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48
1월27일[연중 제3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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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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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P9YDjLj5fNE
[의정부교구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님 집전(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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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세상만사를 섭리하시고 보살피시는 우리 주님이심을 굳게 믿고 거듭 밀려오는 고통 속에서도 기쁘게 살아야겠습니다!>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가끔 우리 인생 여정에도 거센 돌풍이 일 때가 있습니다. 때로 그 돌풍은 허리케인이나 토네이도처럼 강력한 타격을 우리에게 끼칩니다. 그로 인한 끔찍한 고통과 상처가 우리 공동체 안으로, 우리 가정 안으로, 내 영혼 안으로 밀려 들어와 우리를 큰 슬픔과 근심에 잠기게 만듭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그런데 정말 안타깝고 답답한 일은 우리의 구세주요 의지처이신 주님께서 그토록 힘겨운 순간 도무지 우리를 도와주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외칩니다.
“대체 주님은 어디 계십니까? 주님이 계신다면 어찌 우리에게 이토록 혹독한 고통을 겪게 하십니까?”
넘실거리는 파도로 인해 배 안으로 물이 가득 들이차게 되자, 잔뜩 겁에 질린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외칩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생사의 주관자, 만물의 창조주,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외아들이 승선해 계시는데도 제자들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 품안에 푹 안겨서 더 이상 행복할수 없는 상황인데, 매일 주님을 모시고, 그분과 접촉하며, 그분이 내 안에 거처하시고 현존하시는데도, 대체 주님은 어디 계시나? 대체 뭐하시나? 라고 울부짖습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우리네 인생 여정뿐 아니라 우주 만물, 삼라만상을 주관하시고 지배하시는 우리 주님이십니다.
매일 밀려오는 근심 걱정들, 의혹과 불안함을 그때그때 자비하신 주님 손길에 맡겨드려야겠습니다. 세상만사를 섭리하시고 보살피시는 우리 주님이심을 굳게 믿고 거듭 밀려오는 고통 속에서도 기쁘게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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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내 안에 잠든 예수님을 깨워라>
톨스토이는 부유한 귀족 출신에다가 작가로서도 크게 성공하여 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참 만족이 없었습니다. 무언지 모를 불안과 공포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적한 시골 길을 걸어가다가 너무나 평화로워 보이는 한 시골 농부를 만났습니다. 톨스토이는 농부에게 다가가 당신의 그 평화로움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농부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저는 항상 하느님만을 의지하고 살지요. 그래서 제 마음은 늘 기쁘답니다.” 그 말을 들은 톨스토이는 그때부터 진지하게 하느님을 찾기 시작했고 결국 하느님을 만나 과거의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주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주님의 또 다른 이름은 ‘평화’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당신을 깨워주기 전까지는 우리 안에서 잠을 자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왜 배 위에서 주무시고 계셨을까요? 배는 몹시 흔들리고 물이 들이차는 상황이라 억지로 자는 척하지 않는 이상 그렇게 깊은 잠에 빠져계실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무언가 가르치려고 하신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자신의 힘으로 하려고 하는 것을 멈추고 당신을 부르고 당신께 모든 것을 맡기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죽기 직전까지 필사적으로 노력합니다. 이것이 자신 안에 남아있는 자아의 욕심입니다. 나의 힘만으로 무언가 이루어내려고 하는 것도 어떤 때는 명예욕의 발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힘을 다 빼고 당신께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때까지 예수님은 우리 각자 안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내가 힘이 빠졌다는 것은 어떻게 알까요?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남자는 한 여인을 좋아해 청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거절당했습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그 남자는 그 여자가 주님께서 맺어주신 사람이 아니라 믿고 그 여자를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10년 뒤에 우연히 그 여자를 다시 만나게 되었고 이것도 인연인지라 다시 한 번 청원해 보았습니다. 그때 수락하여 둘은 결혼하였습니다.
만약 그 여자를 잃는 두려움 때문에 10년 동안 쫓아다녔다면 그만큼 감정의 고통을 겪었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맡길 줄 알았기에 10년을 평화로이 살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 맡긴다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예수님은 바다를 가라앉히신 다음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겁을 내는 게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잃으면 잃는 것이고 얻으면 얻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주님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사해는 염분이 많아서 몸이 절대 가라앉지 않습니다.
