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블루로드(Blue Road))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고운 모래로 유명한 영덕 장사해변에 들어섰을 때, 짙푸른 동해 바다와 어우러져 주위는 온통 파란 색이었다. 마치 색조의 농도만 달랐을 뿐 한바탕 파란 물감을 풀어놓은 것 같았다.
파란 색은 동양의 주역(周易)에서는 봄(春)이나 나무(木), 동쪽(東)을 상징하는 색이니 마침 금년이 갑진년(甲辰年) 청룡의 해라 그 시작의 의미를 더하는 셈이다. 눈이 시릴 만큼 겨울바다의 첫 인상은 강렬했다.
한편, 파란색은 서양에서는 슬픔이나 자유를 뜻하기도 한다. 슬픔과 자유가 어떻게 서로 연관되는지는 아리송하지만, 이와 관련하여 프랑스혁명 200주년 기념으로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이 만든 영화 '블루(1993)' 가 생각난다. 작곡가인 남편과 딸을 교통사고로 한꺼번에 잃은 슬픔으로 세상과 단절된 생활을 하던 주인공이 남편에 숨겨진 애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계기로 마음의 족쇄를 털어버리고 새 생활을 시작한다는 이야기로서 자유란 과거의 기억이나 관계로부터 벗어나는 정신임을 강조하고 있다.
장사해변에 있는 장사전승기념관에 들렀다. 오랬동안 군사기밀로 부쳐져 있다가 1997년이 되어서야 상륙에 사용된 문산호와 유해가 발견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진 장사상륙작전은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의 양동작전으로 투입된 772명의 학도군이 악전고투끝에 장사해변에 상륙하여 적의 주의를 분산시키고 보급로를 차단코자 했던 전투이다. 하지만 전쟁이 무엇인지도 몰랐을 꽃다운 나이에 운명처럼 휩쓸렸을 희생자들을 생각하면서 정치적 자유를 위하여 개인적 삶의 자유가 스러진데 대해 표현할 수 없는 부채감을 느낀다.
2 해파랑길
이튿날, 강구항을 출발하여 떠오르는 해와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파도 소리를 벗 삼아 함께 걷는다는 해파랑길을 구름에 달가듯이 미끄러지듯 가고 있다. 삼사해상공원을 지나 창포말 등대가 서있는 해맞이 공원에 들어서니 해송사이에 걸려있는 '긴 의자' 라는 시구에 공감이 간다.
"오고 가는 계절에 나이도 잊고
차츰차츰 자신의 그림자를 덜어가며
곱게 나아가는
미륵반가사유상의 기다림
맞이하고 또 보내는 혼자하는 사랑 하나"
해맞이공원부터는 본격적으로 해안과 접한 데크길이 이어진다. 소위 영덕 블루로드에서도 가장 풍광이 뛰어난 구간으로 해초와 소라 고등 등 바다 생물이 버무려진 특유의 비릿한 내음을 맡으며 쉴새없이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걷고 있다.
해변에 잠시 앉아 차분하게 철썩거리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바다를 바라본다. 멀리 햇빛에 반짝이는 고기잡이 배들이 간간히 보일 뿐, 하늘은 맑고 바다는 광활하다. 해불양수(海不讓水)라던가. 바다는 어떠한 물이라도 거부하지 않고 포용한다 하지 않는가?
우리 인생사도 선(善)과 악(惡)을 딱 잘라 이분해서 내치기는 어려울 듯하다. 세상의 어떤 현상도 나름 가치있고 선한 면이 혼재되어 있을 수 있으니, 그런 의미에서 선과 악의 대결보다 선(善)과 선(善)의 충돌을 조절하는 것이 인간의 진정한 운명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갯바위 군데군데 바다낚시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낚시대를 드리운 그들의 뒷모습이 아름답다. 이따금씩 나타나는 어촌마을에는 과메기와 가자미 말리는 일이 한창이다. 이 시기에 흔히 보는 동해의 마을 풍경이리라. 오후 4시쯤 해안 데크가 끝나는 경정2리 차유마을에 도착했다. 고려말 영해부사가 수레를 타고 넘었다는 의미로 차유(車踰) 마을이라 했다는 이곳에 인근 죽도산(竹島山)의 이름을 딴 대게가 성행했다는 내력을 설명하는 대게元祖마을 기념비가 바다를 향해 서있다. 바다는 여전히 맑고 푸르다.
