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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8월18일 목요일 [(녹)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수도회] 사랑의 부르심에 대한 준비와 순응의 자세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에제 36,23-28
† 복음 마태 22,1-14
◈ 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혼인 잔치에 비유하십니다. 어떤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에 많은 사람을 초대했지만, 그들은
잔치에 참석하기는커녕 몹쓸 짓마저 하지요. 이에 임금은 노하여
그들을 벌하고, 대신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치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초대는
혼인 잔치같이 기쁜 잔치에 초대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기쁨이 넘쳐나야 하지요. 아울러 하느님 나라에 초대받은 우리가
신자의 의무를 게을리하거나, 다른 곳에 한눈을 팔 경우에는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경고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복음 후반부는 어색해 보입니다. 거리에 나가 누구나 다 잔치에 데리고
와서는, 막상 그들이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벌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을 잔치에 초대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모든
사람이 다 귀하다는 뜻이지요. 그런 만큼 주님의 초대를 받는 데에,
신분이나 상황은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는 점입니다. 단지 자신을 계속
가꾸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에 임금은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쫓아낸 것입니다. 예복을
입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자신을 가꿔 나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알고, 단점은 버리고, 부족한 점은 보완하고,
좋은 점은 더욱 키워 나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나의 자리에
안주하지 말고 꾸준히 자기 계발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혼인 예복
2016년 8월18일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제1독서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영을 넣어 주겠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6,23-28
복음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1-14
우리 주변에는 잘난 사람이 너무도 많습니다. 혹시 당신도 그 잘난
사람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나라 성인의 80% 이상이 자신이 남들보다 똑똑한 30% 안에
속한다고 믿는다고 합니다. 이 중에서 실제로 30%는 똑똑한 30%
안에 들어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렇다면 나머지 50%는 어떤
부류일까요? 심각한 착각 속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똑똑하다는 착각 속에서 다른 사람보다 윗자리에 올라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데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똑똑한 30%에 속하는 나입니까? 아니면 착각
속에 빠져 있는 50% 속의 나입니까?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정말로 똑똑하다고 인정하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실제로 똑똑하다 하더라도 ‘지가 잘 났으면 얼마나
잘 났다고 저러는 거야?’라면서 부정적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많은 지식과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들어내지
않는 겸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때서야 그 사람의 가치가
더욱 높아지면서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되지요. 그렇다면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묵묵히 하루하루를 중요하게 여기면서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양파를 한 번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양파의 마지막에는 무엇이
나옵니까? 아무 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필요 없다고
말할까요? 그렇지 않지요. 껍질 하나하나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어르신들에게 여쭤보면 다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살아보니 별 것 없어.”
그렇습니다. 살아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루하루가 모여서 인생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는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마지막 날에 후회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 김수환 추기경님 역시 “오늘이 삶의 마지막 순간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러면 항상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고
말씀하셨지요.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초대에 응하지
않은 사람, 초대에 응하기는 했지만 예복을 입지 않고 온 사람이
등장합니다. 모두 스스로를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착각 속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혼인잔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초대에
응하지 않고, 또한 초대에 응했어도 어울리는 예복을 입지 않았던
것이지요.
여기서 특별히 혼인 예복에 대해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혼인 예복은
단순히 세례 받았다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즉, 세례를 받아서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깨끗하고 겸손한 마음 그리고 진실한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라는 예복을 입어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초대에 걸맞은 혼인 예복을 입고 계십니까?
누구든지 자신의 인생을 십 년만 돌이켜 보면 하잘 것 없는 작은
사건이 결정적으로 자신의 삶을 바꾸어 놓았던 기억을 하나쯤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위스턴 처칠).
혼인잔치의 초대(김옥순 수녀)
어린 소녀의 꽃 한 송이(‘따뜻한 하루’ 중에서)
어느 한 신사가 어머니에게 보내드릴 꽃다발을 주문하기 위해서
꽃가게 앞에 차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한 소녀가 꽃가게 앞에 앉아
울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신사는 그 소녀에게 다가가 왜 우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소녀는 신사에게 대답했습니다.
“엄마에게 드릴 꽃을 사고 싶은데 제가 가지고 있는 돈은 저금통에
들어 있는 동전 몇 개가 전부라 서요.” 신사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습니다.
“나랑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내가 꽃을 사줄게.”
