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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이의 일기 - 2003년 7월 어느 날
"그것 참, 시원하다."
아빠가 하시는 말씀이다. 나는 '시원한 것이라니! 혹시 나 몰래 맛있는 팥빙수라도 들고 있으시지 않나?'하고 아빠 곁으로 달려가 보았다.
"아빠, 뭐예요?"
나는 입맛을 쩝쩝 다시기까지 하며 거실로 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더워서 머리가 무겁고 답답하던 참이었다. 아빠는 그림책을 보고 계셨다.
"응? 폭포로구나! 이리 와 이것 좀 봐라."
'폭포'는 내 별명이다. 박연이라는 이름과 폭포라는 별명은 잘 어울린다. 아빠가 보고계셨던 그림도 바로 박연폭포였다.
"아니, 아빠가 시원하다고 하신 것이 겨우 이것이었어요?"
나는 실망감으로 힘이 쭉 빠졌다.
"이것 봐라. 이 물줄기를 보고 있으니 더위가 싹 가시지 않니?"
아빠는 오싹한 듯한 표정을 지으셨다. 그런 아빠가 썰렁하게 느껴졌다.?
"누나, 내가 퀴즈 하나 낼까?"
어느 새 연우가 촐랑거리며 참견한다. 나는 더위로 짜증이 나서 멀뚱하게 바라보았다.
"우리 나라에 있는 3 대 폭포가 뭐야?"
이런 질문은 연우의 특기다. 연우는 일종의 '살아 있는 잡학 사전'이라고 할까? 그걸 내가 알 턱이 없다. 물론 박연폭포 정도야 당연히 들어 가겠지. 나는 시치미를 딱 떼고 말했다.
"다 알고 있으니, 너 먼저 말해 봐라."
"에게, 그것도 모르냐? 개성의 박연폭포, 금강산의 구룡폭포, 설악산의 대승폭포잖아."
연우는 연신 히죽거린다. 나는 점점 더워져서 씩씩거렸다.
"자, 이리 가까이 오렴. 아빠가 시원한 이야기 하나 해 주마."
아빠는 그림을 앞에 펴놓으셨다. 다음은 아빠 이야기를 옮긴 것이다.
옛날 개성 땅에 박 진사라는 선비가 살고 있었단다. 훤칠한 미남에다 피리를 잘 불기로 소문이 났지. 하루는 날이 아주 화창하게 좋아 홀어머니를 모시고 폭포에 가려고 했지.
"어머니, 오늘은 날이 좋으니 바람이나 쐬러 가시지요."
"나는 괜찮으니, 너나 갔다 오너라."
몸이 불편한 어머니는 손사래를 치며 이렇게 말했단다. 박 진사는 할 수 없이 친구들을 불러 폭포에 갔지.
깎아지른 벼랑 사이로 떨어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니 온갖 시름이 다 사라졌단다. 박 진사와 그 친구들은 정자에 앉아 시를 짓기도 하고, 물가에 다가가 너럭바위 위로 떨어지는 물보라를 보기도 했단다. 어느 새 박 진사는 피리를 꺼내 불기 시작했지. 구슬픈 피리 소리는 물 소리와 섞여 멋진 화음을 빚어 냈어. 달이 둥실 떠오를 때까지 피리 소리가 이어졌지.
"이제 그만 돌아가세."
친구들이 이렇게 말했지만, 박 진사는 스스로 소리에 취해 일어날 줄 모르고 있는 거야. 지그시 눈을 감고 연주에 빠져 있으니 말릴 수도 없었지. 할 수 없이 친구들이 하나 둘 먼저 하산하기 시작했단다.
그 때 못 속에서 피리 소리를 듣고 있던 용이 박 진사 얼굴을 슬쩍 보았는데,피리만 잘 부는 것이 아니라 얼굴도 준수해서 그만 넋을 잃고 말았지.
"아아, 너무 멋진 분이야. 저런 분과 함께 천 년을 살 수 있다면..."
용은 처녀로 변신해서 박 진사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지. 박 진사는 깜짝 놀랐지만, 용은 태연히 이렇게 말했단다.
"저는 원래 개성에 살았는데, 시끄러운 세상이 싫어서 이렇게 산중에 집을 짓고 홀로 살고 있어요. 우리 집에 놀러 가실래요?"
박 진사는 이 예쁜 여인이 이끄는 곳으로 따라갔대. 귀신에 홀린 듯이 말이야. 근데 용의 집은 바로 물 속이었던 거야.?
박 진사의 어머니는 아무리 기다려도 아들이 돌아오지 않자, 이 폭포에 와서 그만 아들 뒤를 따라 몸을 던지게 되었단다. 사람들은 이때부터 이 폭포를 '박연폭포'라고 부르기 시작했지. 박 진사가 연못에 빠진 폭포라고 말이야.
/박영대(화가)
출처: 소년한국일보 http://kids.hankooki.com/edu/culture_symbol.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