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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십자가로 돌아가자 원문보기 글쓴이: 수가성여인
종교개혁으로 돌아가는 것은 망하는 길입니다!! 복음은 비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13:13)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사 6:9)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11:15)
사실을 대하는 자세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한 가지는 눈을 감고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며 그런 일이 없다고 우기는 것이요, 다른 한 가지는 눈을 열고 사실을 보며 그 사실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사람이다. - 오스왈드 챔버스-
저는 개혁주의 신앙 안에서 자랐고 신학공부를 했습니다. 저역시 애써 기존 개혁신앙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 몇십년 만에 이제야 거듭났노라고 외치는 분들을 만나보니 현재 신학의 체계 안에서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여태까지 알고 믿었던 것은 복음의 절반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사하시려고 대신 돌아가셨다"라는 복음만 알았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절반만 가진 상태로 자신의 노력을 의지하여 혼자 힘으로 주님을 닮아가려고 애를쓰고 노력하며 율법적인 삶을 산 것입니다.
기존에 알고 있던 <대속의 은총>만으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함께 부활한 십자가<연합의 은총>가 계시로 믿어질 때, 비로소 나는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갈2:20) 이것이 온전한 복음이며, 구원이요, 거듭남인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선행되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을 위한 자기부인의 십자가 삶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다 맡긴다'는 뜻으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비용을 계산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삶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니요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8:9)
"교회가 이 중대한 진리를 알 수 있기를 바란다. 교회는 십자가가 함축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50%의 구속의 은혜밖에는 누리지 못하였다. 교회는 기꺼이 주님과 함께 죽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자기가 죄에 대하여 죽은 것으로 여기는 것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는 아직도 "육체와 세상과 마귀"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F.J.휘걸은 <십자가와 나>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예수님께서 당신의 내면 깊숙한 '지성소'로 들어오신다.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갈2:20)
찰스 트럼벌은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돕는 자가 되고 싶어하지 않으신다. 일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글을 쓸 때 연필을 사용하는 것처럼 우리를 통해 그 분이 일하기를 바라신다."라고 말합니다.
노만 그럽은 <제한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구원이란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의 원래 목적이 달성될 때가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되찾아오신 것은 우리 안에 거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원래 그분이 거하시는 처소로서 지음받았고, 그분을 드러내는 목적 외에 다른 이유로 창조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속이 이루어진 그 즉시로 그 죄인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처소가 아니라면 그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를 돕는 조력자로서 하나님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내 인생을 헤쳐나가고, 내가 구원을 받아서 천국에 가고, 천국에 갈 때까지 잘 먹고 편안히 살기 위해서 교회도, 기독교도, 하나님도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종교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또 더 많이 기도하자, 더 많이 사랑하자, 더 많이 전도하자는 그런 이야기도 아닙니다. 더구나 기본적으로는 하나님과 동역자가 되자, 그분과 함께 무엇을 해나가자, 이런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 안에 모든 것이 된다는 선언입니다. 실제로 기도하고 베풀고 사랑하고 증거하는 분은 우리 안에 계신 그분입니다. 그분이 나의 인생을 사심으로써 내 인생은 그의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주 예수가 왜 오셨는지 바르게 깨닫지 못하면 믿음생활은 헛된 수고에 불과할 뿐이다. 유전자가 들어 있듯이 예수의 생명에는 그리스도 되기 위한 유전자가 들어있다. 그의 생명이 되면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로 살아진다. 새가 물고기를 모르고 물고기가 새를 모르듯이 내가 예수 생명이 되지 않으면 나도 예수를 모르고 예수도 나를 모른다 할것이다.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산 사람에게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개념밖의 어떤 일이 벌어진다. 누군가 내게 와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니다. 나와는 전혀 다른 어떤 생명이 내 속에 거처를 두고 산다. 그 생명을 예수 생명이라고도 하고, 하나님의 영(성령)이라고도 하고, 새 피조물, 새생명, 부활생명이라고 말한다. 하여간 십자가 체험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 되는 순간, 우리 안에 내가 아닌 다른 분이 와서 사시게 된다. 이렇게 다른 어떤 영이 들어와 살게 되면 내가 아닌 나로 인해 당황하기도 하고 어쩔 수 없는 힘에 이끌리는 삶을 살게 된다." <죽고 산자님의 간증에서>
