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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11월30일(일요일) [단양 신라 적성비&충주 탄금대&충주 고구려비&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여주 신륵사] 탐방일정
국민은행 : 010-9024-3919 예금주: 이진미 계좌로 11월11일 회비 26,600원 송금 완료
탐방지 : [단양 신라 적성비&충주 탄금대&충주 고구려비&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여주 신륵사]
탐방일 : 2025년11월30일(일요일)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6시간30분 소요)
07:00~09:30 “신사산악회” 버스로 지하철 3호선 신사역 5번 출구 앞에서 출발하여 충북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52-1 번지에 있는
단양적성 주차장으로 이동 [2시간 30분, 179.5km]
09:30~10:00 국보인 단양 신라 적성비(丹陽 新羅 赤城碑)를 사진촬영 [30분 소요]
[국보 단양 신라 적성비(丹陽 新羅 赤城碑)
수량/면적 1기
국보 지정(등록)일 1979.05.22
소 재 지 충북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산3-1번지
시 대 신라 진흥왕
소유자(소유단체) 국유
관리자(관리단체) 단양군
안내판 설명
단양 신라 적성비는 신라가 고구려 영토인 적성을 점령한 후 세웠다. 비석에 새겨진 기록과 『삼국사기』의 내용에 비추어 보면 진흥왕 6~11년(545~550)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에는 민심을 안정시키고 신라의 새 영토를 확인하며, 새로 복속된 고구려인들을 신라 국민으로 흡수하려는 국가의 의지가 드러난다. 진흥왕이 이사부 등 고관 열 명에게 명령을 내려 신라의 국경을 넓히는 사업을 돕고, 목숨까지 바쳐 충성을 다한 적성 사람 야이차에게 상을 내린다는 내용이 담겨 있으며, 이와 같이 충성을 바치는 사람에게는 똑같이 포상하겠다는 국가 정책도 적혀 있다.
비문에 진흥왕이 다녀갔다는 기록이 없고, 비문 첫머리에 교사(敎事)*라는 부분이 있는 것을 보면 진흥왕의 명을 받아 세운 석비(石碑)이지 왕이 직접 순행하며 민정을 살핀 기념으로 세우는 순수비(巡狩碑)는 아니다. 하지만 순수비의 정신을 담은 척경비(拓境碑)**라는 점과 적성(赤城)이라는 글자가 여러 번 등장한다는 사실은 지금의 단양이 당시에는 적성으로 불렸음을 밝혀 주기 때문에 사료로서 가치가 높다.
*교사(敎事): ~이옵신 일, ~하옵신 일을 의미하며, 임금의 명을 받들어 행하는 일을 뜻함.
**척경비: 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
등록된 자료는 2019년부터 2023년까지 진행된 안내판 개선사업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국가유산 설명
성재산 적성산성 내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비로,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인 이 곳 적성을 점령한 후에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워놓은 것이다.
비석은 1978년에 발견 당시 비스듬히 누운 상태로 땅속에 묻힌 채로 발견되어 비문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비(碑)는 위가 넓고 두꺼우며, 아래가 좁고 얇다. 윗부분은 잘려나가고 없지만 양 측면이 거의 원형으로 남아있고, 자연석을 이용한 듯 모양이 자유롭다. 전체의 글자수는 440자 정도로 추정되는데, 지금 남아있는 글자는 288자로 거의 판독할 수 있다. 글씨는 각 행마다 가로줄과 세로줄을 잘 맞추고 있으며, 예서(隸書)에서 해서(楷書)로 옮겨가는 과정의 율동적인 필법을 보여주고 있어 서예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비문에는 신라의 영토 확장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인의 공훈을 표창함과 동시에 장차 신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를 통해 신라의 형벌 및 행정에 대한 법규인 율령제도 발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노역체제, 재산 분배에 관한 국법이 진흥왕 초반에 마련된 것과 적성 지방에 국한된 관습을 법으로 일반화하고 있는 사실 등이 그러하다.
비문 첫머리에 언급된 고관 10인의 관등과『삼국사기』의 내용을 견주어 살펴볼 때, 비의 건립은 진흥왕 6∼11년(545∼550) 사이였을 것으로 보인다. 북방공략의 전략적 요충지인 적성지역에 이 비를 세웠다는 것은 새 영토에 대한 확인과 함께 새로 복속된 고구려인들을 흡수하려는 국가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비록 순수비(巡狩碑:왕이 직접 순행하며 민정을 살핀 기념으로 세우는 비)는 아니지만, 순수비의 정신을 담고 있는 척경비(拓境碑: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10:00~11:05 “신사산악회” 버스로 단양 적성 주차장을 출발하여 충북 충주시 금릉동 600 번지에 있는 충주탄금공원(구 세계무술공원)으로 이동
[1시간 5분, 70.2km]
11:05~11:35 충주 탄금대 탐방 [30분 소요]
[충주 탄금대
주소 :충주시 탄금대안길 6-4
문의 :탄금공원관리사무소 (043) 848-2246
추억을 심어주는 명승지 탄금대
충주에서 서북쪽으로 3km 지점에 충주사람들에게 추억을 심어주는 명승지 탄금대가 있다. 오대산에서 발원한 남한강이 탄금대 북쪽으로 유유히 흐르고 속리산에서 발원한 달천강이 한강과 합수되는 지점에 자리한 탄금대는 대문산, 견문산이라 부르기도 하는 해발 100m 정도의 나즈막한 산이다. 악성 우륵이 망국의 한을 달래며 가야금을 타면서 제자들에게 노래와 가야금, 춤을 가르쳤다는 곳이며, 임진왜란 때 팔도 순변사 신립장군이 순절한 곳이기도 하며, 야외음악당과 궁도장이 있다.
