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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7: 12-14
대대로 남자는
여기서는 아브라함 당대에 드러날 교회의 모습이 예시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지상에 드러날 하나님의 교회에 주신 하나님 자신이 정하신 규례입니다.
1. 본문 12절은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입니다.
아브라함의 계대에서 계속되어질 할례의 규례가 명령되고 있습니다.
그 범위가 결코 협소하지 않습니다. 또 지금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받을 시일을 팔일로 규정하고 계십니다. 거기서 보면 이것이 그분의 고대 백성들을 지키려고 의도하신 그런 훈련의 일부였다는 사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세례를 베푸는 면에서 보다 큰 자유가 허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른의 경우 빈부귀천의 구별이 없고, 유아의 경우에 한편 부모가 믿는 경우에 허용되고 있으며 기간도 2년 미만의 경우 모두에게 허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주장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분의 자녀들의 연약함을 참작하시고 그들을 아끼셨으므로 그 날짜에 대하여는 심각하게 논쟁하지 말아야 된다고 합니다.
새로 출생한 자들에게 약간의 상처를 입힌다는 것이 위험이 없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비록 하나님이 그 할례가 해나 상처를 주지 않도록 준비해 두셨겠지만 그분은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자녀들을 향한 그분의 부성애를 입증하시려고 그들의 연약함에 관심을 가지고 계셨다고 말하는 것에는 전혀 모호함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것이 냉혹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날 수에서 영적인 신비를 캐내려고 대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현재의 생활은 우화적으로 칠일에 비유되고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팔 일째 되는 날에 유아들에게 할례를 주게 명령하심으로 우리의 생의 전 과정에서 육체를 억제하는 데에 주력해야 되지만 그 육체가 종말을 고할 때까지는 그것이 완수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제시해 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그 할례의 날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외적인 할례는 패하여지고 그 비유의 진실이 제기되었다는 것입니다.
7 이란 숫자는 현재 생활의 과정을 지적하고 있다는 말은 타당성이 있는 듯합니다. 그러므로 팔 일째 되는 날은 신생(新生)의 시작을 미리 예시해주기 위하여 여호와께서 확정하신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유는 성경에서 전혀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어느 것도 절대로 긍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확실하고 분명한 사실만 주장하는 것으로 만족하여야 합니다.
이 상징에서 하나님께서는 옛 사람의 멸망을 아주 분명하게 선언해 주십니다. 그 분은 사람들이 생명을 얻도록 다시 회복시키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십니다.
2. 본문 13절은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입니다.
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하여 그의 지배하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할례를 주라 하십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에 대한 그분의 특별한 사랑이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전 가족들을 다 포용하신다는 사실에서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공식적으로 노예들은 사람들 축에 끼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종 아브라함에 대한 배려로 그들 노예들까지 그분의 자녀들로 삼아 주시는 것입니다.
이 긍휼에 더 이상 추가될 것은 전혀 없습니다. 여기서는 이미 육체의 교만까지도 박살이 났습니다. 그것은 사람에 차별을 두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자유인이나 종을 막론하고 모두 함께 모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랑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은 한 가지 사실을 그분의 모든 종들에게 법칙으로 정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그 종들의 수하에 있는 모든 자들을 데리고 와서 주인된 그들 자신과 함께 동일한 믿음의 사회를 위하여 노력해야 된다는 점입니다. 그를 선지자로, 왕으로, 제사장으로 여기되 특별히 그를 통해서 증거 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경건한 자들의 모든 가족이 반드시 교회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우리의 경건을 입증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들 각자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면에서 정돈된 가정을 갖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자기 집에서 태어난 자들을 하나님께 헌신하고 드려야 될 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그가 얻게 되는 자들을 모두 하나님께 헌신시켜야 된다는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2)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라는 이 표현의 의미는 이중적인 듯합니다.
즉 하나님이 할례로 표와 담보가 되게 하신 그분의 은혜가 영원할 것이라는 뜻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 표 자체를 항구적으로 준수하게 의도하신 뜻을 지니고 있든지 그 가운데 어느 하나에 속한 듯합니다. 이것의 항구성이 가시적인 이 표에 관련되어야 한다는 점에는 전혀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말에서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 유대인들 가운데서 오늘날까지도 지속되어야 한다고 추론하는 자들은 우리의 판단으로는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고정된 것으로 여겨야 할 공리(公理)로부터 빗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끝이 되시기 때문에 율법의 의식으로 돌려지고 그것들의 항구성은 그리스도가 나타나심과 동시에 종식을 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항구적인 처소였으니 그 사실이 “이는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시132:14) 라고 선언되어 있습니다. 안식일도 잠정적인 것이 아니고 백성들의 항구적인 성화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가 이것들을 종식시키셨다는 사실이 부인될 수가 없습니다. 이와 동일한 방법으로 우리는 할례에 대하여도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유대인들이 이 같은 방법으로 그리스도는 율법을 범했다고 주장하고 나선다면 거기에 대한 해답은 쉽습니다. 즉 율법의 외적인 용도는 그것의 진리를 확립하기 위하여 폐기되었다는 말입니다. 결국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할례는 본질적으로 확증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전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은 재가를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가시적인 표가 변경됨으로 사람들을 혼동시키지 않으려고 이 세상의 개혁이 계속 의중에 계획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상이한 의견을 삽입시키고 있지만 그 세상의 개혁은 다른 방법으로는 점점 시들어버렸을 것들을 더욱 영구적으로 존속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의 용도가 중지되기는 했지만 만약 그리스도가 중재자로 여겨지신다면 그것이 영원히 존속하는 것이나 영구적인 언약은 중단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비록 표는 변경되지만 그리스도께서 중재자로서 그 진리를 확증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외적인 할례가 중단되었다는 사실은 바울의 말들 가운데서도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영적으로 할례를 받았으니 그것은 육신적인 표를 받아서 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세례를 이 할례에다 대치시키고 있습니다(골2:11). 그리고 정말로 세례는 할례를 철회해 버리지 않으면 할례를 계승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다음 장에서 그는 할례자와 무할례자나 차이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등한시되었으며 전혀 풍요하게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할례가 아직까지 유대인들 가운데서 위력을 지니며 시행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오류를 배격할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그 할례가 절대로 폐지될 수 없는 그 민족의 특이한 상징인 것처럼 여깁니다. 우리가 여기서 진정으로 인정하는 사실은 그 할례가 당분간 그들에게 허락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취득하신 자유가 더 잘 알려지기까지에만 국한된 것입니다. 그것이 허용되기는 했지만 그것이 절대로 원래의 위력을 그대로 지탱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각각 상이한 표들로 교회에 들어온다는 것이 애매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의 하나는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긍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가지 표는 그분이 부재하신 것으로 그분을 가리워 버리기 때문입니다.
