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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金海金氏 安敬公派 牙山公 서울 宗親會 원문보기 글쓴이: 너털웃음(김은태)
1. 김대건 신부 가문의 가계
김해김씨는 가락국을 설립한 김수로왕의 후손들이다.
그후 마지막 10세 양왕(휘 구형)이 신라 법흥왕 때 신라에 귀의하여서
12세 서현의 아들인 삼국 통일의 큰공을 세운 13세 김유신을 중시조로 한다.
한편 그의 후손들이 크게 번성하여 현재 약 7,000,000여 명을 헤아리고 있으며
금령군파를 비롯하여 142개의 파가 분파되었다.
그중에도 금령 군파의 파조인 김목경계의 경 4파(영견, 영서, 영정, 영순)가 제일 많은 숫자를 차지하고 있다.
파조인 금령군 김목경은 고려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품계가 三重大왕에 이르렀다.
충혜왕때 조돈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금령군에 봉해졌으나 국사가 날로 어지러워짐을 보고
정당 문학 이조연과 함께 임금에게 간청했으나 듣지 않자 속리산에 들어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여생을 마쳤다.
김대건 신부의 가문은 김목경의 7대손인 김영정을 파조로 하는 안경공파이다.
그런데 안경공 김영정은 1475년 문과에 급제하여 목천 현감을 거쳐 정언, 지평을 역임하였고,
1497년 대사련에 승진 다음해 우부승지를 거쳐 대사헌에 올랐다.
1500년에 영돈영 부사가 되고 , 1513년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
사망후 이조판서에 추정되었다.
그리고 안경공의 3대손인 10세 김희현이 이조명종때 아산 현감을 지냈다.
그러므로 그를 파조로하여 안경공파 중에서 아산공파로 분파했다.
아산공 김희현의 아들이 7명이며 장자인 11세 의직은 무과에 급제하여 가선대부 충청도 병마절제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아들 5명(수관, 수광, 수황, 서인 , 수완)을 두었다.
그런데 김대건 신부의 가문은 다섯째 아들 수완(守完의 자손이다.
12세 수환은 사헌부 가찰, 통훈대부, 적성현감을 지냈다.
그리고 그는 아들 3형제(대훈 , 대영, 대홍)을 두었다.
김대건 신부 가문은 둘째 대영의 자손이다.
13세 대영은 직장 벼슬을 했으며 그의 묘는 충청도 홍주군 홍북면 방하리에 있다.
그러나 그의 부인 파평윤씨의 묘는 예산군 신암면 계촌리 청용곡에 있다.
이때부터 이 집안의 선산을 이곳에 정하고 대대로 그 후손들이 이곳에 묻혔다.
대영의 아들 14세 정하 15세 희서이며 희서의 아들이 16세 운조와 귀조가 있다.
그런데 첫째인 운조 字는 억금이고 세례명은 비오이며 진후는 총명인 것 같다.
바로 이분이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이며 이 집에서 이때부터 천주교를 믿기 시작했다.
그는 통정대부로 나라의 관직이 있으며 재산이 부유한 지방 토호였다.
그런데 그의 집안에 처음 천주교를 받아들인 것은 김운조의 아들 4명(종현, 택현, 한현, 희현)중 맏이인 종현과 둘째 택현이며
그 형제는 1784년부터 1785년 3월 사이에 [가성직단]의 충청도 사도 이존창이 내포 지방에서 포교활동을 활발히 할 때
이존창으로부터 신앙을 권유받아 그와 함께 서울 명례방 김범우 토마스에게 배워서 신앙을 받아들임으로 부터이며
그로 인해서 셋재 한현은 회현등 아들들이 천주교에 입교하였고 부친인 김운조는 나라의 관직에 있었으므로
입교를 하지 않고 있다가 50세 이후인 1788년경에 "비오"를 본명으로 천주교에 입교했다.
이때는 바로 홍낙안이 두 번째로 천주교를 박멸하려고 상소를 올리던 때였다.
그후 그는 제사 문제로 일어나 1791년 신해 박해떄 체포되어 풀려난 후 그뒤로 5-4차례 체포 되었다가 석방되었는데
홍주, 저주, 공주 감영옥을 드나들 때 무서운 고문을 당했으나 꿋꿋하게 신앙을 증거 하다가 풀려났다.
