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47
1월26일[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연중 제3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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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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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rTlQEh-6_bU
[예수회 김민회 시몬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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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양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까?>
베드로 사도와 함께 초세기 교회의 공동 수장 역할을 하셨던 분이 바오로 사도였습니다. 두 분 사이에는 일종의 업무분담이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께서 주로 유다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선포하신 반면, 바오로 사도는 주로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이곳저곳 유랑선교를 하시던 바오로 사도는 당신이 개척하신 교회 책임자로 제자이자 협조자들을 선택하여 임명하셨는데, 그들이 곧 티모테오와 티토 주교였습니다.
교회 최고책임자요 일종의 공동 교황이셨던 바오로 사도께서 협조자요 주교였던 티모테오와 티토에게 보낸 서한의 내용은 얼마나 형제적인지 얼마나 절절한지, 접할 때마다 큰 감동의 물결이 밀려옵니다.
높은 사람이라고 어깨에 힘주고, 무게 잡고, 낮은 사람이라고 어떤 사람처럼 95도로 고개 숙여 인사하고... 절대 그런 법이 단1도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와 티모테오와 티토 주교 사이의 그 친밀하고 따뜻한 관계는 오늘 우리가 맺는 관계 맺음 방식에 진지5한 성찰을 하도록 초대합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 주교와 사제 사이, 원장과 평 수도자 사이, 부모와 자녀 사이가 어떠해야 하는지? 아주 좋은 모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사용한 표현들, 문장 하나하나를 보십시오. 끈끈한 동지애와 형제애, 그리고 깊은 신앙과 겸손의 덕이 오는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무엇보다도 바오로 사도의 서한에는 제자들을 향한 극진한 사랑과 따뜻한 가족 정신이 충만합니다. 그들을 향해 아들이라는 칭호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냥 아들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바오로, 사랑하는 아들 티모테오에게 인사합니다.”
“나 바오로가 같은 믿음에 따라 나의 착실한 아들이 된 티토에게 인사합니다.”
그리고 착한 목자 바오로 사도는 제자이자 협조자인 주교들을 향해 간절히 기도하던 스승이었습니다. 이 시대 우리 목자들에게도 꼭 필요한 노력입니다. 우리는 틈만 나면 성찰에 성찰을 거듭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양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까?
“나는 밤낮으로 기도할 때마다 끊임없이 그대를 생각하면서, 내가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깨끗한 양심으로 섬기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는 그대의 눈물을 생각하면서 그대를 다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기쁨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주님으로 인해 받게 된 끝도 없는 박해와 수모, 셀 수도 없이 겪은 죽을 고비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중심으로 한 가족애로 똘똘 뭉쳐 서로 격려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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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faAj9pfHe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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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전하면 어째서 죄에서도 벗어날까?>
오늘은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주교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편지를 쓴 분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많이 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할 때 내용입니다.
특별히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라는 말씀은 큰 울림을 줍니다. “수확할 것이 많다. 근데 일꾼은 적다. 너는 뭐하고 있니? 빨리 일해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시는 일꾼으로 살아가는 것만이 죄에서도 벗어나게 되는 유일한 길임을 묵상해보겠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과 죄에서 벗어나는 것, 에덴동산에서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것과 선악과를 먹지 않게 되는 것과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주님의 일을 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낀다면 그래도 선악과가 탐스러워 보였을까요? 어쩌면 주님의 일꾼이 되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지 못했기에 뱀의 유혹에 넘어간 것은 아닐까요?
죄는 행복해 보이니 짓게 됩니다. 만약 남편이 뭐 외도를 했다. 그래서 또 여자분이 굉장히 힘들어서 암에 걸리셔서 돌아가시는 분이 계셔요. 그런 분을 볼 때는 남자도 문제가 있지만 암 걸리는 나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남편이 그렇게 바람피우는 일이 행복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내가 더 고통스러울 수 있거든요.
어떤 분은 남편이 그렇게 하는 것이 처음에는 아주 미워 보였다가 나중에는 성체조배를 1년 동안 하고 났더니, 남편이 불쌍해 보이더래요. 죄짓는 게 더 이상 행복으로 보이지 않게 만드신 거죠.
우리의 선택은 항상 뭐가 더 행복인가에 대한 우리의 시선에 달려있습니다. 뱀이라고 하는 것은 내 안에서 죄를 더 행복하게 보이게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를 유혹하지 마! 나는 죄를 끊을래. 나는 유혹을 안 받을래. 나는 사탄에게서 벗어날래.” 하더라도 더 큰 행복으로 보이는 무언가를 찾지 못하면 절대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더 큰 기쁜 맛이 있어야 합니다.
초신자의 시선이라고 하는 유튜브 채널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자매가 심한 우울증에 걸렸어요. 엄마랑 둘이 사는데 뭔가 대인관계가 안 되는 거죠. 친구들한테 왕따당하는 기분을 느끼고 점점 더 학교에 안 나가고 싶어지고 집에만 머물고 성적 떨어지고 대학도 들어갈 수 없게 되고 심지어 혼자 계신 어머니가 암에 걸리신 거예요. 그러니까 고통을 더 이상 감내를 할 수 없는 거죠.