신사는 소녀를 데리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 소녀에게 꽃을 사주고
자기 어머니에게는 꽃다발을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신사는 가게를
나오면서 소녀에게 집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소녀는
고맙다고 말하며 엄마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곳은 공동묘지였습니다.
차에서 내린 소녀는 만든 지 얼마 안 된 묘 앞에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엄마'”면서 꽃을 내려놓았습니다. 이 소녀의 모습을 본 신사는 크게
깨달았습니다. 그리곤 곧바로 꽃가게로 돌아가 어머니에게 보낼 꽃
배달을 취소하고, 그중에서 가장 예쁜 꽃다발을 직접 사 들고 나와
멀리 떨어진 어머니의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인터넷에서 보게 된 감동적인 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보면서
‘이 정도면 충분하다.’라는 생각으로 사랑을 행하는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잘 해주었는데,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라고 하면서 억울해 합니다. 자신은 충분한 사랑을 전했지만,
상대방은 그 사랑에 아무런 응답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과연
사랑에 충분함이 있을까요? 어떤 대가를 바라는 사랑이 아닌,
내 마음을 남몰래 전할 수 있는 사랑이었으면 합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주님께서 대신 갚아주십니다.
고해소입니다. 주님 앞에 겸손되이 무릎끓어야 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사랑의 부르심에 대한 준비와 순응의 자세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8월18일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마태 22,1-14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마태 22,9)
The Parable of the wedding feast
사랑의 부르심에 대한 준비와 순응의 자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대교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하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이 행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하늘나라가 임금과 같았다”
(22,2)는 과거형을 사용함으로써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과정과 조건이
이미 달라졌음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임금은 아들의 혼인잔치를 준비하고 당시 풍속대로 초대받은 이들을
부르러 많은 종을 보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습니다(22,3).
다시 말해 초대받은 이들은 부득이한 사정 때문이 아니라 원하지
않아서 잔치에 오지 않은 것입니다. 완고함과 교만과 독선이 의도적인
거부를 부른 것입니다.
초대받은 이들이 오지 않자 임금은 다른 종들을 보내어 잔치가 다
준비되었으니 ‘어서’ 와 달라고 합니다(22,4). 임금의 세심한 준비와
배려가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그럼에도 초대받은 이들은 자기 일을
하러 가버리거나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이기까지 합니다(22,5-6).
그러자 임금은 진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립니다(22,7).
메시아적인 잔치 곧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상징하는 아들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고, 하느님의 일을 돕는 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처사는 하느님을 모독하고
그분의 자비를 거부하는 근원적인 문제이기에 그에 따른 책임 또한
매우 클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선물과 자비를 거부한 유대교 지도자들은
메시아적인 잔치에 참여할 자격이 없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선물을 받을 다른 사람들의 자격까지 부정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세리들과 어울리시고 사랑하시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계획하신 대로 혼인잔치를
마련하시고 모든 이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이 그에 적합하지 않음이 드러나자 임금은
‘아무나 만나는 대로 불러오라’고 합니다(22,9) 이제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구원의 잔치에 초대를 받습니다. 구원은 그렇게
모두에게 주어지는 선물로서 보편성을 띠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부르신다 해서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구원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초대에 응답할 줄
알아야 하고, 혼인 예복으로 상징되는 복음의 실천과 순수한 신앙의
응답이 필요합니다. 올바른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선물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매순간 나를 사랑으로 부르십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부르시고, 내가 머무는 그 순간마다 지켜보시고 당신 사랑의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당신의 자비와 선과 정의를 실행함으로써 구원의 선물을
받으라고 이끄십니다. 그 누구도 차별 없이 모두를 사랑하고 연대하여
공동의 선을 이루라고 초대하십니다.
내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가 바로 하느님께서 마련하는 잔치집이요,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만나는 사람, 하는 일들이 바로 그분께서
마련해주신 잔칫상임을 떠올려야겠습니다. 주님의 초대를 아랑곳하지
않는 완고한 마음과 교만을 버리고 주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겠지요. 아울러 사랑과 정의의 잔치에
어울리는 예복을 준비하고 능동적으로 응답하는 오늘이길 기도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8월18일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마태 22,14)
얼마 전에 대통령께서 새로 선출된 여당 대표와 최고위원들을
오찬에 초대하여 거나하게 고급진 음식을 차려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대통령이나 교황님이
여러분을 초대하면 기쁘게 참석하시겠지요.
본당신부님이 밥 한번 같이 먹자해도 열 일 제쳐놓고 기쁘게 응하겠지요.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하느님이 여러분을 초대하시네요.