사해에 들어갈 때 꼭 지켜야 하는 수칙은 뜨기 위해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괜히 몸을 움직이면 얼굴이 물속으로 들어갈 수 있고 그러면 눈에 심한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수영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이 튀어 눈에 들어가면 엄청 아픕니다.
바오로 사도는 죽는 것이 오히려 더 낫지만 그래도 신자들을 위해 이 세상에 더 살아야겠다고 말합니다.(필립 1,21-24 참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거의 없습니다.
이것 자체가 자신의 모든 힘을 뺐다는 증거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 사람을 통해 모든 일을 하십니다.
이 경지까지 가기는 힘들지라도 나에게 어떤 두려움의 감정이 생길 때마다 오늘 복음을 되새기며 주님께 더 의탁하도록 합시다.
내 안의 잠든 예수님을 깨웁시다. 하도 자주 깨워서 예수님만 깨어있고 나는 편안히 잠자는 사람처럼 됩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이 평화롭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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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매주 수요일에 ‘직원회의’가 있습니다. 보통은 업무보고를 하고, 저의 일정을 이야기하면서 회의는 30분 안에 끝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가끔 현안에 대한 토론을 할 때가 있습니다. 매년 조금씩이라도 급여를 인상해야 하는데 코로나 팬데믹 여파로 급여를 삭감하였고, 대신에 근무시간을 단축했습니다. 편집기의 시스템이 불안정해서 신문제작에 문제가 생기곤 하는데 아직 새 편집기를 구매할 엄두를 못 내고 있습니다. 회계업무 간소화를 위해서 ‘퀵북(Quick Books)' 프로그램을 사용해야 하는데 그것도 쉽지가 않습니다. 토론을 토론으로 받아들이면 되는데, 서로 다른 의견이 있으면 그것을 존중하면 되는데 성격상 그것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경청하면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마치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지 못하는 엄마의 심정 같기도 합니다. 저도 어릴 때 어머니에게 원하는 것들을 말하곤 했습니다. 어머니는 다음에 해 줄게라고 하시기도 하고, 있는 것 일단 사용하라고 하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때는 야속했지만 지금은 충분히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문사에 애정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직원들의 마음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2024년에도 신문홍보과 광고를 통해서 신문자의 재정을 안정적으로 이끄는 것이 저의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대기업은 주로 가족들이 경영권을 승계하지만 미국의 대기업은 ‘전문경영인’이 기업을 운영하는 곳이 많습니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기업의 규모가 커지면 전문경영인 체제가 좋을 것 같습니다. 전문경영인은 경험도 많고, 잘못되었을 경우에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검증된 전문경영인이 운영하면 기업은 더 많은 투자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교회는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사도들이 이끌었습니다. 사도들의 열정과 헌신은 교회를 성장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박해라는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런 교회에 제자가 아닌 전문가가 등장하였습니다. 그는 유대인이지만 그리스어에 능통하였습니다. 당시 강대국이었던 로마에서 공부하였고, 로마의 시민권도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의 율법은 물론 그리스의 철학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그의 판단에 교회는 유대의 율법과 전통을 위협하는 세력이었습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교회를 박해하는 편에 있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 그는 놀라운 체험을 하였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초대교회는 그를 교회의 지도자로 받아들였습니다. 그의 열정과 헌신으로 교회는 예루살렘을 벗어나 아시아로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신학과 교리는 교회 조직의 토대가 되었고, 그가 보낸 서간은 지역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처방전이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확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억울하게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다시 살아났다는 부활의 믿음입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희생이었고, 그의 죽음은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표징이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든 그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으면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다는 믿음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세계교회가 될 수 있도록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사도 바오로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예언자 나탄은 다윗 왕은 잘못을 예리하게 지적하였습니다. 다윗 왕이 자신이 권력을 이용해서 충실한 부하를 억울하게 죽음으로 몰았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이 나탄의 말을 무시하고, 자신의 뜻대로 살았다면 다윗 왕은 잊혀진 왕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 왕은 나탄의 이야기를 경청하였고,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쳤습니다. 다윗은 하느님의 판결을 받아들였고,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으로 거듭 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풍랑을 만나 두려웠습니다. 호수에 빠질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늘 풍랑이 불기 마련입니다. ‘교만, 나태, 시기, 탐욕, 인색, 탐식, 욕정’의 바람입니다. 그 바람 앞에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불렀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불러야 합니다. 그 시작은 바오로 사도가 회심했던 것처럼, 다윗 왕인 회개했던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부르면, 하느님께 우리의 마음을 돌리면 자비로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으로 품어 주십니다.