개신교에 다니긴 했는데 기도들 했대요. 울기도 하고. 그런데 이 현실로 돌아오면 또 똑같은 거예요. 내가 정말 외로울 때 내 그 불안함과 외로움을 위로해줄 수 있는 유일한 거는 내 나 자신밖에 없거든요. 그러니까 나 자신에게 정말 고마운 거죠. 고마우면 나 자신의 말을 따라주게 되는데 자아는 뱀이잖아요. 그러니까 뱀이 원하는 게 뭐겠어요. 나의 멸망인 거죠. 자기처럼 땅으로 끌어 내리기를 원하는 거죠. 안에서 자꾸 어떤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냐면 “죽어. 살면 뭐 해?”
정말 죽는 게 전혀 두렵지 않았대요. 그만큼 삶이 힘들었던 거죠. 근데 이게 뭐예요? 유혹인 거잖아요. 뛰어내리는 게 더 맛있어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바닥이 뱀이 우글거리는 땅이 쑥 꺼지면서 지옥이 보이는 거죠. 그냥 바닥이었으면 바로 뛰어내렸을 텐데 죽음이 끝이 아닌 영원한 고통의 시작임을 보고서는 이 지상이 다시 천국으로 느껴졌대요. 알고 봤더니 어머니가 딸을 위해 매일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딸은 이제 이전의 자신이 아니라 남을 구하려는 어머니와 같은 삶이 더 큰 행복임을 볼 수 있게 되었고 그렇게 살아간다고 합니다.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방법은 죄가 덜 행복하게 보이게 만들고 사실은 더 고통스럽게 보이게 만드는 행복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얻는 평화와 행복이 훨씬 크게 보이게 만드는 것이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게 하는 거죠.
내가 그분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지 못하면 그 행복도 맛볼 수 없고 그러면 그 행복을 잃게 만드는 죄의 고통도 제대로 볼 수 없게 됩니다. 죄를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그 죄를 고통 중의 고통으로 느끼게 만드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 일이란 나에게 은혜를 주신 분의 밭에서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추수꾼이 되는 일입니다.
이소라 씨하고 얼마 전에 신동엽 씨하고 23년 만에 만났습니다. 이소라 씨가 유튜브를 하나 개설을 한 거죠. 전에 한 6~7년 사귀었잖아요. 지금 신동엽 씨는 결혼도 했고 애들도 있는데, 지금 이소라 씨가 어떤 유혹의 뭐 대상이 될 수도 있는 거죠. 그런데 지금은 이전 이야기들을 그냥 재미있게 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신동엽 씨 나름대로 해야 할 일 안에서 상대가 유혹의 대상이 아닌 일 안에 속한 대상들입니다.
주인의 밭에서 추수할 곡물에 마음을 빼앗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것들이 유혹이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추수하여 주인을 기쁘게 할 대상으로 보이게 됩니다. 주님의 일꾼이 되면 이 세상 것들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일거리이지 유혹 거리로 보이지 않게 되어 죄도 안 짓고 좋은 일을 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려면 주님께서 시키신 일을 하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 될 수 있을 만큼 주님을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 죄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모든 영혼은 이제 추수해야 할 곡식들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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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13년 11월 24일 교황권고 ‘복음의 기쁨’을 발표하였습니다. 복음의 기쁨은 현대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등불’과 같습니다. 교황님은 복음의 기쁨에서 ‘첫걸음’이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그 첫걸음의 시작은 창세기 12장의 ‘아브라함’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정든 고향과 친족을 떠나 새로운 곳을 향해 출발하였습니다. 이 첫걸음은 이웃을 향해서 내 딛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가장 헐벗고, 가장 굶주리고, 가장 아픈 이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이웃을 향해 내딛는 첫걸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기 때문입니다. 첫걸음은 공동체를 향해서 내딛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나의 형제요, 어머니냐?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모두 나의 형제요, 어머니다.” 율법학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이의 이웃이 되어주었느냐?” 율법학자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강도당한 이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공동체를 향해서 내딛는 첫걸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는 인간을 넘어 함께 살아가야 할 모든 생명, 어머니인 지구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2024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도 주님을 향해, 이웃을 향해, 공동체를 향해 첫걸음을 힘차게 내딛으면 좋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우리가 내딛는 첫걸음에 몇 가지 원칙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첫 번째는 ‘시간은 공간보다 위대하다.’입니다. 공간에 대한 소유가 시간과 전진에 대한 관심을 압도할 때 비극이 시작됩니다. 공간에 대한 소유가 시간과 전진에 대한 관심을 압도할 때 전쟁과 폭력이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창고에 물건을 가득 쌓아놓고 기뻐하는 부자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다고 하셨습니다. 소유에 집착하는 부자가 하늘나라에게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무릇 종교의 가르침은 공간보다 시간을 우선시 합니다. 부처님은 생로병사의 고통 중에 있는 중생들에게 집착을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욕망을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해탈’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공간과 소유가 차지할 자리가 없습니다. 공자도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때’가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공자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섰으며, 마흔 살에 미혹되지 않았고, 쉰 살에 천명을 알았으며, 예순 살에 귀가 순했고, 일흔 살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랐지만 법도에 넘지 않았다.” 