당시의 사정을 교회 사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조선 최초의 신부 가정의 김 안드레아 할아버지
김(진후)비오도 재판관들 앞에서 똑같은 꾸준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순교의 영광은 얻지 못하였다.
1801년 신유대박해 때는 다시 체포되어 배교한다는 말을 하고 풀려나서 유배를 갔었다.
그러나 그는 입으로만 배교했을 뿐 마음으로 배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시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1805년 또 다시 잡혀서 해미 감옥에 압송되었다.
이번에도 사형 언도를 받지 않은 체 10년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공공연하게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므로 그의 굳은 신앙은 옥리들에게 까지 감화를 주었다. 그러다가 1814년 10월20일 76세로 순교헀다.
한편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김운조(진후, 비오)의 아들 17세인 4현제는 모두 열심히 천주교를 믿어서 맏이 종현과
둘째 택현은 이존창으로부터 권유받아 1784-1785사이에 그와 같이 서울 명례방 김범우 토마스에게 교리를 배워 세례 성사를 받은 후
맏이 김종현은 아마 주문모 신부가 피신 겸 전교 여행차 여주의 윤유일 집과 전주 초남의 유항검의 집 그리고 고산 남포, 공주 온양등
여러 고을과 내포에 갔을 때인 1788년경 주문모 신부에게 십자고상과 성화를 받고서 전교활동을 열심히 하다가 1801년 신유박해 후에는
경상도 전라도를 다니면서 열심히 포교활동을 하였다.
그러다가 아마 1815년 정해 박해때 온 집안이 피난을 다녔다.
1824년경에 세상을 떠났다.
둘쨰 택현은 이존창의 형님의 딸인 이멜라리아와 혼인을 했다.
그리고 그곳 고향에서 계속 신앙생활을 하다가 1827년 정해박해때 가족들을 데리고 서울 청파동으로 갔다가
다시 경기도 용인 한덕골 신자촌으로 피난을 갔다.
거기서 아주 가난한 생활 가운데 글방 훈장을 했으며 1830년 4월 7일 지방 박해때 세상을 떠났다.
가문에서는 그가 박해 중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서 매를 맞고 풀려난 후 다시 포졸들에게 쫓겨 산중으로 헤매다가
연로한 몸에 매를 맞은 여독으로 산중 어느곳에선가 굶어서 죽었다고 한다.
한편 둘째 아들 제린은 한더골에서 얼마간 살다가 산 넘어 골배 마을로 이사를 갔다.
셋쨰 김한현은 형제중에서 신앙 생활에 제일 열심했던 것 같으며 그는 1791년 신해 박해 이후 집안이 천주교 신앙으로 말미암아
부친이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는 등 갖가지 고통과 어려움이 닥치자 세상을 떠나 더욱 조용히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해서 1798년에
가족들을 데리고 경상도 일월산밑의 우련전으로 가서 17년동안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1815년 을해박해 때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안동 진영을 거처 대구 감영 옥으로 이송되어 20개월 동안 갇혔다가 1816년 11월 1일 대구 관덕정에서 순교했다.
넷째 회현은 아마 맏이 종현 가족들과 함께 그냥 고향 솔뫼에 살면서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역시 1827년 정해 박해 때
혹은 1839년에 기해 박해 때에 세상을 떠났다. <용인 천주교회사>와 구전에는 그가 순교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18세 제(濟) 항렬에는 맏 집안 종현의 자녀는 2형제(제광, 제맹)이며 제광은 고향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1839 기해 박해 때 홍주로 피난을 가서 부인 경주김씨가 죽고 그는 아마 다시 박해 후에 고향에 돌아왔는지?
1863년에 세상을 떠났다.
한편 동생 제맹 가족들은 1815년을해 박해를 만나 목천으로 피난 가서 그 이듬해인 1816년 부인이 죽고
그는 다시 고향에 돌아와서 살았다. 둘쨰 집인 택현의 자녀는 3형제(제봉, 제린, 제철)다.
