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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 육체와 정신, 마녀 혹은 성녀, 빛과 어둠, 피와 살, 사람과 사랑….
지난 수십 년 동안 행위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곁을 따라다닌 말들이다. 한국에서 제대로 전시 활동도 한 적 없는 이 예술계의 거인이 <더블유>의 유방암 인식 향상 캠페인을 위해 마음을 열었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ć)라는 예술가에 대해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하면 좋을까? 다행히 전 세계가 공유하는 수식어로 ‘행위예술의 대모’가 있다. 흔히 퍼포먼스라고 부르는 그 행위예술 장르를 시각예술 형식의 하나로 자리 잡게 한 선구자. 제19회 ‘유방암 인식 향상 캠페인: Love Your W’의 협업 아티스트로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라는 거인을 떠올린 건 무의식적인 이끌림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방가르드한 행위예술로 긴 세월 숱하게 비난받은 여성이 언제나 전하려 한 메시지 일부는 ‘두려움을 넘어서는 것’ 그리고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퍼포먼스는 일시성에 뿌리를 둔 비물질적인 작업이지만, 그녀는 사실 영상, 사진, 콜라주, 드로잉, 사운드 작업 등 전방위적인 작업을 해왔다. 우리는 이 강렬하고 신비한 존재를 메신저 삼아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재밌고 구체적인 무언가로 대신 보여주고 싶었다. 수십 년 세월이 보물 창고처럼 아카이빙돼 있을 예술가의 스튜디오. 거기서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흔적을 발견한다면 얼마나 짜릿할까. 그렇게 마리나의 스튜디오와 갤러리 직원들은 세상에 데뷔시킬 ‘희귀템’을 찾아 두터운 역사를 파내는 작업에 들어갔다. “<더블유 코리아>의 선택이 흥미로웠습니다. 2024년 시점에, 제가 1970년에 그린 드로잉을 커버로 선택한 거잖아요. 덕분에 저도 5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가며 기억을 더듬었어요.” 6개월의 교류를 거쳐 캠페인을 둘러싼 모든 일이 끝난 후,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들려준 첫마디다. 이번 Vol.12의 커버 중 하나에는 방대한 아카이빙에서 건져 올린 그녀의 과거 스케치 작업이 자리 잡았다. 최종 후보에 오른 몇몇 작품을 두고 고민한 끝에 선택한 커버 이미지다.
아이디어를 구상 중인 작가의 내밀한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스케치 작업. ARALLEL THINKING FOR DIFFERENT PROJECTS ON A SMALL PIECE OF PAPER, 1970, INK ON PAPER, 10.8 X 13CM, © MARINA ABRAMOVIĆ; COURTESY LISSON GALLERY
Parallel Thinking For Different Projects On a Small Piece of Paper, 1970
Ink on paper
“아쉽게도 아직 한국을 방문해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퍼포먼스 아트를 가르치면서 재능 있고 헌신적인 젊은 한국 예술가들을 많이 만났어요. 한국의 자연과 폭포, 사찰, 불교, 뉴 코리안 시네마(2000년대에 부상한 한국 영화), 음악, 무용이 나를 매료시킵니다.” 한국에 대한 이야기로 말을 시작한 선구자는 인터뷰를 위해 오래 전으로 시간 여행을 했다. 백조와 별, 그 밖에 알 수 없는 흔적이 가득한 펜 드로잉, ‘Parallel Thinking For Different Projects On a Small Piece of Paper’(1970)는 아티스트의 내밀한 기록을 엿볼 수 있어 특별한 스케치다. ‘작은 종이에 그린, 다양한 프로젝트를 위한 병렬적 사고’라는 뜻처럼 여기에는 훗날 시리즈 작업으로 이어진 아이디어와 결국 실현되지 못한 아이디어가 뒤섞여 있다. “서로 다른 호수에서 헤엄치는 백조 두 마리를 그렸어요. 그들은 절대로 만나지 못할 사이죠. 하지만 영상 프로젝션을 이용해, 두 백조가 서로를 향해 끝도 없을 것처럼 헤엄치다가 결국에는 만나는 장면을 만들어보고 싶었답니다. 그렇게 백조와 백조가 만나면 하트 모양을 이루죠.” 한 마리 백조가 헤엄치는 영상 화면 두 개를 나란히 붙여 놓으면, 만나지 못할 백조들도 만날 수 있다. ‘각자의 터전에서 헤엄치는 백조들’이 ‘서로를 향해 맹렬하게 달려오는 사이’로 변화하는 마법. 그러나 이 아이디어는 영상 작업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1970년 당시 마리나는 20대 중반이었다. 사회 체제에 반항하는 자기만의 방식을 찾아갈 무렵이다. 급기야 몇 년이 지나 그녀는 어릴 적부터 하던 페인팅과 드로잉 작업을 멈추기도 했다. “이 드로잉에서는 나선처럼 꼬여 있는 모양들도 보입니다. 제가 전기, 그리고 전기가 만들어내는 에너지에 관심이 많았던 흔적이에요. 당시 저에게 가장 큰 영감을 주는 인물이 니콜라 테슬라였어요. 백조 위에 보이는 커다란 별은, 돌이켜보면 훗날 ‘리듬 5’라는 제목으로 펼친 퍼포먼스를 위한 흔적 같네요. 시내 어디에 가든 공산당의 별 문양이 보이던 시대였어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들려주는 거의 모든 이야기는 결국 발칸반도의 공산주의 체제에서 태어나고 자란 배경으로 귀결된다. 그녀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재자가 유고슬라비아를 통치하기 시작할 무렵 태어났다. 지금은 사라진 동남부 유럽 국가의 이름을 Z세대가 알까? 이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서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등이 분리 독립을 했고,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대개 ‘세르비아 출신 예술가’로 불린다. “제 부모님은 국민 영웅이었어요. 독재 정권 아래에서 빨치산(Partisans)으로 정치 경력을 쌓은 분들이죠. 부모님이 저나 제 동생과 단란한 시간을 보낼 여유도 없었어요. 저는 성인이 될 때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신앙심 깊고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저희 할머니와 보냈어요.” ‘밤 10시 통금’ 을 칼같이 지켜야 하는 엄격한 가정의 어머니가 ‘따님이 발가벗은 채로 벽에 매달려 있어요!’ 같은 소리를 듣는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어느 날 마리나가 밤늦게 집에 들어갔더니, 마거릿 대처처럼 차려입고 식탁에 앉아 있던 어머니가 ‘너에게 생명을 주었으니 이제 빼앗아 가겠다’며 묵직한 물건을 던졌다고 한다.
