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 염의 ( 1851~1919 ) 、 방 심 ( 1853~1931 ) 、다 유 ( 1872~1917 ) 、 유 등 도 ( 1877~1931 ) 、 관계 및 난징 등 전염병이 불교 문헌을 고아원. 한 무리의 수해 복구
출처:서령경매 소스: EK 이페어케이 플러스 https://ownermarket.net/nplanet/profile/40
도록호. : 2711
견적. RMB : 20,000-40,000
(수수료를 함유한) 호가 RMB : 46,000
2711
오 염의 배우다 덩 ( 1851~1919 ) 、 방 심 ( 1853~1931 ) 、과 향기로운 왕 ( 1868~1939 ) 、다 유 ( 1872~1917 ) 、 종 린'과 煃 천 ( 1874~1947 ) 、 유 등 도 ( 1877~1931 ) 、 위 집 때문 화 ( 1881~1946 ) 관계 및 난징 등 전염병이 불교 문헌을 고아원. 한 무리의 수해 복구
6프레임과 렌즈에서 두번째 편지지 봉투를 갖고 9쪽이 2개)다.
일부 문. 한가하게 알아보고 있다. 세모의 선물을 읊: 1밤, 가난한 클렌징을 감당하지 마라.·. 도움을 받게 된다.사람은 이미 멀리, 보슈 등과 같다 인수세대 가 남에게 금액을 이미 낡고 허물어지다 창피해 하다 가……나는 누군가 빌어먹다 새로운 인사를 나누고 우선 솜 저고리를 부르다 울다 잠을 감싸고 있다. 안정되게롱 패딩은. 방금 녹화하고 있다. 찬 감독 거사동쪽, 경오 옛날 작품을 가평. 배시는 위탁 인쇄되어 날인하다(흰 풀을 썩히)(왕)효. 인 백 煃
2.:선생님은 한대는 가르치기도 해 어제 호수 정자를 맡아 상을 모욕한 봉독을 빌려 당신의 지시를 구체적으로 해. 송으로 부끄럽다그러므로, 전자는 상하이에 가서 급히 등불 아래에서 제외하고 구 문을 도끼도 반. 나는 것을 어려워하어른이 말을 듣는 '옹 기',《효경》이름 저작이 구름이 표식에 대해 전문적으로, 언제, 어디가 기. 생각만 하다 궐몽노속편은 닝에서 조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촬영을 마친 후, 위탁 판매처를 알려주시기 바랍니다.자유원은 이 시기에 발전하여, 스스로 군에 맡기고 처리하였다.도리가 맞으면, 연장자가 지키는 힘이다.또한 그 절반에 지나지 않는다. 말톤백 선생의 《삼경의고》는 이미 작년에 있었다.베이징에 있는 지인들에게 부탁하여 구입한 것은, 성심성의껏 공세도 인심의 작품이다.추석 후에, 연장자가 상해에서 오르면 된다.행여 알려 주시기를 바라옵고 가르침을 받들어 가르침을 받기를 바랍니다.경솔하게 답장하여, 순리에 따르다.도유 재배, 5월 삭석.
3. 강장 선생은 같은 해에 가르침을 받지 못한 지 오래되어 치체를 흠모하였다.내일 부처님오신날, 가자와 사제 등이 모여 돈 13원을 방생하는데, 삼지강사 승려에게 산 물건을 전달하여 못에 넣어 선한 인연을 맺게 한 것이 기도이다.도시와 농촌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사람을 보내기가 쉽지 않다. 또한 큰 자비심으로 세상으로부터 해탈한다면 중생은 복을 받고 이익을 얻을 수 없다.동생은 소우환자가 끊이지 않아 법회가 원만할 때함께 기뻐하지 못해 매우 송구스럽습니다.해가 거듭되어 다행히 완쾌되니, 각 고을에도 점차 단비가 내려 돌재해가 없어질 것이다.담에 다시 찾아뵙고 평안하시기를 기원합니다.나이 어린 동생 본술돈수, 사월초칠일밤. 좌충우돌.
