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 잉글랜드의 가을 (3)
아메리카의 마녀사냥
아카디아 국립공원에서 매사추세츠 세일럼까지 다섯 시간 가까이 걸렸다. 약간 길을 돌아오기도 했지만 95번 고속도로에서 세일럼까지 가는 길도 가깝지는 않았다. 우리는 관광안내소 앞 주차빌딩에 차를 두고 안내소에서 지도를 얻어 마녀박물관으로 향했다. 박물관 앞에는 세일럼에 첫발을 디딘 로저 코낸트(Roger Conant 1592-1679)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1620년 메이플라워호가 상륙한 플리머스와 함께 청교도 이민자들의 초창기 정착지 세일럼은 마녀를 관광자원으로 삼는 인구 4만 2천의 이색적인 타운이다. 길에는 빗자루를 가랑이에 끼운 채 거리를 활보하는 마녀복장 여인과 악마 가면을 쓴 사내들이 눈에 뜨인다. 또한 시내에는 관광버스와 관광지를 순회하는 버스들이 분주히 다닌다. 마치 타운 전체가 마녀를 상품으로 살아가는 느낌이다. 실제로 이곳은 1692년 마녀재판 소동이 벌어져 20여 명이 처형당한 마을로 미국으로서는 생각조차하기 싫을 흑역사의 현장이다. 이곳에서 시작된 마녀사냥의 광풍은 인근 보스턴과 로드아일랜드까지 퍼져 지금까지 초창기 청교도 이민역사의 오점으로 남아 있다.
1620년 메이플라워호가 플리머스에 상륙한지 3년 후 일단의 영국 어민들이 건너와 인근 케이프 앤에 작은 정착촌을 이루었다. 이들 중 한 명인 로저 코낸트가 1626년 50명을 이끌고 세일럼으로 이주하면서 이 고장의 역사가 시작된다. 이곳의 원래 이름은 ‘나움케악’(Naumkeag)으로 원주민 말로 ‘고기 잡는 곳’이라는 뜻이다. 뒤이어 1628년 영국에서 존 엔디콧(John Endecott)이 이끄는 식민지 선발대가 도착했다. 엔디콧은 식민지 본진이 정착할 터를 닦으면서 이곳이 평화의 땅이 되기를 기원하며 지명을 세일럼으로 바꿨다. 세일럼은 히브리말로 평화를 뜻하는 'Shalom'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평화를 염원하던 선구자들의 뜻과 달리 세일럼은 마녀사냥이라는 오명으로 미국역사에 남게 된다. 1630년 6월 존 윈스톱의 인솔로 이곳에 도착한 식민지 본진은 땅이 척박하고 식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세일럼에 정착하지 않고 강 건너 땅으로 이민자들을 인솔해 현재의 보스턴을 정착지로 삼았다. 세일럼은 한동안 어업과 무역으로 뉴잉글랜드 지역 중심 항구로 번창했으나 지금은 보스턴에 밀려 외곽 타운 신세가 되었다. 또한 세일럼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 유학생인 유길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유길준은 1883년 민영익을 단장으로 한 친선사절단 일원으로 미국을 방문한 후 혼자 남아 세일럼 인근 바이필드 덤머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현재 세일럼 피바디 엑세스 박물관에 그의 편지와 유품들이 보관되었다는데 가보지는 못했다.
우리는 세일럼 마녀박물관(Salem Witch Museum)부터 관람했다. 박물관에서는 마녀사냥의 진행상황을 인형극처럼 무대로 꾸며놓고 음향효과와 나레이터로 들려주었는데 솔직히 입장료가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단순한 해프닝으로 시작된 세일럼 마녀사냥은 당시 종교적 무지와 청교도와 타종파 간 갈등의 와중에서 일어난 집단 히스테리 결과라 할 수 있다. 1633년 세일럼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로저 윌리엄스는 매사추세츠 교회가 영국교회(성공회)와 완전히 절연할 것과 엄격한 정교분리를 요구했다. 그는 식민지 지도층을 비난하면서 영국 왕이 원주민 땅을 마음대로 식민지로 삼을 권리가 없으며 땅이 필요하면 원주민들로부터 직접 사야한다고 주장했다. 캠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그는 신앙적 열정을 겸비한 인재로 보스턴교회 담임목사로 초빙되었지만 보스턴교회가 영국교회와 관계를 끊지 못했다는 이유로 취임을 거부하고 플리머스교회를 시무하다 세일럼으로 옮긴 것이다. 1635년 매사추세츠 청교도 지도자들은 윌리엄스의 과격한 주장을 빌미로 세일럼교회에 그의 추방을 요구했다. 청교도 지도층이 그를 런던으로 압송할 계획임을 알게 된 윌리엄스는 탈출하여 원주민 마을에 잠시 의탁하다가 남쪽으로 내려가 프로비던스 식민지 즉 현재의 로드아일랜드를 건설했다.