첫째 아들 제봉은 고향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1821년 일찍 세상을 떠나고
그의 둘째 아들 제린(제준 이냐시오)은 김대건 신부의 부친으로 1827년 정해 박해때 부친과 함께 가족들을 데리고
경기도 용인 한덕골로 가서 피난 살이를 하면서 은이 공소 회장을 했으며 얼마 후에는 그의 노모와 가족들은 산 넘어
골배마을로 이사를 했다.
1836년 5월 경에 모방신부가 와서 판공성사를 준후 아들 제복(대건)을 신학생으로 선발했다.
그후 1839년 기해 박해 때 체포되어 서울 서소문 형장에서 순교했다.
1984년 103위 성인으로 시성 되었다.
글의 모친 이멜라리아는 1841년 혹은 1851년 세상을 떠나고 부인 고우술라는 순교는 하지 않고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1864년 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셋째 아들 제철은 1827년 정해박해때 형님 제준의 가족들과 함께 용인으로 피난 갔다가 1839년 기해 박해 때
다시 충청도로 온 것 같다.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관직에 나가 검동지 통정 대부였으며 후손들은 아산 현감을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확실치 않다. 안동 김씨 세도때인 철종 임금 때는 천주교를 묵인하는 상태여서
천주교 신자들도 관직에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묘는 선산에 있지 않고 아산군 인주면 밀두리 신대에 있다.
셋째 집인 한현의 아들은 둘쨰 부인에서 난 제덕 뿐이며 그는 부친이 을해박해로 1816년에 순교를 당할 때 불과 4세의 어린 나이였다.
그래서 부친이 대구 감영 곡에 갇혔을 때 얼마 동안 다른 신자들과 함께 칠곡 신나물골에서 부친의 옥바라지를 위해서 어머니와 함께
살다가 다시 아마 공주 무성산으로 갔다가 또 다시 1866년병인 박해때 전라도 완주군 옥배에 피난 가서 살았다.
그러다가 거기서 1888년에 세상을 떠났다.
한편 종한 안드레아의 전처 부인의 딸인 김재신(데레사)은 부모님들과 함께 1798년 경상도 일월산밑의 우련진으로 갔다가
어머니가 사망한후 외가댁에서 자라 17세에 열심한 신자인 손연욱 요셉과 혼인하여 살다가
1817년에 손연욱이 충청도 베나다리에서 포졸들에게 잡혀 해미 감옥에 갇혔다가 1824년 순교하였다.
그리고 김데레사는 1839년 기해박해때 서울서 순교하였다. 그리고 1984년에 103위 성인 품에 올랐다.
넷째 집인 순교자 희현의 아들은 외아들 제항(루도비꼬)뿐이다.
그런데 제항(명집 루도비꼬)은 충청도 솔뫼에 살다가 박해를 만나 온양배여동에 살았으며 1866년 병인 박해때 포졸들에게 잡혀가서
그해 6월 6일 공주 감영서 순교했다.
그런데 이때 그와 같이 순교한 스테파노가 혹시 그의 가족이나 친척이 아닌지 모르겠다.
19대인 "식植" 자字 행렬에는 제일 큰집인 제광의 아들인 경식은 1839년 (기해)박해 때 홍주로 피난을 가서 살다가
부인 경주이씨는 1865년에 세상을 떠낫다.
그러나 본인은 언제 어디서 죽은지 모른다.
혹시 박해중에 치명을 당했는지 알 수 없다.
그는 외아들 현채를 두었다.
그는 병인 박해를 피해 전라도 정읍 먹구니에 와서 부인 진주강씨 와 동정 부부생활을 하다가 그곳에서 1888년에 세상을 떠났다.
양자로 큰집의 양배를 두었다. 양배의 아들 2명(종락마테오, 종기 요셉)이 있다.
종락의 아들 6명(병태, 경태, 윤태, 용태, 영태, 준태)이 있다. 둘째 종기의 아들은 영태다.
