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여행11 - 교토 중서부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지은 궁전인 니죠성에 가다!
어제 2024년 9월 19일 교토 긴카쿠지(銀閣寺 은각사)를 보고 철학의 길 哲學の道 을 걸은후 아라시야마를
찾아 텐류지 天龍寺(천룡사) 절과 아라시야마치쿠린 竹林 の小經(죽림노소경) 을 보고는 킨카쿠지
(금각사)를 거쳐 도시샤 대학교를 찾아 윤동주시비와 정지용 시비를 보고 이자카야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간사이 여행 사흘째인 2024년 9월 20일 교토 고조거리와 가와라마치 거리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호텔에서
간이 키친이 있는지라 밥을 해서 먹고는 렌터카를 몰아 교토 시내 중서부에 자리한 니조성을 찾아갑니다.
성 건너편에 사설 주차장에 차를 넣고는 대로로 나와 해자에 높은 성벽을 두른 니조성의 위용이
대단한데 약도를 보니 정문은 오른쪽으로 걸어 구부러져서 조금 더 걸어야 할 듯 합니다.
드디어 니조성에 도착하는데 여긴 입장료가 2가지가 있으니..... 700엔 짜리는 정원만 보는 것이고
궁전까지 보자면 1,300엔 짜리를 끊어야 하며 초등 학생은 300엔이고 중학생은 400엔 입니다.
입장권을 끊어 성문을 들어서니 2차 해자가 보이는데.... 니조성 (二条城 이조성)은 동서 480미터에
남북 360미터 로 무척 크고 넓은 성이니, 성벽 밖으로는 폭 13미터, 깊이 17미터인 사각형
해자 를 두르고 있는데.... 성 안에 들어가면 오사카성 처럼 다시 이중으로 두른 해자를 보게 됩니다.
성 안에 해자 앞에는 커다란 음성지원 안내판 이 있는데 일본어, 영어, 중국어,한국어 로 설명을 들을 수
있으나 소리가 너무 커서 마당에 쩌렁쩌렁 울릴 정도이니 그냥 한번 읽기만 하고 가는게 보통 입니다.
교토는 특히나 서양인 관광객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여기 니조성이 특히 그러하니 서양인들은
이런 곳에서 동양의 일본 문화를 접하는 것 같은데, 왼쪽에는 헌국어를 비롯해 여러나라
언어로 된 팜플릿에다가...... 또 한국어 를 포함 각국 언어로 된 리시버를 5백엔에 빌려줍니다.
입장하여 왼쪽으로 돌아 들어가니 니조성 니노마루 입구에 중간크기 정도의 문이 있는데
지붕의 재질이 특이하게도 신사에서 처럼 히노키피즙 나무 껍질 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니노마루 건물 입구는 단아하게 축조되어 있으며 입구에 있는 지붕의 처마는 검은 옻칠을
한 바탕에 화려한 금박으로 장식 을 하였으니 서양인들은 연방 감탄사 를 냅니다.
저만치 금박을 입힌데다가 세세한 조각으로 화려하기 짝이 없는 정문이 보이니 수많은 관광객
들이 사진 찍느라 바쁜 모습을 보는데..... 처마 가운데에는 여러 종류의 새 모양
을 조각한 현판 이 걸려있으니 한눈에 보이도 매우 정교하게 조각 되어 있는걸 알 수 있습니다.
니조성 은 모토리큐 니조조 (元離宮 二条城) 라고도 부르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 는
덴노(천황) 가 머무르던 교토 고쇼 (京都御所 경도어소) 를 보호하고 또 자신이
교토를 방문했을 때 머무를‘쇼군 將軍’의 거소 로 사용하기 위해 1601년에
건축을 지시하여 착공 2년 후에는 니노마루(二之丸) 부분이 먼저 완공 되었다고 합니다.
이에야스는 니조성을 지으면서 성의 건축비용은 서부의 도자마 다이묘들에게서 뜯어냈으며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왕(천황) 으로 부터 정이대장군으로 임명받고 이곳에서 취임 축하연 을 벌였다는데, 손자
도쿠가와 이에미쓰 가 혼마루(本丸) 와 천수각 등을 지었으니...... 1626년에 현재의 규모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니노마루 어전 (二之丸 御展) 은 독립된 전각이 여러채 뛰엄 뛰엄 서있는 조선 궁궐과는 달리 니노마루는 건물이
이어져 엄청난 규모의 단일 건물인 것 처럼 보입니다만.... 실은 6동의 기와집이 이어진 것 이라고 합니다.