탄금정
2층 누각형태인 탄금정은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정자로 본래 충주관아 내 연못에 천운정이란 정자가 있던 것을 사직산에 지건되었다가, 1955년 다시 이 자리로 이건되었는데, 목조로 된 정자가 낡고 헐어 지금 이 정자를 건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강쪽으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탄금대에서도 가장 절경인 열두 대에 이른다. 유유히 흐르던 강물은 질펀하게 호반이 되어 물안개를 일으키고, 서번 박재륜 선생의 글에 죽사 박충식선생의 글씨로 세운 '신립장군 순국지기"비가 외롭게 서 있다.
열두대(남한강변 절벽)
임진왜란 때 팔도 도순변사 신립장군이 조총으로 무장된 십수만의 왜적을 창과 활로 무장한 훈련되지 않은 팔천 군사와 함께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려면 배수진 전법이 아니면 불가하다는 전략을 세우고, 이곳 열두 대에서 병사들과 함께 싸우다 47세를 일기로 애석하게 순절한 곳이다. 부여의 낙화암이 금강변에 있듯이 탄금대 열두대가 남한강변에서 분위기를 갖게 한다. 열두 대란 가야금이 12현 열두줄이기에 "열두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고, 또다른 하나는 신립장군이 왜병과의 전투에서 군사들을 독전하면서 열기에 달아오른 활시위를 강물에 식히려고 이 대(절벽)를 열두 번이나 오르내렸다는 전설이 숨어 있기도 한 곳이다. 이 곳 열두대를 오르내리는 지금의 콘크리트 계단을 12단으로 만든 것도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감자꽃 노래비
일제시대인 1930∼40년대 충주가 배출한 아동문학가 권태응 시인의 시비에 새겨진 <감자꽃> 전문이다. 아이들이 부르는 평범하고 짧은 노래지만 한국 사람은 한국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항일정신을 담고 있는 저항 시로도 읽힌다.
유 형 : 사지
지 정 : 기념물
지정일자 : 2007.7.9
신립장군의 혼이 깃든 충주탄금대
탄금대는 원래 대문산이라고 불리워 오던 작은 산으로 그 밑에는 남한강과 면서도 기암절벽에 송림이 우거져서 경치가 좋은 곳이다.
지금부터 1400여년전(AD 536년경) 신라 진흥왕 때에 악성 우륵선생이 가야금을 탄주하던 곳이라고 해서 탄금대라고 불리워졌다. 우륵선생은 가야국 가슬왕 당시의 사람으로 가야국의 멸망을 예견하고 신라에 귀화하니 진흥왕이 기뻐하여 우륵을 충주에 거주케 하며 신라청년 중에서 법지, 계고, 만덕에게는 춤을 수습시켜 우륵을 보호케 하였으며 우륵선생은 항상 산상대석에 앉아 가야금을 탄주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순변사 신립장군이 휘하장병 8천여명을 거느리고 배수진을 치고 왜장 소서행장을 맞아 격전끝에 전운이 불리하여 참패하게 되자 장강백파에 투신 순국한 전적지로 유명하며 탄금대 북쪽 남한강 언덕에 100척이나 되는 절벽 열두대라는 곳이 있는데 신립장군이 전시에 열두번이나 오르내리며 활줄을 물에 적시어 쏘면서 병사들을 독려하였다 하여 열두대라고 한다.
탄금대에는 현재 충주문화원, 야외음악당, 충혼탑, 감자꽃노래비, 탄금정, 탄금대기비, 악성우륵선생추모비, 신립장군순절비, 조웅장군기적비, 궁도장, 대흥사 등이 있고 조각공원과 체육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최근 탄금대토성에 대한 발굴조사결과 삼국시대 백제세력에 의해 축조된 토성으로 밝혀져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교통 정보 : 충주IC → 충주방면(3번지방도) → 제천방면(19국도,달천사거리 좌회전) → 롯데마트사거리(좌회전) → 탄금대공원]
11:35~11:47 “신사산악회” 버스로 충주 탄금대를 출발하여 충북 충주시 중앙탑면 감노로 2319 번지에 있는 충주고구려비전시관으로 이동 [12분, 8.3km]
11:47~12:07 충주고구려비전시관에서 국보인 충주 고구려비(忠州 高句麗碑)를 관람 [20분 소요]
[충주고구려비전시관
소재지 : 충북 충주시 중앙탑면 감노로 2319
충주고구려비전시관은 2012년에 개관한 곳으로 국내 유일의 고구려 석비인 충주 고구려비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충주는 계립령과 죽령, 남한강 등이 있어 전략적 요충지였는데 고구려가 충주를 70여 년의 오랜 시간 동안 점령했던 흔적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충주 고구려비이다. 오래전부터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 앞에 서 있었던 충주 고구려비는 1979년에 이르러서야 그 가치가 세상에 알려졌고 그 후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을 공략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되어 고구려비로 명명됐다. 이 밖에도 충주고구려비전시관은 충주 고구려비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유산, 설화, 생활상 그리고 안악 3호 분, 광개토대왕 비, 충주 고구려비의 발견 과정 등도 소개하고 있다.]