둘째 제맹의 아들인 제식은 아마 박해를 만나 여러 곳으로 피난을 다니다가 1852년 진천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편 그의 아들은 현윤이고 현윤의 아들은 3명(양배, 형배, 경배)이며 맏아들 양배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큰집인 현채 앞으로 양자를 갔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재식의 부인 경주최씨는 장부가 죽은 후에 자녀 현윤과 함께 3년동안 산속을 헤매며 여러곳으로 피난을 다니다가
아마 1857년 이전에 전라도 변산반도의 불모골에 안착해서 죽고 대대로 그 후손들이 이곳에서 병인 박해가 끝날 때 까지 살다가
그후 부근의 등용리로 나와서 등용리 공소를 세워 1926년 본당으로 승격시켰다.
이것이 전주 교구 부안 본당의 시작이다.
그 이유는 1857년 9월에 최양업신부가 이곳 불무동에 와서 성사를 집행하면서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 전교회의 르그레조아 신부와
리보아 신부에게 두통의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최양업 신부와 위의 경주최씨 부인은 아마 친척인 것 같다.
둘째 집인 택현의 첫째 아들 재봉은 고향에서 살면서 신앙 생활을 하다가 31세로 1821년에 일찍 세상을 떠나자 아들이 없으므로
사후에 제철의 둘째 아들 근식을 양자로 삼았다.
그런데 김근식 베드로는 박해 중에 은진 강경리 등에 피난을 다니다가 다시 공주 금동으로 피난을 가서 살았으며 1866년 병인 박해를
만나서 서울 포졸들이 온다는 말을 듣고 그의 친형인 의식의 가족들은 피난을 하도록 권면한 후에 자기는 자진해서 체포되어 공주 감영으로서 그해 11월에 순교했다. 그때 나이는 43세였다.
또한 택현의 둘째 아들인 제준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1839년 기해 박해 때 서울에서 순교하였고 제린의 맏아들인 지식은
잘 아는 바와 같이 부친과 함께 용인 골배 마을에 살면서 14세까지 한학을 배웠다.
1836년 은이 공소에서 모방 신부에게 "안드레아" 본명으로 세례 성사를 받고서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최방재, 최양업과 함께
그해 12월에 서울을 출발하여 중국 마카오에 도착해서 신학 공부를 한후 1845년 부제 때 조선에 입국하여 주교와 성직자를 모실
준비를 한후 서해 바다로 풍란을 만나 갖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중국 상해에 도착하여 그해 8월 17일에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 집전으로 사제 서품을 받아 한국인의 첫 방인 사제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해 8월31일에 다시 페레올 주교, 다볼뤠 신부와 함께 서해 바다로 본국으로 돌아와 서울과 경기도
특히 고향 경기도 용인 지방을 중심으로 전교를 하다가 1846년 성직자 영입을 위한 바다의 뱃길을 개척하기 위해서 서해바다에
나가 백령도에서 편지를 전하고 순위도를 돌아와 며칠 머무르는 사이에 포졸들에 체포되어 해주 감영을 거처 서울로 압송되어
신문을 받은 후에 사형 선고를 받고 그해 9월16일에 서울 새남터에서 참수 치명을 당하였다.
그리고 1857년 가경과 1925년 복자품에 오르고 1984년 한국 103위 순교 성인 대표 성인으로 시성 되었다.
한편 김대건 신부의 동생 란식은 1846년 병오 박해 때 형님인 김지식(대건안드레아) 신부가 순교한후 어머니 고우술라 모친을 모시고
경기도 용인 골베 마을에서 어렵게 살다가 모친이 1864년에 죽고 또한 부인 안동김씨가 죽은후 1866년 병인 박해를 만나서
이미 큰집 형제들이 살고 있는 전라도 정읍 산내면 먹구니로 가서 혼자 살다가 1873년에 자녀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김택현의 아들 3형제중 둘째 김제린의 아들 김대건 신부는 1846년 병오 박해때 순교하고
동생 김란식 방지거는 자손이 없이 1873년에 죽으므로 그의 직계 자손은 완전히 자손이 끊어졌다.
그러므로 김대건 신부의 직계 후손들은 아무도 없고 다만 김대건 신부의 사촌 형제인
즉 작은 삼촌 제철의 아들들인 4형제(의식, 근식, 선식, 진식) 후손들만이 있다.
