달아 죄송합니다. 영화제목을 그대로 옮겨 오느라 그랬습니다. 2006년 3월 개봉했던 조지 클루니 감독, 데이빗 스트래던 주연의 영화입니다.
엄기영 MBC사장의 담화, “정치적 압력 아니다”
엄 사장은 13일 "뉴스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신경민 <뉴스데스크> 앵커를 교체키로 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다행히 "일각에서 의혹을 제기하는 것처럼 정치적 압력에 의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MBC의 궁극적인 목표는 “국민의 사랑을 받는 공정하고 균형 잡힌 방송"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신경민 앵커는 국민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 불공정했고, 편향적인 방송을 했던 앵커란 말이잖아요.
텔레비전 저널리즘의 역사
텔레비전 저널리즘은 처음에는 라디오 뉴스와 단편 뉴스 영화를 섞은 것으로 인식되었던 모양입니다. 인력도 부족하고 카메라도 컸고, 필름을 방송국에 재빨리 보내기도 어렵고, 그래서 일종의 단편뉴스영화처럼 활용되었습니다. (다음은 미첼 스티븐스, <뉴스의 역사> 486-490면에서 관련 부분을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용서해주시길.)
우리에게도 앵커맨이라는 말은 이제 익숙합니다만, 원래 앵커맨(anchorman)이란 용어는 1952년 전당 대회를 보도하는 CBS의 월터 크롱카이트의 중심적인 역할을 묘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랍니다. 미국 정당의 대선후보를 뽑는 전당대회가 텔레비전 저널리즘 발전에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참고로 앵커맨의 세 유형에 대해서는 제 블로그에 실린 2월 27일에 실린 <차라리 신경민, 박혜진 앵커의 입을 봉하라>글에서 나름대로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저 써준 대로 대본만 읽는 방식은 우리가 가장 배격하는 북측의 뉴스앵커들이 지극히 선호하는 방식입니다.)
존슨 대통령의 전화
“1965년 8월 CBS기자 몰리 세이퍼(Morley Safer)는 베트남에서 캄네(Cam Ne)라고 불리는 작은 마을을 대상으로 <색출멸공>이라는 작전을 수행하는 미 해병대에 동행하였다. 해병대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짚으로 엮은 지붕에 라이트로 불을 붙이면서 캄네 부락을 초토화시켰다. 이 광경은 텔레비전으로 방송되었다. … CBS가 몰리 세이퍼의 캄네 부락 보도를 방송한 다음날 아침, CBS 사장 프랭크 스탠턴(Frank Stanton)은 한 통의 전화를 받고 잠에서 깼다. 다음과 같은 전화 목소리였다. ‘스탠턴 사장, 당신은 나를 망치려고 작정했소? 스탠턴 사장, 나 대통령이데, 어제 당신 부하들이 미국 국기에 똥칠을 했소.’ 전언은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Lyndon Johnson)이 했고, 이는 텔레비전 뉴스의 운영에 있어 받게 되는 정치적 압력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 존슨 대통령은 자신의 집무실에 텔레비전 세 대를 설치해 두고 세 방송사의 뉴스보도를 시청했다. 월터 크롱카이트가 <CBS Evening News>를 마치고 나오면 월터의 비서가 전화기를 들고 그를 기다리며 ‘백악관에서 전화가 와 있습니다’라고 하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Barnouw, tube of Plenty 388면, <뉴스의 역사> 490면에서 재인용)“
누구나 예상하듯, 미국에서도 텔레비전 저널리즘과 정치적 영향력과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때 쯤 프랑스에서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더군요. 그 대목을 인용합니다.
‘나는 텔레비전을 잡고 있다’는 드골 대통령 ▲ 미첼 스티븐스 저
“프랑스에서는 텔레비전이 오랫동안 정부에 의해 운영되고 있어서 텔레비전 기자들은 상급자의 명령에 충실하고 정부의 정책에 대해 개방적인 입장을 취해 왔다.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은 ‘나의 적들이 신문을 소유하고 있으니 나는 텔레비전을 잡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뉴스의 역사> 489면)”
이를테면, 르몽드는 비판적이고, 텔레비전은 친 드골주의적이었단 말이 되겠지요. 우리도 지난 5공 시절 ‘땡전뉴스’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매카시즘 시절의 추억, 영화 Good Night & Good Luck
이 영화는 1935년부터 1961년, 다들 두려워 입을 꼭 다물고 있을 때, 바른 말 잘 하는 미국 CBS 뉴스맨 에드워드 머로와 그의 뉴스 팀이 위험을 무릅쓰고 그의 프로그램을 이용해 조셉 맥카시의 부당함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영화입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를 몰락시키고 헌법에 명시된 개인의 권리를 되찾는데 크나큰 공헌을 남깁니다.