자신의 신체를, 작업의 핵심 매체이자 과정 그 자체로 삼은 20세기의 20대 여성. 그녀가 처음으로 관객 앞에서 몸을 쓴 작품은 바닥에 펼친 손가락 사이 사이를 빠르게 칼로 찌르는 공격적인 퍼포먼스, ‘리듬 10’(1973)이었다. 한때 서울의 ‘국민학교’에서 남학생들이 샤프를 들고 그런 놀이를 했는데, 그 발상의 기원이 바로 마리나의 ‘칼춤’ 아니었을까? 그녀는 손가락이 찔릴 때마다 20개의 칼 중에서 새로운 칼로 바꾸었다. 다시 이 과정을 반복할 때는 신음 소리를 내거나 칼에 찔리는 타이밍을 이전 행위 때와 똑같이 맞추려고 했다. 과거의 실수와 미래의 실수를 하나로 만들고자 한 작품이다. 신체와 정신의 한계를 탐구하는 ‘리듬’ 시리즈는 여러 형태로 이어졌다. ‘리듬 5’(1974) 때는 커다란 별이 등장했다. 마리나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상징인 별 모양 장치에 석유를 뿌려 불을 지르고, 자기 손톱과 발톱과 머리카락을 잘라 불길 속으로 던지며 빛의 폭발을 일으켰다. 퍼포먼스 후반, 그녀는 별 속으로 들어가 누워 있다가 의식을 잃었다.
마리나가 처음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작품은 ‘리듬 0’(1974)이다. 전시장 테이블에 장미, 향수, 빵, 와인, 가위, 쇠막대, 총알이 하나 든 권총 등 72개의 오브제와 함께 이런 메시지가 놓여 있다. ‘저는 물건입니다. 6시간 동안 저를 가지고 원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모든 책임은 제가 집니다.’ 마리나는 그런 상황에서 대중이 어떤 행동을 할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시험하고 싶었다. 처음 몇 시간 동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거나 그녀에게 꽃을 안기고 키스하는 관객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이때의 기억에 관해서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인스티튜트’ 유튜브 채널에 그녀가 직접 남긴 말이 있다. “사람들이 점점 더 난폭해져서 제 목을 칼로 긁고, 피를 마시려 했어요. 저를 업고 돌아다니다가 테이블 위에 올리더니, 제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로 칼을 집어넣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총을 들고 와서는 제가 정말 방아쇠를 당기는지 확인했어요.” 만신창이가 된 여자는 그날 밤 호텔방에서 하얗게 센 머리카락을 발견했다고 한다.
첫 퍼포먼스인 ‘리듬 10’(1973), 그리고 이름을 알리게 된 ‘리듬 0’(1974) 퍼포먼스 때의 마리나. RHYTHM 10, PERFORMANCE, 1 HOUR, MUSEO D’ARTE CONTEMPORANEA VILLA BORGHESE, ROME, ITALY, 1973, © MARINA ABRAMOVIĆ, COURTESY OF THE MARINA ABRAMOVIĆ ARCHIVES
첫 퍼포먼스인 ‘리듬 10’(1973), 그리고 이름을 알리게 된 ‘리듬 0’(1974) 퍼포먼스 때의 마리나. HYTHM 0, PERFORMANCE, 6 HOURS, STUDIO MORRA, NAPLES, 1974, COURTESY OF THE MARINA ABRAMOVIĆ ARCHIVES
그러니까,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대체 왜 그런 ‘예술’을 시작했을까? 자신을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넣고 고통을 감내하는 것. 스스로 고통을 만들어내기까지 하는 것 말이다. “인간이 느끼는 세 가지 주요한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건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난,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나는 관객들 앞에서 어려운 상황을 연출하고 그들의 거울이 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두려움에서 해방됐어요.” 여러 실험을 하면서 마리나는 자신의 에너지가, 혹은 인간의 에너지가 무한에 가깝다는 점을 느꼈다.