와서 밥 한번 같이 먹자고. 보고싶다고.
그런데 말입니다.
의외로 기쁘게 '예' 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네요.
일이 바쁘다고 몸이 좀 안 좋다고 장사해야 한다고
이런저런 핑게를 대며 이 귀한 초대를 우습게 여기네요.
굴러들어 온 복을 이렇게 걷어차도 되나요?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여러분을 초대하십니다.
만사 제쳐두고 오늘은 "예" 하실거죠?
오늘 여러분이 미사에 참석한다면 그냥 내가 좋아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셔서 오게 된 것이라 여기십시오.
하느님은 끊임없이 초대하시는데 거기에 응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이 하느님을 슬프게 합니다.
하느님이 축복과 은혜를 베푸시고자 하는데 우리가 거절하다니요.
그래놓고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나에게 축복을 주시지 않는다고 냉담하고 원망하다니요?
"사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은데 뽑힌 사람이 적다"는
예수님의 씁쓸한 말씀이 귓가에 오래동안 맴도는 오늘입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 14)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8월18일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마태 22, 14)
부르심의 고유함은 진정한 감사에 있습니다.
부르심의 진리는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야말로 삶으로 드러나는 가장 뚜렷한 예복이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새로운 길을 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부르심의 길을 가로막는 것은 언제나 우리자신의 교만입니다.
교만때문에 빚어지는 수많은 아픔을 이미 우리는 체험했습니다.
부르심때문에 생겨난 수 많은 수많은 은총의
역동성을 기억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르심의 시작 그리고 부르심의 목적과 방향또한
우리를 이끄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이 없다면 결코 끝까지
갈 수 없는 부르심의 길입니다.
부르심은 감사의 길입니다.
감사의 삶은 모든 것에 겸손한 삶입니다.
겸손한 삶은 끝까지 따르기위해 먼저 조급함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선택된 이들은 모든 것에 감사하며 모든 것에 겸손한
참된 믿음의 예복을 입고 잔치에 참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서울]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2016년 8월18일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 마태 22,1-14
함께 일하시는 수녀님께서 눈이 아파서 고생을 하셨습니다. 원인은
눈에 작은 이물질이 들어갔기 때문이었습니다. 병원에서 이물질을
제거하고, 치료를 받으니 좋아지셨습니다. 책, 컴퓨터, 스마트 폰,
게임, 텔레비전과 같은 것들을 가까이 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시력이
나빠지고 있습니다. 저도 다초점 안경을 착용하고 있습니다. 라식,
렌즈, 안경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눈이 아픈 것은 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고, 시력을 보완해주는
도구를 이용해서 시력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치료하기도 어렵고, 보완해 주는 것들을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도 다양한 이물질들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편견, 선입관,
이기심, 욕망, 시기, 분노, 열등감, 원망, 무관심’의 이물질이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있습니다. 시력이 나빠지면 생활이 불편하기
때문에 병원을 찾지만, 마음이 나빠지면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제대로 치유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들의 마음도 자주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쌓인
이물질들은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게을러지고, 나태해지고,
교만해지고, 나만 생각하게 됩니다. 나의 말이 비수가 되어서 이웃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선물인
현재를 버려버리고, 한번 뿐인 삶을 헛되이 살게 됩니다.
저는 2005년부터 2007년까지 2년 동안 캐나다에 있었습니다. 잠깐
공부를 하러 갔지만, 저는 그곳에서 새로운 체험을 하였습니다. 사과
농장에 갔을 때였습니다. 한국에서 온 손님들은 크고 굵은 사과를
선택했습니다. 더 크고, 굵은 사과를 찾으면 작은 것들은 버렸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현지인들의 바구니를 보았습니다. 그분들의 바구니에는
큰 것도, 작은 것도 있었습니다. 굵은 것도 있었고, 벌레가 먹은 것도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바구니에는 모두 크고, 굵은 것만 있었습니다.