영화에서 인용한 머로의 명연설입니다. (NAVER의 영화정보에서 활용하였음을 고백합니다.)
"TV는 바보상자가 되어 세상과 격리시키는 도구로 전략하겠죠"
“처음에 우리 역사는 우리가 만든다고 말씀드렸죠. 우리 방송이 이대로 가면 역사의 비난을 받을 것이며,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됩니다. 생각과 정보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맙시다.
자만에 빠져 고립되든가 말든가 아무도 관심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단 한 기자의 의견이라도 논박하려면 충분한 증거가 있어야 된다고요. 만약 그들이 옳다면 무엇을 잃어야 될까요? 그들이 옳다면 TV는 바보상자가 되어 세상과 격리시키는 도구로 전략하겠죠. TV는 지식을 전합니다. 깨달음도, 영감도 선사합니다. 허나 그것은 오직 최소한의 참고용으로 쓰일 때만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TV는 번쩍이는 바보상자에 불과합니다. 좋은 밤 되시고, 행복하십시오(Good night, and good luck.)”
신경민 앵커는 당장 오늘밤 방송을 마지막으로 그만 두겠다는 의사를 회사측에 통보했다고 합니다. 오늘밤 9시 45분, 뉴스데스크가 끝났을 때 전해드리고 싶은 인사를 미리 전해드립니다.
요즘 뉴스에서 들리는 소식은 훈훈한 것이 드물다. 잠깐만 들어도 금방 속이 답답하니 밥 먹으며 보다가는 소화불량 걸리겠다. 그래도 뉴스가 끝나고 30초 정도 나오는 '클로징 멘트'가 이따금씩 막힌 속을 풀었다. 심해처럼 어두컴컴한 시대에 그나마 이따금씩 보게 되는 촛불 같았다. 거기 촌철살인의 클로징 멘트를 구사하는 문화방송 <뉴스데스크>의 신경민 앵커가 있었다.
그러나 지난 13일 밤, 신경민 앵커는 마지막 방송을 마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앵커의 인사권을 가진 엄기영 사장의 뜻이다. 엄기영 사장은 앵커 교체를 "뉴스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필요하다"며 "정치적 압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거듭 강조했다. 허나 한편으로는 후임 앵커의 기준으로 "공정하고 균형 잡힌 방송"을 말하고 있어 신경민 앵커가 문화방송의 '공영성'에 흠집을 냈다고 생각하는 듯싶다.
▲ 조지 클루니 감독의 <굿나잇 앤 굿럭>은 매카시즘의 광풍과 정면으로 싸운 CBS의 앵커 에드워드 머로의 이야기다. 제목 "좋은 밤 되시고, 행복하세요(Good night, and good luck)"는 머로가 즐겨 쓰던 클로징 멘트.
그간 신경민 앵커가 정권에게 그리 친절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신경민 앵커는 클로징 멘트를 통해 여러 차례 이명박 정부를 비판한 바 있다. 30초라는 짧은 시간에 현안을 종합 압축하여 속사포처럼 쏘는 솜씨가 기막혔다. 쇠고기 정국과 촛불시위, 한국방송 정연주 사장의 해임과 방송법 개정, 미네르바 구속과 법원의 촛불배당, 용산 참사와 장자연 리스트 등 사회문제를 종횡무진 누비며 이명박 정부를 자꾸만 꼬집었다.
그래서 이번 앵커 교체가 권력의 눈치를 보는 정치적 판단이 아니냐는 목소리가 들끓는다. 이명박 정부와 갈등을 거듭했던 문화방송의 행보를 살피면 의혹설이 허황되어 보이지 않는다. 과연 역사란 반복되는 것일까. 이번 사건을 지켜보며 에드워드 머로와 영화 <굿나잇 앤 굿럭>(2005)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미국과 한국 사이에서 오십 년이 넘는 세월을 두고 벌어진 닮은꼴 사건에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1950년 미국의 '매카시즘' 2009년 한국의 '명바기즘'
▲ MBC <뉴스데스크>를 하차하게 된 신경민 앵커가 13일 저녁 서울 여의도 MBC본사에서 자신의 마지막 방송을 마친 뒤 뉴스센터를 나서고 있다.