설명: 광서 24년 진사 위가화 상항.
방주(方主)·오학렴(吳學、)·등방술(邦述述)·심동방(沈同方)·왕효진(王孝、)·유종림(劉鍾林)·진도유(陳遗遺) 등 청나라 말 민초 문헌자료로, 남경(南京) 자유원(幼,院)·장유숙(章叔)·해주(海州) 진재(灾)·미주(,) 출사(此)·관(诞)·불탄신일 방생제(佛放)·소주역(瘟疫横横) 등이 언급되고 있다.멋쟁이), 인광법사, 황백우공화이시 등은 강소 해주와 남경 삼지강 법운사에까지 이르렀다.기다리다.
진도유가 1929년에 쓴 서찰은 남경불교자유원에서 남경사회국을 거쳐 입안된 이후 지속적으로 발전해 왔으며, 풍후(煦、)·위가화(家家華)·마치창(馬昶著)이 간행·매입한 이사를 저술하여 지은 것이다.자유원은 풍후(煦、)·임심백(任心白)·위가화(家家華) 등이 설립했다.천타오유는 당시 장쑤성장이었는데, 편지에는 위가화의 이 원 공헌을 인정하면서, 풍후 작품의 출판 간행과 마케창 《삼경의고》에 대해 언급했는데, 대찬마씨 저서이다.작. 등방술신찰불은 집에까지 이야기하였다.부처님 오신 날에 인위적으로 방사하여 절에 있는 스님을 모시고 생물을 구입하다.또 "소우환자가 몰려 법회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적었다.전염병은 19이어야 한다26년 쑤저우에서 발생한 고후중레기, 콜레라 역병.삼지강사는 남경의 삼지강 법운사(法雲寺)에 해당한다.위가화는 1928년 임심백과 남경불교 자유원의 인연을 서술한 시를 지었다.위 두 사람과 풍후, 인광법사 등을 거쳐 자유원을 설립했다.
유종림은 강소 해주 등지의 구휼과 벼슬길에서의 깨달음, 미주 등에서의 출사에 대한 견해, '유심위선(有心爲善)이 있다'는 인식 등을 편지로 썼다.방주모필 편찰은 절친한 친구 장유숙의 상을 언급한다.운수위정 《징재일기》에 장씨의 상을 실은 것은 1905년 11월 3일로 이신시기가 맞아떨어졌다.오학렴은 현금 인출 등을 둘러싸고 대립했다.
또 다른 청말 진사 심동방(沈同书)은 자작시를 써서 민국(民國)에 삼은 후, 유로(遺老)의 정서를 토로하였다.그리고 왕효열의 시로 된 렌즈입니다.
FANG ZHU, WU XUELIAN, DENG BANGSHU, ETC. AUTOGRAPH LETTER SIGNED TO WEI JIAHUA ABOUT NANJING BUDDHIST PROTECTORY, PLAQUE RELIEF, ETC.
Two pieces of calligraphy and nine pages of letter
Note: Dedicated to Wei Jiahua.
84×19.5cm 38×33cm 24×16.5cm 23×7.5cm 29.5×20.5cm 23×12.5cm×3 24.5×15.5cm 30.5×21cm×2
RMB: 20,000-40,000
저자 소개: 1. 왕효열(王孝(, 1874~1947), 자는 동배(東,), 호는 우융(沤,), 장닝(江寧, 지금의 남경) 사람이다.청철에 사람을 거인하다. 욕심이 적고 시와 서화, 전각으로 스스로 즐기다.저술이 매우 많다.
2. 심동방(沈同(, 1872~1917), 본명은 지현(志賢), 자는 유경(卿卿), 호는 월석(石石), 호는 이은(隐隐)이다.강소성 무진인. 광서갑오(1894) 진사. 개서길사. 당현 지현에 임명되어 편제수 직함을 내렸다.