즉 제철의 큰아들 의식은 공주 금동으로 피난을 가서 살다가 1866년 병인 박해 때 동생 근식의 권고로 까족들을 데리고
홍성으로 피난 가서 살다가 거기서 세상을 떠난 듯하다.
그는 아들 현수를 두었다.
현수의 아들은 2명(영배, 윤배)이 있으며 장남 영배의 아들 3명(종석,종선, 종근)이며
한편 현수의 둘째 아들인 윤배는 작은집 진식의 아들 현중이 자녀가 없으므로 양자로 들어가서 아들 종원을 낳았다.
종원의 아들은 4명(선태, 현태, 용태, 성환)이 있으며 맏이 선태는 천주교 대전 교구 사제이다.
둘째 아들 근식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백부인 제봉의 자녀로 양자를 갔으며
공주 금동에 살다가 1866년 병인 박해 때 포졸들에게 잡혀 공주에서 순교했다.
그는 아들 현범이 있으나 자손이 끊겼는지 현재 그 자손들은 찾지 못하고 있다.
제철의 셋째 아들 진식은 아마 1846년 병오박해를 만나 덕산 고을로 피난을 가서 살다가 병인박해 때 해미 포교에게 잡혀서 치명했다.
후손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집을 나갈 때 말을 타고 나갔다가 본인은 감옥에 가고 말만 돌아왔다고 한다."
그의 아들은 4형제 현중, 현성, 현묵, 현근을 두었다.
맏이 현중은 아들이 없으므로 위에서 말한 큰집의 윤배를 양자로 삼았다.
한편 둘쨰 현성은 외아들 영배를 두었으며 영배의 아들은 금철과 종헌이다.
그리고 셋쨰 현묵도 외아들 원배를 두었으며 원배의 아들은 종록과 종운이 있다.
그런데 이 가정에서 대대로 고향 예산군 신암면 계촌리에 살면서 윗대 선산을 고맙게 애써 잘 보호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철의 넷째 아들 선식은 아마 충북 옥천에서 살다가 병인 박해 때 세상을 떠났는 것 같다.
그런데 그가 순교했는지 그냥 세상을 떠났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가 없다.
그러나 순교자일 가능성은 퍽 많아. 후손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어린 아들 현학은 병인 박해 때 부모님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후
문전 걸식을 하고 머슴살이를 하다가 전라도 금산군 진산면 지방리 가세발로 피난을 와서 살다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4형제(경배, 선배, 창배, 흥배)를 두었다.
그의 큰아들 경배는 1939년 50세때에 동생 가족들과 함께 전북 완주군 산관면 마치리로 이사를 갔다.
셋째 집인 한현의 아들 제덕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1815년 을해박해떄 부친 한현이 대구관덕정에서 순교한 후 가족들은 잠시
칠곡 신나무 골에 피신해 있으면서 옥중에 있는 부친을 옥바라지 한후 다시 고향 부근인 충청도 공주 무성산에 살다가 다시
1839년 기해 박해를 만나 여러 곳으로 피신을 다녔으며 1866년 병인 박해 때 전라도 운주군 저고리와 천동산 뒤편에 있는
옥배마을에서 작은집 가족들과 함께 피난을 했다. 그러다가 거기서 1888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후 그의 아들 운식 역시 부친이 옥배에서 세상을 떠난후 얼마간 그곳에 살다가 1905년 세상을 떠낫다.
그리고 바해가 완전히 끝나자 조금 떨어진 전라도 백석 공소 관할의 구저리에 그의 아들 현규가 다른 일가들과 함께 얼마간 살았다.
그러다가 완주군 고산면 소향리 운문 북암으로 가서 살았다.
거기서 다시 곤산면 대야리 신상 부락에서 살다가 전북 이리시의 지밭에 살다가 거기서 죽고 아들 영배는 충북 장호원으로 가서
살다가 후손이 없이 1964년 4월3일 세상을 떠났다.
현재 묘는 감곡천주교 묘지 201호이다.
그러므로 셋째 집 순교자 김종한 안드레아의 후손을 절손되었다.
양자로 작은집 인배씨의 아들 종석을 두었으며 그 또한 그만두고 종석은 해방전에 일본으로 갔다.