에드워드 머로는 미국의 전설적인 언론인이다. 머로가 전설이 된 건 당대 미국을 휩쓸었던 매카시의 '빨갱이 사냥'과 정면으로 맞서 싸우면서부터다. 조지 클루니 감독의 영화 <굿나잇 앤 굿럭>은 바로 이에 관한 이야기다. 당시 머로는 CBS 방송국의 시사프로그램 <씨 잇 나우>의 메인 앵커였다.
그런데 1950년 2월, 공화당 상원의원 매카시가 느닷없이 "국무성에 공산주의자가 205명 있다"는 폭탄 발언을 한 뒤로 엄청난 '빨갱이 사냥'이 미국 전역에 밀어닥쳤다. 매카시에게는 아무런 근거가 없었지만 빨갱이 알레르기를 앓는 미국은 속절없이 선동에 빨려들었고, 서슬 퍼런 기세 때문에 많은 지식인들이 모른 체하며 침묵했다. 바로 그때 에드워드 머로가 나서서 매카시의 광기를 비판하며 싸웠다. 이에 매카시가 머로도 빨갱이라고 모략했음은 물론이다.
여기서 매카시의 논리를 살펴보면 간단하다. 머로가 지적하듯 '매카시 말에 반대하면 무조건 빨갱이'라는 것이다. 어린아이도 저 논리가 바보 멍청이의 논리라는 걸 알 테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에 반대하면 무조건 좌파'라는 수구세력의 논리도 매카시와 다르지 않다. 신경민 앵커가 이명박 정부에 반대하는 말을 하긴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신경민 앵커가 좌파라는 증명은 되지 못한다.
역시 뉴스데스크나 문화방송이 좌편향되었다는 증명도 결코 되지 못한다. 그러면 이는 좌파가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무식하거나 아니면 좌파를 정치적인 수법으로 쓰거나 둘 중 하나다. 아무래도 후자로 추측하는 것이 예의바른 일이겠다. 여기서 문화방송에 좌파 낙인을 찍는 수법은 무척 낡았지만 여전히 효과적이다. 59년 전 미국의 매카시처럼 사람들의 공포를 이용하여 이성을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가히 '명바기즘'이라 할 만하다.
국가권력에 침묵하는 것이 '공영성'인가
▲ 에드워드 머로와 그의 동료들은 정부의 탄압을 견디며 진실을 말했고 끝내 언론자유를 지켜냈다.
아무리 대단한 에드워드 머로라도 겁이 났을 테다. 멀쩡하게 잘 살고 있던 아주머니가 갑자기 골수 공산당원으로 몰려 끌려가는 시대였다. 매카시는 공포의 대왕으로 군림하고 있었고 밉보이다가는 목숨이 위험했다. 그러나 머로는 끝까지 언론의 양심을 지켜냈고 매카시를 주춤하게 만들었다. 공포의 시대에서 잠깐이나마 숨통을 트이게 한 머로에게 사람들은 환호를 보냈다.
그러나 정작 머로에게 돌아온 것은 날벼락이다. CBS 방송국 사장은 광고가 끊겨 <씨 잇 나우>를 더는 방송 못하겠다고 일방 통보했다. 그 시간대에는 하하호호 웃는 쇼 프로그램이 대신 들어갈 것이다. 한 마디로 '뉴스 경쟁력이 없다'는 경제적 이유였다. 그러나 정국을 생각할 때 실상 정치적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걸 모를 리 없다. 머로는 씁쓸한 표정으로 줄담배만 연거푸 뻑뻑 피워댄다.
클로징 멘트는 앵커의 고유한 재량이다. 맺는 말을 문제 삼는 험악한 일은 웬만해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문화방송 엄기영 사장은 앵커의 공영성을 무척 소중하게 여기는 듯싶다. 많은 보수신문도 문화방송이 공영성을 지켜주기를 한 목소리로 바라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공영성이 과연 무엇인지 모를 일이다. 공영성이란 말 그대로 공공의 이익을 위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정부에 침묵하고 방관하는 방송이 공영성 있는 방송이냐는 의문이 생긴다.