우리가 만족해서 웃고 있는데, 옆에 있던 현지인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여러분이 모두 크고, 굵은 것만 따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순간 머리를 세게 맞은 것 같았습니다.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나만
만족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에 대한 배려를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마음에 욕심이라는 이물질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새 마음, 새 땅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느 장소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내 주변을 깨끗이 하면 그곳이 새 땅이 되고, 내
마음을 하느님의 뜻으로 채우면 그곳이 새 마음이 되는 것이고 그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마음으로
하느님과 함께 산다는 것은 현실의 삶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간다는 것은 이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이제
우리의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믿는 다는 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 기쁨, 자유를 얻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를 현실의 삶에서 이미 천상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듯이 우리들 역시 영원한 삶에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선택하였습니다. 신앙을 통해서 주님의 제자가 되는
훈련을 하였습니다. 공동체 모임을 통해서 함께 기도하고, 주님의
자녀로서 충실하게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참 좋은 선택을 하였고,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는 잔치에 초대
되었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봉사가 주님의 잔치에 함께 할
수 있는 예복이 될 것입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기다려 주시고, 기회를 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우리에게 주시는 기회를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인생사는 것(자람)과 죽는 것(열매)이 무관?
2016년 다해 8월18일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인생사는 것(자람)과 죽는 것(열매)이 무관?
예수님은 죽음 설명을 하느님이 베푸신 잔치라 하셨는데 맘에 들어요?
만물원리를 보면 쉽지요. 씨앗이 썩어가며 싹트고 열매까지 맺는 과정!
열매 거두어 잘 된 건 식탁에 오르지만(잔치) 실패작은 내 버리잖아요.
씨앗 하나가 많은 열매 맺는 능력이 있는데 사람은 그만도 못하잖아요.
씨앗 하나와 비교한 제가 몰매 맞아야죠. 그런데 그런 사람 많거든요?
사는 것(자람)만 생각하고 죽는 건(열매) 아예 생각 안하는 분 많아요.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오 22,11~13)”
인간도 죽으면 거둬들여 천사들이 가려서 곳간이나 불에 태울 겁니다.
잘살아 좋은열매(예복입은 영혼)면 잔치참여, 쭉정이 영혼은 불태워요!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청주] 핑계없는 무덤 없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8월18일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 마태 22,1-14
핑계 없는 무덤없다.
어떤 임금이 자기 아들을 장가보내기 위해서 혼인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오랫동안 관심과 사랑으로 배려했던 이들을 초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이된 일입니까? 믿었던 이들이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오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오리라 생각했던 사람들이기에 풍성하게 준비를
했는데 즐길 사람이 없었습니다. 미쳐 그들의 속을 보지 못한 탓이기도
합니다. 급기야 거리에 나가 지나가는 모든 사람을 초청하여 잔칫방을
채우라고 하였습니다.
받은 은혜보다도 자기 잇속을 차리느라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갔습니다. 나 하나쯤이야! 그들은 당장 내가
먹고 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고 내가 아니어도 축하객이 많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날의 잔치는 매우 성대하였고 귀한 선물도
마련되었습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초대 받은 사람은 핑계 아닌
핑계를 댐으로써 선물을 받을 기회를 놓치고 전혀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이 선물을 차지하였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초대 받은 사람은 많았지만 정작 선택된 사람은 적었고 이 모습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구원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지만 결코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응답하는
사람만이 들어갑니다. 묵시록 3장20절에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하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드리는
역할은 나의 몫입니다. 그리고 응답을 한다는 것은 그만한 준비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잔칫집에 가려면 그에 걸 맞는
예복을 입어야 하듯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그만한 삶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여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가운데 예복을 준비해야 합니다.
“배부르면 산해진미가 귀찮고 배고프면 보리죽이 꿀맛이다.”
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헛배가 부르면 정말 먹어야 할 것을 먹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헛배가 불러 다른 것에 관심을 갖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일상 안에서도 미사참례, 성지순례, 피정이나
세미나, 교육,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에 기꺼이
응하는 사람만이 보람과 기쁨을 간직하게 됩니다. 똑같이 주어진
일이지만 은총의 기회로 삼는 사람은 많지 않음을 안타까워하며
영적인 풍요로움을 주는 일에 핑계대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주님의 초대를 거절하고 심지어 죄를 범하는 경우
있습니다. 천국을 소망하면서도 안락의자에 앉기만을 원한다면 그는
결국 뽑힌 사람은 되지 못합니다. 그야말로 주님의 뜻을 행하는 예복도
없이 천상을 갈망한다면 허황된 꿈에 불과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마태22,14) “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신뢰하고 너의 예지에는
의지하지마라. 어떠한 길을 걷든 그분을 알아 모셔라. 그분께서 네
앞길을 곧게 해 주시리라”(잠언3,5-6). 혹 준비가 미흡하다면 지금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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