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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6. 묵상글 ( 연중 제9주간 목요일. - 자기만 없으면.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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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6. 연중 제9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자기만 없으면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십니다.”
오늘의 서간은 하느님의 성실하심과 우리의 불성실함을 비교하는데
사실 우리는 불성실합니다.
불성실하지 않다고, 더 나아가서 성실하다고 얘기할 수 있을 만큼
뻔뻔한 사람은 우리 중에 아마 없을 것이고,
그러므로 철면피가 아니라면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의 불성실에 대해서 마땅히 마음이 찔려야 하고,
하느님께 죄송스러운 마음이 커야 할 것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우리의 불성실에 대해서 성찰하고 반성할지라도
그 성실함과 불성실함의 과녁이 올발라야 할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성실이나 불성실을 얘기하면 즉시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성실과 불성실을 떠올리고,
일도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자기가 맡은 일을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바오로 사도가 티모테오에게 얘기하는 성실함은
하느님께 대한 성실함이기에 결코 일적인 성실함이 아닙니다.
인격적 성실함이고, 사랑의 성실함이며, 그래서 어쩌면
성실함이라기보다는 정결함이라고 함이 좋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하느님께 성실함은 오늘 주님 말씀과 맥을 같이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뿐이시기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다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다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남김없이 다하는 것이고,
일부를 남기지 않는 것이며,
일부를 다른 어디에 남기지 않는 거지요.
그러므로 마음을 다하는 것은 마음이 나뉘어(분심하여)
마음 일부는 하느님께 두고 다른 일부는 사람에게 두지 않는 것이고,
힘을 다하는 것은 힘이 나뉘어
힘의 일부는 하느님 일에 쏟고 다른 일부는 자기 일에 쏟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웃 사랑도 하라는 주님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하느님께 다 쏟으면 이웃에게 갈 사랑은 없는 것 아닙니까?
원래 이웃에게는 남기지 말고 하느님만 사랑하라는 뜻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깊이 생각하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같은 것이고,
남기지 말아야 할 것은 이웃에게가 아니라 자기에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만 없으면 하느님이나 이웃이나 하나이고,
자기만 벗어나면 하느님 사랑이나 이웃 사랑이나 같은 것입니다.
자기가 있을 때 하느님의 사람과 나의 사람이 나뉘고,
자기 안에 갇혀 있을 때 하느님의 일과 나의 일이 나뉘는 거지요.
자기가 없으면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은 다 하느님의 것이고,
그러기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의 것들도 사랑하는 것이며,
하느님을 위해서 하는 것은 하느님의 것들을 돌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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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6.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분이 갑작스럽게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큰 수술을 마치고 회복 단계에 있는데, 이분의 소식을 들은 몇몇 지인들이 찾아온 것입니다. 반가웠지만 그냥 빨리 집에 가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위로를 해준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지만, 자기를 위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오히려 그들을 응대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병문안 오겠다는 분에게 오지 말라면서 나중에 다 낫고 밖에서 보자고 말했습니다. ‘이제 좀 괜찮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찾아주지 않으니 이상하게 외롭고 사람들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더 힘들어졌습니다.
사실 병문안 자체, 즉 사람과의 만남만으로도 어렵고 힘들 때 분명히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만 봐도 우리는 함께 사는 공동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누군가 때문에 죽을 것 같다고도 말하지만, 그 누군가 때문에 살기도 하는 우리입니다. 하지만 점점 이 사회는 외로워지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고독사, 즉 주위에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혼자 죽는 사람이 한 해에 4만 명 가까이 된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고독사 역시 2023년 한 해 동안 3,000명 넘는다고 하더군요. 우리 역시 외로움이 만연한 사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긴 혼밥, 혼술 등의 용어가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쓰이고 있지 않습니까?