3. 진도유(陳遗遺, 1881~1946), 본명은 요(,), 자는 도일(道一), 검홍(虹,), 상해 금산(金山) 사람이다.남사의 사우는 최초의 17인 중의 하나이다.일본 와세다대학에 유학하여 1905년 동맹회에 들어갔다.1925년 12월 장쑤(江省)성 성장을 지냈다.나중에 상해에서 글자를 팔아서 자급하다.서예에 능하여 육조의 비판을 드나들었고, 만년에는 장초에 힘썼다.
4. 방주(方(, 1851~1919), 자는 자도(子,), 호는 검화(华華), 호는 반타맹수(陀盲叟), 화서적자(華赤赤子)이다.안후이성(安人省) 퉁청(83城) 출신. 광서구(光九九, 1883)년에 진사(進士)하여 벼슬이 호부랑(中部郞)에 이르렀고, 지부랑(支部郞)을 거쳐 만년에저서로는 『화서적자문집』, 『주역관아』 등이 있다.
5. 유종림(劉鍾(, 1877~1931)은 자는 숙장(璋,), 장쑤(江人) 양저우(5.州)10여 세에 동자시험에 응시한 후 수재에 들어 곡식을 채웠다.풍후의 문하생이었다. 1900년 경자의 난 때, 자희, 광서는 서쪽으로 도망하고 관중은 대기근으로 풍후는 스스로 은 2만 위안을 기부하였고, 유종림은 동인을 불러 모아 18만 위안을 모금하고, 반주, 장무, 흥평의 삼주현으로 가서 진휼하였다.흥평현에서 2,000여 개의 우물을 파서, 그 지역의 거주지로 삼았다.민모의 항구적 복지. "화양의"'진휼회'가 결성된 후, 유종림은 풍후의 유능한 조력자, 주책이 되었다.협력자를 모아 구제금을 마련하면, 재해가 있으면 반드시 구휼하고, 구휼이 널리 퍼져 있다.예하(하북), 산둥 성허난·안후이·후난·저장 각 성.
6. 자는 감천(泉,), 호는 검은(隐,), 안후이 루장(江江) 사람이다.청광서 17(1891)년 거인.광서(光通) 신묘(,议)는 통의대부(通議大夫)에 임명되었고, 광서(光、)·선통(宣統) 연간에 회양해병비도(扬海海兵備道) 겸 안찰사(察使使)를 지냈으며, 광서(光三十) 34(1908)년에는 회안1917년 장훈(張复)이 복위할 때 도지부 좌참의(支议議)에 임명되었다.회군의 장수 오찬성의 다섯째 아들,이홍장 6남 이소경 장녀에게 장가들다처가 되고 정효서의 처형이 된다.1879년 정효서는 오찬에게 장가들었다성녀. 시를 전하다.
7. 등방술(邦述述, 1868~1939), 자는 정암(正,), 호는 효선(孝先), 악몽노인(梦夢老人), 군벽옹(群翁,), 실명은 군벽루(群楼、), 한척산방(寒山山房), 강녕(江寧, 지금의 남경) 사람이다.등가 신자. 광서 25년에 진사하여 한림에 임하다.장서가 풍부하고 시문이 풍부하여 사명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또 공서로서 옥저전에도 능하다.
위 항 소개: 임심백(任心白, 1878~1948)·별서사원재주(別署四願齋主)·절강성(绍江) 소흥(兴興) 사람이다.어린 시절 관아에서 시역을 하며 근면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독학으로 인재를 이루었다.이후 상해 상무인서관에 입사하여 문과를 정리하였다.인광법사와 진달화상에게 불학을 배웠으며, 풍후(煦、)·왕일정(王一亭) 등과 함께 남경불교자유원(南京佛敎慈院院)을 설립하고 원장을 지냈다.『정토진량』, 『역대 명가집서』 등이 있다.