[국보 충주 고구려비(忠州 高句麗碑)
목차
정의
개설
내용
의의와 평가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비. 석비 · 중원비.
이칭 : 중원 고구려비, 중원비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 충주 고구려비(忠州 高句麗碑)
종목 : 국보(1981년 03월 18일 지정)
소재지 : 충청북도 충주시 감노로 2319 (중앙탑면, 충주고구려비전시관)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비. 석비 · 중원비.
개설
1981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높이 203㎝, 너비 55㎝이다. 중원 고구려비라고도 하였다. 입석마을에 글자가 새겨진 돌이 있다는 정보에 따라 1979년 4월 8일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에 의하여 발견, 조사되었다.
발견 당시 전면(全面)에 바위이끼가 많이 끼어 있어 육안으로는 물론 탁본을 하여도 판독이 어려울 정도였다. 석비의 형태는 석주형(石柱形)으로서 자연석을 이용해 각자면(刻字面)을 갈고 비문을 새겼다.
앞면과 한쪽 옆면에서만 글자를 확인했으나 뒷면과 또 한쪽의 옆면에서도 글자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석질은 견고한 화강암으로 글자의 흔적이 뚜렷하게 보인다.
이렇게 볼 때 4면에 모두 글자를 새긴 4면비(四面碑)로서 글자는 앞면이 10행으로 각 행 23자씩이고, 한쪽 옆면은 7행 23자씩이며, 또 한쪽의 옆면은 6행이 분명한데 뒷면은 너비로 보아서 9행 정도로 추측된다.
내용
비문의 서두에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는 문자가 보이고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제위(諸位)·하부(下部)·사자(使者)’ 등 모두 고구려의 관등뿐이며, 비문 중의 ‘고모루성(古牟婁城)’은 광개토왕릉비에 보이는 성이므로 고구려의 비임이 분명하다.
석비의 형태가 광개토왕비와 흡사해 두툼하고 무게가 있어 보이며, 자체(字體)도 고졸한 예서풍(隷書風)이다. 자경(字徑)은 3∼5㎝이며, 마멸이 심해 정확한 글자 수는 알 수 없으나 대략 400여 자로 추정되었다.
문헌적으로 고찰해 볼 때,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광개토왕(廣開土王)의 북벌남정(北伐南征) 못지않게 장수왕(長壽王)은 남하정책을 단행해 평양성 천도를 비롯해 한강 유역에까지 이른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이곳 한강 유역을 따라 상류에까지 척경(拓境)하고 그 기념적인 석비를 세웠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이 석비의 건립연대를 5세기대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중원비는 비문의 마멸이 심해 연구에 큰 어려움을 주고 있으며, 지금까지 비문의 판독, 그에 따른 내용해석과 용어, 건립연대, 건립목적 등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우선 비문의 판독에서 내용 요소를 인명·용어·지명으로 분류해 검토해 보면, 인명에서 쟁점으로 부각되는 것은 세 가지 정도로 꼽을 수 있다. 첫째, ‘고려태왕조왕령(高麗太王祖王令)’은 고려태왕(高麗太王)과 조왕(祖王)의 실체 및 양자 간의 관계, 그에 대한 해석에 따라 비의 건립연대를 밝힐 수 있는 결정적 단서로 주목받는 부분이다. 고려태왕과 조왕의 관계는 ①고려태왕의 조왕, ②고려태왕=조왕, ③고려태왕과 조왕으로 대별된다. 그 실체는 ②의 경우에만 고려태왕과 조왕을 장수왕(長壽王)으로 보고, ①에서는 고려태왕과 조왕을 각각 광개토왕(廣開土王)과 고국원왕(故國原王), 장수왕과 소수림왕(小獸林王), 문자명왕(文咨明王)과 장수왕으로 다르게 이해하였다. ③은 고려태왕은 장수왕으로 보지만 조왕을 ‘할아버지왕’이 아닌 별도의 인물로 파악했다. 또한 ‘령(令)’에 대해서도 ‘명령’, ‘율령’, ‘인명’으로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둘째 매금기(寐錦忌), 태자공(太子共), 고추가공(古雛加共)의 문제이다. 매금기에 대해서는 우선 ‘기(忌)’에 대해서 동사로 보는 설과 명사(인명)로 보는 설로 나눌 수 있다. 동사설로 ‘꺼리다’라고 해석하여 ‘신라매금이 중원지방에 오기를 꺼려하여 5월 중에 오지 않았고, 12월에서야 왔다’고 보기도 하고, ‘공경하다’로 해석하여 ‘신라매금이 공손히 응했다’고도 보았다. 또한 명사로 보고 매금의 인명으로 보기도 한다. 태자공과 고추가공은 ‘공(共)’의 해석과 태자·고추가의 실체, 나아가 양자의 관련 여부에 대해 의견이 엇갈린다. 먼저 ‘공’을 ‘함께’라는 뜻의 부사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태자의 인명으로 보는 견해가 대세로 굳어졌으나 태자의 실체 및 고추가 공과의 동일인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다.