그 후 1658년 영국에서 일단의 퀘이커교도들이 세일럼에 이주했다. 영국에서 조지 폭스(George Fox·1624∼1691)에 의해 창설된 퀘이커교는 위계적인 교회조직과 예배형식을 폐지하고 각 개인의 내면에 임재하시는 성령체험을 강조했다. 청교도들은 퀘이커가 청교도 공동체를 위협한다고 보고 이단으로 탄압했다. 무엇보다도 위계적인 교회조직을 부정하는 평등주의가 청교도 공동체 질서를 심각하게 해친다는 판단이었다. 매사추세츠 청교도 지도자들은 이들의 침투를 막고자 추방된 퀘이커교도가 돌아오면 사형에 처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세일럼의 퀘이커 신자들은 박해 속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퀘이커교 운동의 중심으로 자리 잡아 뉴햄프셔와 메인은 물론 훗날 코네티컷과 뉴욕까지 교세를 확장한다. 이러한 종교적 긴장 속에서 1689년 부임한 세일럼교회 담임목사 새뮤얼 패리스(Samuel Parris)의 고압적인 태도와 그의 처우문제로 주민들의 의견이 갈리고 세일럼은 내분에 휩싸였다. 이런 와중에 마녀사냥의 발단이 바로 패리스 목사 집에서 시작된 것이다.
1692년 2월 패리스 목사 딸 엘리자베스가 갑자기 헛소리를 지르며 발작을 일으킨다. 며칠 뒤에는 엘리자베스의 사촌 애비게일과 마을 소녀 몇 명도 비슷한 발작을 일으켰다. 패리스 목사와 부모들은 다른 교구 목사를 초빙해 기도회를 열었으나 증세는 계속되었다. 이들을 진단한 의사는 원인을 찾지 못하고 사탄의 짓으로 결론 내렸다. 이에 따라 마을사람들은 소녀들을 심문했고 소녀들은 패리스 목사의 흑인하녀 티투바와 마을 거렁뱅이 새라 굿, 그리고 평판이 좋지 않았던 오스본 노파를 마녀라고 지목했다. 소녀들은 이들을 보자 소리를 지르고 몸을 비틀며 혼절했다. 패리스 목사에게 닦달을 당한 티투바가 악마와 소통한 적이 있다고 자백하자 세 여자는 마녀로 단정되어 투옥됐다. 그런데 마녀가 색출된 뒤에도 소녀들의 증세는 가라앉지 않고 소녀들이 마녀로 지목하는 사람들은 늘어갔다. 소녀들에게 또 다른 마녀로 지목된 사람은 독실한 신앙생활로 존경을 받아 온 마사 코리와 연로한 레베카 너스였다. 심문관이 악령에 시달려왔다는 소녀들을 이들과 대질시키자 다시 발작했다. 마녀들은 계속 늘어났다. 네 살짜리 새라 굿의 딸 도카스와 강직한 존 프록터의 부인 엘리자베스도 마녀로 지목되었다. 엘리자베스를 변호한 남편도 악마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인정되었다. 5월 말까지 백여 명이 투옥되고 광풍은 매사추세츠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마녀재판이 정식으로 열린 것은 그해 6월 초다. 그동안 뉴잉글랜드는 영국의 명예혁명 와중에 총독이 없어 합법적인 재판부를 구성할 수 없어 재판을 진행할 수 없었다. 그러나 5월 중순 신임 총독으로 임명된 윌리엄 핍스가 도착해 즉각 일곱 명의 특별재판부를 구성하고 마녀재판을 시작했다. 속전속결로 진행된 재판결과 6월부터 9월까지 19명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80세이던 마사 코리의 남편 자일즈 코리는 아내가 마녀로 몰려 처형당하자 자신도 빠져나갈 길이 없다고 판단해 일체 심문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재판부는 그의 몸에 널빤지를 놓고 커다란 바위를 올려놓는 고문으로 죽게 했다. 이밖에도 옥중에서 사망한 세 명까지 합치면 세일럼에서 그 해 희생된 사람은 23명에 이른다. 또한 185명이 마녀로 지목되어 수감되어 심문받았다. 세일럼의 마녀재판은 사적 이해관계나 원한을 해결하는데도 이용되었다. 실제로 마녀에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주장한 소녀 앤 퍼트남의 집안은 토지분쟁으로 원한관계에 있던 포터가(家) 인척 46명을 마녀로 엮어 넣었다. 