方 铸(1851~1919)、吴学廉(1853~1931)、邓邦述(1868~1939)、沈同芳(1872~1917)、王孝煃(1874~1947)、刘钟琳(1877~1931)、陈陶遗(1881~1946)等 致魏家骅有关南京佛教慈幼院及瘟疫赈灾等文献一批
图录号: 2711
估价RMB: 20,000-40,000
成交价RMB: 46,000(含佣金)
2711
方 铸(1851~1919)、吴学廉(1853~1931)、邓邦述(1868~1939)、沈同芳(1872~1917)、王孝煃(1874~1947)、刘钟琳(1877~1931)、陈陶遗(1881~1946)等 致魏家骅有关南京佛教慈幼院及瘟疫赈灾等文献一批
镜片二帧、信笺六通九页(带信封二枚)
部分识文:1. 馈岁闲咏。穷担岁晚莫,洁饥寒济众。博施及人已,远仁寿同登。謌以代额。破落人家早向隅,羞人答答乞招呼……有人施我新棉袄,先裹啼儿叫稳眠。棉衣。录以刚长居士博粲。庚午嘉平,东培旧作。钤印:寄沤诗草(白) 王孝煃印(白)
2. 刚长先生大教:一昨自亭湖还,奉读手示,辱承奖借,益增惭悚。前者匆匆赴沪,故于灯下除具,且弄斧班门,不免拘束也。闻耆翁言长者有《孝经》著述诗刊,不识名称云何,何时剞劂,极所念念。梦老续集闻在宁雕版,杀青之后,尚希示以寄售之所。慈幼院于此时期发展,自是任君办理得法,然长者维护之力亦居其半也。马通伯先生之《三经谊诂》已于去年托旅京友人购得,诚为功世道人心之作。中秋后,长者如有沪上之行,盼赐示,或可图趋承教益也。率复,顺承道履。陶遗再拜,五月朔夕。
3. 刚长先生同年有道:久未趋教,渴仰綦切。明日佛诞,家慈及舍弟等共集放生钱十三园,属呈台端,转交三汊河寺僧酌买活物,放入池中,以结善缘,是所拜祷。缘城乡距离太远,遣人送往,殊非易易,且仗大慈悲心为之解脱世纲,则众生获福益无尽也。弟因苏寓病人络绎,致法会圆满时未能随喜,殊深歉疚。日来幸次第告痊,各邑亦渐得甘霖,疫疠或可消除矣。容再诣谭,敬颂道安。年小弟邦述顿首,四月初七夜。左冲。
说明:光绪二十四年进士魏家骅上款。
此为方铸、吴学廉、邓邦述、沈同芳、王孝煃、刘钟琳、陈陶遗等清末民初文献资料一批,关乎南京慈幼院,章幼叔逝世,江苏海州赈灾,出使美洲,为官感悟,佛诞日放生祭祀,苏州瘟疫横行等等,提及慈禧慈安两宫太后、冯煦(蒿庵)、马其昶、李锡纯(耆翁)、张人骏(安帅)、端方(午帅)、印光法师、黄伯雨、龚怀西等人,又及江苏海州、南京三汊河法云寺等地。
陈陶遗1929年所作书札围绕南京佛教慈幼院经南京社会局立案后持续发展及冯煦、魏家骅、马其昶著述刊行和购买二事而作。慈幼院由冯煦、任心白、魏家骅等创办。陈陶遗为时任江苏省长,在信中肯定魏家骅对该院的贡献,另谈到冯煦作品的出版发行以及马其昶《三经谊诂》,大赞马氏著作。邓邦述信札佛谈到家人为在佛诞日放生,托寺僧购买生物。另写道“因苏寓病人络绎”,未能参加法会。所指瘟疫应为1926年发在苏州的烂喉痧、霍乱瘟疫。所及三汊河寺当系南京三汊河法云寺。魏家骅1928年书自作诗,叙述任心白与南京佛教慈幼院之因缘。历数任魏二人和冯煦、印光法师等创办慈幼院经过。
刘钟琳手书信札紧扣江苏海州等地赈灾,仕途感悟,于出使美洲等事之看法,以及对“有心为善皆为缠缚”观点的认识等。方铸毛笔信札提及挚友章幼叔之丧。恽毓鼎《澄斋日记》载章氏之丧于1905年十一月初三,二信时间吻合。吴学廉一信则围绕提款等事而作。
另有清末进士沈同芳书自作诗,当作于民国后,抒发遗老情怀。以及王孝煃诗作镜片一帧。
FANG ZHU, WU XUELIAN, DENG BANGSHU, ETC. AUTOGRAPH LETTER SIGNED TO WEI JIAHUA ABOUT NANJING BUDDHIST PROTECTORY, PLAQUE RELIEF, ETC.