"중생치 못한자는 산상보훈을 전혀 알 수 없고 실용성이 없다. 또한 새생명에 동참없이 원수를 사랑하는 것 역시 지렁이가 새의 흉내를 내는 것과 마찬가지다. 육적생명으로 사는 자는 신약성경의 요구조건이 위압적인 딜레마를 가져다준다. 신자는 육적생명에 대해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안에서 새 생명을 발견해야 한다. 그렇다면 산상보훈이 하나도 문제될 것이 없다. <F.J휘걸의 십자가와 나>
"완전히 새로운 영을 받지 않으면 아무리 올바른 교리라고 할지라도 사람을 바꾸지 못한다. 따라서 사람이 바뀌는 것은 믿음 때문이 아니라 '성령을 받기'때문이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의 상징을 사용하셨다. '영생'은 하나님 자신을 선물하는 것이다. -오스왈드챔버스의 <그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에서- "믿음을 위해 애쓰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내가 노력하는 것은 불신앙이다. 믿음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모든 것을 하심으로 나는 안식에 거하기만 하면 그분이 일하신다. 이것이 진리이다. 그리스도와 나는 하나이다. 이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것은 그리스도와의 일치로 하나가 되어 안식에 거하는 것이다. 그분이 부자인데 내가 가난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허드슨 테일러>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자신의 의견과 선악의 판단으로 살아간다. 자신의 느낌과 감정에 관심을 가지며,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해 살아간다. 영적인 이해는 이들에게 닫혀있다. 심지어 신학을 하고 많은 학문과 설교를 멋지게 만들어내고, 날카로운 강연과 논문을 쓸 수있고, 성경에 기초를 두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마찬가지다. 얼마나 많은 신학자들과 사역자들이 헛된 지혜에 몰두하면서 지혜의 빛에 대해서는 무지한지...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과 지식인은 불행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의 끝없는 본성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연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잃어버린 자에게만 계시하신다. 십자가에서 자기를 잃고 새생명으로 사는 자만이 자기를 위해 살지 않을 수 있다. <마이클 몰리노스/영성깊은 그리스도인>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일5:12)
이렇게 많은 책의 저자들과 간증하는 분들이 동일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결국 거듭난 자만이 알 수있는 세계인 것입니다.
옛언약과 새언약(렘31:34)은 십자가 사건으로 나뉩니다. 옛언약(율법)은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입니다.(고후3:6)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에 따라 죽으심으로 옛언약의 종지부를 찍으셨습니다.
새언약은 신약의 새생명의 언약입니다. "우리를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장사되고 부활하여 새생명 가운데 살게 하려함이라"(롬6:4) 즉, 옛언약과 새언약 사이에는 죽음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죽으실때 아담 안에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리셨다는 의미입니다. 롬6장은 이것을 새생명으로 사는 것이라하며, 눅17:21절은 "천국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포도나무에 접붙임되어 연합된 것이며(요15), 이것이 안식일의 주인인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심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며, 그런 사람이 교회이고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할일은 말씀대로 내가 지키고 사는 것을 멈추고 자신을 날마다 죽음에 넘기고, 주안에 거하여 주께서 일하심으로 나도 일하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
거듭남이란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 안에 형성된다는 뜻이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이 땅에 사셨던 그리스도와 정확하게 동일하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생애가운데 보이셨던 특징들이 그리스도인들 안에 나타나야 한다. 주님은 구원의 진리를 회심, 중생, 거룩으로 분리시키지 않으시고 큰 덩어리로 제시하셨다. -오스왈드 챔버스-
슬프게도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교리적인 면에 있어서 신앙에 대한 강력한 개혁이 일어났다. 반면 그와 동시에 목회자와 교회 리더들 사이에 사랑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심각한 문제가 공존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사랑이야말로 전적으로 신자의 삶을 거룩하게 바꿀 수 있는 힘이 된다는 사실을 누구도 배울 수 없게 된 것이다. 때때로 종교개혁이 초대교회 성령강림절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종교개혁자들 사이에서 형제애, 세상으로부터 구별됨,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짖는 열심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대신 서로 간에 알력과 논쟁이 팽배했다. 도리어 그들은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정치가들을 방패로 삼았다. 설교는 오직 임명된 성직자만의 특권이었다. 신자 모두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동되어 그리스도를 간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초대교회 때와는 상반된 모습이다."
