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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외할머니와 인사를 하고 집으로 올라와 짐을 내려놓고 학원 등록하고 부랴부랴 병원으로 갔다.
병실 문을 열려고 하는데 환자복을 입은 어떤 여자가 웃으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며 눈인사를
그녀에게 하고는 위 아래로 훑어보더니 피식 웃으며 다른 병실로 갔다. 은서는 인상을 쓰며
병실로 들어가서 그를 바라보니 창문을 열고 있었다. 그녀의 기척을 느꼈는지
그가 몸을 돌려 그녀 쪽을 바라보았다.
“은서 왔어?”
“네. 누구에요?”
“응? 아.. 예전에 내 팬이었다면서.. 사인해 달라고.”
“내가 와도 아무런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요. 위 아래로 훑어보더니 웃으며 가던데요?”
“무슨 상관이야. 내 마음이 오로지 너로 가득 차 있는데.”
그가 손을 뻗어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보고 앉으라는 듯 자신 옆을 톡톡 치며 말했다. 그녀가 의자에 가방을 내려놓고 그 옆
에 앉아 물어보았다.
“종이 같은 거 안 들고 있던데.. 어디에 사인을 해 준거에요?”
“응..? 화.. 환자복. 환자복에 해 줬지.”
그가 얼버무리듯 말하자 재인이 그를 째려보았다.
“사실대로 말 안 해요?”
“그러면 화 낼 거면서.”
은서가 입을 떡 벌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에 양 손을 얹고 그 앞에 섰다. 그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어디에 해 줬냐고요!”
그가 씨익 웃었다.
“어~어? 웃음이 나와요? 설마.. 그런 데는 아니죠?”
“어디를 상상하는지 모르겠지만 뭐 그렇게 야한 곳은 아니야.”
“치... 변태.”
“뭐?”
그가 손을 내밀어 그녀를 잡으려고 하자 그녀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나 그의 손을 피했다.
“다른 여자 만진 손으로 날 만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아요.”
“안 만졌어. 아니.. 만졌나?”
“치~ 그럴 줄 알았어.”
“왼손만 살짝.. 종이가 없다면서 다가오는 걸 어떻게 해. 뭐.. 배우였을 때도 그런 팬들이 있기도 했었고.. 쇄골 아래에다 해 줬어. 너도 알다시피 난 아무것도 못 봤어.”
그가 결백하다는 표정으로 두 손을 들어 작은 만세를 부르듯 만들었다. 그런 그를 보자 미소가 번졌지만 용서해주기에는 조금 빠른 것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환자이면서 무슨 향수를 그렇게 뿌려댔는지 머리가 아파서 창문을 열었다고.. 그러다 네 향기가 나서
내가 얼마나 반가웠는지 알아? 모르는 여자들은.. 무서워. 나한테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팬이라고 해도, 머리카락 같은 걸 가져간다고 칼 같은 거 가져오기도 하니까..
사생팬.. 알지? 눈으로 보고 있어도 무서운데 나처럼 안보이면 얼마나 식은땀이 나는지 몰라.”
은서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일도 있었어요?”
“뭐.. 누구나 겪는 일들이야. 연예인이라면..”
“몰랐어요. 후우~~ 빨리 용서해주면 안 되는데.. 도대체 왜 그런 곳에 사인을 받으려고 하지? 이해가 안 돼..”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다시 일반인이 되어 좋구나 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퇴원해야겠어요. 아니.. 아직은 안 되는데.. 내가 계속 있을 수도 없고..”
“이쪽으로 와봐..”
그가 두 팔을 벌리고 손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은서는 천천히 걸어 그의 앞에 서자 그가 그녀를 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향기를 빨아들이려는 듯이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아.. 살 것 같다..”
은서는 피식 웃으며 그를 안았다.
“아저씨가 너무 멋진 사람이라서 불안해요.”
“나는 네가 나를 떠날까봐 불안해.”
“미안하다고 했잖아요.”
“그럼 나도 잘생겨서 미안하다고 해야하나?”
“아고.. 네~.”
“하하하..”
얼마 안 있어서 그가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온 다음날 아침에 내려온 바구니를 보니 안에 핸드폰과 녹음기가 담겨져 내려왔다. 은서는 녹음기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이 핸드폰에는 내 번호가 저장되어 있고, 내 핸드폰에는 이 핸드폰 번호가 저장되어 있어.
즉, 너와 나만 통화할 수 있는 핸드폰인거지.. 무슨 일이 생기면 전화해. 나랑 같이 어디 가고 싶다거나,
보고 싶다거나..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거나.. 알았지? 사랑한다.. 은서야.. 사랑해.”>
은서는 고개를 위로 들고 소리쳤다.
“아저씨.. 진짜.. 너무 멋있어요..”
위에서 뒷짐지고 서 있는 그가 미소를 지었다.
*****
학원에서 수업을 마친 은서가 그의 집 거실에 있었다. 에어컨을 쐬러 오는 그녀를 위해 그가 소파를 천장에 붙어 있는 에어컨이 있는 곳으로 옮겨주었다. 은서는 고개를 들어 바람을 맞았다.
