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삶이 있어 그 그늘이 있다.
기준은 늘 옛것에 있다.
기일에 제사가 끝나면 망인의 주발을 뚜껑으로 덮는 것을 보면 분명 우리의 밥그릇에도 애초에는 뚜껑이 있었을 것이다.
아랫목 이불 속에 묻어 놓은 따뜻한 밥 한 주발, 누구를 기다리는 법에는 늘 뚜껑이 덮여있었다.
지금 주발에 담겨서 나를 기다리는 밥은 없다. 우리는 지금 다 밥통이 되었다. 그리하여 아주 생략되었으나 원래는 있던 것이었다.
나 이후의 내 이름 같은 것이겠다
나와 너처럼 대수롭게 살아도 주발과 뚜껑 같은 원래는 있던 무엇이 있다.
1940년 대, 경주에 내려가 박목월과 시를 담론하고 올라온 조지훈이 경주의 박목월에게 보낸다.
완화삼(玩花衫)
- 조지훈
'차운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 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 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답하여 박목월이 쓴 시
나그네
-박목월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멋이 있다. 내 멋이 있다는 그냥 그윽한 멋이다.
많은 사람들이 문학의 가장 아름다운 도입부를 논할 때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雪國)’, 그 ‘국경의 긴 터널을 지나니 설국(雪國)이었다’를 뽑는다.
나는 이 나라 문학의 가장 아름다운 시구(詩句)로 단연코 저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를 뽑겠다.
그것들은 닿지 않는 내 마음 속 이상의 거푸집이겠다.
여기서 ‘완화삼’은 ‘꽃길을 걷는 다림질한 새 모시의 소매’ 쯤 되겠다.
나그네는 영원한 Vagabond이다.
근 한 세기의 시공을 건넌다.
치마
- 문정희
벌써 남자들은 그곳에
심상치 않은 것이 있음을 안다
치마 속에 확실히 무언가 있기는 있다
가만두면 사라지는 달을 감추고
뜨겁게 불어오는 회오리 같은 것
대리석 두 기둥으로 받쳐 든 신전에
어쩌면 신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은밀한 곳에서 일어나는
흥망의 비밀이 궁금하여
남자들은 평생 신전의 주위를 맴도는 관광객이다
굳이 아니라면 신의 후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자꾸 족보를 확인하고
후계자를 만들려고 애를 쓴다
치마 속에 확실히 무언가 있다
여자들이 감춘 바다가 있을지도 모른다
참혹하게 아름다운 갯벌이 있고
꿈꾸는 조개들이 살고 있는 바다
한 번 들어가면 영원히 죽는
허무한 동굴?
놀라운 것은
그 힘은 벗었을 때 더욱 눈부시다는 것이다
“야, 이 가망 없는 놈들아,” 세상에 던지는 문정희의 미늘 없는 낚시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시인이 딴죽을 건다.
팬티 - 문정희의「치마」를 읽다가
- 임보
그렇구나.
여자들의 치마 속에 감춰진
대리석 기둥의 그 은밀한 신전.
남자들은 황홀한 밀교의 광신들처럼
그 주변을 맴돌며 한평생 참배의 기회를 엿본다
여자들이 가꾸는 풍요한 갯벌의 궁전,
그 남성 금지구역에 함부로 들어갔다가 붙들리면
옷이 다 벗겨진 채 무릎이 꿇려
천 번의 경배를 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런 곤욕이 무슨 소용이리
때가 되면 목숨을 걸고 모천으로 기어오르는 연어들처럼
남자들도 그들이 태어났던 모천의 성지를 찾아
때가 되면 밤마다 깃발을 세우고 순교를 꿈꾼다
그러나, 여자들이여. 상상해 보라
참배객이 끊긴.
닫힌 신전의 문은 얼마나 적막한가!
그 깊고도 오묘한 문을 여는
신비의 열쇠를 남자들이 지녔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보라.
그 소중한 열쇠를 혹 잃어버릴까 봐
단단히 감싸고 있는 저 탱탱한
남자들의 팬티를!
그렇다, 공자라도 물어야(問) 대답(答)이 생긴다.
묻지 않은데 대답은 공연하고 대답하지 않을 것을 묻는 것은 공허하다.
반드시 구하는 물음은 선이고 구했으므로 대답은 후이다.
통신용어에 ‘Pair추파수’라는 개념이 있다. 무선통신에서 중계망을 구성하는데 송신과 수신이 영향을 주지 않게 하는데 최소한의 이격을 가지는 두 주파수로 통상 5MHz 를 둔다.
무엇이 있으면 그 곁에는 반드시 무엇이 따른다.
나그네처럼 스스로를 유지하게 하는 그것은 이격을 주는 것이다.
우리의 성(城)도 그러하여, 치마는 제 여자를 가리는 병풍이고 팬티는 저의 남성을 가두는 막무가내의 바자울이다.
그 안은 밖에서는 가늠할 수조차 없는 지밀한 것이다.
아무도 듣지 않으면 종교가 아니듯 누구도 나를 열어 대거리 하지 않으면 시(詩)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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