울라이와 함께한 ‘Rest Energy’(1980). 활이 마리나를 향해 있고, 그녀는 마이크를 통해 심장 박동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REST ENERGY, PERFORMANCE FOR VIDEO, 4 MINUTES, ROSC’ 80, DUBLIN, 1980, © ULAY/MARINA ABRAMOVIĆ, COURTESY OF THE MARINA ABRAMOVIĆ ARCHIVE
2010년 MoMA에서는 그 유명한 전시, <The Artist Is Present (예술가가 여기에 있다)>가 열렸다. 핏빛처럼 붉은 드레스를 입은 마리나의 강렬한 이미지, 그와 대비되는 정적인 무드는 온라인에서도 놀라울 정도로 퍼져 나갔다. 아티스트가 관객 한 명 한 명과 마주 앉아 ‘우리가 말없이 눈빛으로 연결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자’는 생각으로 마련한 이 시간은 사실 회고전 중 일부인 체험 무대였다. ‘리듬 0’ 같은 작품이 관객의 폭력성을 증폭시켰다면, <The Artist Is Present>는 공생적인 연결감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때도 마리나는 ‘리듬’ 시리즈와 같은 맥락의 퍼포먼스 중이었다. 그녀는 약 80일 동안 매일 하루 8시간을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나이 60대에 벌인 일이다. 관객은 자신이 원하는 시간 동안 마리나 맞은편에 앉을 수 있었다. 누군가는 1분이 되기도 전에 일어났고, 누군가는 복받치는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며 울었다. 침묵 속에서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라는 감정의 거울을 대하기 위해 비요크, 루 리드, 제임스 프랭코 등 셀럽들도 줄을 섰다. 관객과 관객 사이, 전환하는 시간을 만들기 위해 마리나는 그저 잠시 동안 눈을 감았다가 뜨는 식이었다. 다소 지친 얼굴로 그녀가 눈을 떴을 때, 헤어진 연인이자 12년 동안 동료로 함께 작업해온 울라이(Ulay)가 눈앞에 있었던 극적인 순간은 전시를 감동적인 스토리텔링으로 더욱 확산되게 만들었다. 이 예술가 커플은 단순한 협업이 아니라 둘 사이의 ‘혼종적 에너지’ 를 표현하는 작업을 주로 했다. 만리장성에서 서로를 향해 걸어가는 퍼포먼스를 한 발상은 어떻게 봐야 할까? 각자 벽의 동쪽과 서쪽 끝에서 출발해 만날 때까지 걷는다는 내용의 퍼포먼스. 그 계획을 중국 당국에 허락받기까지 무려 8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리고 연인들이 그렇듯 그 시간 동안 둘 사이는 전과 달라졌다. 퍼포먼스의 막은 올랐고, 서로에게 가닿기 위해 걷다가 90일이 흘렀지만, 두 사람은 만남과 동시에 이별로 막을 내렸다. 만리장성에서 쓴 대서사시이자 둘의 이별 퍼포먼스가 돼버린 그 작품명은 ‘The Lovers’(1988). MoMA에서 울라이를 마주한 마리나는 눈물을 흘리며 그를 바라보다가, 관객과 접촉하지 않으려 했던 룰을 깨고 먼저 손을 내밀었다.
2010년 MoMA <예술가가 여기에 있다> 전시 중. 마리나는 평생 응원보다 비난을 더 많이 받았던 자신이 60대가 되어서야 인정받았다고 했다. THE ARTIST IS PRESENT, PERFORMANCE, 3 MONTHS,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NY, 2010, PHOTO BY MARCO ANELLI, COURTESY OF THE MARINA ABRAMOVIĆ ARCHIVES
두려움에 직면하고, 고통을 자율적으로 감독함으로써 정화되며 용기를 얻는 예술가. 마리나는 우리가 삶의 연약함이나 우리 존재의 일회성을 깨달았을 때 취약해진다는 것을 일찍이 알았다. 하지만 연약함과 취약함이 드러나는 어떤 퍼포먼스의 장에서, 예술가와 관객들이 놀라운 관계를 맺으며 에너지를 교환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녀의 근원적인 두려움과 고통이 공산주의 체제와 집안 배경에서 비롯되었다는 건 잘 알려진 이야기다. 언젠가는 ‘예술가로서 내가 두려워하는 것만 한다’는 말을 한 적도 있다. 올해 글래스톤베리 무대에 올라 수많은 관중에게 ‘7분간의 침묵’을 요청한 퍼포먼스 역시 걱정과 두려움을 뚫고 움직인 결과다. 낯선 장소에서, 평생 처음 대하는 성격의 관객을 앞에 두고, 그녀는 곳곳에 폭력이 도사리고 있는 2024년의 현실을 직시하자는 의도로 평화를 기리는 잠깐의 침묵을 권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시끌벅적했을 뮤직 페스티벌 현장이 놀랍도록 고요해졌다.
올해 6월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 무대에서. PHOTO | GETTYIMAGE
나는 문득 소설가 한강을 언급하고 싶었다. 마리나가 아시아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의 존재를 아는지도 조금 궁금했다. 노벨위원회가 ‘역사의 상처를 마주 보고, 인간 삶의 취약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평한 한강의 작품은 누군가에겐 ‘매스꺼울 정도로 가학적이고 피학적인 내용의 소설’이 된다. “한강은 탁월한 작가이고, 국제 문학계에서 매우 높이 평가받고 있죠. 아쉽게도 한강의 최근작을 아직 읽어보진 못했어요.” 고통을 집요하게 파고듦으로써 작업을 펼치는 예술가들은 그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이들을 어떻게 껴안을 수 있을까? 누군가 왜 그렇게 어둠에 집착하느냐고 묻는다면, 예술가는 어떤 답을 내놓을까? “나는 삶이 어려울수록 더 훌륭한 예술가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작업 소재로 삼을 수 있는 것이 그만큼 많아지기 때문에 그래요. 행복으로부터 만들어진 것 중에선 그 어떤 중요한 예술 작품도 본 적이 없어요.” 마리나의 뜻은 이렇다. ‘음악은 기본적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고 마음을 열어야 하는 것이지만, 시각예술과 문학은 다르다.’ 카프카가 행복했을까? 도스토옙스키는?
작년 9월부터 올해 1월 초까지, 마리나는 영국 왕립예술원(Royal Academy of Arts)에서 대규모 회고전 <Marina Abramović>를 열었다. 그녀는 255년 역사를 가진 왕립예술원의 메인 전시실에서 개인전을 연 최초의 여성 작가다. 프리즈 런던 기간에는 이곳으로 각 분야의 뛰어난 여성들을 초대해 티파티를 열기도 했다. 마리나는 자신이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일관되게 말한다. 하지만 그녀가 여성을 향한 전통적인 개념을 재구성한 아티스트라는 점은 콧대 높은 왕립예술원도 인정했다.
작년 영국 왕립예술원에서 열린 회고전 때 설치 장면. GALLERY VIEW OF MARINA ABRAMOVIĆ AT THE ROYAL ACADEMY OF ARTS, © DAVID PARRY/ ROYAL ACADEMY OF ARTS.