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저를 받쳐 주소서. 저는 악인들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당신께 돌아오리이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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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4,35-41: 풍랑을 가라앉히시다.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35절). 여기서 저쪽이라고 하면 지상의 것에서 천상의 것으로, 현재의 것에서 미래의 것으로 건너가자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것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덕을 향하게 하므로, 호수 저쪽으로 건너갈 필요가 있다.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37절)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38절). 주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는 동안에도 제자들을 시험하신다. 주님께서 깨어나시어 호수를 꾸짖으시자 돌풍이 잔잔해졌는데, 호수를 꾸짖으신 분은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시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그들이 구원되어 주님의 기적을 증언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주무시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시며 구원해 주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신다. 그 모습은 아무 힘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히신 분을 연상케 한다. 무덤에 묻히신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시리라고 제자들이 믿기는 너무나 어려웠다. 예수님의 모습과 아우성을 치는 제자들의 모습은 대조적이다. 잠에 짓눌리셨지만(참조: 마태 8,24; 마르 4,38; 루카 8,23), 바다 위를 걸으실 만큼 가벼우셨고, 바람에 명령하셨으며, 베드로가 물에 빠졌을 때 건져주셨다.(참조: 마태 8,26; 14,25-32; 마르 4,39; 6,48-51; 루카 8,24; 요한 6,19-21) 그분은 그들을 두려움 속에 내버려 두신 채 주무신다. 닥쳐올 일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감각을 날카롭게 하려는 뜻이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39절). 그러자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39절). 이렇게 하느님의 능력을 갖추신 분이 누구신지를 제자들은 이 풍랑의 기적에서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을 죽음의 위협에서 구출해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이처럼 교회와 신앙인은 끊임없이 위협을 받는다. 우리는 모든 삶의 모든 사건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그분의 현존과 그분의 능력을 읽을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많은 경우 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조그만 풍랑에도 절망하며, 원망하고 그분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자세가 아니라, 주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고 그분을 의지하는 마음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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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사제인 저나 여러분이나 우리는 믿음이 약합니다. 우리는 삶 안에서 많은 것으로 말미암아, 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처럼 풍랑에 시달립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믿고 있으면서도, 당장 눈앞에 닥친 어려움 앞에서 우리의 믿음은 한없이 약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의 모습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예수님을 깨우고 그분께 도움을 청하였던 제자들처럼, 우리도 가장 절망적인 순간마다 예수님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으며 부르짖는 우리의 기도를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제1독서에서 나탄은 다윗의 죄를 고발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나탄 앞에서, 또 그와 함께 계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자신의 절대 권력으로 죄를 은폐하려는 마음을 무너뜨리고, 하느님 앞에서 솔직하게 자신의 부족함을 시인하게 될 때, 하느님의 은총은 다시 우리 안에서 힘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진실함은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첫 발걸음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솔직해지고 진실해질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나약함을 은총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신비에 대하여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5,20) 그리고 이 말씀은 우리 자신에게도 반드시 이루어질 말씀이기도 합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예수님께 부르짖는 기도와 죄 앞에서 솔직하게 모든 것을 인정할 수 있는 마음은,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는 길이며 그분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오늘 말씀이 알려 주는 이 두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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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들에서 우리는 영성생활의 길잡이를 만날 수 있습니다.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마르코 4,38).
예수님 주변에 아직 군중이 남아 있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호수를 건너가자고 하십니다. 아직 예수님의 말씀과 손길이 필요한 이들이 있는데도 떠남을 선택하신 그분이 다소 냉정하게 느껴지기도 하지요.
그런데 비록 스쳐가는 언급이지만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다 보면 때로는 "하느님"보다 "일"에 더 몰입될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고요히 주님 앞에 머물기가 더 어려운 이유입니다.