<PD수첩>의 광우병 보도 이후 이명박 정부는 기습적인 압수수색 등 문화방송에 수차례 탄압을 가해왔다. 허나 방송이 공영성을 지키려면 외부의 자본이나 권력에 굴하지 않고 양심을 행해야 한다. 언론을 흔히 '제 4부'라고 부르는 까닭을 곰곰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이번 앵커 교체로 자칫 국가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언론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되지는 않을까 염려가 된다. 국가권력은 홀로 오롯할수록 파시즘에 가까워진다.
이명박 정부에게 영화 <굿나잇 앤 굿럭>을 권함
▲ 14일 오전 여의도 MBC본사 로비에서 <뉴스데스크> 앵커 교체에 항의하며 전면 제작거부 중인 보도국 기자들이 '언론장악 획책하는 MB정부 각성하라' '정권에 굴복하는 앵커교체 취소하라' '보도국장 본부장은 책임지고 사퇴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양심을 따랐던 우직한 사나이 에드워드 머로. 93분 짜리니까 <굿나잇 앤 굿럭>은 조금 짧은 영화다. 그러나 에드워드 머로 역할을 맡은 데이빗 스트랜던의 고집스러운 눈매와 청산유수로 흐르는 말재간이 일단 대단하다. 조지 클루니 감독은 흑백화면을 택하여 당시 매카시의 자료필름을 그대로 썼는데 한층 생생한 화면을 만들었다.
가끔씩 들리는 재즈 선율과 흐늘흐늘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를 지켜보고 있으면 어느덧 심장이 쿵쿵 뛴다. 조명이 닿는 곳에는 흑백의 대비가 찌르듯 강렬하다. 영화는 에드워드 머로를 재현하여 오로지 양심과 진실의 힘을 '스트레이트'로 내지르고 있다. 누구나 봐도 피가 되고 살이 될 영화지만 특히 이명박 정부에게 권하고자 한다.
바야흐로 한국의 언론자유는 만신창이다. 한반도 바깥에서 봐도 그러하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4월 2일자에서 한국 검찰이 문화방송 이춘근 PD와 YTN 노종면 노조위원장을 체포했다고 알리며 이를 '광적 탄압병(Mad bullying disease)'이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또 국경 없는 기자회(RSF)는 작년 한국의 '언론자유 지수'를 따져 세계 47위로 정했으며 최근에는 '감시 대상 국가'로 꼽은 바 있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는 에드워드 머로의 연설 장면이 나온다. 혼돈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언론이 해야 할 일을 이야기한다. 국가나 법이 언제나 올바른 것은 아니다. 불의가 공권력을 빌려 민주주의를 위협할 때 언론은 단호히 맞서 싸워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텔레비전이란 그냥 바보상자에 불과하다. 언론의 진정한 힘은 '사실'에 머물지 않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굿나잇 앤 굿럭.
MBC 경영진의 ‘뉴스데스크’ 앵커 교체 결정에 따라 신경민 앵커가 마지막 방송을 마쳤다. 많은 시청자들의 마음을 후련하게 해주는 클로징 멘트로 주목받았고, 또한 결국 그로 인해 앵커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던 그의 마지막 멘트가 무엇일지 많은 관심을 모았다.
자신이 사전에 예고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31일 방송에서 언급했던 자신의 클로징 멘트에 관한 생각을 다시 한번 밝혔다.
신경민 앵커의 마지막 클로징 멘트
“회사 결정에 따라서 저는 오늘 자로 물러납니다. 지난 1년여 제가 지닌 원칙은 자유, 민주,힘에 대한 견제,약자 배려 그리고 안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언론의 비판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아서 답답하고 암울했습니다. 구석구석과 매일매일 문제가 도사리고 있어 밝은 메시지를 전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희망을 품은 내일이 언젠가 올 것을 믿습니다. 할 말은 많아도 제 클로징 멘트를 여기서 클로징하겠습니다."
MBC 뉴스데스크 화면
신경민 앵커의 클로징 멘트를 이어 받은 박혜진 앵커의 인사말은 목이 메인 상태로 이루어졌다. “월요일 뉴스데스크 마치겠습니다.” 만약 인사말이 더 길었더라면 목이 메인 박혜진 앵커는 말을 잇기가 곤란했을지도 모르겠다.