“쇼군(將軍 장군)” 에게 접근하자면 수없이 많은 미닫이 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야밤의 침입자를 경계하여
마루가 밟으면 소리가 나도록 마루 밑에 특수 장치를 하여 놓았다는 설도 있으며.... 전체 조례 를
하기 위해서는 점점 높아지는 서너개의 미닫이 문을 열고 품계에 따라 무릎을 꿇고 도열 했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쇼군(將軍 장군)” 이라는 말의 정식 이름은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인데 안영우씨는
조선일보 ‘숨어있는 세계사’ 칼럼에 ’소수민족 아이누‘ 와 쿠릴열도’ 라는
표제로..... “러․일 서로 자기 땅이라는 쿠릴열도, 원주민은 아이누족” 이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미국이 일본에 육상 배치형 미사일 요격 시스템인 '이지스어쇼어' 를 판매하기로 하자
러시아가 발끈 하니 일본 정부는 "북한 위협에 대비하는 조치" 라고 설명하지만
러시아도 지지 않고 일본 북쪽에 있는 러시아 영토 '쿠릴열도' 에 레이더 기지를 지었다”
“ 일본은 안그래도 쿠릴 열도 일부가 자국 영토라며 돌려달라고 러시아를 설득하고 있는데 러시아가 땅을
내놓긴 커녕 그곳에 레이더 기지 를 세웠으니 크게 반발 했는데..... 사실 이 땅의 원래
주인은 일본도 러시아도 아닌 '아이누' 라는 소수민족인데 '아이누' 는 아이누어로 '사람' 이라는 뜻이다.”
“아이누족은 러시아 사할린, 홋카이도, 쿠릴열도 에서 살면서 고유한 언어와 문화 를 만들었으니 이들에겐
"태양의 아들(일본인) 이 오기 10만년 전 부터 우리가 이곳에 살았다" 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는데 물론
10만년은 '전설' 이고, 고고학계에서는 아이누족이 1만년전 시베리아에서 건너온게 아닐까 짐작하고 있다”
“아이누족은 통일된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부족 생활 을 했으니 일본 혼슈의 도호쿠 지방,
홋카이도, 러시아의 사할린, 쿠릴열도, 캄차카반도 에 흩어져 살았는데 이들은
외모가 백인 처럼 눈·코·입 윤곽이 뚜렷하고, 동남아 사람들 처럼 피부색이 좀 어두운 편이다”
“ 아이누족 남자들은 턱수염을 길게 기르는 전통이 있는지라 일본인은 과거에 그런 아이누족을 '에미시(毛人)'
라고 낮춰 불렀는데 일본인에 비해 몸에 털이 많은 아이누족 특징을 얕잡아보는 말로 일본 '쇼군(將軍)' 의
정식 명칭은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이니 아이누 같은 '오랑캐' 를 정복하는게 쇼군의 주요 임무였기 때문이다”
“일본 역대 쇼군들은 수백년간에 걸쳐 차근차근 북쪽으로 세력을 넓혔으니 일본 혼슈동북부 를 공격해 15세기
에 이르면 아이누족(에미시)을 본토에서 몰아냈고 19세기에는 바다 건너 홋카이도(북해도) 까지 모두
일본 중앙정부의 지배 아래 들어왔으니 더 달아날 곳이 없어진 아이누족도 자연히 '일본인' 으로 동화 됩니다.”