“아~ 시원해.. 이렇게 소파를 돌려놓아도 괜찮아요?”
“응. 처음에는 몇 번 부딪쳤는데, 지금은 덜 부딪치고 있어.”
“부딪쳤어요? 그럼 다시 원래자리에 놓을게요.”
“괜찮다니까..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뭔데요?”
“네 집에도 에이컨 있잖아..”
“있는데, 안틀어요. 예전에 옥탑방에서도 선풍기로 버텼는걸요?”
“정말? 왜?”
“전기세 많이 나와서 안돼요.”
그가 미소를 지으며 얼음이 동동 띄워진 오렌지 주스를 양손에 들고 왔다. 은서는 손을 뻗어 기다란 유리컵을 받았다.
“고마워요.. 음~ 시원하다..”
그가 그녀 옆에 앉았다. 자신도 음료수를 마시고는 은서를 향해 몸을 조금 돌렸다.
은서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그는 그녀 앞에서 선글라스를 쓰지 않는다.
그의 눈동자와 마주 하고 있는 게 제일 기분 좋았다. 초점이 약간 어긋나기는 했지만
그녀는 그의 눈동자가 참 좋았다. 맑고 투명하고, 약간 슬퍼보이는 사슴같은 눈이 좋았다.
은서는 몸을 조금 일으켜서는 그의 어깨를 잡고 그의 왼쪽 눈과 오른 쪽 눈에 번갈아 가며 뽀뽀를 했다.
“왜?”
“나는요.. 아저씨 눈이 참 좋아요.”
“그래? 눈.. 만?”
그 후로도 아직 입맞춤을 제대로 한 적이 없는 은서는 가끔 그의 손을 먼저 잡으려고 노력하고,
이렇게 그의 눈에 입을 맞추곤 했다. 처음에는 그것도 무척 떨렸는데 자꾸 하다보니 여기까지는
무리없이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입맞춤은 무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녀였다.
저렇게 농담처럼 말을 하기는 해도 그도 강요하거나 하려고 먼저 다가오지 않고 느긋하게
그녀의 템포를 기다려 주고 있는 중이었다.
“음.. 네.”
은서는 시큰둥하게 말하고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소파 등받이에 비스듬히 기대고는
얼음 하나를 입에 물었다. 그가 피식 웃고는 그가 손을 내밀자 그녀가 조금 다가와
그의 손아래에 머리를 댔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신도 얼음을 하나 입에 물었다.
“내일부터는 학원도 여름방학이지? 어디 여행 다녀올까?”
“안돼요..”
“왜?”
“나 내일부터 알바 시작해요.”
“무슨 알바?”
“응.. 커피숍이요. 아는 분이 하는 커피숍인데요.. 거기 사장님이신 이모님이 낼부터 나오라고 해서 낼부터 출근해요.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그렇게 오래?”
“직원도 아니고 알바생이라 이 정도는 해야 돈이 된 다구요..”
“그런 말 없었잖아. 학원에서 공부해야 한다고 요즘은 만나주지도 않더니만.. 오늘 하루 쉬고 내일부터 또 바빠진다구?”
“아저씨랑 있으면 공부가 안 된단 말이에요. 그리고 학원 선생님이 이탈리아로 여행가셔서
2주간 방학을 하는데.. 뭐하러 놀아요. 재인 어머님이 오라고 하셨는데 이모님이 도와달라고 하셔서
그리로 가는 건데. 그리고 말을 왜 안 해요? 여기 처음와서 밥 먹을 때 말했잖아요.
여기에서 이사하려고 돈 모으고 있다고..”
은서는 얼음을 아작아작 씹어 먹고는 또 얼음하나를 또 입에 물었다.
“이젠 이사 갈 필요가 없잖아.”
은서는 미간에 주름을 만들고는 자세를 바로 잡아 앉았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난 이사 갈 껀데?”
“내가 여기 있는데.. 어딜 간다구?”
“말 했잖아요. 여긴 내가 부담스럽다구요. 좀 작고 깔끔한 원룸으로..”
그가 벌떡 일어났다. 은서가 눈을 깜박이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왜 화를 내고 그래요? 여기서 가까운 곳으로 알아보고 있단 말이에요. 좀처럼 싼 게 안 나와서 고민 중이고만..”
“벌써 알아보고 있다구?”
“아니.. 모르고 있었던 거.. 아니잖아요.”
“그 때는 지금처럼 사랑하기 전이고.. 이젠 내 옆에 있어 준다고 했잖아.”
“어차피 요즘 아저씨도 가게일로 낮에는 집에 잘 없으면서.. 새로 음식점 또 냈다면서요.. 저녁에만 만나는데 내가 여기로 오면 되잖아요.”
“그럼 여기 바로 옆에 있는 아파트로 갈래?”
“헙! 거기가 얼마나 비싼지 알아요? 나 그렇게는 못 모았어요.”
“**그룹 둘째아드님의 따님이 왜 그렇게 돈에 신경을 쓰는 거야?”