당시 세일럼 인구가 수 백 명에 불과했을 것으로 추산한다면 엄청난 광풍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뉴잉글랜드의 마녀사냥은 이전부터 이루어져 왔다. 매사추세츠에서는 1647년 마가렛 존즈라는 여자가 마녀로 처형되었으며 1662년에는 코네티컷 하트포드에서 집단 마녀소동이 일어나 13명이 체포되어 4명이 처형되었다. 통계에 따르면 1647년에서 1663년까지 뉴잉글랜드에서 79명이 마녀로 체포되고 15명이 처형되었다. 이렇듯 당시 미국에서 마녀재판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이 같은 현상은 이른 바 종교개혁 이후 각 종파 간 갈등으로 반대파를 제거하는 수단으로 악용된 측면이 강하다. 영국에서는 찰스 2세 당시 청교도 혁명직전 1645년부터 2년 사이 수백 명이 이단과 마녀로 처형되었다.
청교도(Puritan)는 1559년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내린 통일령에 순종하지 않고 영국국교(성공회)에 존재하는 가톨릭적 제도와 전례 일체를 배척하고 엄격한 도덕과 성수주일, 향락 배척 등 칼뱅주의 원칙을 고수했다. 이들은 가톨릭에서 독립한 성공회 정착과정에서 심한 박해를 받고 네덜란드와 신대륙인 아메리카로 피해 갔다. 그러나 이들은 당시 절대왕정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과 정치적 요구에 편승해 정치적 세력을 키워나가 1642년 청교도혁명의 주역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1640년부터 20년 간 계속된 청교도혁명 와중에 정치적 이해에 따라 장로파, 독립파, 평등파 등으로 쪼개져 상호 무력충돌을 벌였다. 유럽 전역에서 종교개혁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500년부터 1660년까지 약 8만 명이 프로테스탄 상호 간 이단과 마녀재판으로 처형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영국 본토의 종교적, 정치, 사회적 혼란상이 식민지 미국의 마녀재판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작은 마을에서 마녀재판 희생자들이 계속 늘어나자 9월부터 주민들 사이에 마녀재판에 반대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재판관 중 한 사람은 재판과정의 공정성을 비난하고 재판관직을 사임했다. 당시 판결은 악령에 시달렸다는 소녀들의 증언과 주기도문을 제대로 외우는지, 몸에 악마의 징표가 있는지의 여부, 피의자를 물에 빠뜨려 수영할 수 있는지 등으로 마녀인지 아닌지를 판단했기 때문에 주민들은 재판의 공정성을 의심했다. 하버드대학 총장 인크리스 매더 목사는 ‘양심의 사례들’이란 유인물을 만들어 희박한 증거로 무고한 사람을 마녀로 모는 것을 비난했다. 많은 사람을 마녀로 지목하고도 소녀들의 증세가 호전되지 않고 평소 경건한 사람이라고 평판을 받은 부인들까지 마녀로 지목되자 핍스 총독은 재판중지를 명했다. 다음해 1월 총독은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들과 감옥에 있던 사람들을 석방하고 사건을 종결했다. 마녀사냥 광풍이 지난 후 세일럼이 평온을 되찾자 반성과 참회가 이어졌다. 1696년 새뮤얼 시월 재판관은 잘못을 공개사과하고 참회했다. 배심원들도 잇달아 과오를 고백하고 사과했다. 1711년 식민지 정부는 마녀재판 희생자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하고 유죄기록을 말소했다. 세일럼 주민들은 1992년 마녀사냥 300주년을 맞아 희생자들의 추모비를 건립했다. 세일럼교회도 그해 9월 20일 자로 마녀로 희생된 소속 신자들을 교인으로 복권시켰다.