함께하기 위해서는 나의 불편함을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를 낮추는 겸손만이 누군가 함께할 수 있게 합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완전히 자신을 낮추셨기에 우리와 함께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 누구와도 함께할 수 있을 정도로 낮추셨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높이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배격한 것이 아니라, 이들이 예수님을 반대하는 높은 자리에 앉으려 했기에 함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을 위해, 오늘 복음을 통해서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하겠습니다. 율법 학자 한 사람이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 모든 계명의 정신을 요약해서 말씀해 주시지요. 바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사랑하는 사람만이 첫째가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고, 이런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를 짓누르고 지배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함께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으로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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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결혼은 위대한 대화이다(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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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6.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마르 12,29)
어제 <복음>의 사두가이와의 논쟁에서, 예수님께서 부활과 부활체의 특성,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산 이들의 하느님, 곧 생명의 하느님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그 말씀을 듣고 있던 율법교사는 그 생명의 길인 ‘계명’에 대해 묻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마르 12,28)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동의 원리로서의 ‘계명’을 말씀하기 전에, 그 계명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왜 중히 여겨야 하는지를 먼저 밝히십니다. 곧 행위규범으로 사랑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와 명분과 정당성을 밝혀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그분이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지 하느님께서 ‘한 분 이신 하느님’이시라는 사실과 ‘우리 주님’이시라는 의미와 동시에, 우리의 존재와 의미도 밝혀줍니다. 곧 우리가 ‘그분의 것, 그분의 소유’로 그분의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나아가서, 그분이 우리를 당신의 차지, 소유로 삼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 12,34)
그러니 그는 아직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왜 일까요? 그것은 그가 계명을 들어서 알고는 있지만, 이를 몸소 실행할 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아직 선포되지 않은 “새 계명”에 따라 실행하지도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뒤에 선포하게 될 “새 계명”은 구약의 이중계명과는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곧 <요한복음>에서 선포된 “새 계명”은 이웃 사랑의 시금석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15,12)로 바뀌게 됩니다. 곧 당신이 ‘먼저 베푼 사랑’을 서로 베푸는 ‘하느님 사랑의 실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삶을 통해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는가?” 혹 ‘이익을 얻는 법’, ‘손해 보지 않는 법’을 배워가고 있는가? 더구나 ‘미워하는 법’을 배워가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또 “오롯한 마음으로 사랑을 먼저 앞세우고 있가?” 물어야 할 일입니다. 만약, 우리가 진정 ‘사랑’과 ‘하느님’을 앞세우고 있다면, 하느님과 사랑에 대한 생각으로 우리의 머리가 가득 차 있어 늘 하느님과 사랑에 대한 말을 할 것이고, 사랑하기 위해 고민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나는 무엇에 제일 관심이 많고, 무슨 생각을 제일 많이 하고, 무슨 말을 제일 많이 하고 살아가고 있는가?” “하느님인가? 나 자신인가? 세상인가? 재물인가”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주님!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게 하소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가 되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사랑이 남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한 몸인 내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되게 하소서.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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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6. 연중 제9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은 능력입니다
식물인간이 되어 혼수상태로 있던 사람이 열흘 만에, 어떤 사람은 2년 만에, 어떤 사람은 무려 28년 만에 의식을 회복한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주변을 보면 하나같이 누군가가 지극한 정성으로 그를 돌봤다는 사실입니다. 의식은 없지만 살아있는 사람으로 인정하고 지극한 사랑을 쏟았던 사람들은 결국 그 사랑의 헌신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무한한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12,30.31). 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외적으로 강제되는 의무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하느님 사랑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 하느님을 자발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느님과 인간관계의 기반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마음과 목숨, 힘을 다한 존재 전체로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구체적인 이웃사랑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을 똑바로 인식하고 바르게 사랑해야 합니다. 나 자신에게 너그럽고 시간을 내고 관심을 쏟으며 변명하고 행복한 생활을 바라는 것같이 이웃에게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야말로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3,18)하는 그런 사랑을 해야 합니다.
유다교에는 계명이 많았습니다. 무려 613개 조항의 계명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248개 조항은 명령, 365조항은 금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계명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지에 대한 논의가 자연스럽게 생겨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잡다한 계명들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요약하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불가분의 관계임을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의 기도’의 핵심 정신을 보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도 그렇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헌신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모두를 내어 주셨습니다.