<더블유>의 유방암 인식 향상 캠페인과 관련해 마리나가 한국에 소개하고 싶었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작품은 바로 가슴 드로잉이다. 미니멀하게 표현한, 위트도 있는 다양한 가슴들. “가슴 드로잉을 커버로 보여주지 못한 건 아쉽네요. 서로 다른 문화권에 속한 여성들을 바탕으로, 다양한 크기와 특징을 보여주는 가슴을 그린 거예요. 유방암은 심각한 질병입니다. 물론 제가 이 가슴들을 그릴 때는 그런 면보다 다른 면에 대해 많이 생각했어요. 가슴에서는 젖이 나오고, 그건 우리 모두가 태어나서 가장 처음으로 먹는 음식입니다. 젖을 먹는 아기의 얼굴이 얼마나 평온하고 행복한가요. 여성이 생명을, 또 자양분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껴야 해요.”
미니멀하게 표현한, 다양한 형태의 가슴들. 마리나는 여성의 가슴에서 ‘우리 최초의 음식’을 떠올린다. SPIRIT COOKING 29, INK ON PAPER, © MARINA ABRAMOVIĆ
Spirit Cooking 29, 연도 미상
Ink on paper
지금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70대 후반이다. 작년에는 폐색전증으로 생사를 오가는 수술을 받았다. 건강 문제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마리나는 한국인들과 접점을 마련하는 <더블유> 인터뷰에서 굳이 아픈 이야기를 꺼내기는 싫은 눈치였다. 대신 그녀는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거예요. 비행기를 타다 난기류를 만날 때면 종이를 꺼내 유서를 쓰곤 해요. 하지만 나는 죽음에 내재한 철학적 측면을 아주 좋아합니다. 수피교의 스승들은 이런 말을 했어요. ‘삶은 곧 꿈이며, 죽음은 곧 깨어나는 것이다.’’’ 마리나가 수잔 손택이 세상을 떠나기 5년 전부터 친구로 지내기 시작했다는 일화는 아주 신선하다. 당대의 걸출한 두 여성은 서로가 50대, 60대일 때야 친구로 만나게 되었다. “손택은 비범한 인물이죠. 훌륭한 작가이자 사상가였어요. 그녀의 장례식이 파리에서 열렸습니다. 그런데 비 오는 날, 아주 소규모로 치러졌어요. 정말 화가 났어요. 위대한 여성이었던 그녀에게 마땅한, 위대한 장례식을 치르지 못했거든요. 모든 친구들이 작별 인사를 제대로 할 기회조차 누리지 못했어요. 그때 뉴욕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내 죽음에 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장례식의 세부 사항을 정했죠. 내가 가장 오래 살았던 세 도시인 베오그라드, 암스테르담, 뉴욕에 시신을 묻는 거로 알리되, 진짜 시신이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게 하는 것으로요.”
마리아 칼라스의 공연을 마리나식으로 재구성한 오페라 <마리아 칼라스의 7가지 죽음>. ARINA ABRAMOVIĆ
언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장례식’이라는 위대한 행사를 치르기 전에, 마리나는 삶과 죽음에 관한 또 다른 서사를 남기고 싶었다. 2010년대에 그녀는 <The Life and Death of Marina Abramović> 라는 연극으로 순회공연을 했다. 가면을 쓴 세 여성이 무대에 등장하는데, 그중 누가 마리나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작년까지는 <7 Deaths of Maria Callas>라는 오페라를 위해 여러 도시를 오갔다. 그녀만큼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가진 배우, 윌리엄 데포와 함께한 오페라다. 마리나는 마리아 칼라스에게서 자신과 닮은 모습을 자주 발견했다고 한다. 그리고 칼라스가 오페라에서 연기한 각각의 죽음을 자기 식으로 재창조했다. “칼라스는 탁월한 테크닉으로 무대를 장악하는 싱어였고, 굉장한 열정을 지니고 있었죠. 하지만 결국 상사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답니다.” 노장으로서 여전히 여러 도시를 유랑하며 일정을 소화하는 그녀를 두고, 이렇게 자꾸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해도 되는 걸까? 그녀의 미래에는 죽음도 있겠지만, 그전에 아직 공개되지 않은 놀라운 소식이 먼저 있다. 2026년 서울에서 드디어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개인전이 열린다. 마리나는 그때 충분한 시간을 두고 한국을 둘러볼 거라고 귀띔해주었다. 삶이라는 꿈을 꾸다 곧 깨어나는 일은 이 제왕적인 면모를 지닌 여성 평생의 가장 장대한 퍼포먼스가 될 것이다. ‘사랑’으로부터 출발한 마리나와 <더블유>의 만남은, 어느 위대하고 유쾌한 여성이 쓴 자서전의 마지막 페이지 같은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팬데믹 기간에 출시된 재밌는 상품,<Method>. 30장으로 구성된 카드마다 의식을 고양하기 위한 마리나의 지침이 쓰여 있다. PHOTO | JONGWON PARK
권총도, 채찍도 버텼는데…‘이 남자’ 행동에 무너졌다
[후암동 미술관-마리나 아브라모비치 편]
입력 2022-08-20 00:55:58
행위예술 대모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리듬 0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2010년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눈을 떴다. 이번에는 온몸에 문신을 한 거구의 사내가 보였다.
징 박힌 가죽 재킷, 까맣게 탄 피부, 옅은 기름 냄새를 보니 모터 사이클족 같았다. 마리나는 그를 봤다. 이 사내도 지지 않겠다는 양 마리나의 눈을 응시했다. 10분이 흘렀다. 이 사내는 갑자기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주변이 술렁였다. 사내는 솥뚜껑만 한두 손으로 눈을 감쌌다. 울음을 꺽꺽 삼켰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예술가가 여기 있다(마리나 아브라모비치와의 조우)
행위 예술가인 마리나는 MOMA에서 3개월간 '예술가가 여기 있다(마리나 아브라모비치와의 조우)'는 전시를 했다.
