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29일(주)
* 시작 기도
(대하 34:33) 이와 같이 요시야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모든 땅에서 가증한 것들을 다 제거하여 버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으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였으므로 요시야가 사는 날에 백성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복종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주님...
하나님의 사람 곧 예수를 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요시야와 같이 사람들을 의로운 곳으로 인도하여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민이라도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산 것을 잘 압니다.
오늘 이 종 또한 요시야와 같이 하여야 하지만 나는 너무나 연약하여 잘 넘어지는 자입니다.
하여 나 자신을 내가 잘 압니다.
이런 나를 불쌍히 여기사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나의 의로 나를 드러내려 하는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오늘도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25년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함께 공동체로 예배하는 시간, 주를 더욱 사랑하며 전심으로 예배할 수 있게 우리를 도우소서.
주만 바라보오니 긍휼의 옷으로 덮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계 21:22-27
제목 :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2 성 안에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24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25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26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 나의 묵상
지금까지 거룩한 성은 성벽, 성벽에 있는 열두 문, 그리고 성안에 있는 정금길로 묘사되었다.
그러면 성안에는 대체 누가 그리고 무엇이 있는가?
예루살렘 성안에는 솔로몬 성전이 있었고, 후에는 스룹바벨, 헤롯성전이 있었다.
그렇다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는 어떤 성전이 있을까?
요한은 성 안에서 성전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또한 성전을 보았다.
그것은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어린 양이 그 성전이었다(22절).
그 성에는 만물에 속한 태양이나 달의 빛이 필요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이사야서의 말씀을 성취한다.
(사 60:19)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세상 모든 민족이 그 빛 가운데 다닐 것이며 땅의 왕들도 그들의 영광을 성으로 가져올 것이다.(24절).
여기 거룩한 성으로 들어오는 이들은 그 이름이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이들이다(27절).
그러나 모든 속된 것과 가증한 것과 거짓을 행하는 자는 결코 들어가지 못한다.
오늘 본문은 종말에 완성될 교회의 영광을 보여준다.
교회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표상되며 그것은 눈에 보이는 성전이 아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구원은 성전을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규정하였다.
(고후 6: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지만 지상교회는 짐승의 박해와 유혹에 맞서 순수를 지켜야 하고, 그들의 박해와 유혹에도 불구하고 증인된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교회는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누리지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구원이 완성되면 교회는 어린 양의 신부로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누린다.
그 거룩한 성, 영광스런 교회에 사람이 지은 성전은 없다.
왜냐하면 사람이 지은 성전은 한시적이며 그것 역시 하늘 성전의 모형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히 8:5).
하늘에 있는 성전은 창세전 성부와 성자 곧 삼위 하나님이 영광중에 거하셨던 곳이다.
어떤 특정한 장소나 건물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의 관계성이 바로 성전이다.
(요 17:5)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아들은 아버지께 복종하고 아버지는 복종하는 아들에게 자기 자신을 다 내어주는 것 곧 본질을 계시하시는 영광을 주신다.
이런 아들의 생명을 얻은 교회공동체는 그 이름이 아들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으로서 하늘성전인 성부와 성자와의 완전한 사귐에 이른다.
(요 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현존하는 지상교회의 영광은 결코 세속적인 부와 권력 그리고 명예나 크기에 있지 않다.
그것은 결국 썩어 없어질 배설물과도 같은 것이며 교회의 영광은 언제나 성부와 성자의 영광에 연합하는 것에 있다.
그 비밀을 알지 못하면 늘 남의 다리만 긁게 되고 이 요한계시록의 비밀(mystery)을 이해할 수가 없다.
따라서 삼위일체적인 교회는 창세전 삼위하나님의 연합과 하나됨에 근거한다.
아버지가 아들 안에, 아들이 아버지 안에 거하므로 하나가 된 것 같이 지금 우리도 그 삼위 하나님의 연합 안에 거해야 온전한 교회가 되는 것이다.
(요 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삼위일체의 존재양식의 기본은 내재적 삼위일체이다.
이는 성도 개개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함으로서 구현되는 교회의 실재인 것이다.
(요 17: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교회는 아버지가 아들 안에, 아들이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성도가 하나 되어 삼위 하나님 안에 거함으로서 세상을 향하여 아들을 증거하는 것이다.
영생을 얻은 성도는 날마다 말씀묵상을 도구로 하여 성부와 성자의 영광에 참여하여야 한다.
물론 성령께서는 늘 거기에 동참하여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깨닫게 하시며 성부와 성자가 하시는 일에 함께 하신다.