공자의 이 말로부터, 15세를 지학(志學), 30세를 이립(而立), 40세를 불혹(不惑), 50세를 지천명(知天命), 60세를 이순(耳順), 70세를 종심(從心)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는 모두 시간이 공간보다 강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2024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공간에 대한 집착보다 시간의 가치를 먼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는 ‘실재가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요한 사도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백번 묻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낮다고 합니다. 백번 보는 것보다 한번 행하는 것이 더 낮다고 합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참된 양심이 아닙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자기 안위만을 신경 쓰고, 폐쇄적이고 건강하지 못한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 받고 더럽혀진 교회를 저는 더 좋아합니다. 저는 중심이 되려고 노심초사 하다가 집착과 절차의 거미줄에 갇혀버리고 마는 교회를 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갈 수 있다.” 2024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이 땅에서 먼저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곳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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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0,1-9: 추구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티모테오는 사도 바오로에게는 가장 사랑하는 제자였다. 아마 티모테오는 바오로 사도의 첫 선교여행 중에 개종한 것 같다. 티모테오는 바오로와 같이 두 번째 여행과 세 번째 여행을 함께 하였다. 바오로 사도는 그에게 여러 상황에서 여러 가지 일을 맡겼다. 마케도니아의 테살로니카와 코린토의 공동체들을 맡겼다. 사도는 그에게 신약에 정경이 된 적어도 두 서간을 남겼다. 티모테오는 바오로 사도가 첫 번 감옥에 있는 동안 가까이 있었고 그 후에 에페소에서 주교직을 행하였다. 감옥에 갇힌 바오로는 두 번째로 로마의 가는 길에 동행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바오로 사도의 또 다른 협력자인 티토는 이방인 가정의 출신이었다. 사도는 그도 사도의 첫 여행 중에 개종시킨 것으로 보인다. 티토는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예루살렘까지 동행하였다. 티토는 코린토와 사도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하였다. 바오로가 남긴 서간에서 이미 크레타의 사목자로 나타난다. 성 바오로는 그에게 간곡한 부탁을 하면서 에피로에 있는 니코뽈리와 일치하라고 적고 있다. 그는 달마치아에서 특별한 모습으로 존경을 받았을 것이다.
오늘 복음에 보면 주님께서는 일흔두 제자를 뽑아 둘씩 짝을 이루어 당신에 앞서 보내셨다. 왜 그랬을까? 이 두 사람은 이리 같은 세상에 은총이 되도록 보내신 것이다. 두 제자는 그들 가운데 주님을 모시고 간 것이다. 사랑으로 모신 하느님께서 그들을 지켜주실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은총이 되게 하시려고 둘씩 짝을 지어 보내신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자기 일에 충실해야지 사소한 일에 관심과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4절)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현세적인 어떤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복음의 전파만을 위하여 주님께 의지하며 헌신하는 것임을 예수님께서는 가르쳐 주신다. 그런데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2절) 분부하신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 똑같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어떠한 일꾼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 여기서 말하는 일꾼은 누구를 위해 일하는 것이며, 무엇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일까? 어느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서로의 축복과 구원을 위해 일할 사람이고, 그런 일꾼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며 현세적인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 전파되도록 일해야 한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는 사업이다. 이 구원사업을 위해, 우리 가운데서, 우리 공동체 안에서 더 많은 훌륭한 일꾼이 나오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 일꾼들을 위해, 또한 더 많은 일꾼이 나오도록 미래의 일꾼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우리 가운데서 배출해야 한다. 우리 자신부터 먼저 투신하면서 현재와 미래의 일꾼들을 위해 기도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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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무소유’를 요구하십니다. 길을 떠나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들까지도 지니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제자들은 이미 가진 것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것은 공생활 가운데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제자들이 앞으로 하게 될 모든 일 안에서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님께서는 ‘성령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가지지 마라.’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를 가지고 있으면 우리 마음은 그 하나를 향하게 됩니다. 그러나 두 개, 세 개, …… 가진 것이 점점 늘어나면, 우리 마음도 갈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명확합니다.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성령 하느님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복잡한 마음, 갈라진 마음, 갈등을 겪고 있는 마음 안에 놓여 있다면, 여러분의 마음이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나는 그대에게 상기시킵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이미 세례와 견진 성사를 통하여 티모테오처럼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께서 반드시 여러분과 함께 계심을 믿으십시오. 성령의 인도와 함께 가족과 이웃들에게 평화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서 보내신 일꾼이 되는 오늘 하루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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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생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0,2-9)
이 말씀은, 표현되어 있는 대로 읽으면, 복음을 전하러 가는 사도들과 선교사들이 지켜야 할 ‘한시적인 실천 지침’인데, 넓은 뜻으로 읽으면, 신앙인들이 평생 지켜야 할 ‘삶의 지침’입니다.