머리로 아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 아직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그 앎이 온몸에 배어서 행동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하느님 나라에 온전히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온몸으로 사랑하십시오. 그리하면 더 큰 사랑의 능력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 자체 이신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이 우리를 재촉하는 오늘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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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6.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원래는 좋은 뜻인데 그 의미가 퇴색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진상(珍賞)입니다. '진상'의 유력한 어원 중 하나는 바로 '왕이나 고위층에게 진귀한 물건이나 지방의 토산품을 바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새 쓰이는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 '진상'의 어원으로 꼽힌 이유는 진상이 가지는 폐단 때문이었습니다. 말로는 윗사람에 대한 존경심과 예우라고 하지만 먹고살기 빠듯한 서민들에게는 귀한 것을 마련하는 일 자체가 고역이었고, 구하기 힘든 것을 요구해 부담이 가중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런 진상이 지닌 폐단이 부각되면서 '허름하고 나쁜 것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도 사용되었고, 현대에 와서 많이 쓰이는 '진상'은 그 부정적 의미를 차용하여 '못생기거나 못나고 꼴불견이라 할 수 있는 행위나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예전에 ‘땅콩회황’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이렇습니다. 땅콩은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 있기에 봉지를 드리고 먹겠다고 하면 접시에 담아 드리는 것이 매뉴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진상 손님이 땅콩을 접시에 담아 주지 않고, 봉지로 주었다고 화를 내면서 비행기를 멈춰 세웠습니다. 그리고 승무원을 내리게 한 후에 비행기를 출발하도록 했습니다. 자신의 권력과 재력을 믿고, 힘이 약한 사람을 괴롭혔던 ‘진상’의 한 예입니다. 이런 진상의 이야기는 곧잘 언론에 등장하기도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좋은 뜻인데 그 의미가 퇴색된 단어가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바리사이’입니다. 바리사이의 원래 의미는 ‘분리된 사람’이란 뜻입니다. 바리사이는 죽은 이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바리사이는 율법과 계명을 충실하게 지켰습니다. 바리사이는 이정표와 같았습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을 따르면 하느님께로 가까이 갈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바리사이는 특권의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죄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의 위선과 교만을 비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의 ‘진상’ 행위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바리사이들의 하는 말은 지키고 따라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따르지 마라.”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지고가야 할 짐을 남에게 맡겼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도 하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의 조문을 외우지만, 율법과 계명의 정신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릇의 겉만 닦고 속은 닦지 않는 것처럼, 바리사이는 겉은 화려하게 꾸미지만 속마음은 탐욕과 거짓으로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는 자신들의 얄팍한 지식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시험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바쳐야 한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
모든 바리사이가 진상은 아니었습니다. 바리사이 중에도 예수님을 스승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니코데모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무덤에 모셨습니다. 이방인의 사도가 된 바오로 사도는 바리사이였습니다. 교회를 박해했던 바오로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회심한 바오로 사도는 베드로 사도와 함께 초대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위하여 나는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는 고통까지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신앙인으로서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성직자와 수도자가 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성직자와 수도자로서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진상 신자, 진상 성직자와 수도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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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6. 연중 제9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눈을 다친 사람이 올림픽 사격 대회에 나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다리가 부러져 목발에 의존해야 하는 사람이 월드컵에 나갔다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시지요? 맞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지요. 또한 그 결과는 보나마나일 것입니다.
사격에 나가려면 다른 것도 온전해야 하겠지만, 눈도 온전해야 합니다. 월드컵에 나가려면 다른 것도 온전해야 하겠지만 제일 중요한 다리가 온전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의 모든 것을 다 해서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가톨릭교회의 두 축이라고 이야길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 존재하고, 우리고 또한 이 말씀으로 인해 천국을 보장받습니다.
이 두 말씀을 보고 있자면 십자가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첫 번째 말씀은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계명입니다. 그러므로 수직이지요. 두 번째 말씀은 인간과 인간에 대한 말씀이므로 수평입니다.
수직과 수평이 만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 위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 사랑하는 곳에 인간과 인간이 만나 사랑하는 곳에 예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그것은 수직과 수평이 한 점에서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십자가가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 이 모두를 하는 것은 바로 ‘나’입니다.
이런 ‘나’는 그냥 ‘나’가 아닌 사랑으로 가득 찬 ‘나’입니다. 또한 어떤 일이 있어도 하늘을 향해 걷는‘나’입니다.
이렇게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하느님 사랑 안에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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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팀이란….
성공적인 결과를 얻은 운동선수들에게 기자는 질문합니다.
당신의 활약으로 팀이 승리했습니다.
오늘의 활약은 특히 더 대단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과 같은 결과를 낼 수 있었던 다른 비결이 있었나요?
이렇게 질문을 하면 대부분의 선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선 기분이 좋습니다. 오늘 컨디션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우리가 팀으로 승리했기 때문입니다.
혼자 잘한 것이 아니라 우리 팀 동료들이 잘해주었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원팀으로 계속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들은 원팀을 강조합니다. 원팀은 뭘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원팀은 자기 통제와 배려로 뭉친 결합체입니다.
