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모 주교의 명상 칼럼] 실존적 차원의 나 (2)
해답은 못찾았지만 마음은 평화롭다
신에 대한 믿음을 상실한 현대인들은 쉽게 실존적 공허감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사이비 종교나 알코올, 마약 중독에도 쉽게 빠질 뿐만 아니라 감각적 쾌락에도 쉽게 빠진다.
그러나 인간은 아싸지올리가 말하는 상부무의식의 요소, 즉 영성(spirituality)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실존적 공허감에서 벗어나는 어떤 길을 찾으려고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 답을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 즉 불교에서 실존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면 인간 실존에 대한 붓다의 깨달음은 어떤 것인가?
붓다는 힌두교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힌두교는 인간의 삶은 끊임없이 윤회(輪廻)한다고 주장한다. 전생에서의 업 때문에 현생(現生)이 있고, 현생의 업 때문에 다음의 생(生)이 있다.
그런데 붓다가 깨달은 것은 이 세상의 삶은 생노병사(生老病死)와 번뇌로 가득한 고(苦), 즉 고통의 바다(苦海)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붓다에게 구원이라는 것은 윤회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은 깨달음을 얻어 번뇌와 업을 끊어 해탈해야 한다. 그것이 곧 열반(nirvana)인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인 위빠사나 명상에서는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가 세 가지 중요한 깨달음인데, 물질이나 정신은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니 무상이요, 그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으니 괴로움(苦)이며, 나의 몸과 마음조차도 내가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으니 내가 없는 것(無我)이다.
나는 여기서 의문을 하나 가지고 있다. 전생(前生)과 후생(後生)이 과연 있을까? 업(karma) 때문에 인간의 생(生)은 끊임없이 윤회하는 것일까?
나는 어리석은 집착에서 벗어나 해탈의 니르바나를 꿈꾸며 명상하고 있지만, 이것이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다시 나는 누구인가? 생각이 나인가? 생각은 나의 일부이긴 하지만 나의 본질은 아니다. 지금 나의 생각은 10년 전, 20년 전, 30년 전의 나의 생각과는 다르다.
그렇다면 어떤 생각을 하는 내가 참 나인가? 10년 전 생각을 하던 내가 참 나인가, 아니면 지금 이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참 나인가?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고 했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 없이 잠들어 있을 때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물론 데카르트는 기존에 옳다고 믿어 왔던 모든 것의 불확실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던 시대적 명제에 가장 확실한 것부터 검토하는 과정에서 “cogito ergo sum”을 말했지만 말이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이 가르침은기독교의 핵심 교리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젊은 시절의 나의 믿음과 지금의 나의 믿음은 확실히 다르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나의 어떤 믿음을 보고 나를 구원하실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의 몸이 나인가? 몸도 나의 일부이긴 하지만 몸 역시 나의 본질은 아니다. 젊은 시절의 나의 몸과 지금의 나의 몸은 다르다. 10년 후 나의 몸은 또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몸을 가진 내가 참 나인가?
기독교의 신앙대로 우리가 부활한다면, 우리의 몸은 젊은 시절의 건장한 몸으로 부활할까, 아니면 늙어서 쇠약해진 몸으로 부활할까?
나는 오직 지금 여기서만 존재한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금 여기에서의 나는 과거의 나와는 다른 존재이고, 미래의 나와도 다른 존재이다.
시간 축 위에서 나를 보면 나는 오직 지금 이 순간에만 존재할 뿐, 나에게 허용된 시간 축을 벗어나면 현재의 이 공간에서도 나는 없다.
만일 4차원, 혹은 5차원의 존재가 백년 후의 이 공간을 바라본다면 나는 이 공간에 없을 것이다.
나는 바다의 파도 포말과 같은 존재이다. 순간적으로 파도의 물방울이 되어 바닷가 바위를 철석이지만, 이내 다시 대양의 큰 물결로 돌아간다.
그럼에도 집착하고, 미워하고, 괴로워하는 나는 과연 누구인가?
나는 30년 넘게 이 화두를 걸머쥐고 끙끙대고 있지만 아직도 답을 얻지 못한 채 명상 중에 이 화두를 바라보고 있다.
다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전에는 두려움으로 인간 실존을 바라보고 있었다면, 지금은 평화스러운 마음으로 인간 실존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마음공부가 어느 정도는 되어 있고, 마음의 근육도 어느 정도 키워져 있기 때문이리라. 이것이 명상의 위대한 힘이다.
출처 : 마음건강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