별게 없었다. 마리나가 미술관 문이 열리고 닫힐 때까지 2층의 한 곳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는 게 다였다. 방문객은 마리나와 마주 앉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눈맞춤뿐이었다. 시간은 자유였다. 다만 대화도, 스킨십도 금지였다. MOMA는 "바쁜 뉴요커가 한가하게 앉아있을 리 없다"며 떨떠름해했다.
예측은 빗나갔다. MOMA가 붐비기 시작했다. 마리나와 마주 앉으려고 세계 각지 사람들이 찾아왔다. 많은 이가 꼭두새벽부터 입구에서 진을 쳤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예술가가 여기 있다(마리나 아브라모비치와의 조우)
가만히 앉아있는 마리나는 돌부처 같았다.
그런 마리나와 눈을 마주치는 이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누군가는 웃었다. 누군가는 울었다. 누군가는 괴성을 질렀다. 누군가는 눈싸움을 했다. 누군가는 토를 했고, 누군가는 갑자기 옷을 벗어 던져 경비가 달려왔다. 5분도 못 채운 채 뛰쳐나가는 이가 있었다. 지박령(地縛靈)이 된 이도 있었다.
마리나는 늘 그대로였다.
자식 14명을 모두 잃은 뒤 그대로 굳어버린 그리스·로마 신화 속 니오베(Niobe)가 된 듯했다. 마리나는 736시간 30분간 앉아 있었다. 1주일에 나흘간 단식했다. 앉아있는 7~8시간 동안 화장실도 가지 않았다. 마리나가 어떻게 생리 작용을 해결하는 지가 진지한 토론 주제기도 했다. 전시 기간 누적 관객은 850만명이었다. MOMA 역사상 최다 관람객 수였다. 당시 뉴욕시 전체 인구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예술가가 여기 있다(마리나 아브라모비치와의 조우)
하나, 둘, 셋….
마리나는 또 눈을 떴다. 빨간색 롱 드레스를 입은 마리나가 이번에는 자기 앞에 앉은 중년 사내를 쳐다봤다. 수염을 멋스럽게 기른 백발 신사였다. 마리나는 그를 보자 동요했다. 살짝 웃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했다. 마리나는 통증을 느꼈다. 이번 전시 중 없던 일이었다. 사내는 미소를 보였다. 마리나를 다독이는 듯했다. 그의 눈시울도 뜨거워진 상태였다. 사내는 목울대가 뜨거운 듯 심호흡을 했다. 사람들은 둘을 숨죽이며 쳐다봤다. 마리나는 곧 울 것 같았다. 철의 여인 같던 마리나가 딱 한 번, 무너진 때였다. 이 남성의 이름은 울라이(우웨 레이지에펜)였다.
22년 전 : 중국 만리장성
마리나·울라이, 더 러버스(The Lovers)
1988년 중국 만리장성.
마리나와 울라이는 이곳의 한가운데에서 만났다. 둘 다 탈진 상태였다. 머리는 산발이고, 손과 발은 거친 흙먼지에 부르텄다. 바로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 비루한 행색의 두 사람은 포옹했다. 서로의 손을 꽉 쥐었다. 나란히 서서 울먹였다. 마리나가 고개를 푹 숙인 채 훌쩍였다. 울라이는 그런 마리나를 말없이 바라봤다. 만감이 교차했다. 마리나는 그 순간을 "내 주변 모든 게 부서지는 듯했다"고 회고했다. 그렇게 둘은 연인 관계를 끝냈다.
마리나·울라이, 더 러버스(The Lovers)
둘은 만리장성의 양 끝에서 각자 걸으며 헤어짐에 다가섰다.
3개월 전 마리나는 황해, 울라이는 고비 사막에서 첫발을 뗐다. 마리나는 빨간 옷, 울라이는 파란 옷을 입었다. 서로 2500㎞ 거리에 발자국을 찍어왔다. 12년 치 사랑의 마침표를 찍는 길이었다. 예술가인 둘은 결별마저 예술로 승화했다. 작품 이름은 '더 러버스(The Lovers)'였다. 마리나와 울라이는 각자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품었다. 만리장성은 산 능선을 살려 만든 성벽이다. 아찔한 높이, 깎아내리는 듯한 계단 등 정글만큼 험한 길도 적지 않다. 마리나와 울라이는 몇 번씩 넘어지고 주저앉았다. 내일과 다음 생 중 무엇이 먼저 올지 알 수 없는 밤도 종종 마주했다. 하지만 그 통증을 견뎌냈다. 죽을 수도 있는 행위 예술이었지만 멈추지 않고 발을 뻗었다.
마리나·울라이, 더 러버스(The Lovers)
둘은 만리장성의 양 끝에서 각자 걸으며 지난날을 돌아봤다.
원래 이 행위 예술은 마리나와 울라이가 결혼을 위해 기획한 일이었다. 상대를 향한 발걸음은 애초 사랑의 결실을 재촉하는 일이었다. 빨리 걸어가면 결혼을 앞당길 수 있는 퍼포먼스였다. 둘은 2500㎞의 험한 길을 웃으며, 설렘을 끌어안고 내달리듯 걸으려고 했다. 사랑은 모든 오르막길을 무릅쓰더라도 행할 가치가 있다는 점을 알리고 싶었다. 사랑의 행위만이 이에 따라오는 고통을 겪을 가치가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반대였다. 상대에게 다가가는 그 걸음은 외려 이별을 재촉하게 됐다. 빨리 걸어갈수록 결별을 앞당길 수 있게 됐다. 이들의 발걸음은 시간이 흐를수록 무거워졌다. 때론 걷다가 멈추어 섰다. 그 자리에서 얼굴을 감싼 채 하염없이 흐느꼈다.
마리나, 울라이
둘은 만리장성의 양 끝에서 각자 걸으며 같은 말을 떠올렸다.