1)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이 말씀은, 심판의 날이 다가오는데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서 구원받을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적다고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입니다. ‘일꾼’이라는 말을, 하느님과 예수님을 위해서 일하는 일꾼으로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 말은, 넓은 뜻으로 ‘충실한 신앙인’을 뜻하는 말입니다. 모든 신앙인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자녀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일을 도와드리는 것은 당연히 할 일입니다. 그런 뜻에서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사실 모든 신앙인은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일하는 일꾼입니다. <신앙인이 하느님을 위해서 하는 일은, 실제로는 신앙인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일하고 나서 보상이나 대가를 요구할 것도 없고, 생색낼 것도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우리는 흔히 이 말씀을 “성소자들을 더 많이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로 이해하지만,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사고 청하여라.”입니다. 조금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면, “각자 자기 자신이 충실한 신앙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사고 청하여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나 혼자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생활이 아닙니다. 하느님(예수님)께서 도와주셔야만 하는 생활입니다. 어렵든지 쉽든지 간에, 힘든 상황이든지 편안한 상황이든지 간에, 신앙인은 늘 주님의 도움과 보호 안에서 사는 사람이고, 그 도움과 보호 덕분에 하느님 나라를 향한 여행길을 끝까지 가는 사람입니다. <기도문마다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우리 교회의 모든 기도문에는 전부 다 그런 뜻이 들어 있습니다.>
3)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이 세상에서의 신앙 여정은 이리 떼 가운데에 놓여 있는 양들 같은 처지로 사는 것과 같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신앙생활이 위험하고 힘들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이리 떼에서 양들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뜻이 들어 있는 말씀입니다. 이리 떼를 양들로 변화시키려면, 양들은 더욱 양답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을 신앙인으로 변화시키려면, 신앙인들이 더욱더 신앙인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4)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이 말씀은 물질에 대한 집착과 탐욕과 걱정을 버리라는 가르침입니다. 집착과 탐욕은 죄이고, 걱정은 믿음 없는 태도입니다. “그래도 현실적으로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한다.”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정말로 돈이 없어서 아무 일도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믿음과 사랑을 통해서 ‘영적으로’ 살아 있기만 하면 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반대로, 돈이 많아서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해도, 하느님이 아니라 돈의 힘에만 의지한다면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하느님 나라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5)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이 말씀은 실제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세속 일’에 연연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6)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신앙생활은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는 생활이고, 그 평화를 ‘삶’으로 드러내고, 증언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생활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에게 평화를 나누어 주려면 우선 먼저 신앙인 자신이 영적인 참 평화를 가득 누리고 있어야 합니다. <그 평화는 물질을 통해서 오지 않습니다. 주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갈 때에만 그 평화를 얻어 누릴 수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집착과 탐욕과 걱정을 버리지 않으면 평화를 잃게 됩니다.>
7)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복음을 전하는 활동은 호의호식하려고 하는 활동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8) “그곳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고,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중입니다. 믿음과 사랑 실천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 같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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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님]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오늘은 성 티모테오와 성 티도의 기념일입니다. 이들은 모두 사도 바오로가 선교여행 중에 만난 이들 가운데 눈여겨보았다가 선교의 협력자로 삼아서 제자 훈련을 시킨 후 에페소와 크레타에 파견한 선교사입니다.
이 두 사람 말고도 사도 바오로의 협력자였다가 제자가 된 이들은 여럿이 더 있는데, 루카(콜로 4,14), 에바프로디토스(필리 2,25), 실라스(사도 15,40), 마르코(필레 1,24), 아리스타코스(필레 1,24), 데마스(필레 1,24), 프리스카와 아퀼라 부부(로마 16,3) 등이 그들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개척선교 노선은 이들 협력자와 제자들에 의해서 비로소 교회에 자리잡게 되었고, 후대 역사를 통해 계승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사도 바오로의 선교는 개척적인 특징이 많았습니다. 그가 사도단에서는 비주류 출신이어서 끌어주는 사람도 없고 함께 할 이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시작했어야 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그러니 불러주는 데도 없는 데 무작정 찾아 나선다든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굳이 천막 만드는 험한 노동을 해 가며 스스로 수입을 충당한다든가, 그냥 세례를 주고 떠나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신앙으로 공동체를 이룰 때까지 기다린다든가 하는 그의 선교활동 특징들이 자칫 이어받는 후계자가 없으면 중단될 수도 있는 불안정성을 내포한 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불안정하게 사도 바오로가 시작한 복음화 과업이 중단되지 않고 소아시아 지방과 그리스 일대 섬들에서 지속되었음을 알려주는 이들이 오늘 교회가 기념하는 두 사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일흔두 명의 제자들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신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이 파견기사는 네 복음서 중에 오직 루카만이 기록해 전해주는 이야기인데, 파견된 제자들이 명심해야 할 신앙적 원칙과 파견지에서 지켜야 할 수칙은 열두 제자의 파견기사와 같지만, 파견되는 제자들이 일흔두 명으로 늘어났다는 점이 눈에 띄는 차이점입니다.
이 일흔두 명의 제자들은 애초에 열두 제자들이 파견되어 복음을 전하면서 합류한 예순 명의 아나빔이라고 추정됩니다. 초대교회의 주류가 된 이들은 예수님께서 수확할 밭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보내 달라고 청하여 받으신 일꾼들이었습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해서 보면, 예수님 이래로 교회의 역사에서 하느님의 일꾼은 늘 부족했습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은 이 만성적인 성소 부족 사태의 해결책은 하느님께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는 것, 단 하나뿐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되, 기도로 청할 때에는 “청하는 것이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믿고 기도하라”고 일러주셨습니다.(마태 21,22)
여기서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믿는 일이란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구하는 일”로서 그리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은 곁들여 얻어지리라.(마태 6,33)고도 일러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되짚어 보면, 기도에도 믿음이 필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언제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바오로 시대에도 그리고 우리 시대에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우리의 일을 하면 됩니다. 관건은 믿음입니다.