"일"과 "사람"에 파묻혀 있으면, 온전히 마무리되지 않은 현장을 떠나는 게 마치 직무유기처럼 느껴지기 십상입니다. 식별이 필요하지만 대개는 절박해 보이는 일거리를 눈앞에 펼쳐놓고 '나 아니면 안돼, 일단 끝내고 보자, 하느님은 나중에 잠시...' 하는 생각을 불어넣는 유혹일 확률이 크지요. 악의 바람은 오직 하나,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떼어놓는 것뿐입니다.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마르코 4,36) 제자들은 군중을 남겨 둔 채 예수님을 모시고 갑니다. 그러자 다른 배들이 뒤따르지요. 우리가 "일"을 끊고 "하느님"을 선택할 때 군중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따라오도록 돕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를 통해 군중은 자기 자리에서 예수님 말씀과 손길을 기다리던 수동성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주님을 선택해 따르는 체험을 하게 된 것이지요.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코 4,38) 그런데 하필 거센 돌풍이 불어 물이 배에 들이칩니다. 방금까지 으쓱했던 군중과의 교감에 미련이 남은 제자들에게 '이러느니 그들에게 봉사하며 뭍에 더 눌러있는 편이 나을 뻔 했다'는 불만과 후회가 몰려들기도 했을 겁니다. 제자들은 지금 내적 외적으로, 안팎으로 돌풍에 휩싸인 겁니다. 말하자면 통제가 안 되어 당황스런 상황에서 마음도 들쑤셔진 것이지요.
그러니 천하태평 주무시는 예수님이 못마땅하고 원망스럽기까지 했을 겁니다. 제자들의 말 안에는 "당신께서 하라시는 대로 했다가"라는 볼멘 후회가 행간에 스며 있는 듯합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마르코 4,39) 외부적 상황은 물론 내면의 소용돌이도 내가 아무리 되씹고 곱씹은들 해결이 안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때 치료가 필요한 경우와 믿음이 필요한 경우는 구분되어야 합니다. 내적 고통이 후자에 해당한다면 이를 잠잠히 만들 수 있는 힘은 주님의 현존 뿐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코 4,40) 말씀으로 외부적 상황을 잠재우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내면에 대고 안타까움을 토로하십니다. 그 안에는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데도..." 하시는 속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안팎으로 고요를 체험합니다. 언제 그랬는지 싶게 모든 격정이 가라앉았습니다.
하느님과 가까워질수록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려는 시련과 유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늘 담담하고 자신만만하다면 이미 성인 경지에 든 것이거나, 아예 영성생활을 시작조차 못 한 것이지요. 나약한 우리가 아무리 마음을 단단히 먹어도, 내외적으로 폭풍에 갇히면 그간 주님과 쌓은 신뢰와 경험도 백지처럼 되어버려, 번번이 두려움에 전복되어 휘청대고 무너집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다윗 임금의 숨은 죄악을 예언자 나탄을 통해 들추십니다.
"네가 나를 무시하고 "(사무엘기 하권 12,10).
"몹시 업신여겼으니"(사무엘기 하권 12,14).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를 이렇게 정의하십니다. 특히나 더 사랑하고 총애하는 이의 죄이기에 당신 스스로 무시당했고 업신여김 받았다고 느끼시는 겁니다. 사람에게 범하는 죄가 결국 하느님께 범하는 죄임을 알겠습니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사무엘기 하권 12장 13절). 다윗의 범죄를 옹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만, 이 한 마디로 모든 내외적 폭풍이 사그라집니다. 다윗에게 퍼부으시는 하느님의 격노는 물론 다윗 내면에서 들끓던 오염된 양심의 불안도 잠잠해집니다. 자신을 겸손히 낮추는 죄의 고백은 하느님과 자신의 관계를 다시 되돌리는 것입니다. 이로써 사람과의 관계도 자연히 질서를 찾게 됩니다.
사랑하는 벗님! 살다 보면 폭풍을 만나기 마련입니다. 외부적으로도 내면적으로도 피할 수 없습니다. 질병, 실직, 이별, 사고, 손실, 박해, 오해, 소외, 상처, 두려움... 그런데 고통이 나름 이유 있는 사건을 통해 오는 것 같더라도, 많은 경우 하느님을 오롯히 향하고 사랑하려는 우리를 시련하는 힘일 수 있습니다.