'우린 어디서부터 엇갈렸을까.' 한때 마리나와 울라이는 서로가 서로를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 믿었다. 마리나의 기행(奇行)도, 울라이의 자유분방함도 서로라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마리나와 울라이는 5년간 미니밴을 타고 전 세계를 누빈 일을 회상했다. 둘은 매 순간을 단편 영화처럼 차곡차곡 기억했다. 마리나는 울라이의 손길을 곱씹었다. 울라이는 마리나가 활짝 웃으며 건넨 "내 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야"라는 말을 거듭 되짚었다. 성벽 길을 하염없이 걷던 둘은 종종 하늘을 봤다. 내가 보는 하늘을 저 멀리 상대방도 보고 있을 것이다. 밴에 올라타 바라보던 그 하늘을 떠올렸다. 눈물이 또 쏟아졌다. 머리가 어지러워질 땐 다음에 딛게 될 걸음, 다음에 쉬게 될 호흡에 온 힘을 쏟았다.
마리나, 울라이
중국이 허가를 빨리 내줬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8년 전, 중국은 두 사람이 결혼을 염두에 두고 구상한 '더 러버스'에 대해 심드렁해했다. 왜 하필 만리장성이냐는 거였다. 중국이 이를 심사하며 8년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둘도 8년씩 더 늙었다. 울라이는 그 사이 중국어 통역을 한 여인과 외도했다. 마리나도 같은 기간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줬다. 그런 시간의 틈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럼에도 중국 탓은 아니었다. 둘은 이미 금 간 유리였다. 아무리 맞붙여도 갈라진 틈은 벌어질 터였다. 사실 오래전부터 둘의 관계는 아슬아슬했다. 이들은 유명해질수록 가치관을 놓고 충돌했다. 가난에 지친 마리나는 돈과 명예를 추구했다. 부르주아 삶을 경멸한 울라이는 그런 마리나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마리나·울라이, 더 러버스(The Lovers)
하지만 사랑은 사랑, 이별은 이별, 예술은 예술이었다.
이들에게 사랑과 이별, 예술혼은 별개였다. 중국의 허가 소식을 들은 마리나와 울라이는 '더 러버스'를 강행키로 했다. 둘은 이 일을 사랑의 오프닝이 아닌, 사랑의 엔딩으로 꾸미기로 했다. 마리나와 울라이는 2500㎞를 걸으며 규칙을 지켰다. 지팡이를 짚고서라도 걸었다. 그렇게 서로 만났다. 둘은 잠깐 울었다. 그리고 이별했다. 마리나는 이에 "우리에겐 특정한 형태의 결말이 필요했다. 이는 매우 인간적인 방식이다. 어떤 면에서는 조금 더 극적이고, 사실 영화 엔딩에 가까웠다"고 했다. 마리나와 울라이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34년 전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1976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마리나, 울라이
마리나는 이곳에서 울라이와 마주했다. 둘은 약속한 듯 사랑에 빠졌다. 마리나는 이해받기 힘든 길을 걸어왔다. 밥 먹듯 나체의 몸을 보였다. 매 공연에서 피와 눈물을 쥐어짰다. 울라이는 서독 출신의 행위 예술가였다. 관습에서 자유로운 보헤미안의 삶을 향유했다. 마리나는 이 사내만이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울라이는 마리나의 도발적인 면에 매력을 느꼈다.
사실 마리나는 누군가에게 쉽게 마음을 여는 이가 아니었다. 마리나에게는 집시 같은 면이 있었다. 한 곳에 천막을 치고 살며 영원히 머무를 듯 정성을 쏟다가 어느 순간 망설임 없이 떠났다. 마리나가 자신의 그런 성향을 부정해도, 실제 삶은 늘 그런 식이었다. 울라이에게 마리나는 자신과 같은 별종이자 연구대상이었다.
두 사람이 1974년에 만났다는 말도 있다.
마리나는 그 해 행위 예술 '요한의 별'에 매달렸다. 자기 민족·국가가 행한 일을 고발하기 위한 작업인데, 자신의 배에 면도칼을 대 사회주의 상징인 별을 그리는 일을 했다. 당연히 출혈이 극심했다. 울라이는 피를 뚝뚝 흘리는 마리나를 보고 감동했다. 그런 울라이가 마리나의 배를 치료해주면서 연인이 됐다는 것이다.
마리나, 울라이
사랑이 내려앉는 순간, 모든 우연은 운명의 탈을 쓴다.
마리나와 울라이 둘 다 생일이 11월 30일이었다. 서로가 그날을 끔찍이도 싫어한다는 점이 비슷했다. 매해 생일이 있는 달력 페이지를 찢는 습관도 똑같았다. 마리나와 울라이는 머리를 길게 길렀는데, 펜이나 젓가락으로 이를 고정하는 습관조차 동일했다. 마리나에게 울라이는 신이 준 선물 같았다. 울라이만 있다면 지독했던 삶도 살아갈 수 있을 듯했다. 둘은 쌍둥이처럼 똑같은 옷을 입었다. 말투와 걸음걸이도 같아졌다. 연인이자 친구, 동료의 관계는 영원할 듯했다.
실제로 마리나와 울라이는 12년간 작품 14편을 함께 했다.
마리나·울라이, 정지된 에너지
대표작은 1980년 '정지된 에너지'다.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열린 이 행위 예술에는 마리나와 울라이가 함께 등장한다. 마리나는 활을 쥔다. 울라이는 그 활에 걸린 화살이 마리나의 심장을 향하도록 활시위를 당긴다. 서로 당기는 힘 탓에 둘의 몸은 뒤로 기울었다. 울라이는 힘만 살짝 빼면 마리나를 죽일 수 있었다. 서로는 온 정신을 집중해 서로를 살렸다.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타자에 대한 신뢰를 증명했다.