사실, 사도 바오로가 티모테오에게 당부한 것도 믿음이었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나는 그대에게 상기시킵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2티모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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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그리스도인에게 신앙은 유산입니다. 이 유산은 그 어떤 물질적인 유산보다 값지고 가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보낸 서간인 오늘 독서에서,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에우니케에게 깃들어 있던 신앙의 유산인 믿음이 티모테오에게도 전수되었다고 확신합니다.
신앙은 다른 이에게서 전해 받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듣는 것에서 오기 때문입니다.(로마서 10장 17절 참조)
우리는 험난한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지위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정에서 신앙을 전수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고귀하고 큰 유산을 자녀에게 선물하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인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가정에서 배웁니다. 가정은 가장 작은 신앙의 공동체며, 가장 중요한 교육의 공동체기도 합니다.
바오로는 티모테오 안에 ‘진실한 믿음’이 있다고 말합니다. 진실한 믿음이란 ‘위선이 없는 믿음’, ‘진리의 정신 안에 있는 믿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티모테오가 이 믿음을 잘 간직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믿음은 티모테오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불태우게 합니다. 하느님의 은사란 티모테오가 받은 사목 직무를 뜻하기도 하지만, 이 직무를 위하여 자신의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신앙을 더욱 뜨겁게 하는 것은 세례를 하나의 자격증이나 천국으로 가는 통행증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교리와 신앙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특히 우리 가정 안에서 전수될 것이며, 이것은 가장 큰 선교며 우리의 의무고 우리 신앙을 지켜 나가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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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10,2)
오늘은 어제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에 이어서, 바오로의 영적 아들이며 제자이고 협력자인 성 티모테오와 티토의 축일입니다. 한 사람의 변화는 단지 한 사람의 변화로 끝나지 않고, 많은 사람의 삶과 진로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입니다. 이는 바로, 바오로의 작은 날개 짓이 훗날 이스라엘이란 좁은 지역을 떠나 세상의 모든 고을과 지역으로 파급 확장되어 영적 새바람을 일으킨 것은 마치 복음 선포와 선교의 영적 나비 효과라고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다마스커스 여정에서 주님의 선택과 소명을 보고 들음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대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음을 자신의 선교 여행을 통해 몸소 체험하고 실감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떳떳하게 예수님의 일꾼으로, 복음의 일꾼으로 최선을 다했기에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나 바오로는 그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콜로1,23) 이렇게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복음의 일꾼으로 수많은 시련과 환난과 옥고를 겪으면서도 생의 마지막까지 땅끝까지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다 실행하였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교회는 바오로 사도가 사랑하고 아꼈던 에페소의 성 티모테오와 크레타의 성 티토 주교의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독서의 행간을 보면 티모테오가 겪는 어려움을 수인이 된 바오로가 알고 있었기에 그를 위해 밤낮으로 기도하며 그가 홀로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격려합니다. “나는 그대의 눈물을 생각하면서 그대를 다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2티1,4.8)라고 격려합니다. 마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면서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10,3)는 표현에서 느껴지는 안쓰러움과 걱정스러움을 바오로 사도 역시 느꼈기에 티모테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며 독려합니다.
주님의 일꾼은 자신이 소유하고 소지한 것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은사로, 하느님 영으로 불타올라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영적 아들인 티모테오에게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2티1,6)라고 격려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소임을 수행하면서 직면하는 반대와 어려움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겁을 내지 말고 또 “주님을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도록.”(1,8) 티모테오에게 아버지의 심정으로 독려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역시도 살아가면서 두렵고 힘들 때, 오늘 복음에서 둘씩 제자들을 파견하신 까닭을 기억하면서 혼자가 아닌 누군가가 자신과 함께하고 있음을 기억하고 또한 동행하시는 하느님의 힘을 의지하면서 꿋꿋이 자신에게 맡겨진 소임을 수행하는 사람이 됩시다. 사도 바오로가 제자인 티모테오에 대한 신뢰에서 우러나온 말은 어쩌면 우리에게 준 기도이며 기대가 아닐까, 싶습니다. “나는 그대 안에 있는 진실한 믿음을 기억합니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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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23년 10월 초, 미국의 자선가 찰스 프렌시스 척 피니가 92세의 나이로 샌프란시스코의 작은 임대 아파트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그는 생전에 자신에게 아주 엄격했습니다. 10달러짜리 플라스틱 시계를 차고 다녔으며, 그의 옷은 기성복으로 헤질 때까지 입고 다녔습니다. 호텔은 항상 저렴한 곳을 찾았고, 옷도 호텔 방에서 직접 빨아 입었습니다. 비행기는 이코노미석만 고집했습니다.
가난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평생 80억 달러, 우리 돈으로 약 10조 8,000억 원을 여러 곳에 기부할 정도로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모두를 익명으로 했습니다. 모든 사업에 성공했지만, 그 성공을 자기의 편안하고 안락함을 위해 쓰지 않았습니다. 소비와 사치를 누려도 누가 뭐라 하지 않을 정도의 위치였지만,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도 한 번에 구두 두 켤레를 신을 수 없어요.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줘 그들이 스스로 일어서게 하는 것만큼 세상에 가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척 피니는 전 재산을 남김없이 세상에 기부했고, 이로써 그의 재단은 2020년에 해산했습니다. 이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각자의 삶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나요?
