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의 시토회 수도원장은 스테파노 하르딩이라는 규율 엄정한 영국인이었으나,
이런 일을 무척 유감스러이 생각하며 평소부터 좋은 지원자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는데,
뜻밖에 베르나르도가 여러 동료들과 더불어 입회를 원하자 날뛰듯이 기뻐하며 즉시 그들을 받아들였다.
베르나르도는 트라피스트회의 엄중하기 짝이 없는 모든 규율을 충실히 지킬 뿐 아니라
자진하여 다른 고행도 많이 행했다.
그리고 언제나
"베르나르도야, 너 무엇하러 여기 왔느냐( Ac quid venisti)?"는
글씨를 앞에 놓고 자신을 격려했다.
Every morning Bernard would ask himself,
"Why have I come here?",
and then remind himself of his main duty - lead a holy life.
이 같은 베르나르도의 수도에 대한 열심이 눈에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1115년에 그는 랑그레에 시토 수도원을 세우기 위해 12명의 수도자와 함께 파견되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엄격한 규율과 엄격성 때문에 약간의 어려움에 봉착했으나
그의 성덕이 수많은 제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이때 이 수도원의 이름을 바레 답신트에서 클레르보(명랑한 골짜기)로 바꾸었고,
당시 68개의 시토회 수도원의 모원이 되었다.
그 뒤 그는 38세때 트로아에서 개최된 성직자 회의에 참석하고,
신전기사(神殿騎士)수도원의 규율을 혁신할 것을 위탁받게 되었는데,
이것이야말로 베르나르도가 그리스도교를 위해 공공연히 활동을 시작한 시초로서,
그후로는 주교의 선거나 또한 여러 교리 및 사목 논쟁에 대한 화해 조정 등
중대한 교회의 문제를 그가 관계치 않은 것은 거의 없을 정도로
유럽의 가장 영향력있는 인사 중의 하나가 되어 통치자와 교황의 자문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는 대립 교황인 안클레투스 2세의 요구에 대항해 1130년의 인노첸시오 2세 선출의 합법성을 지지했다.
또한 그는 로테르 2세를 황제로 인정하도록 롬바르드인들을 설득시키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1140년부터 그는 공적으로 설교하는 일을 시작해 여러 지역의 교회에서 부탁을 받아 강론을 하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듣는 것보다도 성인이라는 소문이 있는 그를 접하고, 그의 기적을 보며,
그의 축복을 받으려는 열정으로 수십리 되는 먼 거리를 무릅쓰고 모여오곤 했고
이로써 그는 놀라운 명성을 얻었다.
베르나르도는 초청을 받고 이에 응할 수 없는 경우에는
종종 그 교회에 서한을 보내어 훈계나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이와 같은 서한 중 지금까지 보존해 내려온 것이 500여 통에 달하고 있는데,
어느것을 보더라도 경건과 신심이 충만해 교회를 염려하는 마음에 누구나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공로 중 가장 뛰어난 일은 무엇보다도 성지 팔레티나를
회교도의 수중에서 탈환하는 십자군을 위한 설교일 것이다.
이것은 전에 클레르보의 수도자였던 교황 에우제니오 3세의 명에 의한 것으로
그는 전 유럽 각국을 순회하며 일반 시민들에게 성스러운 전쟁에 가담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참가한 각국 장병들은 모두 인간들이라 결국 저들간에 질투와 시기심으로 싸움이 일어나
마침내 십자군 전쟁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는 베르나르도에 있어서 커다란 시련이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인내하며, 교회에 손해를 입히지 않고,
또 남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성심성의로 기도하며 보속으로 극심한 고신 극기를 감행했다.
그는 교황직의 의무에 대한 글을 교황 앞으로 보내어서 로마 쿠리아의 남용을 자제하고,
교황이 항상 목전에 두어야 할 종교적 신비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교황 에우제니오는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으므로
그를 랑그독에 파견해 알비파 이단을 대항해 설교토록 했다.
그는 명령받은 임무를 완수하기만 하면 늘 마치 그리운 고향에 가는 것처럼
클레르보에 부지런히 돌아와서 사랑하는 수도 생활에 골몰했다.
그리고 그가 수도원에 돌아올 때는 반드시 새로운 지원자들을 데리고 오는 것이 상례였다.
그리하여 클레르보의 수도자 수는 점차 증가되어 그의 임종시에는 약7백명이란 다수에 달했다.