3 사색의 길
3일째, 날씨는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어제보다는 파고가 높다. 끝없이 밀려드는 파도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어느 시인의 그리움이란 시구가 뇌리를 스친다.
이제 축산항을 지나 해변길에서 벗어나 사색의 길로 접어들었다. 1시간여 가파른 고개를 넘어 이윽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외가이자 출생지였던 괴시리(槐市里) 전통마을에 들어섰다. 원래 호지(濠池) 마을로 불렸으나 목은 선생이 중국 구양현(歐陽玄, 1273~1357)이 살던 회화나무 마을과 비슷하여 괴시리로 바꾸었다는 이 마을은 그후 영양 남씨의 집성촌으로 자리잡아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데, 대부분 ㅁ 자형의 서남향 한옥이 모여있으나 인기척이 거의 없어 다소 적막한 느낌을 주고 있다. 지방 촌락이 고령화되고 인구도 급감한 탓이리라.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은 고려말 유학자이자 권신으로서 성균관을 개혁하고 정도전, 권근, 길재, 맹사성 등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었지만,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키며 조선 개국에 참여하지 않고 야인(野人) 으로 생을 마감했다.
생전에 그는 6,000여수의 시문을 남겼다 하는데, 목은이색기념관에 걸려있는 그의 시조에서 고려의 쇠망에 대한 애잔한 심중을 짐작해 본다.
"白雪(백설)이 자자진 골에 구룸이 머흐레라
반가온 梅花(매화)는 어내 곳에 픠엿난고
夕陽(석양)에 홀로 셔 이셔 갈 곳 몰라
하노라"
4 운명의 길
목은이색기념관을 나오면서 여러가지 상념이 나를 감싼다. 당시 외교와 개혁에는 이성계와 뜻이 같았으나, 새 왕조의 창건에는 반대하여 결국 은둔 (隱遁)의 길을 택한 그의 처세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시사점을 던지는지 궁금하다. 정치적, 현실적 실익을 넘어선 그 무엇이 그를 붙들었던가?
한편, 한손에는 칼(의사)을 잡고 또 다른 손에는 펜(시인)을 쥐고 일생을 살아가고자 했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소설의 주인공, 닥터 지바고도 떠오른다. 볼세비키 혁명, 적백 내전, 스탈린의 철권통치하에서도 예술과 사랑을 위하여 정치적 회색 지대를 고집했던 그는 죽고 나서야 비로소 시인으로서의 영예를 되찾는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는 의미를 전하고자 했을까? 사랑하는 라라를 떠나보내던 눈덮인 시베리아 설원이 눈에 아른거린다.
무릇, 은둔이나 회색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신념은 어떤 모습을 띠고 있을까?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택한 그들에 대한 경외감 탓인지 공연히 마음이 심란하다. 그래도 역사는 이 모든 다양성을 소화하여 보편적 정신으로 나아갈 것으로 믿는다. 분명 가치관의 갈등 끝에는 또다른 희망이 보이리라 기대해 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삶을 산다기 보다 삶이 나를 산다는 기분이 여전히 드는 것을~
영덕대게나 과메기 등 동해안의 겨울철 별미는 이번에도 맛볼 기회가 없었다. 혼자서는 어느 식당에서도 반겨하지 않는 나홀로 여행의 비애이다. 그에 반해 눈과 코, 귀 등 다른 오감은 즐거웠다. 푸른 바다와 맑은 공기, 파도소리를 비롯한 청정한 자연의 기운을 만끽한 데 만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