주님의 일은 자기 혼자만 잘 사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모두 잘살게 하는 것,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구원의 길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갑니다. 다른 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그가 힘든 삶을 사는 것은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쉽게 단정합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일꾼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세상에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보여 주십니다. 즉,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섬김을 받는 삶이 아닌, 섬기는 삶을 살아야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척 피니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세상에 가치 있는 삶을 사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세상 안에서 화려하고 넉넉한 삶을 살 수는 없겠지만, 예수님의 참 평화를 선물로 받을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당당하게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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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삶이라는 길을 떠나네>
루카 10,1-9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시다)
그때에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삶이라는 길을 떠나네>
“가거라,
나는 …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삶이라는 길을 떠나네
나를 보내시는 님께서
나와 함께 몸소 가시려는
삶이라는 길을 떠나네
나를 보내시는 님께서
짝지어주신 길벗과 함께
삶이라는 길을 떠나네
나를 보내시는 님만
오롯이 고이 모시고
삶이라는 길을 떠나네
나를 보내시는 님을
뵙고픈 벗을 만나러
삶이라는 길을 떠나네
나날이 믿음으로
나를 보내시는 님처럼 되어
삶이라는 길을 떠나네
나를 보내시는 님처럼
믿음이고픈 벗을 만나러
삶이라는 길을 떠나네
나날이 희망으로
나를 보내시는 님처럼 되어
삶이라는 길을 떠나네
나를 보내시는 님처럼
희망이고픈 벗을 만나러
삶이라는 길을 떠나네
나날이 사랑으로
나를 보내시는 님처럼 되어
삶이라는 길을 떠나네
나를 보내시는 님처럼
사랑이고픈 벗을 만나러
삶이라는 길을 떠나네
내가 얻기 위함이 아니라
벗에게 내어주기 위하여
삶이라는 길을 떠나네
내어주고 내어주다
나마저 없어져야 마침내 끝날
삶이라는 길을 떠나네
나는 사라지더라도
나를 보내시는 님은 길이 남을
삶이라는 길을 떠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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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근본에 충실하라>
예수님께서는‘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카10,4)고 하셨습니다.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라 하시며 홀로서기를 바라셨습니다. ‘인사는 왜 하는가? 사랑과 존경에서 합니다. 인사를 통해 상대방과의 관계를 형성합니다.
그러나 그 본래의 의미를 잃을 때가 많습니다. 잘 보이려 하고, 인정받으려 하며 그로부터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또 청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근본은 잃은 채 껍데기에 매달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인사까지 하지 마라.’는 것은 한마디로 ‘한눈팔지 마라.’,‘양다리 걸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부름을 받았으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마음을 쏟아야지 어디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되겠는가? 하는 의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지체되어서는 안 됩니다.
언젠가 익명의 편지를 한 통 받았는데 그 내용은 ‘김대건 신부님께 의탁하며 기도하라고 하시며 신자들과의 관계를 끊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려면 더 많은 관계를 맺어야 할 텐데 ‘끊어라!’는 말씀을 하셨을까?
오로지 주님 안에 머물라는 사랑의 충고였음을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을 간직합니다. 인사를 하다 보면, 다시 말해, 사람에게 매이다 보면 진짜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한다는 일깨움을 주십니다. 사람이 정에 매달리다 보면 근본을 잃게 됩니다. 하느님으로 만족해야 하는데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합니다. 사람에게는 인기가 오르는 것 같은데 주님의 눈 밖에 납니다.
“주님을 생각하면 나의 마음은 기쁘고, 나의 하느님 생각만 하면 나의 가슴은 뛰노라.”(이사61,10공동번역) 하느님만을 갈망하고 즐거워해야 하지만 인간적인 욕망은 그칠 줄을 모릅니다.
바오로 사도는 외쳤습니다.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로마 8,5-6)
그는 감옥 안에서도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2티모테오 1,8).하고 권고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며 인간적인 것들에 매이지 않는 삶을 갈망하는 오늘을 겸손하게 봉헌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전하고, 복음을 ‘지금 여기서’ 산다는 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믿음의 고백이 단순한 입의 고백이 아니라 가슴을 거쳐 손발에서 이루어지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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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 삶의 리듬>
-친교의 관상, 선교의 활동-
12년전 나온 책이지만 여전히 오늘날도 호소력이 있고 공감이 가는 2권의 책을 선물받았고 즉시 대략 다 읽었습니다. 한권은 <피로사회), 한권은 <시간의 향기-머무름의 기술->이란 책으로 현대사회는 물론 공동체 이해와 건설에 도움이 되는 책입니다. 또 어제 받은 카톡 글도 공동체 삶에 좋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되어 인용합니다.