자기 통제력을 가지고 서로를 배려해야 원팀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며 동시에 매우 값진 것입니다.
우리 가정도 원팀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공동체도 원팀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을 위한 팀이 아닌 서로 배려하는 ‘원팀’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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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6.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하라
<가장 큰 계명, 사랑의 이중계명이 답이다>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시편25,4)
오늘은 제69회 현충일입니다. 나라 사랑에 몸바친 분들을 기리는 날입니다. 6.25당시 나라를 위해 싸우다 전몰한 장병과 순국선열 그리고 순직 공무원 등의 넋을 기리고 얼을 위로하기 위해 지정된 대한민국의 기념일이자 법정 공휴일입니다. 오늘 10시 정각에 전국민은 경건한 마음으로 애국선열의 명복을 비는 묵념을 합니다. 또 오늘은 제80주년 노르만디 상륙작전 기념일이기도 합니다. 1944년 6월6일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킴으로 나치 독일에 대한 승리의 전환점이 된 날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오늘 담화를 통해 “결코 다시 전쟁은 아님을”(Never again war!), 또 평화와 기도를 강조하셨습니다.
모든 전쟁은 영적전쟁으로 전환되고 모두가 영적승리의 삶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방법은 단 하나, 주님의 사랑의 전사가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성심성월” 전인류가 사랑을 회복할 절호의 달로 오늘 복음도 반갑게 일치합니다. 사랑은 멀리 밖에서 부터가 아니라 가까이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구체적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시 반갑게 읽어보는 감동적인 카톡글입니다.
“저희 부부는 신들린 사람처럼 하루하루 기쁘게 생활했습니다. 이제 나이가 60대 후반의 부부가 되어보니 서로 안쓰럽고 눈빛만 봐도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 차리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수도원에 도움이 될까? 어떻게 하면 수사님들께서 좀 더 편리하게 사용하실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집을 짓고 있습니다. 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입니다.”
이렇게 사랑으로 집짓는 일을 마치고 사랑의 향기를 남기고 바람처럼 떠난 사랑의 부부입니다. 사랑은 추상적 명사가 아니라 구체적 동사입니다. 사랑은 마음이기보다는 행동입니다. 이 순박한 부부의 사랑은 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어김없이 하느님께 대한 열렬하고도 항구한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사랑해서 사람입니다. 사랑하지 않고 사람이 되는 길은 없습니다. 사랑은 사람의 본질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사랑뿐이요, 평생공부도 사랑뿐이요 평생 졸업이 없는 “사랑의 학교”에서 평생학인이 되어 공부해야 하는 영원한 초보자인 우리들입니다. “사랑”하면 떠오르는 두 편의 시詩가 생각납니다.
“당신 언제나
거기 있음에서 오는 행복, 평화
세월 지나면서
색깔은 바랜다지만
당신 향한 내 사랑 더 짙어만 갑니다
안으로 안으로
끊임없이 타오르는 사랑입니다
세월 지나면서
계속 새로워지고 좋아지고 깊어지는
당신이면 좋겠습니다”<1997.3. >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면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면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1998.12.25.>
27-26년전 시들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공감하는 사랑의 시입니다. 오늘 복음의 율법학자도 제가 보기엔 이런 분입니다. 율법학자가 다 꽉막힌 사람은 아닙니다. 오늘 어느 진지하고 진실하고 열려있는 구도자 율법학자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도 진지합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 뭐냐는 질문에 하나에 하나를 추가하여 둘을 말하며 이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 말합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613가지 율법을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요약합니다. 예수님의 창안같지만 이미 신명기(6,4)와 레위기(19,18)의 말씀의 재확인이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권위가 넘치고 한층 중요성을 띕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화답하는 율법학자 역시 참 멋진 훌륭한 제자의 자질을 지닌 분임을 깨닫습니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낫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온마음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과제로 주어진 인생임을 깨닫습니다. 삶은 선물이자 평생과제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났음이 선물이요, 평생과제 사랑의 수행을 통해 완성해야할 인생입니다. 