왜 목이 메지 않겠는가. 바로 얼마전 파업참여에 관한 클로징 멘트 때문에 방통위로부터 경고 결정이라는 수난을 겪었던 박혜진 앵커였다. 뉴스 프로그램에서 입바른 소리를 해왔다는 이유로 하차하게 된 선배의 마지막 말을 듣는 느낌이 어찌 간단할 수 있었을까. 신경민은 그렇게 떠나갔고, 이제 우리는 신경민-박혜진 앵커 체제의 호흡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한 쪽에서는 불편하다고 했지만, 그래도 오늘의 상황을 걱정하는 많은 시청자들이 뉴스의 정도라고 입을 모아 칭송했던 ‘뉴스데스크’의 한 시대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신경민 하차 이후에 닥쳐올 진짜 문제들
그러나 거목 앵커를 떠나보내고 목이 메여만 있기에는 방송을 둘러싼 현실이 너무도 척박하다. 우리가 진정 걱정해야 할 문제는 단순히 신경민의 하차가 아니라, 이를 계기로 본격화될 'MBC의 권력순종‘이다.
이미 그 조짐들은 나타나고 있다. 오늘 MBC 기자들이 밝힌 내용은 충격적이다. 최근 “박연차 회장이 지난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대통령 측근 기업인 천신일 씨에게 수십억을 전달한 의혹이 있다”는 ‘뉴스데스크’ 톱뉴스가 다음날 아침 전영배 보도국장의 지시에 따라 ‘뉴스투데이’에서 누락되었다는 것이다.
MBC가 처음으로 단독보도했던 이 내용은 일종의 특종이었다. 그 뒤 다른 언론들도 비슷한 의혹을 보도하였고, 검찰도 천신일 씨에 대한 출국금지 조치를 내린 상황이다. 특종이라고 키워도 시원치않을 기사가 보도국장의 전화 한통으로 빠졌다면 간단한 일이 아니다. 신경민 앵커 전격 하차의 배경이 무엇인지,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MBC 기자들이 신경민 앵커 교체와 불공정보도의 책임을 물어 보도국장에 대한 불신임을 결의한 것은 시의적절한 행동으로 받아들여진다. 이제는 신경민 앵커 문제보다도 공정방송의 제도적 실현, 그리고 이를 방해하는 요소들에 대한 극복이 근본적인 과제로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방송은 언론이다. 따라서 권력에 대한 견제를 중요한 책무로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MBC는 아직 살아있는 방송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물론 이를 불편해하는 사람들에게는 눈엣 가시였겠지만 말이다.
신경민 앵커의 마지막 클로징 멘트를 들을 때 사실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박혜진 앵커만 목이 멘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두 사람을 성원했던 많은 시청자들의 마음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경민이 이렇게 물러났다고 해서 아직 진 것은 아니다. 언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싸움은 결국에는 언제나 승리하였음을 우리는 기억하기에, 이를 위한 MBC 구성원들의 노력과 행동에 변함없는 기대를 건다.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신경민 앵커의 하차소식을 들으면서 나는 손석희를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신경민이라는 사람을 단순히 mbc뉴스데스크의 앵커로만 기억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출근길의 라디오 프로그램들 중에서 근 10년째 최고의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손석희의 시선집중뒤에는 신경민 아나운서가 진행했던 '뉴스의 광장'이 있었다. 나는 시선집중도 듣고, 뉴스의 광장도 듣는 편이었지만. 때로는 모든 이들이 좋아했던 손석희의 시선집중보다는 신경민의 뉴스의 광장을 더 좋아했다. 아니 내 취향은 시선집중 보다는 뉴스의 광장에 더 쏠려있었다.
손석희의 시선집중은 말 그대로 '집중'이었다. 논란이 되는 뉴스를 선별하여, 그것에 대해 손석희가 집중적으로 따지거나 공격한다.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건 둘 간의 진검승부다. 그렇지만 승패는 가려지지 않는다. 손석희는 기준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기준에 의거하여 이것이 옳다. 이것이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손석희는 판단을 청취자에게 맡긴다. 내가 옳은 것인가. 남이 옳은 것인가. 따라서 손석희는 때로는 청취자를 대리하는 검객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청취자의 반대편에서 검을 교환하는 '적수'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사안에 따라. 손석희는 계속하여 변한다. 김명민이 그랬던 것처럼 손석희는 계속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중립을 지킬 수 있고, 사람들에게 신뢰받는 진행자가 될 수 있다. 자신의 색깔을 지우고, 상황에 따라 논란의 핵심을 짚어낼 줄 아는 그의 태도 때문에.