“엄마가 평범한 집안의 분이셨어요. 어려서부터 아버지 돈은 아버지 돈이고, 그게 제 돈은 아니라고
가르치셨거든요. 아린이 옷 중에 아린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버리는 옷을 가져다 입히시곤 하셨어요.
그건 진짜 싫었는데.. 여하튼 자라면서는 그게 맞다는 생각을 했어요. 할아버지, 아빠가
재벌이시라고 저도 재벌은 아니니까요. 일하는 게 좋기도 하고요.”
“그럼 내가....”
이번에는 은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아저씨 도움을 왜 받아요?”
“그럼 어차피 할아버지가 해 주신 거니까 그냥 여기 있으면 되겠네.”
“그만해요. 나 집에 갈래요.”
은서는 컵을 들어 남은 주스와 얼음을 입에 털어 넣고는 싱크대에 가서 물을 틀어 씻은 다음 옆에 엎어 놓고는 손을 웃옷에 쓱쓱 닦으며 현관으로 향했다.
“어디가! 니네 집 덥다면서!”
“이제까지 모아 놓은 돈 찾아서 재인이랑 유럽으로 2달 동안 배낭여행 갈 준비하러 가요! 왜요!”
“뭐?”
은서는 문을 닫고는 그 쪽을 노려보며 말했다.
“우리 아빠도 저한테 잔소리 안 하시는데.. 아저씨가 우리 엄마에요?”
“뭐! 너 가기만 해.. 야!”
몸을 홱 돌려 계단으로 내려오면서 궁시렁댔다.
“아니.. 내가 왜 자기 도움을 받냐구.. 할아버지 도움 받은 것도 싫어서 이사가려고 하는 건데.. 그때는 착실하다고 칭찬해 놓고는.. 하여튼 돈 많은 사람들은 자기 편한대로 하려고 한다니까.. 내 생각은 물어보지도 않고..”
은서는 그의 집 쪽을 바라보고는 “치! 흥이다!” 라고 말하고는 집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싸웠다구?”
놀러 온 재인이 테이블을 정리하고 카운터로 돌아온 은서에게 말했다. 그녀는 시무룩한 얼굴로 대답했다.
“응.”
“핸드폰도 놓고 왔구?”
“응.”
“아저씨 애 좀 타시겠는데? 너랑 유일하게 연락할 수 있는 핸드폰은 네가 집에 놓고 왔고, 너는 알바하러 나왔고, 집에는 10시가 다 되어야 들어가니까..”
“너무 심했나..? 아니야.. 너도 알잖아. 내가 얼마나 이사하려고 열심히 돈을 모으고 있는지... 근데 아저씨는 물어보지도 않고 화부터 냈어.. 실망이야.”
“아~ 그렇지.. 아저씨가 널 너~무 모르는 거지.. 니가 잘 안 꼬이는 성격인데 한 번 꼬이면 쉽게 안 풀린다는 걸.. 은서~ 파이팅!”
“파이팅!”
은서도 양 팔을 올려 주먹을 꼭 쥐었다. 손님이 들어오시자 은서가 예의미소를 지었다.
“어서 오세요.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저녁 7시가 되자 그녀는 조금 불안해졌다.
“아.. 전화기는 가져 올걸.. 걱정 많이 할 텐데..”
그런데 그 때 문이 열리는 작은 벨소리가 딸랑거리며 울리고 주위의 여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카운터에 있던 은서는 “어서오세요.” 라고 인사를 하며 출입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눈을 크게 뜨고 숨을 들이 마신채로 멈추었다. 그는 상당히 고급스러운 소재의
다크실버 정장세트를 입고 실크셔츠는 버튼을 3개나 풀어 가슴 근육을 살짝 보여주었다.
처음 보는 선글라스도 이제까지 본 것 중에 제일 그에게 잘 어울리는 제품이었다.
여기에 오면서 어디 미용실에도 다녀오셨나 헤어스타일은 그의 잘 생긴 얼굴을 더욱 돋보이도록
뒤로 멋스럽게 넘겨져 있었다. 그는 주위를 인상을 쓰며 살펴보았다. 여자들은 자기들을 바라보는
줄 알고 여기저기에서 숨죽인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드디어 카운터가 어디에 있는지 알았는지
긴 다리로 우아하게 천천히 걸어 왔다. 카운터를 손으로 잡고 앞을 보았다. 잠시 조금 깊이 숨을
들이마시더니 한 쪽 입 꼬리만 살짝 올려서 씨익 웃었다. 은서는 입을 오므리고는 눈을 내렸다.
힘들게 여기까지 찾아내서, 사람 많이 다니는 곳에 와준 것에 감동해서 자체적으로
꼬리를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난 앞이 잘 안보여서 그러는데요, 여긴 뭐가 제일 맛있어요?”
“커피가 제일 맛있는데요.."
"그럼 아가씨가 제일 좋아하는 걸로 한잔 부탁해요. 어디 앉아야 할지.. 안내해주겠어요?“
“재인아..”