과연 사랑의 숙제는 잘되어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삶인지 자주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날마다의 미사시간이 참 좋은 사랑의 점검시간이기도 합니다. 슬기롭게 대답하는 내공 깊은 율법학자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이 우리에게도 해당됐으면 좋겠습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참으로 멋지게 실천한 분이, 이중사랑의 빛나는 결정체가 바로 예수님이요, 제1독서에서 예수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바오로입니다. 바오로 역시 예수님을 닮아 사랑의 이중계명 실천의 대가이자 달인입니다. 비록 옥중에서 쇠사슬에 매여있지만 자유로운 영혼의 바오로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감옥에 가둘 수 없듯이 예수님과 일치된 자유로운 영혼 역시 감옥에 가둘수는 없습니다. 바오로는 사랑하는 제자 티모테오에 대한 가르침은 그대로 오늘의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기억하시오, 예수그리스도를”(Beloved: Remember Jesus Christ)”에 이어지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문이자 찬가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기원합니다. 영성생활에 예수그리스도를 잊지 않고 끊임없이 기억하는 일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과의 일치가 날로 깊어질수록 사랑의 이중계명 실천도 더불어 저절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며,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니,
그러한 당신 자신을 부정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일치된 이들은 예수님을 닮아 성실한 사람들이요 사랑의 이중계명의 실천이 이를 입증합니다. 중용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성실(誠實)은 하늘의 도이며, 사람의 도입니다.” 하늘은 성실합니다. 자연의 운행은 지치거나 쉼이 없고, 게을러지는 법이 없이 한결같습니다. 수도원 주차장의 활짝핀 금계국꽃들과 마가렛꽃들의 환대가 한결같이 성실합니다. 다음 옛 어른의 말씀도 지칠줄 모르는 한결같은 사랑의 노력을 권합니다.
“성공이라는 드문 일은 수많은 실패들의 반복으로 이뤄진다.”<다산>
“노끈으로 톱질해도 나무를 자를 수 있고, 작은 물방울이 쌓이면 돌에 구멍을 낸다.”<한서>
사랑의 이중계명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닮아 진실(眞實), 성실(誠實), 절실(切實)의 삼실(三實)의 사람들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주님을 닮은 사랑의 이중계명 실천의 사람들로 변모시켜 줍니다.
“주님,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 진리로 이끄소서.
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옵니다.”(시편25,5ㄱ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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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6.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나의 사랑>
나를 빚으신 분을 사랑하니
나를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니
나를 빚으신 분을 사랑하네
너를 보내신 분을 사랑하니
너를 사랑하고
너를 사랑하니
너를 보내신 분을 사랑하네
너와 나 이으시는 분을 사랑하니
너를 나처럼 사랑하고
너를 나처럼 사랑하니
너와 나 이으시는 분을 사랑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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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6. 연중 제9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
세 가지가 조화된 온전한 사랑
인간 생명은 세 가지가 조화되어 이루어집니다. 에페소인들이 ‘몸(육체)과 목숨(영혼)과 정신(영)’의 은총을 주님께서 오실 때 온전히 간직하게 되기를 기도한다고 사도가 말하는 대목에서도 이와 같은 가르침을 볼 수 있습니다. ‘몸’은 영양분을 주는 부분을 말하고 ‘목숨’은 생명에 관련된 것을, ‘정신’은 지적인 차원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복음 저자에게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을 어떤 계명보다도 앞세워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참조· 마태 22,37; 마르 12,30; 루카 10,27). 이 한 구절이 온전한 인간을 아우르고 있습니다. 곧, 육체적 본성인 심장, 드높은 지적 이성적 본성인 정신, 그리고 이 둘을 중재하는 영혼을 모두 일컫습니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7 사람은 위대하다
주님의 성령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다(지혜 1,7)
신적인 씨앗은 우리 안에 들어 있다. 여느 씨앗이 그러하듯이, 신적인 씨앗도 자라야 한다.
또 다른 자리에서 엑카르트는 “그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이다”라고 되풀이 하여 말한다. 아무도 그 씨앗을 덮어 버리거나 입을 다물게 하거나, 오랫동안 잊어버릴 수 없다. 옮겨 붙을 재료만 있으면 그것은 불타오를 것이다. 씨앗은 자라고 또 자라야 한다. 우리도 자라야 하고, 우리 안에 있는 신적인 씨앗도 자리야 한다.