마리나·울라이, Death Self
앞서 1977년에는 'Death Self'를 선보였다.
마리나와 울라이가 둘의 입을 붙인 채 서로의 숨으로 호흡하는 행위 예술이었다. 두 사람은 17분 뒤 이산화탄소 질식으로 기절했다. 같은 해 '측정할 수 없는 것'도 공개했다. 벌거벗은 마리나와 울라이가 좁은 출입구에 섰다. 사람들이 지나가려면 이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야 했다. 두 사람 중 누구 몸과 더 많이 닿을지는 자유였다. 이 행위 예술은 6시간 동안 이어질 계획이었지만, 경찰이 다급하게 뛰어들어 3시간 만에 끝났다.
마리나·울라이, 시간에서의 관계
마리나·울라이, AAA-AAA
이 밖에 마리나와 울라이는 둘밖에 할 수 없는 작품들을 고안했다.
16시간 동안 서로의 머리카락을 포니테일로 묶은 채 등을 맞대고 있는 '시간에서의 관계'(1977), 마주 서서 입을 벌린 채 긴 소리를 내며 다가가는 'AAA-AAA'(1978) 등이다. 그 사이 둘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가 커플이 됐다.
마리나와 울라이는 서로를 택한 데 대해 후회가 없었다.
평생 똑같은 별, 똑같은 구름을 보며 살아야 할 사이였다. 똑같은 책을 읽으면 분명 똑같은 감동을 할 사이였다. 가끔 누추하고 아팠고, 때때로 소리치며 싸웠지만 그뿐이었다. 그렇게 이들은 1980년, 만리장성을 놓고 '더 러버스'를 기획했다. 서로가 어떤 운명을 맞을지 모른 채. 핑크빛을 꿈꾼 '더 러버스'의 색이 어떻게 변할지도 모른 채 손을 맞잡았다.
64년 전 : 유고슬라비아
'정말로 못하겠다'는 말을 하는 이는 주의 깊게 봐야 한다.
그런 이는 종종 룰을 과감하게 어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다짐마저 깨부수는 일을 겪었다'는 식의 드라마 한 편을 읊으면서. 사실 마리나는 자신이 누군가를 영혼을 다해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마리나가 머문 곳은 대부분 폐허였다.
마리나의 아버지와 어린 시절 마리나
1946년 유고슬라비아.
그 해 마리나는 태어났다. 쉽게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막이 올랐다. 집안은 심상치 않았다. 할아버지는 세르비아의 그리스도 정교회 대주교였다. 부모님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파르티잔(partisan)이었다고 한다. 마리나가 어린 시절 배운 교육 대부분은 종교와 공산주의에 대한 희생이었다. 마리나의 아버지는 가정불화로 1964년에 집을 나갔다. 샴페인 잔 12개를 깨뜨리고 난 뒤였다. 마리나의 어머니는 남은 자식들을 더욱 통제했다. 마리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끔찍한 결혼 생활을 했다. 어머니는 나와 내 동생을 군대식으로 통제했다"고 회고했다. 마리나를 놓고 어머니는 "왜 잘난 척이냐"며 종종 구타했다. 마리나는 29세까지 어머니와 살았는데, 통금 시간은 늘 오후 10시였다.
하지만 역사 속 대부분 혁명이 그랬듯, 통제와 억압은 아이러니하게 강렬한 자유를 낳는다.
마리나는 그림의 매력에 푹 젖었다. 붓과 색연필을 들면 통증이 옅어지는 듯했다. 그곳에선 늘 자유였다. 사회주의 혁명용 트럭을 본뜬 장난감 두 개가 충돌하는 그림도 서슴지 않게 그렸다. 마리나는 캔버스에 만족하지 못했다. 더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마리나는 무작정 군 기지로 찾아가 "연기로 하늘에 그림을 그리겠다"며 비행기에 타겠다고 요청했다. 군은 마리나를 미친 사람으로 보고 무시했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마리나는 굴하지 않았다.
마리나의 비정상적인 인내력 또한 통제와 억압의 결과물이었다. 마리나는 자기 몸을 캔버스처럼 다루기로 했다. 내 몸이야말로 자유의 극치였다. 마리나는 1973년 영국 에든버러에서 첫 행위 예술 '리듬 10'을 선보였다. 준비물은 칼 20개와 녹음기 2개였다. 마리나는 펼친 손의 손가락 사이로 리듬감 있게 칼날을 찔렀다. 러시안룰렛 같았다.
마리나는 칼에 베일 때마다 통증을 참고 새 칼을 꺼냈다.
마리나는 스무 번 베였다. 이 작업 소리는 녹음기에 고스란히 담겼다. 마리나가 녹음기를 되감아 처음부터 재생했다. 섬뜩한 칼 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마리나는 그 소리에 맞춰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당연히 그럴 수 없었다. 실수가 이어졌다. 자유를 움켜쥐었지만, 이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안절부절못하는 자화상을 표현한 듯했다.
화제를 몰고 온 행위 예술 '리듬 0'은 1년 뒤에 이뤄졌다.
테이블 위 72가지 물체를 원하는 대로 저에게 쓰세요.
퍼포먼스. 나는 객체입니다.프로젝트 중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은 저에게 있습니다.소요 시간 : 6시간 (오후 8시~오전 2시)
마리나는 관객에게 이 안내문을 띄운 채 가만히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꽃, 꿀, 빵, 향수, 와인, 깃털, 포도알 등 소위 쾌락의 도구, 칼, 채찍, 가위, 면도날, 금속 막대기, 권총과 총알 등 이른바 파괴의 도구가 올라왔다. 시작은 조용했다. 사람들은 잠잠했다. 이대로 끝날 듯했다. 한 사람이 마리나에게 꽃을 줬다. 그녀의 입술에 살짝 키스했다. 마리나는 가만히 있었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리듬 0
이 행동이 도화선이었다.