은서는 팔짱을 끼고 옆에서 웃으며 구경하고 있는 재인이를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난 아가씨가 해줬으면 좋겠는데.. 안 되나?”
“저는 카운터를 봐야 해서요.”
사장이모가 웃으며 다가왔다.
“안내해 드려.”
“사장님..”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건 이거지? 아포카토..”
사장님을 비롯해서 나머지 직원들 모두 재미있는 구경이라고 생각하고는 웃으며 아무도 도와주려고는
하지 않았다. 은서는 카운터에서 나와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어깨에 올렸다. 그는 그녀를 따라
창가 쪽의 자리에 앉았다. 은서가 다시 카운터로 돌아가려는데 그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그건 어떻게 먹죠? 혼자 숟가락으로 먹기가 좀 힘들 것 같은데..”
은서는 주위의 시선을 느끼며 조용히 그에게 말했다.
“지금 나 벌 주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죠? 빨대로 쭉 마시면 되는 걸로 줄 테니까 얼른 마시고 가요.”
“나 여기 찾느라 힘들었어. 준혁을 얼마나 들볶았는지 몰라. 아마 지금도 밖에서 나를 욕하고 있을 거야.”
“준혁아저씨가 여기 왔어요? 근데 왜 안 들어오구..”
“미남 둘이 여기 들어오면 여자들이 떼로 몰려들텐데.. 장사 되겠어? 주위를 봐.. 소리만 들어도 장난 아닌데? 니가 여기에서
한 발짝만 움직여도 서로 내 앞자리에 앉으려고 할걸? 아닌가? 여기 사장님 돈을 좀 벌어드리려면 들어오라고 할까?”
"화는 내가 내야지. 왜 아저씨가 화를 내고, 나한테 왜 이러냐구요..“
그는 미소를 지으며 양 손을 들어 항복의 표시인 것 마냥 고개를 살짝 옆으로 숙이고는 말했다.
“좋아. 그렇게 하고 싶단 뜻인 거지? 그럼 주문한 걸 갖다 주세요.”
“네?”
“가 보라구.”
은서는 풀어지려는 마음이 도망가 버리고 알 수 없는 그를 째려보고는 몸을 돌리자 정말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여자가 그녀의
어깨를 밀치고는 그 옆에 섰다.
“오빠, 진짜 멋지다~ 앉아도 돼요?”
그가 미소를 지었다. 여자를 홀리는 저 미소를..
“물론.. 이름이?”
“이정아에요.. 오빠는요?”
“나?”
은서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그의 모습은 보기 싫었다. 그래서 여자 손님에게 고개를 숙였다.
“손님, 죄송한데요... 제 남자친군데요.”
여자 손님이 기가 막히다는 듯이 의자에 몸을 기대며 팔짱을 끼고는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은서를 바라보았다. 피식 웃
더니 그를 다시 바라보며 말했다.
“오빠~ 정말? 이 여자가 오빠 여자친구에요? 완전 갭이 장난 아니다.. 누가 보면 고등학생인 줄 알겠어~ 작고, 촌스럽고.. 오빠~ 아니죠?”
그는 대답대신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방해 되니까 그만 가 보지?”
여자 손님이 한 손을 뻗어 은서를 조금 밀었다. 은서는 그를 향해 돌아섰다.
“좋아요. 여기에서 조용히 나가서 집에서 기다려주면, 아저씨 뜻대로 할께요.”
“약속?”
“약속해요.”
“좋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에 앉아 있던 여자가 그의 손을 잡았다.
“오빠, 어디 가요?”
그는 조금 고민하는 것 같더니 그녀의 손을 잡았다.
“혼자 왔어?”
“아니요.. 친구랑 둘이 왔어요.”
“그럼 같이 나갈까? 내 친구를 소개시켜 줄게.”
“좋아요.”
그 여자 손님은 은서를 지나치며 콧방귀를 살짝 뀌고는 자신의 친구가 있는 테이블로 가서 친구와 이야기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은서는 슬퍼졌다. 그가 결국 이 여자들과 나갈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저 여자들은 준혁한테 맡기고 집에 가서 기다리고 있을께.. 데리고 나가야 여기에서 소란을 안 피우지 않겠어? 너무 의기소침해 하지 마.. 저렇게 골치 아픈 냄새를 풍기는 여자와는 10분이 한계야.. 한 10시?”
은서는 그제서야 미소를 지었다.
“네.. 10시요.”
“옥상?”
“모기 물려요. 집에서 기다려요.”
“오케이~ 이따 봐.”
그는 그녀의 머리에 뽀뽀를 쪽! 했다. 그리고는 그녀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자. 이제 출입문으로 날 안내해. 여긴 너무 복잡해..”
은서는 키득거리며 그를 현관문으로 안내했다. 준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죄송해요..”
“은서씨가 뭘요..”
준혁은 그녀를 향해 잠시 웃어 인사를 하고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들어가 봐.. 이따 봐.”
“네.. 그럼 조심해서 가세요.”
은서는 먼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준혁은 그에게 말했다.
“이건 비싼 거야.. 내가 직접 고를 거야.”