"종교개혁자들은 다양한 믿음의 고백 중에서도 개종과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을 최고로 여긴다. "칭의" 와 "의롭게 되다"라는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한다. 반면 "거룩함"이라는 말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죄에 대한 용서,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로움을 주장할 수 있는 믿음에 대한 교리가 유난히 강조된다. 그러나 우리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그분 안에 뿌리박은 우리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예를 들어,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에 십계명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나, 마태복음 5장(산상수훈)과 요한복음 13-16장에 나온 '그리스도의 계명'은 좀처럼 언급하고 있지 않다. < 앤드류 머레이 -생명되신 주중에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
칼뱅의 사상은 루터와 강조점이 서로 다르다. 그의 <기독교 강요>는 믿음으로 의롭게 됨에서 시작되지 않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시작된다. 루터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는 도피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찾은 반면, 칼뱅은 하나님의 심판의 공포를 보다 고요하게 명상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심판은 선택받을 자들에게는 닥치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루터는 선택받은 자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는 방법을 몰랐다. 그는 그 자신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었고 일생내내 신앙과 확신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였다. 그러나 칼뱅은 근사치에 가깝고 입수가능한 시금석들을 갖고 있었다. 칼뱅은 지극히 내적이고 또 무행인 거듭남의 경험을 요구하지 않았으나, 후에 칼뱅주의는 원래 칼뱅의 입장에서 벗어나 선택의 표시가 무엇인가에 대해 고뇌했다. 칼뱅에게는 시금석이 있었다.
첫째는 신앙고백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츠빙글리와 견해가 같다. 둘째는 엄격하게 훈련된 그리스도교적 품행이며, 이것은 재세레파와 같은 견해이다. 셋째는 성례전에 대한 사랑이다. 유아세례는 반복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가 말한 성례전은 주의 만찬을 의미한다. 칼뱅은 어떤 사람이 이 3가지 시금석을 갖추었다면, 그는 선민임이 분명하므로 더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이처럼 성경보다 교리적 이념을 앞세워 자유로워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신학 체계 안에 가두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잣대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산물인 교리와 신조를 성경 위에 두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에 통탄할 입니다.
이제 더이상 거짓복음에 속지 마십시오!!
우리 인생들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가야 하고, 십자가로 돌아가야 하며, 성경으로 돌아가야 하고, 초대교회의 믿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그리스도를 알아야하고, 그리스도의 비밀은 교회이고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자가 그리스도의 일군인 것입니다.(고전4:1) 거짓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아서 내침을 당했던 것입니다.(마7)
감독과 집사의 자격은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찌니(딤전3:9)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눅6:39)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마 7:13-16)
본질의 변화없이 지적동의에 의한 칭의에 머무르는 잘못된 가르침에 속지 마십시오! 새로운 성향과 기질의 변화없이 타락한 본성그대로는 결코 구원은 없습니다.