또한 미국정부는 1957년 265년 만에 세일럼 마녀재판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이는 미국 역사상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한 다섯 가지 역사적 과오 중 하나이다. 엄밀히 따지면 세일럼 사건은 미국독립 전 사건으로 현재의 정부가 사과해야 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미국정부는 역사 앞에서 겸허히 사과했다. 피해자들이 엄연히 살아있는 전시 성노예(위안부) 강제동원 사실도 부인하면서 한사코 외면하는 일본정부와는 대조적이다. 참고로 지금까지 미국정부가 공식 사과한 다섯 가지 역사는 세일럼 마녀재판과 원주민 학살, 행정명령 9066호에 의한 2차대전 당시 일본계 시민 강제수용, 1930년대부터 40여 년 간 이루어진 흑인들을 동원한 비밀 매독균 임상실험, 1970년 대 CIA가 실시한 LSD 환각제를 사용한 인간 세뇌실험 등이다. 일부 역사가들은 여기에 더해 흑인노예와 멕시코 전쟁 그리고 월남전까지도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은 세일럼 마녀사냥을 반성과 함께 이러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교훈으로 삼고 있다. 박물관에는 이 사건과 함께 1950년 대 몰아쳤던 빨갱이 사냥인 매카시 선풍의 자료들도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 나치 독일이나 일본의 군국주의 경우를 보더라도 사회구성원들의 집단적 광기에서 이성을 지키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역사적인 교훈이다. 이러한 점은 현재 분단과 이념, 지역갈등 등으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는 조국으로서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세일럼 마녀사냥은 미국 건국초기 독점적인 청교도시대를 마감하는 역사의 분기점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어쩌면 세일럼의 교훈이 오늘 날 미국의 종교와 신앙 자유의 토대가 된 것일 수도 있다. 이제 미국은 다양한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 오랜 세월 후 세일럼은 당시 수치스러운 역사를 가장 중요한 관광상품으로 삼아 타운의 수입원으로 삼고 있다. 돈이 되는 것이면 조상의 치부까지 팔아먹는 자본의 논리인 것 같아 씁쓸한 느낌도 들지만 과거 치욕의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생각한다면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박물관 관람이 끝나면 자연적으로 선물가게로 연결된다. 가게에는 온갖 종류의 마녀 형상과 마술도구들이 가득했다. 우리는 박물관을 나와 호손가를 따라 부두로 향했다. 부둣가 식당들은 저마다 마녀 모형을 세워놓고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우리는 간단한 샌드위치와 맥주로 점심을 때우고 부둣가를 둘러보았다. 19세기까지 수많은 무역선과 어업기지로 인근 보스턴과 경쟁하던 세일럼은 이제 과거의 영화를 뒤로 한 채 요트와 낚시배들만 한가로이 떠 있다. 그러나 제법 규모가 큰 옛날 세관건물과 창고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부두에는 ‘세일럼의 우정’(Friendship of Salem)이라는 범선이 정박되어 있다. 17세기 무역선을 그대로 복원한 이 배는 과거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와 중국, 일본까지 시속 6노트의 속도로 왕복 2년 간 후추 등 향신료와 동양제품을 싣고 허리케인과 해적의 위험을 뚫고 항해했다고 한다. 우리는 배 내부를 관람하고 다시 시내로 향했다.