이럴 폭풍에 휩싸여 죽을 지경이 된 우리보다 주님이 더 안타까워 애태우십니다. 그분은 결코 손 놓고 우리를 방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안에서 함께 출렁대며 고통을 겪고 계십니다. 폭풍을 잠재우고 고요를 회복하는 힘은 주님 현존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우리 믿음의 콜라보입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건너고 나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온하고 고요하지만, 폭풍 한가운데에선 늘 처음인듯 두렵고 힘겹게 마련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무의식까지 주님의 이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어떤 돌발 상황에서라도 기억나도록 영혼 깊숙이 새겨두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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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우 사도 요한 신부님]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점지해 주시고 백성이 지지하여 왕위에 오른 다윗은 기쁨과 감사의 찬송을 올린 것도 잠시, 그 축복을 배신하는 어처구니 없는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도 그 죄악을 감추어 보려고 얕은 꾀를 쓰다가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충직했던 부하 우리야와 그의 아내 밧세바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성왕(聖王)이라고 칭송받던 다윗이 갑자기 그 거룩함의 가면을 벗고 교묘하고 간사하게 자기 죄를 감추려는 모습을 보면서, 처음에는 안쓰럽다가 다음에는 교묘하다며 손가락질하지만, 그 다음에는 우리도 죄를 지을 때 또 다른 다윗이 되어 가는 경우를 겪으면서 자책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죄를 짓는 인간의 전형적인 교활함과 교묘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다윗을 뉘우치게 하기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축복을 전해 주었던 나탄 예언자를 시켜 다윗의 양심과 신앙에 호소하셨습니다.
즉, 나탄이 다윗을 찾아와서 들려준 비유는 이미 수많은 양과 소를 가진 부자가 겨우 암양 한 마리만을 키우는 가난한 사람의 소유를 빼앗아 버렸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당연히 다윗도 그 부자의 악랄함에 분노를 표시했지만 나탄은 결정적인 한 마디를 던졌습니다: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2사무 12,7) 나탄이 전해준 이 말씀이 날카로운 비수처럼 다윗의 귀와 가슴에 꽂히자 다윗은 항복했습니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2사무 12,13)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고 깨닫는 순간에 즉시 죄를 고백하고 참회하는 다윗의 이런 모습 또한 죄를 짓는 교활한 모습과 함께 인간의 솔직한 민낯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일화는 교묘하게 죄를 짓는 인간의 모습과 참으로 대조적인 모습, 즉 슬기롭게 그 죄를 뉘우치게 하시는 하느님을 알게 해 줍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복음은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치는 바람에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된 위기에서 예수님께서 바람과 호수를 고요하게 잠재우신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제자들이야 당연히 이런 위험천만한 상황에서도 태연하게 고물을 배게삼아 잠만 주무시던 예수님을 깨우며 난리를 피웠습니다. 왜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 한 마디 말씀으로 사태를 진정시키셨습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 4,39) 앞의 ‘잠잠해져라’는 명령은 배를 집어 삼킬 듯 덤벼들던 바람에게 하신 듯하고, ‘조용히 하라’는 명령은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소란을 피우던 제자들에게 하신 것 같습니다.
이 상황은 군중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여러 비유 이야기로 가르치신 후에 이어진 것이었습니다. 거듭되는 가르침으로 피곤해지신 예수님이야 출렁이는 배 안에서도 태연하게 주무실 수 있었다고 하지만, 비유의 가르침을 군중의 맨 앞에서 듣고도 도무지 깨달음이 없었던 제자들로서는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르 4,41) 하고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어디까지나 믿음의 문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시기만 하면 거센 돌풍도 가라앉힐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돌풍 같은 자연현상을 가라앉히시는 일은 차라리 쉬운 일이었으나 제자들의 마음 안을 들뜨게 하고 있던 극심한 불신의 바람을 가라앉히시는 일이 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람과 호수에게 명령하신 직후에 제자들을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자연현상의 위기 속에서 믿음을 타박하시는 예수님을 제자들은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바람을 말 한 마디로 잠재울 수 있단 말입니까?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범람하는 강물에다 대고 기도하면, 부르짖으면 비가 그치고 강물이 줄어들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제자들도 아마 그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그분께서 하느님 나라의 비유를 가르치시고 난 후였음을 감안해야 합니다.
무릇 비유란 하느님 나라라는 보이지 않지만 현세를 움직이고 있는 신비요 진리를 보이는 사물과 사태에 빗대어 설명하는 화법입니다.