3. 본문 14절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입니다.
1) 할례에 보다 더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무시한 자들에게 가혹한 형벌을 선언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인자하게 그분의 사랑과 영생에 대하여 담보를 제공해 주셨는데 구태여 무엇 때문에 그것을 무시하고 받기를 거절하는 자들의 태만함을 일깨워 주시려고 그렇게 위협을 추가하고 계십니까?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이 형벌에 대한 선고는 어리석게도 배은망덕하는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배격하거나 경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구절은 그런 경멸적인 행위들이 절대로 형벌을 받지 않고 그냥 지나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오직 멸시하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겠다고 위협하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그들이 팔일 전에 죽는다면 자녀들의 무할례가 그들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추론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순수한 약속이 그들의 구원에 대하여 효력을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표들에 그분 자신의 효능적인 역사(役事)를 국한시키려고 외적인 표들로 이 구원을 그렇게 입증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한 가지 사실을 이유로 제시함으로 이 제목에 대한 모든 논란을 배제하고 있습니다. 그가 부가하고 있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헛되게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언약을 지키고 있는 능력이 제거될 때에는 그 언약이 범해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종족의 구원이 ‘내가 네 자손들에게 하나님이 될 것이며’ 라고 한 표현 속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비록 할례가 하나의 확증으로 첨가되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이 그 말씀에서 그것의 위력과 효력을 박탈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결합시켜 놓으신 것을 사람의 능력으로는 절대로 와해시킬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 말씀 자체를 배척하든지 그 자신에게서 그 말씀 가운데 제공되어진 혜택을 박탈시키지 않고는 그 표를 멸시하거나 무시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그렇게 멸시한 자들에게 그런 가혹한 형벌을 내리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유아들이 죽음으로 구원의 표들을 박탈할 경우에는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격하시키는 일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구해 주셨습니다. 똑같은 원리가 오늘날에도 세례에 적용되고 있습니다.
세례를 무시하고 순수한 약속으로만 만족하는 척하면서 가장하는 자들이 그들 속에서 도시리고 있는 만큼 그리스도의 보혈을 짓밟고 있는 것입니다. 또 그런 자는 자녀들을 씻어주도록 그 보혈이 흘러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형벌은 은혜를 결핍하고 그 표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따르게 됩니다. 그 표와 말씀에 대한 불경건한 단절이나 또는 오히려 그것들을 해치는 것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범해지기 때문입니다. 부모들이 소홀히 하기도 전에 갑작스런 죽음이 임하여 도저히 어린 아이에게 세례를 줄 겨를도 없이 그 아이들을 멸망에 넘겨주는 것은 미신에서 기원되고 있는 잔인성입니다.
그러나 약속이 그런 아이들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은 조금도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약속을 확증시키려고 첨가된 그 상징이 정말로 그 약속의 위력을 약화시키리라는 것보다 더 애매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더 모호한 주장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세례는 구원에 필요한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는 일반적인 의견은 온건하게 적용되어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나 성령의 능력을 외적인 상징들에 결부시켜서 하나님을 대항하여 거짓된 비난을 초래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2)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라는 말씀을 더 상고하십시다.
하나님의 언약은 우리가 믿음으로 그분이 약속하신 것을 포용해 들일 때 인가를 받게됩니다. 누가 반대하기를 유아들은 지금까지 이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이런 잘못에 대한 죄가 없다고 한다면 그것에 대하여 우리는 이 하나님의 선언을 마치 그분이 육아들이 그들의 잘못으로 처벌을 받을 수가 있는 것으로 주장하고 계신 것처럼 너무 긴박하게 압박을 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대형(對型)을 관찰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이 아기의 아버지의 인격 안에서 그 아기를 자녀로 삼으시는 것과 같이 그 아버지가 그런 혜택을 거절할 때는 그 아기는 교회에서 잘리워졌다고 말하게 되는 사실입니다. 그 표현의 뜻은 곧 그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들로부터 제외될 것이라는 표현입니다.
무할례로 남아있는 자들은 유대인이 되지 못하고 그 백성의 인구조사에 포함되지 못할 것이라는 몇몇 사람들의 설명은 너무도 냉혹한 표현입니다. 우리는 좀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정말로 그들을 그분의 백성으로 인정하시지 않으실 것이며 그들은 양자의 표나 표지를 지니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말해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