“문제는 아이누족이 용모도 언어도 다른 '이민족' 이라는 점이었으니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일본인은 단일민족' 이라고 강조했는데 아이누족은 그런 주장이 빛바래게
하는 존재라..... 1899년 아이누 민족의 고유 풍습을 금지 하고 일본어 사용을
의무화 했으며 전통적인 수렵 생활을 금지 하고,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압박 한다”
“쿠릴 열도는 크고 작은 섬 56개 가 늘어선 열도이니 최북단 아틀라소프섬 (아라이도·阿頼度島) 은 러시아
캄차카반도, 쿠나시르섬(구나시리·国後島) 은 일본 홋카이도 코앞에 있는데, 19세기 들어 두 나라가
근대국가로 발돋움하며 충돌이 시작됐으니 남진하는 러시아 와 북진하는 일본 이 쿠릴 열도에서 맞닥뜨린다”
“두 나라는 1855년 쿠릴열도에서 가장 큰 섬 이투루프섬(에토로후) 을 기준으로 섬 남쪽은 일본 땅, 북쪽은
러시아 땅 으로 삼기로 했으며 쿠릴열도 옆에 있는 사할린은 양 국민의 공동 거주지 가 됐는데 이후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를 꺾은 뒤, 쿠릴열도는 물론 쿠릴열도 옆에 있는 사할린섬 전체를 차지한다.”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이런 판세가 뒤집히니 일본이 미국에 맞서 사투를 벌이고 있을때 소련이 일본을 침공
해 쿠릴열도 전체를 점령하자 일본은 소련에 "1855년에 정한대로 이투루프섬 남쪽에 4개 섬은 돌려달라" 니
소련은 "2개만 돌려주겠다" 했는데 1960년 일본이 미국과 '미· 일 안보조약' 을 맺자 소련이 약속을 취소 한다”
쇼군(정이대장군) 이 아이누를 토벌한건 훨씬 나중의 일이고 규슈에 거주했던 말레이 계통
원주민을 조몬인으로 부르는데 BC 3세기 부터 한반도에서 철기문화에 벼농사 를 짓는
사람들이 건너와 규슈에 수십개 부족국가를 세우니 야요이인으로, AD 4세기에 말을 탄
김해가야인들이 건너와 왜인들의 국가를 통합하니 한반도와 규슈에 걸친 세력를 이룹니다.
고 최인호씨는 이 인물이 김해 대성동 13호분 주인으로 일본에서 숭신왕으로 불린다는데.....
후손은 391년 왜병을 이끌고 한반도로 건너와 동족 김해가야 및 아라가야인들과 연합
해 신라를 공격해 서라벌이 함락되기 직전인 400년에 고구려 5만 대군이 남하해 종발성
이 함락되자 가야인들과 함께 일본으로 후퇴해 새 왕조 야마토(大和) 를 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1611년 일왕(천황) 양위식 행사에 참석하려고 수도 교토로 상경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
오사카성에 있던 토요토미 히데요리 를 불러 니조성에서 만났는데 교토의 백성들이
히데요리를 열렬히 환영 했고, 22살의 장성한 히데요리를 보고는 이대로 두면 훗날
도쿠가와 쇼군가가 위험해 지겠다는 위기 의식에 토요토미가 멸족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1615년에 토요토미 가문 말살을 위해 펼쳐진 오사카 전투에서는, 니조성에 불을 지르고 그 틈을 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암살 하려는 음모가 발각됐으니 음모를 꾸민 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편이 되어있던 후루타 오리베의 가신 이라...... 이 책임으로 후루타 오리베는 할복을 명받아 자결합니다.
1634년 제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 까지 쇼군 즉위 의식이 치러졌으나 이후 19세기
말 까지 쇼군의 발걸음은 뚝 끊겼다는데.... 200년도 지난 후에 다시 찾은 사람은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 였으니 이에모치는 상경해 일왕(천황) 에게
양이를 약속 했지만 3년 후인 1866년 조슈번 정벌전 도중 쇼군 이에모치가 급서 합니다.
15대이자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니조성에서 쇼군 자리를 계승 했으나 도쿠가와 막부는 이미
기울대로 기울어 요시노부는 니노마루 (二之丸 御展) 오오히로마(大広, 거실) 에서 40여명의 중신들을
모아놓고 일본 통치권을 일왕(천황)에게 반환 한다고 선언하는데 1867년 사건을 "대정봉환" 이라고 합니다.
니조성은 1939년에는 황실에서 교토부로 소유권을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3~4월
중에는 야간 조명을 밝히는 라이트업 행사 가 있고 9~11월에는 니조성 축제 가 열립니다.