Two pieces of calligraphy and nine pages of letter
Note: Dedicated to Wei Jiahua.
84×19.5cm 38×33cm 24×16.5cm 23×7.5cm 29.5×20.5cm 23×12.5cm×3 24.5×15.5cm 30.5×21cm×2
RMB: 20,000-40,000
作者简介:1. 王孝煃(1874~1947),字东培,号寄沤,江宁(今南京)人。清季举人。淡泊寡欲,以诗词、书画、篆刻自娱。著述甚富。
2. 沈同芳(1872~1917),原名志贤,字幼卿,号越石,一号蠡隐。江苏武进人。光绪甲午(1894)进士,改庶吉士,授唐县知县,赐编修衔。
3. 陈陶遗(1881~1946),原名瑶,字道一、剑虹,上海金山人。南社社友,为最早十七人之一。留学日本早稻田大学,1905年入同盟会。1925年12月,曾任江苏省省长。后在上海卖字自给。精书法,出入六朝碑版,晚年致力章草。
4. 方铸(1851~1919),字子陶,号剑华,又号盘陀盲叟、华胥赤子。安徽省桐城人。光绪九(1883)年进士,官至户部郎中,度支部郎,晚年研究佛学。著有《华胥赤子文集》《周易观我》等。
5. 刘钟琳(1877~1931),字叔璋,江苏扬州人。十余岁应童子试,中秀才,继补廪生。是冯煦之门生。1900年庚子之乱时,慈禧、光绪西逃,关中大饥荒,冯煦自捐银两万,刘钟琳邀集同仁募捐十八万,前往邠州、长武、兴平三州县放赈。在兴平县开凿二千余口井,为当地居民谋永久福利。“华洋义赈会”成立后,刘钟琳更成为冯煦的得力助手、筹集合作人,筹集赈济款,有灾必赈,施赈遍及直隶(河北)、山东、河南、安徽、湖南、浙江各省。
6. 吴学廉(1853~1931),字鉴泉,号剑隐,安徽庐江人。清光绪十七(1891)年举人。光绪辛卯授通议大夫,光绪、宣统年间任淮扬海兵备道兼按察使衔,光绪三十四(1908)年兼任淮安关监督。1917年张勋复辟时曾被任命为度支部左参议。淮军将领吴赞诚第五子,娶李鸿章六弟李昭庆长女为妻,又为郑孝胥内兄。1879年郑孝胥娶吴赞诚女儿。有诗传世。
7. 邓邦述(1868~1939),字正闇,号孝先、沤梦老人、群碧翁,室名群碧楼、寒瘦山房,江宁(今南京)人。邓嘉慎子。光绪二十五年进士,授翰林。藏书宏富。工诗文,以词名于世。又工书,擅玉箸篆。
上款简介:任心白(1878~1948),别署四愿斋主,浙江绍兴人。童年在衙署中充侍役,勤敏好学,自学成才。后入上海商务印书馆工作,整理文契。依止印光法师和真达和尚学佛,曾与冯煦、王一亭等人创办南京佛教慈幼院并担任院长。有《净土津梁》、《历代名人家书》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