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보면 꽤 우습기도 하고 어찌 보면 좀 유치하기도 하지만, 하여간 상당히 재미있는 노랫말이다. 많은 유행가 가사들이 사랑, 고향, 방랑 등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 7-5조나 3-4조의 정형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데에 반해, 이 '오빠는 풍각쟁이' 같은 노래는 일상생활에서 스치는 소소한 웃음거리를 형식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가사에 담아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유행가의 주류와는 판이한 내용을 다루며 하나의 쟝르로 형성된 것이 이른바 '만요(漫謠)'다.
이미 30년대 초부터 '만곡', '유행만곡' 등의 명칭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만요는 대개 당시 유행가의 주요 소비층인 도시 소시민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똑같이 웃음을 주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해도, 전통적인 민요가 지니고 있는 은근한 해학과는 다른 맛을 풍긴다. 부조리한 상황을 직설적으로 꼬집거나, 일부러 희화적인 표현을 늘어놓으면서 다소 실없는 웃음으로 소시민의 말초적 감각에 영합하는 것이다. 30년대 중반 이후로는 김정구나 김해송 같이 만요에 특기를 보여 인기를 얻는 가수들이 나올 만큼 만요의 유행이 대단했는데, 요즘 입장에서는 당시 생활상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흥미로운 자료가 된다.
'오빠는 풍각쟁이'에도 그런 면에서 눈에 띄는 대목이 몇몇 있다. 1절에서는 노래 속 주인공이 오빠가 자기 반찬을 빼앗아 먹는 것에 대해 불평하고 있는데, 불고기나 오이지, 콩나물은 지금도 반찬으로 자주 접하고 있는 것들이지만, 떡볶이가 오이지나 콩나물과는 대별되는 고급 반찬으로 불고기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는 것이 상당히 이채롭다. 떡볶이의 역사를 추적하는 데에 귀중한 자료인 셈이다. 또한 지금은 사라져 버린 명치좌(명동에 있던 옛 국립극장 자리)가 인기있는 영화관이었던 것도 확인이 되고, 날마다 술에 취해 지각만 하면서 월급타령이나 하는 30년대 회사원의 모습도 그려 볼 수 있다. 요즘은 거의 쓰이지 않는 풍각쟁이, 모주쟁이, 대포쟁이 같은 애교스런(?) 욕설 역시 당시 소시민들이 사용한 일상언어의 단면을 보여 주는 말이다.
1938년 말에 콜롬비아에서 발매된 '오빠는 풍각쟁이'는 당시 여자 만요가수로는 대표적인 존재였던 박향림의 인기곡으로, 박영호가 작사하고 김송규가 작곡했다. 김송규는 앞서 말한 가수 김해송의 본명인데, 유행가에 대해 천재적인 감각을 지녔던 그의 작곡과 화려한 기교적 목소리의 정수로 꼽혔던 박향림의 노래가 어울려, 만요 특유의 감칠맛을 더해 주고 있다.
한편, 만요가 인기를 끌고 각 음반회사에서 경쟁적으로 만요를 만들어 내면서, 갈수록 말초적인 감각을 자극하는 내용도 크게 늘게 되었다. 당시 신문이나 잡지에 야비하고 저속한 유행가를 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글이 더러 실리곤 했는데, 1940년 5월 조선일보에 실린 아래와 같은 글에서 그러한 주장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좀 생각 있는 사람이면 전혀 유행가란 것을 가정으로 가지고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고, 어린 자녀들이 이같은 노래를 부르는 것을 꾸짖고 경계했다. 이렇게 일반이 경계하는 속에서 지금같이 어느 의미에서든지 무서운 발전을 보이고 있는 유행가의 정체란, 알고 보면 자못 저급한 세계로 돌아가며 저급한 그대로 세력을 뻗게 되었던 것이다. 그 세력이란 삼류, 사류의 빠나 식당에서 환영하고 즐겁게 불러 주었기 때문에 점점 기세를 올렸을는지도 모른다."
유행가의 저속함을 비난하는 이러한 글에는 문화현상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지식인 위주의 시각이 다분히 반영되어 있다. 또한 일제 말기에 전쟁이 격화되면서 정책적으로 사회 분위기를 일신하려고 했던 의도도 상당히 담겨 있다고 하겠다. 실제 이와 비슷한 기사가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과 태평양전쟁 직전인 1940년 무렵에 많이 나왔다는 것은 우연으로만 볼 수 없을 것이다. 이에 따라 1937년 말에서 1938년 초에 걸쳐 만요와 같은 가벼운 유행가를 단속하는 분위기가 잠시 있었고, 이후 전시체제가 본격화된 4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만요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고 말았다.
글 : 이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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