시내로 향하는 호손가에는 세일럼이 배출한 19세기의 걸출한 문인 너새니얼 호손(1804-1864)의 동상이 모자를 손에 든 모습으로 세워져 있다. 세일럼의 마녀사냥 역사는 그 후 수많은 문학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특히 이곳에서 태어나 50년 가까이 살면서 많은 작품을 남긴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글씨’는 당시 마녀사냥 시절의 풍경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고향에서 벌어진 마녀사냥 역사에 수치심과 죄책감을 강하게 느끼며 살았다. 그의 선조가 당시 재판관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작품에서 세일럼의 마녀사냥을 “우리 역사에 기록하기 가장 부끄러운 치욕적인 사건”이라고 했다. 호손은 주홍글씨 뿐 아니라 ‘일곱 박공의 집‘ 등 많은 장, 단편 소설로 세일럼의 상처를 휴머니즘의 시각으로 다루었다. 호손 뿐 아니라 많은 작가와 화가들이 세일럼 마녀사냥을 시와 소설,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 내가 최근에 읽은 브루노이아 배리의 장편소설 '레이스를 읽는 여인'도 세일럼을 배경으로 한 현대판 작품이다. 타운 곳곳에는 그의 작품에 묘사된 건물들과 풍경이 많이 남아 있다. 주황색 세관건물과 건물에 장식된 독수리상도 주홍글씨 첫머리에 묘사된다. 또한 몇 불럭 뒤에는 일곱 박공(경사진 지붕에 삼각형으로 지붕을 덧대어 창문이 튀어나오게 한 것)의 집 모델이 된 건물과 거대한 느릅나무도 그대로 있다. 이 집은 당시 갑부 무역상 존 터너가 1668년에 지은 것으로 뉴잉글랜드의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나는 세관 뒤편에 있는 건물을 주차시간에 쫓겨 먼발치로 짐작했을 뿐이다. 원래 서너 개 박공이 있던 건물을 근래 소설 묘사에 맞추어 일곱 개로 늘려 복원한 것으로 상징적인 가치 외에는 별 의미는 없다.
1850년 3월 '주홍글씨'를 발표한 호손은 3년 동안 재직한 세일럼 세관 근무를 사직하고 고향을 떠나 1864년 타향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에게 세일럼은 애증이 엇갈린 고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마을 곳곳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와 동상, 빌딩들이 그를 기념하고 있다. 지금 세일럼은 마녀 캐릭터로 관광객을 모으고 있는데 이에 걸맞게 점쟁이 사업도 성행하고 있다. 점치는 방법도 카드, 수정구슬, 손금, 레이스 등 다양하고 심지어는 마귀를 부르는 종교적 의식을 행하는 모임도 있다고 한다. 320년 전 마녀를 없앤다며 벌인 마녀사냥이 마녀들을 키운 셈이다. 특히 세일럼은 매년 10월 31일 할로윈데이에는 요란한 장식과 행사로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고 하는데 우리가 갔을 때에는 이른 탓인지 그때서야 집단을 가로등에 두르는 등 채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사실 마녀재판은 13세기 당시 교황 그레고리 9세 때부터 시작되어 중세를 휩쓸었지만 종교개혁 후에는 프로테스탄 종파 상호간에도 무차별적으로 실시되었던 인류역사의 어두움이었다.
가톨릭교회는 21세기가 시작된 2000년 3월 12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미사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종이 2천 년 동안 교회가 종교의 이름으로 행한 모든 잘못들을 고백하고 참회했다. 이날 요한 바오로 2세는 십자군 원정, 유대인 차별, 갈릴레오 이단재판 그리고 중세기에 벌어졌던 마녀재판과 이슬람과 개신교 등 타종교와의 반목,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 기독교 분열에 대한 잘못을 일일이 거론하면서 인류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이에 앞서 바티칸은 3월 5일 ‘기억과 화해 : 교회의 과거범죄’라는 제목의 문건을 발표하고 하느님의 뜻이라는 구실로 그동안 저지른 과오를 공식 인정했다. 그러나 나는 인류가 종교의 이름으로 저지른 역사적 과오들은 가톨릭 뿐 아니라 모든 종교가 마음을 모아 함께 참회했더라면 더욱 의미 있고 아름다웠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타종교와의 반목이나 여성 억압과 차별, 기독교 분열과 이단재판도 가톨릭만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다음 해 이슬람 과격파들이 지하드(聖戰)라는 미명으로 9.11 테러를 저지르지 않았는가. 어쨌든 가톨릭교회가 먼저 고백하고 참회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나는 세일럼을 떠나 뉴욕으로 오면서 모든 종교가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존중할 때 비로소 인류평화의 시대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2014.10.23 뉴욕 虛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