넷째 집인 순교자 희현의 후손들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의 아들 제항은 병인 박해 때 온양 배여동에 살다가
공주포교에게 잡혀서 순교헀다.
그의 아들은 2명이 있었는데 맏아들 광식은 부친이 병인박해 때 순교한 후에 박해를 피해 충남 금산군 추부면 와평리로
피난을 와서 살다가 거기서 1885년에 후손 없이 세상을 떠났다.
한편 그의 부인 밀양박씨는 어디서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알수 없지만 묘가 해미에 있으므로 혹시 병인 박해때 순교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후 작은집 아들 현준을 양자로 입양했다. 현준의 자녀는 4명(원배, 인배,춘배,근배)이 있다.
둘째 아들인 경식은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부친이 병인박해때 순교를 하자 가족들을 데리고 전라도 완주군으로 피난을 왔다.
그러나 역시 병인 박해중에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부부가 전주 감영으로 가서 문초를 받았다.
그러나 꿋꿋하게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즉석에서 부부가 다른 많은 신자들과 함께 오랏줄에 목이 졸려 순교를 당했으나 부인은
순교를 하고 그는 극적으로 까무러 쳤다가 다시 깨어나서 큰아들 현준을 데리고 천등산 밑의 전북 완주군 옥배마을에 가서 피난을
하였다.
그리고 둘째 부인과 혼인해서 아들 현동을 낳아서 살다가 거기서 세상을 떠났다.
한편 그의 큰아들 현준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큰형인 광식 밑으로 양자를 시켰다.
그러므로 그의 아들 현동은 부친이 세상을 떠난후에도 계속 옥배에서 살았다.
아들 형배는 그의 가족들과 함께 이리시로 나와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형배의 아들은 종성이고 종성의 아들 4명(경태,인태, 석태, 상태 )이 있다.
이분들의 후손들은 현재 이리시와 서울 부근 등지에서 살고 있다.
한편 선대 16세 운조의 동생 귀조 가정은 그가 41세의 젊은 나이로 1785년에 일찍 세상을 떠났으므로 아마 큰집과 같이
천구교 신앙을 받아들였는지 알 수가 없다.
17세인 그의 아들 관현은 한 살때 부친을 잃고 모친과 함께 솔뫼 부근인 예산군 여사울로 이사를 가서 거기서 아마 신앙을 받아들여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1833년 48세로 세상을 떠나고 그의 슬하에는 아들 2명(제교, 제호)이 있었다.
18세인 큰아들 제교는 계속 여사울에서 살다가 병인 박해 때 본읍 포교에 잡혀서 1차 배교하고 풀려났다가 다시 다른 신자들과 함께
공주 포교에게 잡혀서 1869년 공주에서 순교했다.
그의 아들 복식은 자손이 끊겼는지 현재 그 사정을 알수 없다.
한편 관현의 둘쨰 아들 제호는 박해중에 피난을 다니다가 순교를 헀는지 어떻게 되었는지 알수가 없고
다만 제호의 아들 만식은 1866년 병인 박해 때 어린나이에 홀로 앞에서 말한 친척 중에 맏집에 속하는 현윤 가정이 살고 있는
전라도 변산반도의 불무동으로 왔었다. 거기서 장성하여 경주김씨와 혼인을 하여 아들 현수와 현욱을 낳았다.
그러나 자녀들은 더욱 안전하게 잘 기르기 위해서 전북 정읍군 산내면 능교리로 이사를 갔었다.
그리고 거기서 담배 농사를 해서 크게 성공을 했으나 국가의 전매법이 생겨서 선매하기 위한 많은 돈을 못 받게 됨으로
다시 가난하게 되었고, 그리고 거기서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첫째 아들 현수는 아들 2명을 두었다.
한편 둘쨰 아들 현욱 집은 아들이 2명이 있으며 맏아들 형배는 아들 6명(종주,종환,종범, 종명,종권,종구)
둘째 경배는 아들 2명(종성,종진)이 있다. 이렇게 모두들 조상들로부터 받은 신앙의 유산을 깊이 간직하며 열심히 살고 있다.
이 가문의 가장 큰 특징은 필자가 만나 본 결과 한가정도 빠짐없이 현재까지도 열심히 겸손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