이 자람은 끝이 없다. 끝이 있다면, 하느님이 그 끝일 것이다. 신적인 차원으로 뻗어 나가려고 하는 영혼의 포부야말로 영적인 성장의 출발점이다. 우리는 우리의 불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여러분은 하느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을 충분히 소유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여러분은 하느님을 더 원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을 충분히 소유한 나머지 싫증이 날 정도라면, 하느님은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닐 것입니다.”(181)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4장 오직 고통뿐
1년 후에는
루치아는 이 귀찮게 구는 사람들, 비평하는 사람들, 특히 아첨하는 사람들로부터 멀리 떠나고 싶었다.
지금 그녀는 그 당시를 회상하며 말한다.
“그 칭찬과 추켜올리는 말들을 들었을 때 저는 참으로 민망스러웠습니다. 사람들이 제게 대해 말하는 것이 다 진실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알쥬스트렐의 세 목동이 날마다 드리는 로사리오의 기도 덕분에 로사리오의 신심은 재빨리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이것은 곧 포르투갈의 새 시대의 서광이었다. 그러기에 포르투갈의 주교를 비롯하여 온 국민은 1938년 파티마의 성모님께 대한 대규모의 감사 축제를 계획한 것이다.
한편 파티마의 심부름꾼이었던 루치아, 프란치스코, 히야친따에게는 사방을 둘러보아도 고통뿐이었다. 그래도 기특한 그들은 두 손을 뻗어 소탈하게 그 고통을 맞이했다. 그 고통이야말로 그들에게 있어서는 무한히 사랑하올 분의 축복으로 이끄는 십자가였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그들은 하늘의 기쁨에 자신을 잊고, 이 괴로운 시련을 미리 알려 주고 동시에 천국을 약속해 주신 귀부인의 더할 나위 없으신 아름다움과 그 사랑겨운 말씀을 늘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수업이 없는 날에는 셋이서 루치아네 집 우물 그늘이나 카베소의 고요한 동굴에 모였다.
거기서 그들은 이 세상 것, 이 세상 사람 일체를 피해 오직 셋이 함께 기도하고 함께 고통을 받으며 서로의 힘을 북돋우는 것이었다. 이 평화스런 경지에서 그들은 형언키 어려운 발현의 그때를 재현하며 귀부인께서 가르쳐 주신 희생의 방법, 약속, 그 중에서도 그들에게 맡기신, 이 지상에서는 자기네 이외에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 신비한 비밀에 대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언제까지나 대화를 나누곤 하였다.(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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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6.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을 종합하는 사랑의 이중 계명을 가르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기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안다면, 이 두 계명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인간에게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거의 본성과도 같아 이겨 낼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른 이를 사랑할 때도 그 사랑 안에는 언제나 자신을 향하는 사랑이 섞여 있습니다.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그 순간조차도 ‘너’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나’입니다.
프랑수아 바리용 신부는 인간의 근원적인 자기애(自己愛)와, 그로 말미암아 순수하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원죄’로 봅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전부일 수 없게 하는 ‘자신을 향한 사랑’이 바로 원죄입니다(『흔들리지 않는 신앙』, 47-48면 참조).
자기애를 이겨 내려면 끊임없이 하느님을 중심에 두려고 노력하여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은 하느님과 이웃을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이용하거나 배제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중심에 두었을 때 그 누구도 결코 도구화 되거나 소외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향하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첫 번째 계명을 충실히 지키면,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번째 계명이 자연스럽게 실현됩니다.
이러한 삶이 결국 자기 자신을 참되게 사랑하는 삶입니다.
사랑으로 창조되고 사랑으로 충만하여지는 인간은, 순수하고 참된 사랑을 할 때 본모습을 찾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참으로 사랑하고 잘 돌보려면 이기주의적인 자기애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순수한 사랑의 시선을 찾아야 합니다.