“알았어.. 저 여자들부터 좀 어떻게 해줘..”
“흥! 여자들까지 처리하면, 세트로 가져갈 거야.”
“세트로? 그건 좀.. 음.... 아, 알았어..”
“오케이~”
그녀가 문을 닫고 카운터로 돌아오니까 직원들이 몰려들었다.
“정말 저 남자가 언니 남자친구에요?”
“응.”
“진짜 부럽다.. 어떻게 만났어요?”
“멋진데?”
사장님이 그녀 옆을 쑥 지나가며 웃으며 말하셨다.
“그래서, 졌어?”
“응.. 와주었잖아.. 여기 찾느라 얼마나 힘들었겠어.. 봐줘야지..”
재인이 그녀의 어깨를 자신의 어깨로 툭 밀었다.
“으이그~ 정말 오늘 스타일 죽이기는 하더라.. 배우했다더니.. 보통 인물은 아니구먼~”
재인은 웃으며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은서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한 숨을 내 쉬고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들을 맞았다.
****
은서는 그와 식탁에 마주 앉았다.
“소파는 싫어?”
소파에 앉으면 그의 손을 잡거나 그의 품에 안기거나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추는 그에게 정신이 팔려서 제대로 이야기를 못할 까봐 은서는 단호하게 식탁을 고집했다.
“여기가 좋아요.”
“알았어.”
그는 여유있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저씨, 나는 이 집이 불편해요.”
“언제는 옥상에 정원도 있고, 마음에 들었다면서..”
“그야 물론.. 마음에야 들죠. 하지만 지금 집의 절반도 사용 안 하고 있는 건 모르죠? 혼자 사는 데 집이 너무 커요. 관리비도
너무 많이 나오고.. 낭비하는 게 싫어요. 그런데, 아저씨는 싫다는 거죠? 아저씨 아래층에 살면서 계속 낭비하고 살라는 거
죠? 좋아요. 그러죠 뭐.”
그가 인상을 찡그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뭐야! 아까랑 말이 다르잖아.”
“뭐가 달라요. 아저씨 말대로 한다고 했잖아요. 이사 안 간다구요. 됐죠?”
그의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숨을 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은서는 입술을 깨물고 웃음이 나는 걸 참고 있었다.
“알았어.. 알았다구.. 대신 올 해만.. 너무 일찍 이사가지는 말라구.. 너무 멀리 가지도 말고.. 내가 보고 싶은 때 너를 보러 갈
수가 없잖아...”
은서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그는 정말 너무 멋있었다. 그리고 사랑스러웠다. 그리고는 뒤에서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아저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일부러 그런 거지?”
“조금요..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건 제대로 말 했어요.”
“알고 있어.. 뭐.. 너의 그런 부분도 좋아하니까.. 아~ 내가 오늘 얼마나 힘들었는데..”
은서는 그의 얼굴이 보이도록 식탁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의 눈에 입을 맞추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다.
은서는 가만히 있는 그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가 놀라 눈을 떴다. 그렇게 무섭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다른 남자의 얼굴로 변하지도 않았다.
“가만히.. 있어 주세요..”
그는 살짝 미소를 짓더니 다시 눈을 감고 그대로 있었다. 은서는 다시 숨을 들이마시고는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어깨를 잡은 손이 살짝 떨려 왔다. 하지만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대로 있어 주었다. 천천히 입을 떼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할 것처럼 힘들었다. 그가 그녀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은서는 그의 심장소리가 들리는 가슴에 얼굴을 대고 기대었다. 그가 천천히 팔을 올려 그녀를 감싸 안았다.
“나.. 잘했어요?”
그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내 심장소리 들으면.. 모르겠어?”
은서는 자신의 심장만큼 빠르게 두근거리는 그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기다려 줘서 고마워요.”
“날 사랑해 줘서 고마워..”
은서도 팔을 들어 그를 안았다.
“오늘 힘들었죠?”
“음.. 조금.”
“질투나 하게 만들고.. 그렇게 멋지게 하고 오면 어떻게 해요.. 가게 안에 있는 여자들은 다~ 쳐다보더만...”
“평상시 차림인데?”
은서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눈에 장난기가 어려있었다.
“뻥은... 처음 보는 옷이 던데.. 언제 샀어요? 뭐야.. 선글라스도 처음 보는 거던데..”
“단추를 두 개만 풀걸 그랬나? 너무 보여 줬나?”
“그래요.. 너무 많이 보여 줬어요..”
살짝 보였던 그의 몸은 저질스럽다거나 하지 않았다. 남자의 몸이 저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 생각하면서 감탄했다.
“아저씨는 운동도 열심히 하나봐요.”
“아무래도.. 잘 안 보인다고 게을리 하기 싫었어.”
“그렇구나..”
“다른 여자들이 나를 바라보니까 질투 났어?”
“몰라요..”
“보고싶다..”
“네?”
“네가 질투하는 모습.. 궁금해..”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그에게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가슴이 아프기도 하고, 정말은 안보여주고 싶기도 하고, 또 한편에서는 다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보고 싶어요..?”
“음....”