자신에 대해서는 추상같이 엄격하던 그도, 제자들에 대해서는 봄날처럼 온순히 대하며,
자신의 깊은 신비적 체험에서 베풀어지는 건강한 지도는 누구나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활동과 심각한 건강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왕성한 저술가로도 큰 명성을 얻었다.
그의 서한과 아르마그의 성 말라키의 생애 그리거 신애론이 영어로 번역되었고,
자신의 수도자들에게 행한 강론때문에 그의 저서와 신심은 오늘의 신자들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고 있다.
그는 모든점에서 수도자들에게 명상적 생활을 하도록 권고했다.
그는 밤에도 기도했는데 그의 동료 수사들도 밤에 깨어 함께 기도했다.
그는 수도원을 지혜롭게 잘 다스렸으며, 특히 수도원 규칙을 엄중히 보전해 나가려고 무진 애썼다.
그러므로 그의 정신은 그 수도원에 오늘날까지 살아있다.
1152년 베르나르도는 병상에 눕게 되었는데 마침 메츠시의 귀족과 시민들 사이에 투쟁이 일어나자,
주교는 베르나르도에게 사신을 보내어 그이 조정을 절실히 간청했다.
그러자 그는 쇠약한 몸을 두 수도자에게 부축 받아 그 시에 가서 알선에 노력한 결과
끝내 쌍방을 화해 시키는데 성공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활동이었다.
그의 병세는 더욱 심해졌다. 그가 교회를 위해 세운 수많은 공로와 또한 수도원에서
시시로 쌓은 덕행의 보수를 받기 위해 천국을 향해 떠난 것은 1153년 8월 20일의 일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 63세였다. 그는 다양한 기질과 믿음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으며,
’꿀처럼 단 박사’(Doctor Melifluus)란 칭호를 얻었다.
교황 비오 8세가 그를 1830년에 교회 박사로 선언했다.
그는 스콜라학파 이전의 신학자이며, 때로는
"마지막 교부"(Last of the Fathers of the Holy Church)로 불리기도 한다.
☆시토회
Ordo Cistereiensis
Cistereians(O. Cist.)
1098년 프랑스 부르군드지방시토(Citeaux)에서
성 로베트트(St. Robertus de Molesme, ?∼1111)가 설립한 수도원에서 시작된 수도회,
회의 이름은 모원의 지명에서 비롯되었다.
성 베르나르도(St. Bernardus de Clairvaux)의 기여로 크게 발전하였으며,
곧 서부유럽으로 확산되어 13세기 중엽에는 680여 개의 소속대수도원들이 있었다.
은수적(隱修的)인 수도외의 생활양식으로 교회, 제구(祭具), 제의(祭衣) 등이 매우 소박하며
성 베네딕토의 회칙을 기초로 한 규법을 준수하여 단식, 침묵, 단순노동 등이 매우 엄격하게 준수되었다.
1119년 교황 갈리스도 2세에 의해 인간된 `사랑의 헌장’(Charta Caritatis)이 회헌이 되었으며
이런 시토의 규정들은 다른 중세수도원 들, 특히 의전수도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17세기에 시토회에 각국가단위의 구심점들이 형성되자 시토에 있는 수도원은
국외 시토회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초기의 엄격한 회칙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려는 운동이 시작되어
이것은 라 트라프 (La Trappe)의 수사들에 의해 실현되었다.
1902년 레오 13세 때 트라피스트회는 시토회에서 `엄률 시토회’로 분리하여 독립하였고,
이 전의 시토회는 `성 시토회’로 존속하였다.
1898년 시토 대수도원이 복구되었을 때 엄률을 채택하엿으며
로마에 거주하는 시토의 아빠스는 엄률시토회의 총장이 되었다.
☆트라피스트회
Ordo, Cisterceinsium Reformatorum
Trappists
1098년 프랑스의 시토(Citeaux)에 세워진 수도회,
즉 시토회 중 `엄률(嚴律) 시토회’의 주요 수도회.
1892년 시토수도원이 모원(母院)으로 회복될때까지 라 트라프(La Trappe)가 엄률 시토회의 중심지였다.
이 곳에 1664년 랑세(A. J. Le B. de Ranc )에 의해 개혁의 물결이 일게 되었으며
이 때 `트라피스트’란 이름이 생겨났다.
이는 이전의 시토회의 성격을 보유하면서 더욱 엄격성을 추가한 회였다.
트라피스트의 생활은 `기도와 참회, 침묵과 노동’으로 요약된다.
(가톨릭대사전에서)
토마스 머튼(1941년 트라피스트 수도원 입회.칠층산,명상의씨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