그렇게 펼쳐진 '집중'뒤, 신경민은 자신의 '광장' 앞에서 기준을 제시한다. 신경민의 뉴스에서 우리는 흔히 그의 육성을 접할 수 있다. 손석희가 자신의 의견을 정확하게 밝히지 않는 대신에 신경민은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그리고 정확하게 전달한다. 그 '기준' 앞에서 옳고, 그른 것, 합당하고 합당하지 않는 것이 구분된다. 그 기준에 대한 판단 역시 청취자의 몫이었지만, 신경민이 가지고 있던 '색깔' 이 명확했음은 분명하다. 나는 그런 신경민이 좋았다. 그의 목소리에서, 그의 태도에서 세상의 옳고 그름에 대해 판단하는 오만한 사람의 품격을 느꼈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가 제시하는 기준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때도 있었지만 나는 그의 목소리에서 엘리트의 숨소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뉴스데스크의 메인 앵커를 맡는 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기대를 하고 있기도 했고, 우려를 하기도 했다. 기준이 정해지지 않은 이 한국 사회. 때로는 기준이 정해지더라도 사안에 따라, 상대에 따라, 굽혀지거나 매서워 지는 그 기준이 보편화된 이 사회에 신경민이라는 존재는 바른 치유약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기대했다. 그리고 이를 당연시 여기는 사회 풍토 안에서, 무조건 중립을지켜야 하고, 옳지 않더라 하더라도 그것을 말하는 것이 기울어진 태도라고 지적받는 이 사회속에서 신경민이라는 존재가 쉽사리 부정당하지 않을까. 우려했었다,
그래서 신경민은 환호 받았고, 비판받았으며, 칭찬받았고, 비난 받았다. 환호와 비난이 공존하는 순간속에서 신경민 앵커는 석연찮은 이유로 물러나게 되었다.
여기서 손석희의 진행 방식과 신경민의 진행 방식 중 무엇이 더 옳고, 무엇이 옳지 않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나는 그럴 재능도 못되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다만 나는 신경민의 진행방식이 현대의 한국에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부박의 유령이 떠돌아 다니는 한국 사회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준'을 잡아줄 '어른'이었다. 그리고 그어른에게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건 무엇을 다 해줄 것이다 하는 영웅심리가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안내자'로서의 능력이었다.
신경민이 그러한 능력을 가진 '어른'이라고 확답할 수는 없다. 다만 그는 그런 어른을 태어나게 할 수 있는 '확률'을 만들고, 토양을 만들어 낼 수 잇는 사람이었다. 옳고 그름을 꿰뚫어 보고 제시할 줄 아는 '앵커'로서 신경민은 확실히 한국에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세상은 그가 중립적이지 않다는 이유도. 다시 말하자면 '기준'을 제시한다는 이유로, 그 이유 하나 만으로 그를 몰아내고 있다.
앞으로 나는 손석희를 생각할 때 마다 신경민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손석희가 가지고 있는 재능이 신경민 보다 못하기 때문이 아니고, 신경민이 한국에 필요한 인물이어서도 안된다.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고, 같은 저널리스트임에도, 손석희는 인정받고, 신경민은 배척받는 이 사회를 다시 셍각해 보고 싶기 때문이다.
ps) 이 글은 계속 해서 수정될 예정.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제대로 수정을 못함.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난 참 글 못 쓰는 편...
ps2) 오늘 발행된 시사인 잡지를 읽다가 현재 사태를 예견한 듯한 신경민 앵커와의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거기서 신경민 앵커는 자신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엥커 멘트에 대한 소신이 작년 12월 31일에 있었던 클로징 멘트라고 밝혔습니다. 그 클로징 멘트를 소개하며 이 졸렬한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 올 한해 클로징에서 하고 싶었던 얘기는 원칙이 숨 쉬면서 곳곳에 합리가 흐르는 사회였습니다. 그것은 민주주의, 책임, 신뢰, 안전이었고 힘에 대한 감시와 약자배려를 뜻합니다. 내용을 두고 논란과 찬반이 있다는 점 알고 있습니다. 불편해 하는 분들에게 미안하지만 이 꿈과 소망은 바꾸거나 버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함께 가져야 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