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6월 안중근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흥과 신아산 부근으로 일본군 공격에 나섰다. 두달전 경흥에 주둔중인 일본군 수비대를 급습, 진지를 점령하는 승리를 거둔 안중근 부대는 또 다시 다수의 일본군을 사살하고 10명 가까운 일본 군인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린다.
이때 안중근은 일본군 포로에 대해 석방 결정을 내렸다. 게다가 포로들에게 무기까지 돌려주었다. 의병들은 안중근의 조치에 크게 반발했다. 일본군은 한국 의병을 생포하면 즉시 총살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중근은 만국공법(萬國公法)을 들어 포로라도 죽여서는 안되고 포로수용소가 없으니 석방할 수밖에 없다며 석방을 강행했다.
포로 석방으로 안중근은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석방을 놓고 의병들간에 갈등이 커져갔고, 부대를 이탈하는 의병들도 나타났다. 더 비싼 대가는 석방 포로들에 의해 부대의 위치가 알려지면서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은 것이다. 안중근부대는 참패했고, 이후 안중근 의병은 결성 1년도 안돼 해체의 길로 들어섰다.
안중근은 왜 의병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적군인 일본군 포로를 석방했을까. 안중근은 만국공법에 입각한 인도적 처리를 내세우고 있으나 그 이면에는 휴머니스트이자 평화주의자로서 안중근의 면모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