셋째 개로(盖盧)를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로, 개로를 개로왕(蓋鹵王)으로 비정하거나 고구려 관리로서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의 인명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비문의 내용에서 ‘수천(守天)’, ‘상하(上下)’, ‘궤영(跪營)’, ‘태곽추(太霍鄒)’, ‘모인(募人)’의 용어에 대해서도 여러 견해가 있다.
그리고 비문에는 우벌성(于伐城)과 고모루성(古牟婁城)의 고유지명이 나오는데 그 위치에 대한 견해가 세 가지로 나뉜다. 우벌성을 ‘서라벌성(徐羅伐城)’의 약칭으로 보는 견해와 중원비가 서 있는 중원지방으로 보는 견해, ‘이벌지현(伊伐支縣)’과 연결시켜 순흥(順興)에 비정하기도 한다. 고모루성은 충남 덕산설, 충북 음성 고산성(高山城)설, 포천 고모리산성(古毛里山城)설이 제기되었다. 이 밖에 한강 하류 강북 지역과 남한강 상류지역 혹은 고구려 남진 교통로로써 원주와 춘천을 지목하기도 했다.
비의 건립 목적·배경에 대한 연구로는 첫째로 개인 공적비(功績碑)로 보고 그 주인공을 태자공, 다우환노(多亏桓奴), 장수왕으로 하는 견해, 둘째, 정계비(定界碑) 혹은 척경비(拓境碑)로 규정한 견해, 셋째, 국왕의 순수비(巡狩碑)·순행비(巡行碑)로 이해하는 견해, 넷째, 고구려와 신라간의 회맹비(會盟碑), 다섯째로 기존 양국관계의 재확인·유지를 위한 노력의 산물 혹은 고구려 영향권에서 이탈해간 신라를 회유·포섭하여 예전 관계로의 회복을 호소하기 위한 장수왕의 정치적 의지의 산물로도 파악했다.
또한 그 외 연구사적 쟁점으로 3면비·4면비인가의 문제와, 시작면이 어느 면인지 하는 문제 그리고 서체 등에 관한 것이 있다. 2000년 고구려연구회의 연구에 따라 4면비임은 확실해졌으나 시작면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의의와 평가
석비가 있는 마을 주위에는 골짜기마다 많은 고분이 있고, 그리 멀지 않은 탑평리 7층석탑 주변에서는 삼국시대의 기와들이 수집되며, 뒤쪽 장미산(長尾山)에는 삼국기 축조로 보이는 산성이 있다. 그리고 불과 4㎞ 직선거리인 북쪽 봉황리에는 삼국시대의 마애불상들이 있다.
특히 면계(面界)를 이루는 노은면에서는 일찍이 “건흥5년세재병진(建興五年歲在丙辰)”의 명문이 있는 고구려시대 금동광배(金銅光背)가 출토된 일이 있다.
이러한 모든 점을 종합해 볼 때, 이곳 입석마을을 중심한 역사·지리적인 여러 가지 문제를 생각할 수 있는 동시에 이 석비 건립의 시대적 배경과 입지적 조건 등을 이해할 수 있다. 국내에서 발견된 유일의 고구려비이므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또한 5세기 고구려·신라 관계, 고구려 관등조직, 인명표기방식 등 문헌에 없는 내용이 담겨 있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12:07~12:47 “신사산악회” 버스로 충주고구려비전시관을 출발하여 강원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654-2 번지에 있는 법천사지로 이동 [40분, 31.4km]
12:47~13:00 국보인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原州 法泉寺址 智光國師塔碑)를 사진촬영 [13분 소요]
[국보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原州 法泉寺址 智光國師塔碑)
수량/면적 1기
국보 지정(등록)일 1962.12.20
소 재 지 강원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산70번지
시 대 고려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국유
관리자(관리단체) 원주시
안내판 설명
탑비란 승려의 출생에서 사망까지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비는 고려 선종 2년(1085)에 지광국사의 삶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지광국사는 원주 출신으로 8살의 나이에 출가하여, 21세에 승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문종까지 여러 왕을 거치면서 최고의 승려로 활약하였다. 역대 왕들은 자주 지광국사를 왕실로 초청해 말씀을 들었고, 임금과 함께 국왕의 수레인 어가를 타고 다녔다. 특히 문종은 지광국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극진하게 대접하였다. 지광국사는 문종 24년(1070)에 87세의 나이로 법천사에서 입적*하였다.
지광국사탑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에 몸돌을 세우고 왕관 모양의 머릿돌을 올린 모습으로 전체 높이는 4.55m이다. 받침돌에 있는 거북의 얼굴은 용의 얼굴과 비슷하다. 특히 등껍질에 사각형을 여러 개 그리고 그 안에 왕(王) 자를 새겨 장식한 점이 독특하다. 탑비에 섬세하고 화려하게 새겨진 연꽃·구름·용 등은 당시 조각 예술의 최고 경지를 보여 준다. 특히, 몸돌 양 옆면에 구름과 어우러지게 새겨진 용 두 마리가 정교하면서도 사실적이다.