기존의 복음으로는 결코 인격의 변화는 가져올 수 없습니다. 옛 생명이기에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생명이 그리스도의 새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게 구원입니다. 그런데 기존의 알았던 복음은, 십자가에서 주님이 대신 피흘려 주심을 믿으면 죄사함이요, 구원이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말한 십자가만 알기로 작정하고 자랑한다는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죄사함만이 아니라, 죄를 짓고 있는 죄인(아담)까지 함께 죽은 것입니다. 이미 주님과 함께 이 천년전에.. 이 자기죽음이 계시로 믿어질 때 비로소 주님의 생명이 실제 내 안에 임해서 살아가신 것이 구원이요, 거듭남입니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고후4:3)
자연인은 더러운 그릇(죽은영)에 세상욕심을 맘껏 채우려는 사람이며, 종교인은 더러운 그릇(죽은영)을 비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작금의 기독교는 종교인보다 자연인에 더 가깝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자리는 더러운 그릇을 깨뜨리고 새 그릇으로 만드는 자리입니다. 한마디로 기독교란 죽은 영혼만 살려 주고 피조물을 돕는 차원이 아니라 죽은 영혼을 주님의 영으로 새롭게 탄생시켜 대신 살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새롭다는 것은 고치는 것이 아니라 새 것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영으로 완전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복음은 비밀이며 가리워졌다는 것이 너무나 자명합니다. 그동안 만연된 잘못된 다른 복음(기복과,번영,율법주의등)에 속지마시고 십자가 복음 안에서 진정한 진리이신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이것이야말로 종교개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거듭남은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당면의 문제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반응하시고 점검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13:5)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8:9)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요 12:24-25)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7:13~14 )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5:31-32)
거듭난자가 교회이며, 그리스도와 연합이 비밀인 것입니다. 지식적인 연합이 아니라, 육체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 부부가 하나가 되 듯 그리스도의 영으로 연합되어 생명을 낳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요6:28~29)
"우리 안에 임하시는 성령은 우리가 예수님을 위하여 뭔가를 '하도록 하는'영이 아니라, 우리로 주님의 완전한 기쁨이 '되게 하는'영이다. -오스왈드 챔버스-
순종은 '하는 것'이 아니라, '되어지는 것'입니다.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8:12-14)
아래 추천 도서는 제가 읽고 검증했던 십자가 복음안에 있는 그리스도 생명에 관한 책들입니다. 그러나, 저자나 역자중엔 자신의 체험없이 지식인 경우도 다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익은 있을 것입니다.
먼저, 진한 표시의 책부터 읽어보시면 도움이 되실 것이며, 새 생명을 경험한 후에는 앤드류 머레이, 오스왈드 챔버스, 잔느 귀용의 모든 책들은 유익하므로 적극 추천합니다.
참 아이러니한 것은, 동일한 책을 읽고도 전혀 다른 해석을 하는 안타까운 경우도 많이 보았습니다. 부디 주님께서 눈을 밝히 열어주셔서 보화를 발견하시길 기도합니다.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갈1:12)
<추천 도서> 스티븐 맥베이 / 은혜 영성의 파워/ 내게 찾아오시는 은혜 /NCD 노만 그럽 / 제한받지 않으시는 하나님 / 두란노 챨스R 솔로몬 / 영적치유의 핵심 / 나침반사 오스틴 스팍스 / 십자가의 중심성과 보편성 / 빌라델비아 댄스톤&데이비드 그레고리 / 온전한 복음 /스텝스톤 F. J. 휘걸 / 십자가와 나 / 생명의 말씀사 찰스 프라이스 / 예수님 위해 살려고 하지 말라 / 생명의 말씀사 래리 크랩 / 네 가장 소중한 것을 버려라 / 살림 제시펜루이스 / 갈보리 십자가 / 기독교문서선교회 워치만 니 /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 / 생명의 말씀사 이상관 /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 프릿츠 리데나워 / 종교에 매이지 않은 그리스도인 / 생명의 말씀사 헨리 스쿠걸 / 인간의 영혼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 / 생명의 말씀사 매튜 미드 / 유사 그리스도인 / 지평서원 한나W.스미스 / 그리스도인이 체험하는 삶의 비밀 / 두란노 진 에드워드 / 하나님의 생명 체험하기 / 생명의 말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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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십자가로 돌아가자 원문보기 글쓴이: 수가성여인
첫댓글 감사 합니다 잘보았습니다..
깊이가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