영생의 사귐으로서 말씀묵상은 성도 각자를 삼위 하나님과 연합하게 한다.
이런 연합의 삶을 사는 개개인은 서로 사귐을 갖게 되며 이를 통해서 내재적 삼위일체의 공동체성과 연합이 실현된다.
이것이 하나님이 처음부터 계획하셨던 교회의 목적이며 계시록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교회의 영광인 것이다.
나는 내재적 삼위일체나 경륜적 삼위일체도 알지 못하였다.
나아가 이런 내재적 삼위일체의 기초 위에 세워진 교회의 영광스러움은 더더욱 알지 못하였다.
그저 교회를 건물로서 이해하였기에 그 교회의 건물을 크게 지어야 한다는 부담감과 그렇게 크게 지은 예배당에 사람 숫자를 가득 채우는 것이 목사의 사명이라 생각하였다.
더욱이 나는 거기서 오는 부담을 떨쳐내지 못하였다.
그렇게 해서 빨리 교회를 부흥시키고 재정도 넉넉하게 운영하면서 사회에 선하고 좋은 일도 많이 하여 예수님의 이름을 널리 증거하는 것이 복음전도의 첫 걸음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나는 교회의 존재 이유와 사명을 몰라도 너무 몰랐고 그것도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섭리에 대해서 전혀 반대로 행하고 말았다.
나는 삼위 하나님과의 연합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교회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기에 그저 눈에 보이는 그 무엇으로 교회가 살아 있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고자 고군분투하였다.
무엇보다 그렇게 하면 성도들과 세상 사람들에게는 칭찬과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사명일까를 생각하면 아찔할 뿐이다.
작금의 교회가 너무 눈에 보이는 것에 치중하며 매몰되어 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뜻과 의도가 단 한 번도 흔들리거나 변하지 않고 오롯이 일관된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 곧 영생이다.
그런 삶을 살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 하나님 나라이며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서 오직 눈에 보이는 착한 일이나 선한 일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교회에 발을 들여놓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나 섭리는 결코 교회나 교인의 숫자가 증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우리들의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목회성공이라는 부나방과 같은 존재요, 손에 잡히지 않는 무지개를 좇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삼위 하나님이 창세전부터 지금까지 그러하시는 것처럼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연합 안에 거하며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그 자리가 비록 이 땅에 발을 디딘 자리여서 사방이 가로막혀 어느 곳 하나 길이 열려있지 않을지라도 그러하다.
그리고 여전히 이 세상은 혼탁하고 혼미하여 길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마찬가지다.
내 안에 나와 함께 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연합 안에 거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우리의 상황과 형편에 상관없이 하나님 나라 곧 영생을 누릴 수 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의 일관된 주장이다.
예수님이 오신 후에 천년왕국이 임하거나, 또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천년왕국이 임하여 우리가 왕노릇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전천년설이든지, 후천년설이든지 그 천년은 사실적 천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 현재이다.
예수님이 초림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재림하시는 그 시간이 바로 진정한 천년의 의미이다.
그 동안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위임하신 왕과 제사장으로서 성부와 성자 안에 연합하여 살아가야 한다.
그럴 때 거기서 복음을 통하여 생명이 나오게 되고 그 아들의 생명으로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영생은 결코 미래의 어느 특정한 시간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영원한 현재로 영생을 얻은 성도는 날마다 주의 말씀을 통하여 주님과 깊은 교제로 나아가면 성부와 성자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며 그것이 교회의 영광이다.
나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혼탁한 시대에 진정한 교회요 교회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말 것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교회의 사명과 임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 극히 인간적인 사고와 생각으로 점철되어 외형적으로만 크게 하고자 했었습니다.
부흥이라는 미명하에 사람들을 못살게 굴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순진한 성도들은 그런 목사의 요청에 순종하여 한 사람이 몇 명씩 반드시 데려와야 한다는 명령(?)에 다른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오늘은 우리 교회에 와주면, 다음에는 너희 교회에 가줄게’라는 품앗이 출석을 하는 세태에 가슴이 타들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이 시대의 교회가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었나이까?
그 책임이 나와 같은 목사에게 있음은 변명의 여지가 없나이다.
무지하고 그 안에 가득한 탐욕이 이런 사태를 만들었나이다.
이런 무지와 탐욕을 불쌍히 여기사 긍휼을 베푸소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말은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욕심인 줄도 모르고 죄인 줄도 모르는 이 시대의 목회자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그리하여 아버지의 뜻, 주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복음을 통하여 생명으로 나아가는 목회자와 성도들이 되어 이 땅에서부터 영생을 누리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