은서는 그의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에 가져갔다.
“지금이 바로, 질투하는 얼굴이에요.”
은서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웃으며 그녀의 얼굴을 만졌다. 하지만 질투하는 모습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가 떨리는 손을 내리며 말했다.
“나 참고 있어. 네가 마음에 준비가 될 때까지.. 그러니까 유혹하지 마.”
은서는 피식 웃었다.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가 입술을 내밀었다.
“이 정도 상은 받을 만한 날이었다고 생각하는데?”
은서는 키득거렸다.
“좋아요. 상 줄께요.. 힘들게 나를 찾아 와준 당신은 너무 멋있었어요..”
은서는 짧게 그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그가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대고는
기분 좋은 목소리로 웃었다. 그의 몸이 울리며 그의 웃음이 은서에게 전해졌다.
은서는 행복한 기분에 조그맣게 한 숨을 내 쉬었다. 그리고 다시 그의 입술에 입술을 댔다.
그리고 그의 윗입술을 혀로 핥았다. 그리고 아랫입술은 조금 더 천천히 혀로 핥았다.
그리고 자신의 입술로 그의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는 혀로 간질였다. 그가 미간에 주름을 만들고
양손으로 내 볼을 잡아 그녀의 입술을 떼어 냈다.
“이런 거 어디서 배웠어!”
“아저씨 영화에서요. 약혼녀랑 아주 쪽쪽...”
“어? 그거 봤어? 다 봤어?”
“아니요.. 거기까지 보다 껐는데.. 도저히 못 보겠어서..”
“그래? 뒤는 더 장난 아닌데..”
“치~ 나이도 어렸으면서 그런 영화나 찍고..”
“왜 그래.. 그 영화로 그 해에 상을 얼마나 많이 받았다구..”
“아~ 그러셨어요~! 나 갈래요.”
그의 무릎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그가 그녀를 옆으로 안아 들어 올렸다.
“으악~! 아저씨.. 떨어질 것 같아요.. 내려 줘요..”
은서는 그의 목에 두 팔을 둘러 꼭 끌어안았다.
“아... 보고 싶다..”
“치.. 치사해요.. 그렇게 말하면 다 넘어가는 거 알면서..”
“정말 사랑스러울 것 같아..”
“아까 커피숍에서 여자가 한 얘기는 이쪽 귀로 들어가서 저쪽 귀로 그냥 나왔어요? 고등학생 같다잖아요. 작고.. 촌스럽다고..”
“아까 내가 물었지?”
“네?”
“여긴 뭐가 제일 맛있냐고..”
“커피전문점이니까 커피가 제일 맛있다고 했죠.”
“틀려.”
“네?”
“나는.. 네가 제일 맛있어..”
“아윽~! 아저씨 내려 줘요.. 온 몸에 닭살이..”
그가 동동거리는 그녀의 다리를 부드럽게 만졌다.
“안 돋았는데?”
“유치하지~만, 좋다는 얘기죠...”
그는 소파에 앉아 자신의 무릎위에 그녀를 올려놓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한 동안 그들의 입맞춤은 끝나지 않았다.
******
은서는 그의 집 주방에서 같이 먹은 아침상을 치우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요즘 갑자기 좋아진 노래였다. 이제야 알게 된 가수가 부르는 노래에 빠진 자신을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이런 거 안 해도 돼..”
“몇 개 없는데 그냥 있기도 좀.. 그렇잖아요..”
“그 노래? 좋아?”
“네.. 몇 개 다운 받아서 듣고 있는데요.. 좋은 것 같아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정리를 다 마치고 그의 옆으로 돌아온 은서에게 뜬금없이 질문을 했다.
“가을은?”
“식욕의 계절?”
그녀의 즉답에 그가 껄껄 웃었다.
“여행의 계절?”
은서는 그의 표정을 살피며 다른 대답을 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웃고 있었다.
“왜요?”
“그냥.. 대답이 귀여워서..”
“뭐가 귀여워요..”
“그냥.. 그런데 너는 정말 보통 여자랑은 다른 것 같아.”
“뭐가요? 나는 평범하다고 생각하는데..”
“보통 그 나이 때는 쇼핑 좋아하고, 돌아다니는 거 좋아하고.. 그렇지 않아?”
“그렇게 말하면 조금 이상한 것도 같네요.. 하지만 나는 쇼핑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지 않아요. 오히려 쌓이던데요? 10만원만 써도 두통이 찾아 와요.. 다시 돈으로 바꿔 오고 싶고... 그리고 돌아다니는 것도 별로 좋아 하지 않아요. 이상해요?”
“이상하지. 태어난 집안에 비해 너무 검소하니까. 그렇다고 싫은 건 아니고 사달라는 것이 없으니까..”
“필요한 게 없는데 뭘 사달라고 해요.. 그리고 뭐가 필요하면 내가 사는 되지.. 아저씨한테 왜 사달라고 해요?”
“그래?”
“네..”
“그런데 텔레비전도 잘 안 보더라.. 안 좋아해? 보통은 잘생긴 배우나 가수 좋아하고 그러지 않나? 드라마 보면서 친구들이
랑 이야기 하고.. 안 그래?”
