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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성모님을 폄하하는 말씀이 아니라 성모님을 극찬하고 칭송하는 예수님의 말씀!
하느님의 인류 구원 역사 여정 안에서 성모님의 역할과 기여를 인정하지 않고, 그분의 존재, 그분의 탁월한 신앙과 동정성을 부정하고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성모님의 동정성을 부정하는 근거로 삼는 복음 구절이 있는데,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마르코 복음서입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마르 3,32)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위해 출가하신 다음 성모님께서는 이제 내 역할은 다 끝났다, 큰 짐 덜었다, 이제는 편안하고 여유 있는 노년을 보내야지, 사실 분이 아니었습니다. 성모님의 안테나는 오로지 예수님께로 향해 있었습니다.
오늘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몸은 건강할까? 식사는 제때 하고 있을까? 무슨 도움이라도 되어드릴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그렇게 노심초사하면서 지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성모님에게 걱정스런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당대 나름 시국을 주름답던 주류 세력들, 율법학자들, 바리사이들, 대사제들과 맞서서 날선 대화를 주고받는데, 절대로 뒤로 물러서지 않고 논쟁을 거듭하니, 저러다 제 명대로 못 살겠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입니다.
밤새 뜬 눈으로 지새운 성모님께서는 날이 새자마자 예수님이 머무시는 집으로 찾아가셨습니다. 성모님 일행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께 그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찾아오셨다고.
위 표현에 따라 성모님의 동정성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신이 나서 외쳤습니다.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 외에도 적어도 아들 2명, 딸 2명을 슬하에 두었다.’ 성모님의 동정성은 허구라고 부르짖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정통 교부들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예수님 시대 형제, 자매라는 용어는 협의적으로도 사용되었지만, 광의(廣義)적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동일한 부모에게서 출생한 자녀들도 형제 자매라고 불렀지만, 사촌, 팔촌 등 친척들에게도 형제, 자매라고 칭했습니다.
따라서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을 찾아온 형제들과 누이들은 성모님의 친 자녀들이 아니라 사촌이나 오촌 형제자매들이라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렇다 치더라도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 34-35)는 예수님의 말씀은 걱정이 되어 찾아가신 성모님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억울하고 큰 상처가 될수도 있었겠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이 대목을 묵상하다보니,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위 말씀은 성모님을 힘들게 하신 말씀, 성모님을 무시하는 말씀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 안에서 수많은 신앙인들 가운데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뜻을 잘 실행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면에서 예수님의 알쏭달쏭한 말씀은 성모님을 가장 극찬하고 칭송하는 말씀이 될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아버지를 버려야 진짜 나의 삶이 시작된다>
복음: 마르코 3,31-35
오늘은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말씀하시는데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외의 대답을 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예수님께서 인간적인 혈육의 관계를 넘어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또한 ‘자유로운 어른’이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부모나 가족의 뜻에 휘둘리면 아직 독립한 어른은 아닙니다.
가끔 주위에서 아이들이 가출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왜 아이들이 가출을 할까요? 어떤 아이는 엄마, 아빠 없는 곳에서 잠시라도 살고 싶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엄마, 아빠의 뜻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독립하여 어른이 되고 싶다는 뜻입니다. 가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부모의 뜻에서 벗어나서 진정으로 자유롭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부모에게 빚진 게 있기 때문입니다. 양심상 가출해도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렸다는 생각에 행복할 수 없고, 자존심 때문에 다시 들어가지 못하면 나쁜 길로 빠지기 십상입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니얼 페리는 웰튼 아카데미의 밝고 열정적인 학생으로, 새로 부임한 교사 존 키팅의 영향 아래 연기에 대한 자신의 진정한 소명을 발견합니다. 셰익스피어 공연에 대한 니얼의 열정은 엄격하고 성공을 중시하는 아버지 페리 씨의 기대와 극명히 대비됩니다. 무대 위에서 느끼는 기쁨과, 훗날 의대 진학을 포함해 제대로 된”미래를 준비하라는 아버지의 강압 사이에서 갈등하는 니얼은 자기 주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합니다.
니얼이 학교 연극 ‘한여름 밤의 꿈’에서 중요한 역을 맡게 된 순간, 그는 마침내 인생의 목적을 찾았다고 느끼며 벅찬 행복감에 사로잡힙니다. 여기에 힘을 실어준 인물이 오늘을 살고 꿈을 찾으라는 키팅 선생님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를 알게 되자 즉시 연극을 그만두고 공부에만 전념하라고 명령합니다. 니얼은 아버지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연극에서 찾은 자유를 놓치기 싫어 갈등하며, 결국 결단을 내리지 못합니다. 키팅 선생님이 “오늘을 잡아라(Carpe Diem)”라고 격려하지만, 니얼은 아버지의 요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몰래 공연을 강행합니다.