-2500년전 중국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에 섭공이라는 제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나라에 문제가 있었으니, 백성들이 날마다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떠나 인구가 줄어들고 세수가 줄어들어 큰 걱정이 생겼습니다. 초조해진 섭공은 공자에게 묻습니다. “선생님, 날마다 백성들이 도망을 치니 천리장성을 쌓아서 막을까요?” 잠시 생각하던 공자는, “근자열 원자래(近者說 遠者來)”, 이 여섯 글자를 남기고 떠났습니다.-
“근자열 원자래(近者說 遠者來)” 무슨 뜻입니까? ‘가까이 있는 사람을 기쁘게 하면, 멀리 있는 사람이 찾아온다’라는 뜻입니다. 기쁘게, 행복하게 사는 형제들의 공동체라면, 향기로운 꽃을 찾는 벌들처럼 저절로 성소자도 피정자도 손님들도 끊임없이 찾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우선적인 것이 향기나는 매력적인 좋은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Christ is password for a happy life”
(그리스도는 행복한 삶의 암호이다)
엊그제 강론에 인용되어 많은 분들에게 신선한 깨우침이 된 교황님의 말마디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기쁘고 행복한 공동체의 비밀은, 열쇠는 그리스도 예수님께 있음을 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가 되어 가까이 함께 있는 사람들이 기쁘게 살면 멀리있는 사람들도 저절로 찾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제자들 공동체가 그러합니다. 공동체 훈련이 잘 된 그리스도 예수님의 친교 공동체는 제자 72명을 파견하므로 빛나는 선교공동체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정말 좋은 공동체는 친교공동체이자 선교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어제는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이었고, 오늘은 바오로의 최측근 제자이자 영적 아들이자 협력자인 성 티모테오와 성 티토 주교 기념일입니다. 성 티모테오는 터키의 에페소 교회를, 성 티토는 그리스의 크레타 교회를 맡아 돌보았던 목자입니다. 오늘 독서 둘을 보면 바오로 사도가 얼마나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 삶에 충실하며 제자들을 사랑했는지 마음에 와닿습니다. 성 티모테오에게 준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감동적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똑같은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전례중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자비와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 나는 그대 안에 있는 진실한 믿음을 기억합니다...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불태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한 영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은총과 자비와 평화를 내리시고,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시어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의 은사를 불태우게 하시며,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를 이뤄주십니다. 티토에게 준 편지글중 일부입니다.
“나 바오로는 하느님의 종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입니다... 나 바오로가 같은 믿음에 따라 나의 착실한 아들이 된 티토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
새삼 그리스도 예수님이야 말로 은총과 자비와 평화의 영적 보물창고의 패스워드 즉 암호이자 열쇠임을 깨닫습니다. 성 바오로, 성 티모테오, 성 티토 모두가 참 좋은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 형제들임을 깨닫습니다. 직접 예수님을 모시진 못했어도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로서 바오로의 그리스도 예수님과 일치의 깊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독보적이니 바로 이점이 우리에게는 희망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에서 파견되는 72명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도 놀랍습니다. 얼마나 영적훈련이 잘 된 공동체의 제자들인지 짐작이 갑니다. 필요가 적을수록 진짜 부자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만으로, ‘하느님의 나라’ 비전만으로 참으로 부유하고 행복한 무소유의 제자들입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병자들이 있으면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하여라.”
군더더기 없는 본질적인 사명의 나열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꿈과 그리스도 예수님이 삶의 중심이 되었기에 거품이나 환상이 없는 이런 단순한 본질적 깊이의 무소유의 삶입니다. 문자 그대로 실천하라는 것이 아니라, 요구하지 말고 피하지도 말고, 본질적 사명에 충실하면서 주님의 평화를 선물하면서 무소유의 영성을, 정신을 배우고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 늘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 예수님과의 우정이 날로 깊어갈수록, 우리 모두 소유에 소유되지 않고 소유가 아닌 존재의 삶을, 무소유 영성의 자유로운 삶을, 지상 순례자로서 하느님 나라 공동체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 다음에는 일흔 두 제자의 귀환이 소개됩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예수님의 공동체는 ‘관상의 친교’와 ‘활동의 선교’라는 공동체 삶의 리듬이, 균형과 조화가 얼마나 필수적인지 봅니다. 새삼 우리 성 베네딕도회 정주 수도자들이 바치는 미사와 성무일도의 공동전례기도는 '친교의 장'이자 동시에 '선교의 장'임을 깨닫습니다. 친교와 선교, 관상과 활동, 기도와 일의 '삶의 리듬'은 생명의 리듬이요 어제 읽은 구절도 생각납니다.
“리듬이 없는 시간은 고유한 시간의 질(質)을 상실한 채 양화(量化)된 시간이다. 한마디로 ‘향기가 없는 시간’이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친교의 관상가(觀想家)로 산처럼, 또 선교의 활동가(活動家)로 강처럼, 하느님 나라 공동체를 이루어 조화롭고 향기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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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인연에 대하여
"나 바오로가 같은 믿음에 따라 나의 착실한 아들이 된 티토에게 인사합니다."
한 주일 사이에 저는 두 부류의 제자를 만났습니다. 둘 다 제 제자이지만 한 제자들은 수도원을 떠났고, 다른 제자는 이번에 사제품을 받은 새 사제입니다.
어제는 새 사제가 저의 공동체에 와서 첫 미사와 식사를 같이했는데 이 형제가 끝까지 사제가 되어준 것이 너무도 흐뭇하고 기뻤습니다.
자기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수도자가 되고 사제가 된 것이지만 마치 저를 위해 사제가 되어준 것 같았다는 말입니다.
