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최초로 통일하고 황제라는 직위를 세계 최초로 사용한 진시황(始皇帝, BC 259~210)은 유년시절 어두운 그늘이 많았다. 그의 아버지는 전국시대 진(秦)나라의 군주인 장양왕(莊襄王)이었다. 당시 장양왕은 조(趙)나라에 볼모로 붙들려 있었는데, 거상 여불위(呂不韋)는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애첩인 조희(趙姬)를 장양왕에게 바치고 아직 후계자로 지명되지 않았던 그를 재위에 올려놓았다. 진시황은 타국에서 태어나 어머니와 단 둘이 살면서 생사의 관문을 시도 때도 없이 넘나들다가 13세에 아버지인 장양왕이 죽자 재위에 올랐다.
그런데 남편을 잃은 젊은 과부 어머니는 젊은 혈기를 다스리지 못하고 진시황의 생부인 여불위와 옛정을 되살리는 불륜에 탐닉했다. 생부인 여불위는 성장해 가는 아들의 시선이 두려워 과거 자신의 애첩이었던 장양태후(庄襄太后)와의 관계를 끊으면서 자신을 대신할 노애(嫪毐)라는 건장한 사내를 갖다 바쳤다. 태후는 이 사내와 마구잡이로 놀아났고 자식을 둘이나 낳았다. 점점 간이 커진 어머니와 사내는 급기야 아들의 권력까지 넘보기 시작했고 아들 진시황은 이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진시황은 또 암살 노이로제에 시달렸다. 무려 세 차례나 암살 위기를 넘겼다. 이 때문에 자신의 침소를 절대 비밀에 붙이는 등 인간을 불신하는 성향이 그를 지배했고 결국 인간의 역할이나 작용보다는 시스템을 더 믿는 쪽으로 발전했다. 이렇듯 진시황은 그 자체로 콤플렉스 덩어리였다. 아버지의 사랑을 거의 받지 못한 채 최고 권력자에 올랐고 어머니에 대해서는 극도의 증오심을 품게 됐다. 실세 여불위에 대해서는 늘 두려움을 느끼며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의 난잡한 성 생활은 어머니는 물론 모든 여성에 대해 극도의 환멸감을 갖게 만들었다. 그가 평생 정식 황후를 두지 않은 것도 이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의 성격은 우울하고 음침했다. 유년기를 늘 혼자서 보낸 탓에 어둡고 생각이 많았다. 모든 것을 혼자 생각했고 상상을 통해 미래를 시뮬레이션하는데 익숙했다. 상의할 대상도 대화 상대도 없었다. 독단적 성격의 형성은 기정사실이었다. 암살 위협도 그의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어둡고 우울한 성격에 보태어 아무도 믿지 못하는 극도의 신경질적인 의심증까지 형성된 것 같다. <사기> ‘진시황본기’에 따르면 함양 부근에 엄청난 규모의 휴식 겸 놀이공간을 만들어 놓고 자신이 행차해 머무를 경우 그 거처를 누설하는 자에는 모두 사형에 처했다고 한다. 진시황의 암살 공포심과 의심증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자신을 짓누르는 모든 압박과 스트레스를 일로 풀려고 했다. 매일 업무량을 정해 놓고 그것을 다 하지 못하면 잠도 자지 않았다는 기록은 그가 확실히 워크홀릭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천하통일 이후에는 자신의 제국을 작동시키기 위한 시스템 마련에 심혈을 기울였고 그 시스템을 몸소 점검하기 위해 엄청난 규모와 장기간에 걸친 제국 순시를 햇수로 13년 동안 다섯 차례나 단행하는 의욕을 보였다. 한차례 순시를 나가기 위한 준비와 그 규모 및 기간을 감안하면 순시에서 돌아오자마자 바로 다음 순시를 준비했다는 것이고 통일 후 죽기 전까지 거의 절반 가까이를 외부에 있었다는 뜻이 된다.
진시황과 관련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 중 하나가 앞서 잠깐 언급한 대로 정식 황후를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진시황본기>에도 여성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생모를 가리키는 ‘여불위의 첩’이란 대목과 ‘모태후의 죽음’ 정도가 거의 전부다. 기록의 한계가 있겠지만 진시황의 여성 혐오증을 입증하는 간접 증거가 될 수 있다.
생모를 제외하고 진시황과 관련된 여성이라면 <화식열전>에 짤막하게 기록돼 있는 과부 청(淸)이 전부다. 그 기록을 보자. 파(巴) 지역에 청이라는 과부가 있었다. 조상이 단사(丹砂)를 캐는 광산을 발견해 몇 대에 걸쳐 이익을 독점해 왔고 이로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가산을 소유하게 됐다. 청은 과부의 몸으로 가업을 잘 지키고 재물을 이용해 자신을 지키며 살았다. 그래서 진시황은 그녀를 정조가 굳센 부인이라 해 손님으로 대우했고 또 그녀를 위해 여회청대(女懷淸臺)까지 지어 주었다.
“나(오지현의 목축업자)는 비천한 목장주였고 청은 외딴 시골의 과부에 지나지 않았으나 만승의 지위에 있는 황제와 대등한 예를 나누고 명성을 천하에 드러냈으니 이 어찌 재력 때문이 아니리오!” 위 기록의 요점은 이렇다. 오늘날 사천성 지역에서 단사 광산업을 하는 과부 청은 가업을 잘 유지하면서 자기 몸도 잘 지켜내 진시황으로부터 정조가 굳센 여인으로 칭찬을 받은 것은 물론 황제와 대등한 예를 나누는 손님과 같은 대접을 받았다. 더욱이 진시황은 그녀의 정절을 기념하는 ‘여회청대’ 또는 ‘회청대’라는 건물까지 지어줬다.
진시황의 기록에서 어머니를 제외하고 여성에 관한 것은 과부 청이 거의 전부다. 그만큼 과부 청에 대한 진시황의 관심이 남달랐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진 것도 모자라 여불위와 간통하고 나아가 천한 노애와 음탕한 짓을 아무렇지 않게 저질렀던 어머니와는 너무 대비되는 여인 앞에서 진시황은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여인상을 발견했던 것 같다. 혼자의 몸으로 정조를 굳게 지키며 당당하게 가업을 지켜내는 청의 모습이 진시황에게는 신비롭게 비쳤을 것이다. 그래서 특별히 ‘여회청대’까지 지어 그녀의 정절을 기렸던 것 아니겠는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진시황의 또 다른 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