공연이 대성공을 거둔 직후, 페리 씨는 니얼을 나무라며 웰튼 아카데미에서 퇴학시키고 군사학교로 보내겠다고 위협합니다. 깊은 상실감과 압박감에 사로잡힌 니얼은 아버지의 기대와 자신의 꿈을 결코 조화시킬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또다시 아버지와 맞설 용기를 내지 못한 그는 파멸적 절망감에 굴복하고, 그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맙니다. 그의 나약함은 재능의 부족이 아니라 아버지의 의지에 맞서지 못한 데 있었기에, 그 결말은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옵니다.
니얼이 아버지를 넘어서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버지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키팅 선생이 아버지를 대체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아버지가 주는 것만큼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른이 되려면 부모보다 더 많이 주는 부모를 찾아야 합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만이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로운 어른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에릭 리델은 1902년 중국에서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의 자녀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순종의 삶이 얼마나 큰 힘을 지니는지 직접 체험했습니다. 성장하면서 교육을 위해 스코틀랜드로 건너가 뛰어난 달리기 재능을 발견했고, 곧 ‘나는 스코틀랜드인(The Flying Scotsman)’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육상계에서 명성을 얻었음에도, 그는 모든 재능이 하느님께서 더 높은 목적을 위해 주신 것이라 믿었습니다.
1924년 파리 올림픽에 출전 자격을 얻었을 때, 그가 가장 자신 있던 종목인 100m 경기가 주일(主日)에 열릴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주일을 오로지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날로 지켜야 한다는 그의 신앙적 확신과 충돌했고, 가족은 물론 영국 대표팀 관계자들도 그에게 종목 포기를 말리고 출전하라고 강하게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의 뜻을 최우선으로 여겨, 결국 가장 잘 뛰는 100m가 아닌 400m에 나가 예상을 뒤엎고 금메달을 획득함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습니다.
이후 많은 이들이 에릭 리델을 비난하거나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는 “나를 지으신 하느님께서는 내가 달릴 때 기뻐하심을 보신다.”라고 고백하며, 같은 신앙을 지닌 사람들과 기쁨과 위로를 나누었습니다. 올림픽 후에는 세상적 명예를 누릴 수 있는 길을 마다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선교사로 지내며, 현지인들과 한 가족처럼 지냈습니다. 일본군의 억류 캠프에 갇히는 시련을 겪었을 때에도 함께 수용된 사람들과 하루하루를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지내며 서로를 돌보았습니다.
1945년 뇌출혈로 사망하기까지, 에릭 리델은 언제나 가족이나 주변인들의 기대보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따랐으며, 같은 뜻을 품은 이들에게 영적인 형제이자 스승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의 삶은 “하느님의 뜻 안에서 만나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가족”이라는 복음적 가르침을 몸소 보여 주었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은총이 어떤 것인지를 세상에 드러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뜻에서 벗어난 이들과 사귀어야만 진정한 하느님 아버지의 가족들이 됩니다. 부모의 뜻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은 아직은 모기처럼 세상에 집착하는 사람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친구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 사람을 만나지 진정한 하느님 가족의 행복을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참 행복은 관계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만이 우리를 독립된 어른으로 만들고 좋은 친구들과 함께 행복해질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렇게 말합시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르 3,31-35: 예수님의 형제, 자매, 어머니인 사람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33절). 이 말씀은 당신 어머니를 부끄럽게 여기신 것도 아니다. 부끄럽게 여기셨다면 그 태를 거쳐 나오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35절) 마리아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기 때문에 마리아는 가장 확실한 가족이시다. 우리는 당신 가족으로 우리를 불러주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여야 한다.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느님의 가족이 되기 위한 요건을 말한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다면 그는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이다. 어머니라는 것은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낳아줄 수 있다면 그것은 가족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때문에 우선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는 태도와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삶이 있어야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가족이란 육적인 가족보다 영적인 가족이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즉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육신을 잉태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때문에 더욱 복되신 것이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11,27).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혈연관계는 그들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않았다.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잉태하신 것도 복되시다고 천사도 엘리사벳도 말하였다. 그보다 더 행복하게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지 않았더라면, 어머니라는 친족관계조차 마리아에게 아무런 유익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참조: 마태 3,8-10; 루카 11,27-28; 로마 9,1-8). 주님께서 마리아를 칭송하신 것은 혈연관계로 당신을 낳아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행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이 말씀은 마리아 안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시고 우리 가운데 사셨기 때문이 아니라(요한 1,14 참조), 자신을 지어내시고 자신 안에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을 지켰기에 복되다는 것이다. 즉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셨기 때문에 복되시다는 말씀이다. 말씀을 실천하는 삶으로 가족이 되어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밤새 몰아치던 폭풍우가 물러난 아침, 파도에 휩쓸려온 불가사리가 해변에 수도 없이 널려 있었습니다. 해변을 걷던 어린 여자아이는 불가사리를 하나 집어 바다로 던졌습니다. 또 하나를 주워 그것도 바다로 던졌습니다. 그 모습을 보던 한 노인이 다가와 말을 겁니다.