아마 부모님들의 마음들이 이런 저의 마음과 똑같을 겁니다. 이에 비해 지난주 만난 제자들은 진한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전날 회식 때 기쁘게 즐겁고 대화 나누고 다음 날 미사를 드리는데 그중 몇이 미사를 따라 하지 못할 정도로 그간 신앙생활을 소홀히 한 것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그런 것이겠지, 미사에 안 나가도 나름대로 신앙생활 열심히 하겠지, 이런 식으로 그들을 이해하려고 하고 저 자신에게는 위로하려고 해도 여간 아쉽고 씁쓰레한 것이 아니었고 배신감과 허탈감 같은 것도 있었습니다.
수도원 있을 때 제가 가르친 것이 이것밖에 되지 않았나! 내가 가르치고 물려준 것이 고작 이것이었나! 이런 것이었지요.
수도원을 나가서도 연을 끊지 않고 저를 찾아 준 것은 너무도 고맙지만 저와의 관계가 인간적인 신뢰와 사랑의 관계에 그치지 않고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디모테오와 티토와 바오로 관계처럼 한 믿음의 관계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바람 때문에 진한 아쉬움이 남았던 겁니다.
저의 바람은 인연(因緣)이 인연(人緣)으로 그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우리가 인연 차원에서 잘 산다는 것은 나쁜 인연은 끊어버리고 좋은 인연은 끊지 않고 이어가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좋은 인연이라는 것이 그저 인간적인 인연에 그친다면 이렇게 인간적으로 좋은 관계를 좋은 관계라 하기엔 부족하지요.
부자지간과 모녀지간도 마찬가지지요. 부자지간과 모녀지간의 인연은 계속 유지되는데 자식들이 언제부턴가 부모와 같은 믿음의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부모들이 신앙의 부모들은 되지 못한 것이지요.
이런 면에서 어제 회심한 바오로가 오늘 두 성인에게 같은 믿음의 아비가 된 것은 바오로에게는 여간 큰 행복이 아니고 우리에게는 여간 큰 모범과 도전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들을 믿음의 아들이라고 말하는데 그가 이들에게 믿음의 아비가 된 것은 거저 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아들 디모테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나 바울로가 아들 디모테오에게 편지를 씁니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끊임없이 그대를 생각하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는 그대에게 상기시킵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바오로가 이렇게 아들을 위해 기도하고, 서간을 통해서 받은 은사를 상기시키고, 그 은사를 다시 불태우라고 격려하였기에 오늘 축일로 지내는 두 아들이 같은 믿음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제가 사제가 됨으로써 육신의 아비는 되지 못했지만 저를 아비처럼 생각하는 아들과 딸들이 많이 있는데 이들이 부디 인간적인 사랑과 인연으로 그치지 말고 저와 같은 믿음의 자녀로 성장하고 살아가길 기도하는 오늘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과 대자 대녀들과의 관계도 오늘 바오로 사도와 두 아들과의 관계와 같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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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 10,2)
<참일꾼들!>
오늘 복음(루카10,1-9)은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지명하여 둘씩 보내시며,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고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이 많다는 의미는 무엇이고, 일꾼이 적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 의미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찾아본다면 어떠한 의미일까?'
2013년 11월 24일에 반포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첫 권고이자, 교황님의 모든 영성이 녹아있는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에서 교황님의 '새로운 복음화를 위한 세 분야'를 이렇게 지정하셨습니다
첫째는 '일반 사목' 분야로, '성령의 불로 활력을 얻어 신자들의 마음이 불타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냉담 사목' 분야로, '세례를 받았지만 세례의 요구대로 살지 않는 냉담 교우들의 마음을 회두시키는 것'입니다.
셋째는 '복음화' 분야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 또는 여전히 그분을 거부하는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지상 그리스도의 대리자이신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시대를 분명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보시면서, 시대적 징표로 이 '세 사목 분야'를 제시하셨습니다.
'복음의 기쁨'은 오늘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정말로 일꾼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일꾼들이 부족해 보입니다.
점점 더 세상 가치 속에 빠져들면서 성령 안에서 불타오르는 신자들의 수는 적어 보이고, 점점 더 냉담자들의 수는 늘어나는 것만 같고 여전히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드러남)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거부하는 이들은 많아 보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닮은 참일꾼들이 되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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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EQICDdTO3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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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루카 10, 2)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먼저 수확의
들판을
보여주십니다.
수확의 들판을
뛰어다닐 때가
가장 행복한
때입니다.
일꾼의 행복은
살아내야 할
수확의 들판과
함께합니다.
소중한
일꾼을
영적으로
살찌우는
수확의
들판입니다.
그래서
일꾼은 기도로
태어나고
사람의 길은
수확의 길로
이어집니다.
수확은 일꾼을
만들고
수확의 들판은
일꾼들의 삶을
알려줍니다.
참된 일꾼이
많아질수록
밝아지고
풍요로워지는
하느님의
들판입니다.
수확의 기쁨과
알찬 보람을
만지는 사람은
언제나 주님의
일꾼들입니다.
일꾼들의 마음은
수확의 들판에
가 있습니다.
기도 또한
우리의 마음이
가 있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은총의
수확입니다.
일꾼들의 호흡과
일꾼들의 땀방울이
기도의 결실임을
우리는 압니다.
기도로
결합되어 있는
일꾼들의
삶이며
기도로
강렬하여지는
수확의
들판입니다.
기도로
시작하는
오늘의
행복입니다.
행복의 수확은
기도의 힘입니다.
기도의 힘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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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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