“네. 그냥 멍~하게 보고 있는 것도 좀 그렇고, 혼자 보면서 웃는 것도 좀 이상하고... 오래 보면 머리도 아프고.. 연예계 쪽은 별로.. 아! 가끔 다큐는 봐요.”
뭐 거의 사실이기도 했지만 그와 사귀면서부터는 더 텔레비전을 멀리했다. 아무래도 눈으로 보는 건 그에게 고통스러울 것
같아서 피하고 있었고, 함께 있을 때는 그에게 집중했다. 그의 행동, 말, 얼굴 표정, 작은 손 동작 하나까지..
“다큐? BBC나 디스커버리채널 같은 거?”
“네.. 어느 채널에서 하든지 다큐는 보는 편이에요. 뭐 찾아서 보는 건 아니고요. 그냥.. 재미있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보면서 운 적도 있어?”
“네.. 있잖아요. 바다거북 특집이었는데요. 글쎄 엄마거북이 뒷다리로 열심히 땅을 파고 알을 낳고, 혹시나 해서 흙을 다시
덮어 주고.. 그러면 그 알에서 태어난 아가 거북이들이 땅을 헤치고 나와서 정말 열심히 바다를 향해 기어가는데.. 글쎄.. 갈
매기가.. 그 아가 거북들을 막.. 잡아가는 거에요.. 목숨을 걸고 갈매기를 피해 바다속에 들어가도 상어나 물개가 또.. 엄마가
알을 100개에서 200개 낳는데.. 살아서 엄마나 아빠가 되는 애들은 겨우 1%밖에 안 된대요..”
은서는 다시 눈에 눈물이 고여서 코를 훌쩍였다. 그가 다시 껄껄 웃으며 그녀를 안았다.
“이그~ 눈물이 그렇게 많아서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
“그렇죠? 강해져야 하는데..”
은서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깊은 숨을 내 쉬었다.
“아~ 편하다.. 아저씨는 참 가슴이 넓은 것 같아요..”
“그래? 고마워.."
"뭘요.. 내가 고맙죠..“
“학원은 안가도 돼?”
“음~ 가야 해요.. 쓩~하고 날아갔다가 다시 쓩~하고 날아왔으면 좋겠다.. 뭐.. 금방 다녀올게요.”
“응. 다녀와..”
점점 그와 헤어지는 게 쉽지 않았다. 자신의 집에 있는 시간보다 그의 집에 있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한편으로는 그런 그녀를 그가 지겨워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집에 안 가려고
한 적도 있지만 그가 부르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다리가 알아서 그를 찾아 간다.
건물에 사시는 다른 분들도 우리 두 사람의 교제를 알고 계시지만 딱히 뭐라고 하시는 분들은 없으셨다.
오히려 좋아하시는 것 같았다. 4층 총각한테 드디어 애인이 생겼다면서 축하해주는 할머님도 계셨다.
아마도 그는 건물식구들에게 엄청난 사랑과 신뢰를 받고 있는 듯 했다. 그래도 그의 집에
너무 자주 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
“은서씨. 오늘 끝나고 차 한 잔 안 할래요?”
“네. 안 해요.”
학원에서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바람이 불어 고개를 돌렸다. 거리는 어느새 알록달록한 옷으로 갈아입은
나뭇잎들이 시원한 가을바람에 흔들렸다. 아직 햇살은 따가웠지만 거리를 오고가는 사람들의 옷차림은
계절이 변하고 있음을 알게 해 주었다. 그 때 눈앞에 뭔가가 왔다갔다 했다. 은서는 그걸 손으로 잡았다.
포장지에 싸여 있는 작은 선물상자였다. 몸을 돌리자 재인이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게 뭐야? 아니.. 여긴 어쩐 일이야?”
“뭐야.. 생일 오늘 아니었어? 맞는데..”
“아.. 맞다.. 내 생일이었네? 고마워..”
“얼마나 연애에 푹 빠져 사느라고 생일도 잊어 버리냐? 너도 참..”
“그런가?”
“그러고 보면 너도 참 독특한 것 같아. 보통 여자들은 100일, 200일, 300일 같은 기념일, 생일, 발렌타인데이, 화이트데이 같
은 거 절~대 그냥 안 넘어가거든? 자기들은 남자한테 선물을 안 줘도 꼭 받지. 분위기 좋고 근사한 곳에 가서 밥도 먹고, 차
도 마시고.. 그런데 너는 그런 거에 별로 관심 없잖아.”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나야.. 우리가 뭐 날짜 따질 수나 있었냐? 공백이 너무 길었잖아.”
“그런가? 나는.. 그래.. 아저씨는 매일 매일 나한테 감동을 줘.. 아침에 눈을 뜨는 걸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이야. 하루일과를
마치고 함께 밥 먹고, 차도 마시고.. 잠드는 시간에 설레는 마음으로 잠들게 하는 사람이야.. 기념일이 왜 필요해? 주고 받는
선물보다 그게 더 좋은데?”