자기애를 버리고 하느님을 향할 때,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하느님 사랑의 신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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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6.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12,12,28ㄱㄷ-34)
오늘 복음의 율법 학자는 요즘 사람들이 자주 언급하는 ‘답장너 loaded question'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아는 것처럼 현문현답賢問賢答의 전형적인 실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예전 학창 시절을 떠오르면 부끄러움이 많은 학생이었기에, 선뜻 질문을 던지지 못했습니다. 물론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고 모르는 것, 혹 불확실한 것을 명백하게 알고 싶은 마음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잖아요. 그렇습니다. 좋은 질문은 좋은 대답을 얻게 될 것이고, 이는 곧 어둠에서 빛으로 향하는 인생의 과정입니다. 일찍이 ’테야르 드 샤르댕‘은 생명에게는 어둠 속을 더듬어 가면서 가능한 모든 길을 찾아보려는 방향성이 있으며, 이것이 진화를 부채질한다, 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에서의 어둠은 빛의 부재뿐만 아니라 모름에 대한 은유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어둠은 불가에서 이야기하는 무명無明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기에 빛을 찾아 열심히 더듬는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누구인지를 잘 모르고 있으며 어디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아무튼 율법 학자는 예수님과 사두가이 사이의 토론을 열심히 들었습니다. 그가 열심히 들은 까닭은 바로 그의 내적 호기심의 발로이며, 무려 613개 조항의 계명 가운데 도대체 으뜸가는 계명은 어떤 계명일까, 하고 물어왔기에, 이 토론을 지켜보면서 이분이시라면 나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다고 확신했나 봅니다. 그래서 그는 주저하지 않고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12,28)라는 질문을 예수님께 드린 것입니다. 그 율법 학자만이 아니라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이 갖고 있던 오래고 묵은 질문이었지만, 아무도 감히 질문하지 못한 것은 저처럼 부끄러움이 많거나, 호기심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이 율법 학자 때문에 우리가 참으로 알고 싶었던 으뜸 계명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질문을 받고서 예수님은 비로소, 구약과 신약을 집약하고 요약해서 단 두 가지로(=사랑의 이중 계명) 총괄합니다. 즉, “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12,30.31) 하느님 사랑이 첫째이며 이웃 사랑이 둘째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두 사랑은, 특별히 마태오 25장의 최후 심판에서 잘 드러나듯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발로라고 밝힘에서 그 절정에 이릅니다.
그러기에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첫째와 둘째 계명을 언급하기 전에 먼저,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라고 전제하고서 계명을 말씀하셨고, 이 가르침을 듣고 난 다음에 율법 학자 역시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12,32)라는 표현에 주목하고, 이 표현의 의미를 새겨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깨닫지 못하고서는 뭣이 중헌디, 뭣이 중하냐고!, 라는 표현처럼 본말이 전도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의 순서와 가치 서열을 파악하기 이전에, 그리스도인 존재의 실천 원리로서 계명을 논하기 이전에, 이 계명의 기원과 왜 이 계명을 소중히 여기고 실천해야 하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와 기원은 바로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뿐이시며, 한 분뿐이신 하느님 안에서 우리 모두 다 그분의 자녀이고 형제라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음과 목숨, 정신과 힘을 다해 이를 깨우쳐 깨달을 때 그분을 온전히 사랑하고 그 사랑 안에서 자연스럽게 우리 존재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고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이론이 아닌 실재이며, 계명이 아닌 존재 이유이고 보람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율법 학자가 이런 대답을 하기 이전부터 그렇게 노력하면서 살아 온 모습을 꿰뚫어 보시고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12, 34)하고 칭찬과 함께 그런 삶을 충실히 살아가도록 독려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이 슬기롭게 대답한 율법 학자처럼 슬기롭게 대답할 뿐만 아니라 실천하면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주님으로부터 이런 칭찬을 듣는 삶을 충실히 살아가도록 합시다.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그 빛으로, 그 진리로 오늘 이끌어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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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6.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첫째가는 계명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28절)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은 두 가지 큰 계명을 들어 그것을 하나로 만들어 대답하신다. 먼저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신명 6,4)라는 유대교 교리의 진수와 신앙의 기초를 말씀하시면서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라는 말씀을 하시며,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유일한 증명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실행함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말로서가 아니라 가난한 이웃을 겸손하게 섬김으로써 하느님의 위엄을 가장 잘 찬미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모든 율법서와 예언서가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계명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신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 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30절) “마음을 다하여”라는 표현은 조그마한 갈라짐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찮은 것에 사랑을 쏟아붓는다면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그 사랑이 그만큼 부족할 것이기 때문이다. 동정이라는 말이 바로 하느님께 대한 갈림 없는 사랑의 삶이라고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31절) 이웃 사랑은 최고의 덕이며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계명의 근본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이웃을 모른 체하지 않는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고 말씀하신 바를 기억하여 자비를 보여준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유일한 확증은 바로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고 그들을 끊임없이 돌보는 일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대답을 들은 율법 학자는 그 대답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덧붙여 말한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 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낫습니다.”(33절).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34절) 고 축복해주셨다. 나는 어떻게 이 계명을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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