그 모든 비유에서 결론은 알아들을 귀가 필요하다는 것이요, 그 귀는 마음의 귀인 것이며, 깨달음이기도 하고 단연코 믿음입니다.
다윗에게 유혹이 찾아들었을 때 하느님께서 보고 계심을 깨닫는 믿음이 있었더라면 그는 감히 그런 죄악을 저지를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며, 더군다나 우리야를 죽여서라도 죄를 감추려는 더 큰 유혹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 역시 자신들의 능력이나 기도로써는 거센 돌풍을 잠재울 수 있으리라는 상상도 하기 어려웠겠지만,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달리 말하면 그분을 통하여 기도를 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믿음을 지녀야 했습니다. 전례적 기도의 기본이 이것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위기들, 우리를 가로막는 도전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힘만 믿지 말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믿고 기도할 줄 아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그렇게 믿어야 할 사람이 바로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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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4,35~37)
마르코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티베리아 호수를 건너시는 모습을 세 번 전해 줍니다. 주님 공현 후 수요일 복음에 보면, 먼저 피곤으로 지친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건너가게 하신 다음, 당신 손수 군중을 돌려보내신 후 홀로 기도하시고서 새벽녘에 홀로 호수를 건너가시는데, 제자들이 겁에 질려 있자,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고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르6,45~52참조)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4,35) 고 하셨기에 지난 복음과 달리 예수님은 군중을 남겨 둔 채, 건너편 게라사 지방으로 가기 위해 호수를 질러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군중들을 남겨 둔 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건너편 마을에도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호수를 건너자고 하신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 대부분이 어부였기에 그곳 호수 사정을 익히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이 타신 배를 돌려, 바다 건너편을 향해 출발했고 주변에 있던 다른 배들도 주님이 떠나는 것을 보고 함께 그 배를 뒤따라갔습니다.
그런데 그 배가 호수 가운데에 있을 때,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4,37) 되었나 봅니다. 이스라엘을 여행하셨던 분은 잘 아시겠지만, 티베리아 호수는 주변이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마치 분지같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서남쪽에서 바람이 불어와서 남쪽 계곡을 통과하여 분지같이 생긴 티베리아 호수로 들어오면 큰 폭풍으로 돌변하기도 하는 지형적 특색을 가지고 있는 곳입니다. 흔히 이 바람은 대개 오후에 불어서 저녁때쯤엔 약해지기 때문에, 어부들은 주로 밤에 고기를 잡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저녁 이후에 폭풍이 불 때가 있는데 이 바람은 매우 강렬합니다. 이런 돌풍은 엄청난 힘으로 수면을 치기 때문에 높은 파도를 일으켜서 배를 덮치곤 합니다. 그렇게 되면 배에 탄 사람들은 순식간에 위험한 곤경에 빠지게 되곤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탄 배에 몰아쳤던 돌풍은 바로 이런 거센 돌풍이었나 봅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그 호수의 돌풍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음에도 예상하지 않은 돌풍의 위력에 심히 위협과 위험을 강하게 느꼈던 상황인 듯싶습니다. 그런 위험한 상황이 발생했는데도 예수님께서 태평스럽게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4,38) 주님은 하루 종일 가르치시고 치유해 주셨기에 피곤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런 동안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자 제자들은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모습과 예수님의 태평하게 주무시는 모습이 너무 대조적인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거의 울부짖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4,39)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호수와 돌풍을 잠잠하게 하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4,40)고 책망하십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것일까요? 아마도 제자들의 두려움은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4,41)라는 의문 아닌 의문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즉 제자들은 주님께서 호수와 바람을 잔잔케 하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고', '겁에 질려 떨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초자연적인 권세 앞에 큰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이 사건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거센 풍랑이 이는 호수는 우리네 삶, 흔히 표현하듯 인생은 고해苦海와 같다, 라고 하듯이 인생은 마치 거칠고 험한 바다를 항해하는 한 조각배와 같이 많은 어려움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호수 이편에서 저편으로 노 저으며 건너가는 위태위태한 배는 우리 자신과 교회를 상징한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항해 여정 가운데 순풍은 물론 역풍과 돌풍을 만나는 게 인생입니다. 그와 같은 시련과 환난이 닥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인데 아무런 대비를 하지 못했기에 이런 상황을 만날 때 당황하고 겁에 지르게 되리라 봅니다. 자연스러운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일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교회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께 집중하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평온하게 대처할 수 있는 굳건한 신앙이 필요하리라 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호수와 돌풍마저도 그분의 한 말씀에 잠잠해 짐을 통해서 그리고 제자들의 반응을 보면서 우리가 인생이란 고해의 바다를 항해하면서 피할 수 없이 직면하게 될 이런 시련과 환난의 시기에 어떻게 처신하며 주님께 응답해야 하는지를 오늘 복음은 우리를 가르치고 있다고 봅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돌풍과 호수를 잔잔하게 하신 후에 돌풍으로 말미암아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고 겁에 제자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훈계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하리라!"라고 했으니, 두려워하지 맙시다. ‘사랑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돌풍의 한가운데를 건너간다 하여도 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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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아마존의 어느 원주민 부족은 구슬 목걸이를 만들 때 일부러 흠집 난 구슬을 한 개씩 끼운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것을 ‘영혼의 구슬’이라고 부릅니다. 영혼을 지닌 어떤 존재도 완벽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고대 페르시아의 카펫 직조공들 역시 카펫을 짤 때 정교하고 아름다운 문양에 의도적으로 흠을 하나씩 남겼다고 합니다. 오직 신만이 완벽하며,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페르시아의 흠’이라고 합니다.