* 입적(入寂): 열반에 들었다는 뜻으로, 승려의 죽음을 이르는 말.
등록된 자료는 2019년부터 2023년까지 진행된 안내판 개선사업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국가유산 설명
법천사터에 세워져 있는 지광국사(984∼1070)의 탑비로, 국사가 고려 문종 24년(1070)에 이 절에서 입적하자 그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사리탑인 지광국사탑과 함께 이 비를 세워놓았다. 지광국사탑은 현재 국립문화유산연구원에서 보수중이며 탑비만이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돌을 세우고 왕관 모양의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거북은 목을 곧게 세우고 입을 벌린 채 앞을 바라보고 있는데, 얼굴은 거북이라기보다 용의 얼굴에 가까운 형상으로, 턱 밑에는 길다란 수염이 달려 있고 눈을 부릅뜨고 있다. 독특한 무늬가 돋보이는 등껍질은 여러 개의 사각형으로 면을 나눈 후 그 안에 왕(王)자를 새겨 장식하였다. 비몸돌에서 눈에 띄는 것은 양 옆면에 새겨진 화려한 조각인데, 구름과 어우러진 두 마리의 용이 정교하고도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머릿돌은 네 귀가 바짝 들려진 채로 귀꽃을 달고 있는데, 그 중심에 3단으로 이루어진 연꽃무늬 조각을 얹어 놓아 꾸밈을 더하고 있다.
비문에는 지광국사가 불교에 입문해서 목숨을 다할 때까지의 행장과 공적을 추모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정유산(鄭惟産)이 짓고, 글씨는 안민후(安民厚)가 중국의 구양순체를 기본으로 삼아 부드러운 필체로 썼다.]
13:00~13:45 “신사산악회” 버스로 원주 법천사지를 출발하여 경기 여주시 천송동 288-85 번지에 있는 신륵사관광지 주차장1로 이동 [45분, 25.1km]
13:45~16:00 신륵사 탐방 후 여주 남한강 출렁다리 방문 [2시간15분 소요]
[여주 신륵사
신륵사는 봉미산 기슭에 위치한 여주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오랜 역사와 웅장한 규모,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자 경기도 전통사찰로 지정되었다. 일반적으로 사찰은 산속에 짓는 경우가 많은데 보기 드물게 남한강이 바라보이는 강변에 세워졌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고려 말기 나옹선사가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하며 200여 칸에 달하는 대사찰이었다고 한다. 조선 성종 3년(1472)에는 세종대왕릉인 영릉의 원찰로 삼아 보은사[報恩寺]라고 불렀다가 원찰로서의 의미가 약해진 뒤 다시 신륵사라는 이름으로 돌아왔다. 벽돌로 쌓은 다층전탑이 있어 벽절로 불리기도 했다. 여주IC, 서여주IC에서 차량으로 약 13분 소요된다. 신륵사 주변은 국민관광지로 개발되어 인근에 맛집이 많고 국내 최대 규모의 도자기 전문 쇼핑몰이 있는 여주도자세상, 황포돛배 유람선 등과도 가깝다.
문의 및 안내 031-885-2505
주소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길 73 (천송동)]
[경기도 여주의 신륵사의 보물들
보물 제 180호 신륵사 조사당,
보물 제 225호 신륵사 다층석탑
보물 제 228호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보물 제 231호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앞 석등
보물 제 226호 신륵사 다층전탑
보물 제 229호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비,
보물 제 230호 신륵사 대장각기비 등이 있으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28호 신륵사 극락보전이 자리하고 있다.]
[보물 여주 신륵사 조사당(驪州 神勒寺 祖師堂)
수량/면적 1동
보물 지정(등록)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길 73 (천송동, 신륵사) / (지번)경기 여주시 천송동 282 신륵사
시 대 조선시대 초기
소유자(소유단체) 신륵사
관리자(관리단체) 신륵사
국가유산 설명
신륵사는 봉미산 기슭에 있는 조선시대의 절로, 원래는 신라시대에 지었다고 하나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조사당은 절에서 덕이 높은 승려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건물로, 신륵사 조사당에는 불단 뒷벽 중앙에 지공을, 그 좌우에는 무학과 나옹대사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조선 전기 예종 때 지은 것으로 보이며, 낮은 기단 위에 앞면 1칸·옆면 2칸으로 세웠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장식구조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데, 이러한 구조를 다포 양식이라 한다. 앞면은 6짝의 문을 달아 모두 개방할 수 있게 하고, 옆면은 앞 1칸만 문을 달아 출입구를 만들어 놓았다.
조선 전기의 조각 수법을 보이고 있으며 규모는 작지만 균형이 잘 잡힌 아담한 건물이다.]
