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유명한 작곡가 베토벤은 26살 때부터 청력이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청력 감퇴와 실연, 가정 불화 등으로 한없는 슬픔과 절망에 빠진 베토벤은 32세에 죽을 결심을 하고 유서를 썼습니다. "나는 6년 동안 나아지리라는 희망에 속았던 절망스러운 존재다. 나는 귀머거리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완전해야만 하는 감각이 나에게 있어서 오히려 더 허약하다는 사실을 내가 어떻게 감당해 낼 수 있을까? 잠시 후면 나는 나의 삶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이 불운한 존재여!.....오! 하나님, 나에게 마지막으로 순수한 기쁨의 날을 허락하소서! 너무도 오랫동안 진정한 기쁨이 나의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지 못하였습니다."
유서를 쓰고 있는 베토벤의 영혼은 기쁨이 메말라버린 영혼이었습니다. 그의 영혼에는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의 기쁨은 슬픔과 불행과 절망에 눌려 질식해버렸습니다. 그의 유서는 기쁨이 말라버린 영혼, 죽어가는 영혼의 마지막 몸부림이었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기쁨이 있어야 생기가 넘칩니다. 기쁨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기쁨이 없는 삶은 죽고 싶은 삶이고, 죽은 것과 마찬가지의 인생입니다. 어른들 말씀을 들어 보면 죽고 싶을 때가 많았다고 하십니다. 슬픔과 불행과 절망으로 지쳐서 우리 영혼의 기쁨이 말라버렸을 때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베토벤은 기쁨이 말라버려서 죽겠다고 유서를 썼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기쁨이 충만하여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죽겠다고 말하는 인생과 무엇을 위해 죽을 수 있다고 말하는 인생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는 영혼의 기쁨이 살아 있느냐 죽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기쁨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지탱할 의지마저 잃어버리고 죽기를 원하는 무력한 실패자가 됩니다. 그러나 기쁨이 충만한 사람은 자신의 불우한 운명을 바꾸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가치 있는 일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능력과 용기를 가진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기뻐한다는 것"은 의미를 알고 있습니까? 현재나 미래에 자신에게 다가올 확실한 좋은 일을 생각하며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는데 이 기쁨에도 몇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1) 자연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이 기쁨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세상 살아가면서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즐거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추구하던 일을 열심히 노력하여 성공하면 기쁨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자신이 바라던 것일 이루고 얻었으며 기쁨이 있습니다. 즉 열심히 공부를 하여 높은 점수를 받았다든지 어느 시험에 합격을 하였을 때 오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하고 절약하여 집을 샀다든지 하는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사람의 성격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즐거움이 많은 집에서 자란 사람은 그 성격이 쾌활한 성격으로 형성이 되어 늘 기뻐하고 짜증을 덜 내는 성격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쾌활한 성격을 가지면 스트레스를 덜 받고 고통을 잘 참고이길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성공하는 사람도 역시 늘 웃음을 잃지 않는 사람이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2) 도덕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도덕적인 기쁨이란 내가 좋은 일을 행했을 때 오는 기쁨입니다. 이것을 평안 또는 양심의 고요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아침 진지는 잡수셨는지요?" 이것이 우리나라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인사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 문화와 유대문화는 닮은 점이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인사입니다.
유대인들은 "샬롬"이라고 인사합니다. 이는 "평안하십니까?"라는 뜻입니다. 우리나라의 인사와 너무나 흡사하지 않습니까? 이는 두 민족 모두가 안녕치 못한 과거의 역사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우리민족을 가르켜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의 민족"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어쩌면 역사적으로 평안치 못했던 우리들의 열등감을 보상하기 위해 스스로 붙인 별명인지도 모릅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힘으로 결코 평안을 보장하지 못해왔고 지금도 그러하니까 밖으로 부터 주어질 수 밖에 없는 이 평화를 소원하고 갈망하기에 아예 인사말이 "안녕하셨습니까?"하는 말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어느 국민하교에서 '평안'이라는 주제로 사생대회가 열렸습니다. 두 작품이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선정되었습니다. 한 작품은 쳐다보기만 해도 금방 마음이 평안해지는 그런 그림입니다. 시골 마을이 있고,초가집 몇 채가 있고,마을 앞에는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마을뒤에는 아담한 뒷동산이 있고,열려있는 싸릿문 옆에는 삽살게가 꾸벅꾸벅 졸고 있고,굴둑에서는 연기가 낭만적으로 솟고 있습니다.그러나 다른 한 그림은 아주 다른 평안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높은 벼랑이 그려져 있고 더구나 폭풍우까지 몰아치고 있는 것이 그 그림의 배경입니다. 그런데 깍아지를듯한 벼랑의 한 틈바구니에서 엄마품에서 새록새록 잠자고 있는 참새 한마리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런데 그 어린 참새의 모습이 그렇게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전자의 그림이 세상이 추구하는 평안이라면 후자의 평안은 성경이 말하는 평안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를 걸어도 마치 푸른 초장과 맑은 시냇가를 걷는 듯한 평안, 바로 그런 평안입니다. 요한복음 16:33에서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함이라. 세상에서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보십시오. 주님께서도 끝까지 강조하시는 평안은 환란이 없는 평안이 아니라 환란가운데서의 초월적인 평안입니다. 대개 초신자는 예수를 믿기만 하면 일순간에 모든 환란은 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환란에 있을 때 낙심하고 예수를 잘못 믿었다고 푸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초신자들이 원하는 그런 평안을 주시겠다고 단 한번도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이런 평안에 도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일렁거리는 파도와 폭풍우속에서 도대체 어떻게 이 모든 것을 초월하고 평안을 유지할 수 있단 말입니까? 여기 본문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3) 영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이 영적인 기쁨은 성령의 열매 중에 하나라고 사도바울은 갈5:22에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모든 죄를 씻음 받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쁨입니다. 영적인 기쁨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자에게 오는 기쁨이요. 구원받아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며 사는 기쁨입니다. 이 영적인 기쁨을 소유한 사람은 세상에서 닥쳐오는 환난이나 고통도 물리쳐 이기며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기쁨을 소유한 사람은 주님을 위하여 충성하고 교회를 위하여 봉사할 때 그 기쁨이 더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를 하고, 심방을 하고,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구제를 하고, 또한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드리고, 건축헌금을 드릴 때 마음속에 기쁨이 더 커진다는 말씀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다가 핍박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고 잡혀가서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순교를 당하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였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 자기를 돌로 쳐죽이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었던 용기는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이는 영적인 기쁨을 소유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