“꼬마야! 지금 뭐하니?”
“불가사리를 바다로 돌려보내고 있어요.”
“하지만 얘야, 이 해변에는 수십만은 못 되더라도 수만 마리나 되는 불가사리가 널려 있단다. 네가 몇 마리 구해준다고 별 차이가 있겠니?”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불가사리를 또 집어서 바다로 던졌습니다. 그리고 노인에게 말했습니다.
“쟤한테는 큰 차이가 있죠.”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 아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유명한 이야기를 알고 있어도 실천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 하나로 무슨 변화가 있을 수 있냐면서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환경 문제가 심각하다고 서로 이야기하지만, 나 혼자만 지켜봐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랑 실천도 그렇습니다. 누구는 사랑을 실천한다고 누가 알아주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서 시작하는 사랑 그 자체로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온 인류가 구원의 길에 들어선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주님께서 알아주십니다. 이렇게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만이 주님의 편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알리지요.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라고 반문하시면서,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면서, “이들이 내 어미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생물학적 가족을 무시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보다 주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진정한 주님의 가족이 될 수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구원의 길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나라에서 새로운 가족이 이루어집니다. 이를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당신의 뜻을, 즉 사랑의 길을 걸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어 보이는 삶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그 모든 것이 역전되고 맙니다. 당연히 지금 당장 사랑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이란 치과의사 앞에 있는 것과 같다. 그 앞에 앉아 있을 때마다 최악의 통증이 곧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새 통증이 끝나있다(비스마르크).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우리’라는 단어는 울타리에서 기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 울타리에 있지 않으면
‘우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라는 단어는 연대성을 내포합니다.
서로 영적인 형제 관계 속에서
친교와 일치를 이루며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연대성은 말씀 안에서
영적인 친교와 일치가 바탕이 될 때 의미가 있습니다.
나는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말씀 안에서 교우들을 섬기며
형제적 삶을 살고 있는지 나부터가 살펴볼 일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 35)
하느님의 뜻은
말씀에 대한
우리의
실행입니다.
예수님의 실행안에
혈육보다 뜨거운
하느님 나라가
있습니다.
믿음과 실행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몸입니다.
우리의 실행으로
말씀의 길은 더욱
아름다워집니다.
우리의 삶은
말씀의 실행으로
더욱 아름다워집니다.
말씀의 올바른
실행은 먼저
우리의 뜻을
내려놓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말씀과
실행의 관계입니다.
말씀과 실행으로
하느님의 뜻은
우리의 삶안에서
더욱 구체화됩니다.
하느님의 뜻에서
두 개의 가장
큰 축(軸)은
말씀과 실행이듯
하느님 말씀을
이웃과 우리자신에
실행하는 복음의
사람되십시오.
실행으로
우리모두는
형제가 되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입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1.28)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3,35)
'예수님의 참가족!'
오늘 복음(마르3,31-35)은 '예수님의 참가족'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와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부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마르3,32) 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마르3,33) 하고 반문하시면서,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3,34-35)
요즘 우리가 듣고 있는 독서 말씀은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대사제이신 예수님, 멜키체덱과 같은 영원한 사제이신 예수님, 더 나은 계약의 중개자요, 새 계약의 중개자이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독서(히브10,1-10)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히브10,7)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히브10,10)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실행해야 할 하느님의 뜻이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났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 모두의 구원을 위한 희생제물, 속죄제물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세례성사를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신 예수님'을 따라갑시다!
'예수님의 생각을' 따라가고, '예수님의 말을' 따라가고, '예수님의 행위를' 따라갑시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너를 위해 죽읍시다!
그래서 '예수님의 참가족'이 됩시다!
복음말씀
제1독서
<보십시오,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10,1-10
형제 여러분, 1 율법은 장차 일어날 좋은 것들의 그림자만 지니고 있을 뿐
바로 그 실체의 모습은 지니고 있지 않으므로,
해마다 계속해서 바치는 같은 제물로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이들을 완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
2 만일 완전하게 할 수 있었다면,
예배하는 이들이 한 번 깨끗해진 다음에는 더 이상 죄의식을 가지지 않아
제물을 바치는 일도 중단되지 않았겠습니까?
3 그러한 제물로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될 뿐입니다.
4 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를 없애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5 그러한 까닭에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6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7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8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제물과 예물을”, 또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원하지도 기꺼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시는데,
이것들은 율법에 따라 바치는 것입니다.
9 그다음에는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을 치우신 것입니다.
10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31-35
31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32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34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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