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냉면/신동호
열두 살 때, 아버지 손에 이끌려 요선동 평양냉면을 첨 먹어
봤다. 친구가 없는 아버지는 복더위에 삼계탕이나 개고기를
드실 때 꼭 날 데려갔다. 냉면 맛은 참 밍밍했다. 아버지 인생이
그랬다. 전쟁 통에 청각이 포격 소리와 함께 진흙탕에 묻혔다.
낚시찌처럼 강물 위에서 말없이 흔들리는 게 인생이었다.
사랑이랍시고 절망에 몸부림치거나 시대에 모든 걸 바친다고
유치장과 감옥을 들락거렸으니, 꽤나 드라마틱한 삶 같지만 결
국은 고만고만한 게 인생이다. 분노도 삭고 열등감 따위 아무것
도 아니란 걸 알았을 때 냉면집 문턱을 닳도록 다니게 되었다.
양념 하나 없는 투명한 육수가 오래된 친구들 같아서 낮술에
자주 쓰러지던 시절, 전투력 없이도 툭툭 끊어지는 면발 앞에서
자주 무너지던 나이였다. 참으로 밍밍한 게, 뭐가 잘난지도 모르
게 된 내 맘 같았다.
서른일곱 살 때, 첨 대동강변에서 평양냉면을 먹어봤다. 유산
한 푼 없이 낚시대 몇 개 남기고 간 아버지의 인생, 가끔이었지만
그 원망스러운 날들이 밍밍하게 희석되는 경험을 하고 말았다.
인생과 인생이 만나서 얼마나 더 질기게 한을 남겨 좋겠는가.
고명들처럼 소박하게 어울리는 게 인생이다. 우리만 한 마음이
수두룩한 평양이었다.
<장촌냉면집 아저씨는 어디 갔을까?>, 실천문학사
<시 읽기> 평양냉면/신동호
평양냉면, 좋아하세요? 슴슴하고 밍밍한 맛의 평양냉면은 극명하게 호불호가 갈리는 음식 중 하나에요. 기대했던 것만큼 실망의 쓰나미가 몰려들기도 하죠. 그런데 이게 한번 맛을 들이면 자꾸만 생각나는 별난 음식입니다.
한국 전쟁 후 고향을 떠나온 평안도 사람들에게 평양냉면은 고향의 맛이면서 어머니 그 자체였을 겁니다. 하지만 어린 소년에게는 참으로 난감한 맛이었겠지요. 전쟁 통에 청각을 잃어버린 아버지. 강물 위에서 말없이 흔들리는 낚시찌처럼 고요하게 생을 이어가는 아버지를 보면서 소년은 다른 삶을 꿈꿉니다. 아버지처럼은 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드라마틱한 삶을 선택했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사랑 때문에 몸부림치고 시대를 위해 많은 걸 바친 후 고만고만한 게 인생이라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어, 세상을 떠난 아버지 대신 아버지의 땅에서 고향을 맛봅니다. 후루룩― 냉면을 삼키며, 아버지가 애틋하게 그리워져 가슴이 저몄을 겁니다. 그러면서 아들을 떠올렸을 겁니다. 이제 아버지와 같이 먹던 평양냉면을 아들과 먹겠지요.
―정진아 엮음, 『맛있는 시』, 나무생각,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