여태 눈치 보던 사람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칼로 옷을 찢었다. 드러난 살에 상처를 냈다. 일부는 거기서 흘러나온 피에 혀를 댔다. 총이 머리에 겨눠졌다. 손가락이 방아쇠에 놓이려고 할 때 사람들은 서로 다투기도 했다. 마리나는 통증을 견뎠다. 몇몇 사람들이 마리나를 들어 올려 테이블에 눕혔다. 고작 3시간이 흐른 즈음 마리나는 벌거벗겨졌다. 4시간쯤 지났을 땐 마리나의 목과 배 등에 상처와 낙서가 가득했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리듬 0
약속한 시각이 지났다.
마리나가 일어섰다. 관객을 향해 걸었다. 이들은 마리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모두 도망쳤다. 마리나는 '리듬 0'을 통해 도덕과 규범, 즉 어느 정도 '군대식 통제'를 받는 인간에게 감춰진 욕망과 잔혹성을 폭로했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리듬 0
"신은 제 아버지와 닮았어요. 제 아버지 역시 저를 침울하고 엄격하게 다뤄야 한다고 믿었지요. 하지만 아버지는 저를 어른스럽게 만들지 못한 채, 조숙하고 반항적인 성격으로 만들었어요. 아버지는 저를 사랑과 부드러움으로 정말 쉽게 다룰 수 있었을 거예요. 저는 순했거든요. 정도 많고, 눈물도 많았어요." 마리나의 이 행위 예술은 독일 작가 루이제 린저의 소설 '생의 한가운데'의 주인공 니나 부슈만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마리나는 그 누구도 자기 삶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괜찮았다. 부모님에게서 엿본 결혼 생활은 끔찍할 뿐이었다. 아이를 갖는 일조차 과분했다. 불굴의 의지로 삶을 헤쳐왔다. 몸의 통증처럼 마음의 통증도 늘 그렇게 참으면 되는 일이었다. 상관없었다. 지금 이대로면 충분했다. 울라이. 울라이의 그 천진난만한 파란 눈을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64년 후 : 미국 뉴욕
하나, 둘, 셋….
마리나는 머릿속으로 숫자를 재차 헤아렸다. 다시 봐도 이 남성은 울라이였다. 22년의 긴 세월을 품은 울라이였다. 푹 팬 주름살이 보였다. 구겨진 귓불이 보였다. 왜소해진 어깨가 보였다.
마리나, 울라이
마리나는 '더 러버스'를 마친 이후 삶을 떠올렸다.
가슴 한쪽이 텅 빈 듯했다. 명품 부티크에서 비싼 옷과 신발을 왕창 샀다. 참고 억눌렀던 일을 닥치는 대로 저질렀다. 그런데도 허전했다. 잃어버린 사랑도 사랑이었다. 통증은 좀처럼 옅어지지 않았다. 결국 참아야 하는 일이었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발칸 바로크
마리나는 예술에 더욱 매달렸다.
마리나는 1990년대 발칸 반도에서 발생한 이른바 '인종 청소' 사건을 참고해 나흘간 1500개의 피 묻은 소뼈를 닦았는데, 이 행위 예술 '발칸 바로크'로 1997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전쟁의 참상을 신랄하게 알린다는 평이었다. 마리나는 피투성이의 암호랑이 같았다. 아프고 지친 상태였지만, 본능이 이끄는 사냥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22년을 더 살아왔다.
울라이의 삶도 달라졌다. 울라이는 술과 마약에 빠져들었다. 정신 차려보니 파멸의 구렁텅이 입구까지 와 있었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예술가가 여기 있다(마리나 아브라모비치와의 조우)
마리나는 울라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마리나는 이번 통증만은 참을 수 없었다. 엄마에게 맞을 때도, 칼로 손가락을 찌를 때도, 면도날로 배를 가를 때도, 총구가 목을 찍어누를 때도, 2500㎞의 길을 걸을 때도 통증을 참았지만 이번만은 견딜 수 없었다. 메두사를 본 듯 굳어있던 마리나는 그렇게 '규칙'을 깼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였다. 한겨울에 꽃비가 내릴 일이었다.
울라이는 마리나가 내민 손을 보고 옅게 웃었다. 울라이는 몸을 숙여 마리나의 손을 꼭 쥐었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누구도 마리나가 규칙을 깬 데 대해 비난하지 않았다. 둘은 그 직후 다시 헤어졌다. 마리나는 울라이의 뒷모습을 보며 쏟아지는 눈물을 닦았다. 마리나는 그 일을 돌아보며 "울라이와의 만남은 작품이 아니라 내 인생 그 자체였다.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다.
마리나, 울라이
마리나와 울라이는 그 후 종종 마주했다.
둘은 마음 맞는 친구로 소통했다. 두 사람은 저작권 문제로 소송을 벌이기도 했지만, 함께 보낸 시간 중 대부분은 웃으며 보냈다. 2020년, 울라이는 림프계 암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76세 나이에 눈을 감았다. 마리나는 "그의 죽음을 알고 커다란 슬픔에 잠겼다. 그는 뛰어난 예술가면서 한 인간이었고 그가 몹시 그리울 것이다. 그의 예술과 유산이 영원히 살아있으리라는 사실에 위안을 얻는다"고 추모했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마리나는 만 75세의 나이로 지금도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마리나에게는 '행위(공연) 예술의 대모'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어떤 이들에게는 신적 존재로,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악마의 대리인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마리나는 자신을 전사로 칭하고 있다.
마리나는 8년 전 국내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예술가는 전사가 돼야 한다. 전사의 역할은 새로운 영역을 정복하는 건데, 이는 스튜디오 아트로 충분하지 않다. (…) 빵을 굽는 사람이라면 늘 마음을 모아 자기가 만든 빵이 세상에서 파장을 만들고, 역할을 하며 퍼져가는 데 염두에 두고 깨어있는 시간으로 사는 것이다. 그게 전사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