[보물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驪州 神勒寺 多層石塔)
수량/면적 1기
보물 지정(등록)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길 73 (천송동, 신륵사) / (지번)경기 여주시 천송동 282 신륵사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신륵사
관리자(관리단체) 신륵사
국가유산 설명
신륵사 극락보전 앞에 있는 탑으로,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한 후, 그 위로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각 부분의 세부적인 조형방법은 전혀 달라서, 기단에서부터 탑신부까지 전부 한 장씩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바닥돌 윗면에는 연꽃을 돌려 새겼다. 아래층 기단의 네 모서리에 새겨진 기둥조각은 형식적이나, 특이하게도 물결무늬를 돋을새김해 두어 눈길을 끈다. 아래층 기단의 맨윗돌을 두껍게 얹어놓아 탑의 안정감을 높이고 있으며, 위층 기단의 모서리에 꽃 모양을 새긴 기둥을 두고 각 면마다 용무늬를 깊이 판 모습은 능숙한 석공의 솜씨를 드러낸다. 탑신부의 각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얇은 한 단이며,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치켜올려져 있다. 8층 몸돌 위에 지붕돌 하나와 몸돌 일부분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층수가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8층 탑신의 아래까지만 옛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각 부분 아래에 괴임을 둔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 석탑 양식을 일부분 남기고 있으나, 세부적인 조각양식 등에서 고려 양식을 벗어나려는 여러가지 표현이 돋보인다. 하얀 대리석이 주는 질감은 탑을 한층 우아하게 보이게끔 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국보)과 돌의 재질, 조각양식이 비슷하다. 신륵사는 조선 성종 3년(1472)에 대규모로 새 단장을 하였는데, 이 탑도 이 때에 함께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보물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驪州 神勒寺 多層塼塔)
종목 보물 (구)제226호(1963년 1월 21일 지정)
수량 1기
시대 고려시대
관리 신륵사
주소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길 73 (천송동, 신륵사)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驪州 神勒寺 多層塼塔)은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다층전탑이다. 다른 명칭으로 벽탑, 나옹탑, 동대탑이 있다. 현존 유일한 고려시대 전탑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226호로 지정되었다.
아래로 한강이 굽어보이고 강 건너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경치좋은 바위 위에 이 전탑이 세워져 있다. 전탑(塼塔)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이르며,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와 경상북도 안동지역에서 몇 기가 남아 있다.
탑의 높이는 약 9.4m이다.
탑은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하고, 다시 3단의 계단을 쌓은 후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기단과 계단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탑신부는 흙벽돌로 6층까지 쌓아 올렸는데, 그 위에 다시 몸돌 하나를 올려놓고 있어 7층같아 보이기도 하는 애매한 구조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전탑과 달리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매우 얇아 전체가 주는 인상이 사뭇 독특하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3층이 2단, 4층 이상은 1단이며, 지붕돌 위로도 1층은 4단, 2층 이상은 2단씩의 받침을 두었는데 이 또한 특이한 형태이다. 꼭대기에 머리장식이 있기는 하나 얇다. 이 전탑은 모든 형태가 전통의 전탑과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어, 중국으로부터 전래한 새로운 양식을 따라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기단에 사용된 장대석 중 최하단의 중간 돌과 제2단의 아래 돌은 다른 부재보다 높은 돌을 사용했다.
신라시대의 전탑이 거의 간격을 두지 않고 벽돌을 쌓은 데 비하여, 이 전탑은 벽돌 사이를 넓게 떼어서 면토를 바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탑의 건립 연대
탑의 북쪽에 수리할 때 세운 '신륵사동대탑수리비'가 존재한다. 거기서 ‘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崇情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이라는 연대가 있다. 조선 영조 2년(1726)을 뜻하지만 이 때 탑을 해체하고 수리하여 다시 세워진 것이므로, 지금 탑의 형태는 만들 당시의 원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벽돌에 새겨진 무늬로 보아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처음 세워진 이후 여러 차례 수리되는 과정에서 벽돌의 반원 무늬 배열상태가 어지럽혀지고, 전체 형태가 다소 변형된 것으로 보여진다.
신륵사동대탑수리비(神勒寺東臺塔修理碑) 내용
인근에 위치한 '신륵사동대탑수리비(神勒寺東臺塔修理碑)'는 다층전탑의 수리 내용을 기록한 비석이다. 이 비석의 내용을 보면, 전탑의 유래와 구성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다층 전탑은 '나옹탑'이라고 불리었으며, 이는 전탑과 나옹 선사와 관련이 있음을 암시. 나옹 선사는 5월 15일에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신륵사의 연혁을 기록한 탑지가 봉안되어 있다.
기단 하부에 사리를 봉안했다.
이 전탑은 건립 이래 3차례에 걸쳐 수리되었다.
이 전탑의 정식 명칭은 원래 '신륵사 동대탑(神勒寺 東臺塔)'이었다.
탑의 지정학적 위치와 의의
이 탑은 나옹 선사의 다비식 이후에 사리를 안치하기 위한 구조물로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전탑의 건립 위치로서 바로 아래에 한강이 굽어보이는 암석 위를 택하였음은 신라시대 이래 고려시대에 걸쳐 유행하던 특수한 점지 경향의 유풍이라고 할 수 있다.]
[보물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鍾)
종목/번호 보물 제228호
보물 지정일 1963-01-21
명칭(한자)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유형 유적건조물
소재지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길 73(천송동 282번지) 신륵사
시대 고려시대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鍾)은 보물 제228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길 73이다.
