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Ⅲ-61]인상 깊은 2개의 편액 이야기
최근 서울 인사동 <진공재 갤러리>에서 본 2개의 편액(현판)이 너무 인상 깊어 뇌리에 박혔다. 첫 번째 편액(35×117×4cm, 송판松板)은 청나라 석학 옹방강(翁方綱, 1733-1818)이 1811년 10월 조선에서 온 24살의 추사 김정희(1786-1856)에게 써준 것이고, 두 번째 편액(107×30cm, 틀포함 113×37cm)은 구한말 석촌石邨 윤용구(尹用求, 1853-1939, 고종때 문신이자 서화가)이 국포菊圃 이교엽(李敎曄, 1963-1943)에게 써준 것이다, 둘 다 고색창연한 작품이다. 첫 번째 편액의 원본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있는데, 누군가 복각한 것을 전각예술가 진공재가 먼지를 털어내고 호분(胡粉, 조개껍질 가루)과 경면주사로 칠을 새로 한 것이다.
현판의 유래와 내용을 살펴보자. 먼저 옹방강은 53살이나 어린 추사와 필담을 나눈 후 평생 사제師弟의 연을 맺었다. 또한 “경술문장經術文章 해동제일海東第一”이라 극찬한 후 ‘보담재寶覃齋(옹방강의 호는 담계覃溪)’라고 호까지 지어줬다. 추사는 옹방강 사후엔 스승의 아들과 편지를 주고받았으니, 어떻게 이들의 ‘학문적 우정’이 대를 잇고 이어지게 된 것인지 그저 놀랍기만 하다. 그런가하면 추사는 옹방강 다음 가는 학자 완원(阮元, 1764-1848)과도 사제의 연을 맺었는데, 호 완당(阮堂)도 스승을 기리는 뜻으로 지은 것이다. 아무튼 ‘실학實學’이 무엇인지 모르는 분은 없으리라. 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 곧 실사구시實事求是인 것이다. 옹방강은 실사구시가 무엇을 말함인지 친절하게 해설하는 글을 큰글씨 옆에 병기했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攷古證今 山海崇深 覈實在書 窮理在心 一源勿貳 要津可尋 貫徹萬卷 只此規箴> 어려운 한자는 실상을 조사한다는 뜻의 ‘규명할 覈핵’자와 ‘바늘 잠箴’자 정도일 것이니, 풀이를 보자. “옛것을 고찰하여 오늘날 (이를) 증명한다.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다. 사실을 규명하는 것은 책 속에 있고, 이치를 탐구하는 것은 마음에 있다. 근원이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의심치 마라. 요체의 나루를 찾을 수 있다. 만권의 책을 꿰뚫는 것도 단지 이 가르침 하나뿐이다” 조선에서 온 손자뻘의 연부역강 학자를 극진히 대접하며 이와 같은 글을 써주다니, 퇴계와 기대승의 학문적 우정을 보는 듯하지 않은가. 추사는 이 글 속에 나오는 <山海崇深산해숭심>을 스승의 유지를 받들 듯 글로 써 남겼다.
두 번째 편액(현판)의 ‘역수헌亦睡軒’은 윤용구의 당호인 둣하고, 耈傖(구창)은 비루한 늙은이라는 뜻으로 자신을 낮춘 것이다. 아마도 어지러운 구한말 정국에 경북 거창에서 처사로 독야청청하는 이교엽의 서실에 붙이라는 의미로 써준 듯하다. 호 국포菊圃도 의미심장하다. 국화는 오상고절傲霜孤節의 상징이자 은일隱逸하는 선비의 꽃이 아니던가. 국화밭이래도 상관없겠다. 문집으로 <국포집菊圃集>을 남겼는데, 거기에 실린 한시 한 편이 선비의 정신을 나타내듯 써늘하다.
전문을 감상하자. <蹈白刀不懼 見靑天懼/涉風波不恐 立平地恐/竹密不防水 山高何礙雲/治堯田者 有水憂/治湯田者 有旱憂/我則無旱憂 亦無水憂>. 무슨 뜻인가. “칼날을 밟아도 두렵지 않는데, 청천을 보면 두렵다/높은 파도는 두렵지 않는데, 평지에 서서는 두렵다/대나무는 아무리 많아도 물을 막지 못하고/산은 아무리 높아도 구름을 막지 못한다/벼슬하는 사람들은 거기에 따라 근심 걱정이 따르겠지만. 나에게는 그런 것이 없으니 무슨 근심걱정이 있겠는가”라는 뜻일 터인데, 여기에서 어려운 한자라야 ‘걱정할 우憂’는 아실 것이고, ‘두려울 구懼’ ‘거리낄, 방해할 애礙’‘가물, 드물 한旱’자 정도일 듯. ‘치요전자治堯田者와 치탕전자治湯田者’는 요임금과 탕임금 때의 벼슬아치를 이른 것이다.
윤용구를 검색해보니, 공재 윤두서의 10대손으로 성균관 대사성과 도승지,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고종때 문신이자 서화가였다. 일제가 주는 어떤 작위도 거절한 마지막 선비의 삶을 살았다고 한다. 푸른 하늘과 평평한 대지를 두려워한 국포 이교엽은 역사를 제대로 아는 자가 아니었을까. 그러니 석촌이 현판을 써줬을 터이고. 2개의 편액을 감상한 단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