“아유~ 아주 닭살이구나.. 그치만 부럽다.. 너 확실히 아저씨와 사귀면서 많이 밝아지고 부드러워졌어.”
“그래서 그런가? 요즘 학원에서 차 한 잔 하자는 남자들이 있어. 아주 짜증난다.”
“그래?”
“그래~. 다른 남자들은 정말 관심 없어.. 아니.. 관심 가질 시간이 없는데.. 후우~~”
“뭐야.. 너 무슨 고민 있어?”
“너무 많은 시간을 같이 있으니까.. 걱정 돼.. 아저씨가 혹시 나한테 질릴까봐..”
“질린대?”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너.. 너무 참고 있어서 그런 거 아니야? 솔직히 집에서 하는 데이트라고 해야 하는 일이 거의 정해져 있잖아.. 밖으로 나와.”
“하지만..”
“얘기는 해 봤어? 너 혼자 고민하는 거지? 아저씨보고 나가자고 하자니 왠지 싫어할 것 같고.. ”
“응... 하지만...”
“너.. 그렇게 참다가 더 큰 일 생긴다.. 아저씨 만나면서 너까지 세상하고 담쌓고 살면 어떻게 하니? 네가 아저씨를 밖으로 데
리고 나와야지..”
“그게 맞을까?”
“네가 참고 있는 걸.. 아저씨가 알고 있는 거 아닐까? 난 그런 것 같은데? 오히려 참고 말 안하는 너에게 미안하고, 자신이 못났다고 자책할 지도 몰라..”
“그 생각은 못했어.. 고마워.. 친구야~”
재인이 은서를 끌어안고는 등을 토닥 토닥해 주었다.
“그래.. 나 밖에 없지?”
“응.. 고마워..”
“그리고 나.. 임신했다.”
은서가 놀라 입을 벌렸다. 그리고 손을 들어 재인의 배에 살짝 댔다.
“축하해~.”
“야.. 이제 겨우 8주인데 배가 나왔겠냐?”
“입덧은..”
“조금.”
“안색이 그래서 안 좋구나. 시원한 주스 마시러 갈래? 내가 살게. 어떤 녀석인지 너무 궁금하다~.”
두 사람이 커피숍으로 향했다.
다음 날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왜?>
“아저씨, 저요. 오늘 아저씨랑 가고 싶은 데가 있어요. 너무 멋지게 입지는 말구요. 한 시간 후에 1층에서 만나요.”
<어디 가는데?>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어요. 한 시간 후에요.”
<응, 알았어.>
전화를 끊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머리도 감았다. 양치질도 하고 밖으로 나와 머리를 말렸다.
화장을 하고 작은 티아라모양에 작은 큐빅이 박혀 있는 머리띠를 했다. 그리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보들보들한 느낌의 꽃나염 7부 원피스를 입었다. 오렌지색 핸드백을 크로스로 매고 반짝이는
베이지색 플랫슈즈를 신었다. 그리고 재인에게서 선물 받은 상큼한 향의 향수를
조금 뿌렸다. 1층에 내려가자 아저씨는 택시 문을 열고 그 옆에 서 있었다.
“치이~ 멋지게 입고 오지 말라니까..”
“평범하게 입은 건데?”
그는 먹색 정장바지에 검은색 셔츠를 입었다. 단추를 두 개 열어 놓은 센스까지.. 심플한 스타일의 선글라스를 썼다.
“너무 멋진데.. 큰일 났네.. 사람 많은데 갈 건데..”
은서는 택시에 올라타며 한 숨을 내쉬었다. 그가 올라타 문을 닫으며 말했다.
“여자들 난리 나겠네. 내 사랑하는 애인은 질투 작렬하시겠고..”
“음.. 나도 오늘은 좀 꾸몄거든요? 긴장하셔야 할 거예요..”
그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러게.. 긴장 해야겠네.. 향기가 너무..”
“이상해요?”
은서는 너무 진하게 뿌렸나 싶어서 손목에 코를 대고 킁킁 거렸다. 그가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의 말을 들은 그녀는 목까지 홍당무가 되었다.
“어디로 가실까요?”
“음.. 호.. 홍대 V홀이요...”
그가 키득키득 웃었다. 은서는 그를 팔꿈치로 살짝 찌르고는 창밖을 바라보면서 손으로 얼굴에 부채질을 했다.
그리고 그의 달콤한 목소리를 떨쳐 버리려 노력했다. 얼른 얼굴이 정상으로 돌아오길 바라면서..
하지만 그의 낮은 저음으로 달콤하게 한 말은 귓가를 맴돌았다.
“향기가 너무 자극적이야.. 한 입 먹고 싶어..”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4.07.10 09:23
첫댓글 음... 난 절대 플랫 안 신는데....
은서양은 다르군요... ㅎㅎㅎ
잘 읽었어용 :)
제가 힐을 못 신어서요.. ^^; 키가 작은데도 힐은 힘들더라고요.
허.. 한 입 먹고 싶대 ㅋㅋㅋ
ㅋㅋ 야. . 한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