신륵사 조사당 북쪽 언덕에 있는 보제존자 나옹화상의 사리를 봉안한 석종형 승탑이다. 고려 말기의 고승 나옹화상은 양주 회암사에 머무르다 갑작스럽게 왕명을 받고 밀양 영원사로 떠나게 되었다. 나옹선사는 떠나기 전에 회암사를 중수하고 낙성회를 열었는데, 이 때 귀천을 가리지 않고 비단과 곡식을 가져다 공양하는 여인네들이 몰려들어 생업을 포기할 정도였다. 왕실에서는 이를 문제삼아 나옹선사에게 밀양 영원사로 한시 바삐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 왕명으로 길을 나서기는 했지만 나옹선사는 병이 깊은 상태였기에 신륵사에 이르러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자 머물게 되고 결국 이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신륵사에 나옹선사의 석종형 승탑이 세워지게 된 것은 이러한 나옹화상의 입적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고요한 소나무 숲 속에 안치된 사리탑 앞에는 석등이 세워져 있고 선사의 생적을 기록한 석종비는 뒤쪽에 세워져 있어 석등, 승탑, 탑비 등 3조의 묘탑상설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고려 말기에 불교를 중흥하고 조선 초기에 불교의 기반을 다진 고승으로 2천여 명의 제자를 배출했던 나옹화상의 묘역은 정성과 공력을 들여 마련된 흔적이 짙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완성된 이 승탑은 종의 모습을 닮아서 석종이라 불린다. 네모난 형태의 높고 넓은 기단에는 사방에서 기단 위로 오르는 층계가 마련되었으며, 기단 위에 넓고 얇은 돌을 깔고 그 중앙부에 2단의 받침대를 놓은 뒤 탑신을 안치하였다. 이처럼 이 사리탑은 기단의 모습부터 장중함을 느낄 수 있다. 이간 뒤의 놓인 탑신은 당당한 규모에 위로 올라가면서 윤곽선이 완만한 종의 형상을 본떠 만들어 타원형을 이루는데, 어깨 부분에서 수평으로 꺾이고 꼭대기 한 가운데에 큼지막한 화염보주를 장식하였다. 이 보주는 불꽃에 싸인 모양으로 조형성이 매우 뛰어남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석종형 승탑이나 사리탑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고려 말기에 새롭게 수용된 사리탑 양식으로 이는 멀리는 인도의 복발형 불탑에 뿌리를 두고 있다. 훗날 티벳을 주심으로 유행한 라마탑에서 새로운 양식으로 진전되고 이러한 양식이 좀 더 간소화되어 고려 말기에 우리나라에 수용되었다. 고려 말기에 화장사 지공선사탑에서 첫선을 보였는데 그의 제자였던 나옹화상의 승탑에서는 탑신이 아예 종 모양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훨씬 간략한 형태로 보편화된 양상을 띠게 되었다.]
[보물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鍾碑)
보물 (구)제229호 (1963년 1월 21일 지정)
수량 1기
시대 고려시대
소유 신륵사
주소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길 73, 신륵사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鍾碑)는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 사찰에 있는 고려시대의 비석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229호로 지정되었다.
개요
이 비는 고려 말의 승려 보제존자 나옹의 묘탑과 영정을 모신 진당(眞堂)을 조성한 내력을 적은 비다. 나옹이 양주 회암사 주지로 있다가, 말년에 밀양 영원사로 가던 중 신륵사에서 세상을 떠나자, 제자들이 절 북쪽 언덕에 종모양의 부도를 세워 그의 사리를 안치라고 이를 계기로 그의 초상을 모실 진당을 짓는 등 대대적인 중창을 하였다. 비문은 이색(李穡)과 서예가인 한수(韓脩)가 짓고 썼는데 단정한 필치가 돋보인다. 뒷면에는 건립에 참여한 제자와 시주자의 명단, 중창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비는 2단의 지대석 위에 연꽃 무늬를 새긴 비좌를 얹어 비몸을 세웠으며 비몸 양옆에 기둥을 세운 뒤 그 위에 지붕 모양으로 된 개석(石)을 얹었다.
이러한 형식은 고려 말기에 유행한 석비형식으로 신륵사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도 같은 형식이다.
특징
전체높이 212cm, 비신높이 121cm, 너비 61cm. 지대석과 3단의 장방형 대석 위에 비신을 얹었는데 상단의 대석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다. 비신은 대리석으로 양옆에 화강암기둥을 세워 보강하고, 그 위에 목조건물의 공포와 기왓골을 조각한 옥개석을 얹었다. 신라시대 이래로 귀부와 이수를 갖춘 일반화된 석비 형식이 고려 말기에는 대석과 옥개석으로 변형되기 시작하는데, 바로 이 비가 고려 말기의 석비 형식을 잘 보여준다. 글씨는 자경(字徑) 2cm 정도의 해서로 넉넉한 짜임새와 부드러운 필획이면서 흐트러짐이 없다. 비신 위에는 지붕형의 개석을 덮었다. 지붕은 팔작지붕을 모방하였는데, 아주 정교하게 조각되어 기왓골, 공포, 막새기와 등이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비는 1379년(고려 우왕 5년)에 세워졌다.