니노마루 궁전 (二之丸 御展) 은 모모야마 시대에 쇼인즈쿠리 양식 의 대표적인 건물로 국보 로 지정되어
있는데..... 여섯동 건물이 복도를 통해 이어져 있는 구조이며 33개의 방마다 화려한 벽화 가 있으니
방의 용도에 맞는 그림 으로 꾸며져 있는데 이 중에서 오오히로마 이치노마가 대정봉환 장소 라고 합니다.
니노마루 궁전 안의 기다란 나무 복도를 걸어가다 보면 삐걱거리는 소리 가 나는데
쇼군의 암살이나 외부자의 침입을 막기 위한 덧이라는 낭설이 있었으나...
사실이 아니며 이 특유의 소리가 마치 휘파람새 소리 와 비슷하다 하여
우구이수바리 (鴬張りの廊下 꾀꼬리 소리의 복도) 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복도 밑 공간에는 못 같은 구조물 이 설치되어 있는데 복도를 밟으면 압력에 의해
나무 복도와 함께 빈 공간에 고정된 못들이 움직이면서 소리를 내는
것이라고 하며 빛을 막기 위해 궁전 내에서는 촬영이 금지되어 있는게 아쉽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 일본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의 원한 을 사게 되는데 세키가하라 전투후
서군에 속한 다이묘들의 영지를 몰수 했으니.... 암살을 하려는 자와 이를 막으려는 자의
숨바꼭질을 보는 듯 한데 문득 서로 다른 입장을 생각하는 “역지사지 (易地思之)” 란 단어가 떠오릅니다.
문학 평론가 왕은철 교수는 동아일보 ‘왕은철의 스토리와 치유’ 라는
칼럼에 “나무꾼과 사슴은 문화다” 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동화는 순진무구한 동심의 세계만을 담을것 같지만 교묘하게 폭력을 숨겨놓기도 한다. 그림 형제나 안데르센의
동화 들은 말할 것도 없고 ‘나무꾼과 선녀’같은 한국 전래동화도 그렇다. 나무꾼과 선녀는 이런 이야기다. "
"가난한 나무꾼이 사냥꾼에게 쫓기던 사슴을 나무 더미 뒤에 숨겨줘 목숨을 구해준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사슴은 나무꾼의 소원 을 들어준다. 나무꾼은 사슴의 말에 따라 '선녀의 날개옷을 감추고 그녀를
아내로 삼는다. ' 이후의 이야기가 어떻든 나무꾼의 입장에서 보면 소원을 성취하는 행복한 이야기 이다."
그러나 반대편에서 생각하자면...... " 어쩔 수 없이 나무꾼과 결혼해야 하는 선녀의 입장
에서 보면 폭력의 이야기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폭력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은 선녀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을 우리 문화가 무의식적으로 억압하기 때문 이다."
"나무꾼과 선녀라는 제목도 나무꾼을 앞에 놓음으로써 억압에 일조 한다. 나무꾼을
중심으로 모든게 합리화 된다. 그렇다면 제목을 ‘선녀와 나무꾼’으로 바꾸면
어떨까. 그렇게 되면 선녀가 이야기의 주체로 되면서, 선녀가 목욕하는 장면을
엿보고 날개옷을 훔치고 속임수로 결혼 하는 사냥꾼의 행동은 관ㅇ증이요 폭력 이 된다"
"선녀를 붙잡을 비밀을 알려주는 사슴도 그 폭력에 동조 한다. 아니, 사슴은 단순한 동조자
라기 보다 폭력을 처방하고 부추기는 주체 이거나 적어도 가부장 문화의 대리인 이다."
"그러나 이렇게 읽으려면 제목만 바뀔게 아니라 내용도 바뀌어야 한다. 한국에서 출간된
20여종 나무꾼과 선녀, 선녀와 나무꾼을 비교해보면 알수있는 것처럼 제목만 앞뒤로
바꾸고 내용을 그대로 두는 것은 구호만으로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구호는 구호일 따름이다. 진짜 변화 는 나무꾼과 선녀, 선 녀와 나무꾼이 기반
으로 하는 문화가 거북이 걸음일망정 조금씩 옳은 방향으로
나아갈 때라야 가능하다. 문화 속의 폭력을 응시하고 사유하는 게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