종비 내용
전면에는 나옹선사의 일생·사상·업적 등이 기록되어 있고, 후면에는 진당시(眞堂詩)와 200여 명의 문도와 추모자의 이름이 해서로 쓰여있다. 특이한 것은 전면 끝부분에 비문을 지은이·글쓴이·새긴이 건립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지은이와 글쓴이는 비문 맨 앞쪽에, 건립에 관련된 인물은 후면 음기에 새겨진다. 나옹선사는 교종과 선종으로 나뉘어 싸우던 고려 말의 불교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 두 종파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고, 그 사상은 조선 개창의 정신적 지주였던 무학대사에게 이어졌다.
수리 이력
신륵사의 시행된 수리 내역은 '신륵사개와모연문', '여주봉미산보은사중수사적기'등 문헌을 통하여 대체적인 것을 파악할 수는 있으나 보제존자석종비에 관한 수리 기록은 조선시대까지는 보이지 않고 1970년대에 들어서야 찾을 수 있다.
1973년 신륵사 석조문화재 보수 계획을 보면, 조잡한 보호책을 철거하고, 새로 보호책을 설치하고, 안내판을 설치하는 등의 작업이 기록되어 있다.
1979년에도 신륵사에서 석종비에 이르는 곳에 계단을 신설하는 공사를 진행하였다.
2001년 강우 등으로 노출된 기초부분을 보수하는 공사를 진행하였다.
2014년 비석 위의 균류 등을 제거하고, 균열된 곳에 충진재를 넣어 보존하였다.]
[보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神勒寺 普濟尊者石鍾 앞 石燈)
보물 지정일 : 1963. 1. 21.
시대 : 고려시대
소재지 : 여주시 천송동 산113-1
규모 : 1기
신륵사 서북쪽 언덕 위에 세워져 있는 8각 석등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세부분으로 이루어진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에는 표면 전체에 꽃무늬를 가득 새겨 장식하고 있다. 화사석은 각 면에 무지개 모양의 창을 낸 후, 나머지 공간에 비천상(飛天像)과 이무기를 조각했다. 지붕돌은 두꺼우나 여덟 귀퉁이에서의 치켜 올림이 경쾌하여 무거운 느낌을 덜어준다.
고려 우왕 5년(1379) 보제존자석종 및 석비와 함께 세워진 작품으로,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며, 고려 후기의 대표적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보물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驪州 神勒寺 大藏閣記碑)
보물 (구)제230호 (1963년 1월 21일 지정)
수량 1기
시대 고려시대
소유 신륵사
주소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길 73, 신륵사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驪州 神勒寺 大藏閣記碑)는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 사찰에 있는 고려시대의 비석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230호로 지정되었다.
개요
신륵사에 세워져 있는 비로, 극락보전 서쪽 언덕에 있었던 대장각(불경을 만들어 보관하던 곳)의 조성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을 적고 있다.
길쭉한 사각형의 바닥돌 위에 받침돌을 놓고, 그 위로 비몸을 세운 후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비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워 비몸을 단단히 지탱하도록 하고 있다. 이렇듯 비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우는 형식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보이는 현상으로 주목되는 부분이다.
권주(權鑄 )의 글씨로 새긴 비문은 비몸이 크게 파손되어 전체의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다. 비문의 뒷면에는 불경(경률론)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는데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비를 세운 시기는 고려 우왕 9년(1383)이다. 거북 모양의 비받침, 용의 머리가 새겨진 비머리가 고려 후기로 오면서 사각형 받침과 지붕 모양의 머릿돌로 간략화되는데, 이 비도 그러한 예이다.]
[여주 남한강 출렁다리
교량연장 : 515m
보도폭원 : 2.5m
주탑높이 : 48m
성인 1,200명 동시통행 가능
남한강 물결을 가로지르는 여주 남한강 출렁다리는 다채로운 감동을 선사한다.
우리나라 최초로 한강을 가로지르는 여주 남한강 출렁다리는 총 길이 515m, 폭 2.5M의 보행 현수교이다.
남한강의 푸른 물결 위를 가로지르며, 천년고찰 신륵사와 금은모래 캠핑장을 연결하여 다양한 경험을 제공한다.
걸을 때마다 느껴지는 강바람과 강 위를 걷는 아찔함은 남녀노소 모두에게 특별한 추억을 선사한다.
수도권의 뛰어난 접근성과 여주시 도심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어 당일치기 여행이나 가족 나들이 코스로도 좋다.
낮에는 아름다운 강변 풍경, 밤에는 환상적인 빛의 예술!
여주남한강출렁다리는 야간이 되면 화려한 미디어파사드로 환상적인 볼거리를 제공한다.
첨단 LED 기술을 활용한 빛의 향연이 남한강의 물결과 어우러져 색다른 감동을 선사하며, 계절과 행사에 따라 다채로운 테마 연출이 진행된다.
반짝이는 강물과 빛의 향연으로 특별한 야경을 만끽할 수 있는 여주의 새로운 랜드마크 여주 남한강출렁다리는 여주 여행의 필수코스가 되었다.]
16:00~17:40 “신사산악회” 버스로 신륵사를 출발하여 서울 지하철 3호선 신사역으로 귀경 [1시간 40분, 85.8km]
단양 신라 적성비 위치도
충주 탄금대 지도
충주 고구려비전시관 위치도
원주 법천사지 위치도
[여주 남한강출렁다리&신륵사]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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