많은 이가 부족함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실수하지 않고, 빈틈도 보이지 않는 완벽한 삶만이 행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럴까요? 어떤 사람이 더 인기가 많았는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약간의 실수도 하고 부족한 사람에게 오히려 호감이 갑니다. 이런 사람이 훨씬 편하며 이 사람 역시 관대함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로써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실수 없이 살아가려니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가 완벽해지려고 하니 당연합니다. 이렇게 완벽에만 온 힘을 쏟다 보면 다른 이와 함께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때로는 일부로라도 부족한 모습을 보일 필요도 없습니다. 자기 마음도 편안해지고, 남도 나를 도와주려고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는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완벽함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완벽함을 만들어 주지 못하는 주님께 불평불만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함께하는 삶을 원하시는데, 많은 이가 자기 혼자의 삶만을 요구합니다. 당연히 주님과도 함께하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배 안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말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제자 중에는 어부 출신이 많습니다. 따라서 이런 상황을 그 누구보다도 잘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자기 힘으로도 전혀 대처할 수 없음을 알았나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깨웠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렇게 바람과 호수까지도 복종하게 만드는 큰 힘을 가지신 분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분과 같은 편이 되고 또 함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려면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도 고개를 뻣뻣이 들고서 마치 맡긴 것을 찾으려는 사람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면서 겸손의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그때 주님의 그 큰 힘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닌,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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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 함께 있으니>
마르코 4,35-41 (풍랑을 가라앉히시다)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우리 함께 있으니>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내 곁에
네가 있으니
나는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아!
네 곁에
내가 있으니
너도
그 무엇도
두렵지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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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의 사람이 되어라>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배 안에 있었는데 마침 거센 바람이 일었습니다. 배 안으로 물이 들이쳐서 위험에 처해 있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4,38)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믿음의 수준을 드러내 줍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웠지만, 사실은 깨어나야 할 사람은 제자들입니다. 거센 돌풍을 잠재우실 능력의 주님과 함께하면서도 주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사는 이 연약한 믿음의 삶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배를 함께 탄 것은 운명을 같이하겠다는 동의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돌풍이라는 환난이 옴으로써 그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결국 처음에 가졌던 순수한 마음을 잃어버린 탓입니다. 제자들은 그 믿음을 회복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풍이 이는 바람과 호수를 향해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나와 함께 죽는 것을 왜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세상의 풍파에 조급하게 허둥대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이신 당신께 온전히 의탁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니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믿음을 간직하고 희망을 접지 마십시오. 폭풍 속에서도 주님은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는 능력으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1베드5,7)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여전히 우리는 일상생활 안에서 겪는 여러 어려움 속에서 주님이 함께하신다면 왜 이런 시련과 고통을 주느냐고 원망할 때도 있습니다. 주님을 믿어서 나아진 게 무엇이 있느냐고 하소연할 때도 있습니다.
정말 침몰의 위기에 처한 배에서 주무시던 모습 그대로인 것 같아 야속하기 한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도대체 무엇을 하시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열심히 살려고 애쓴 이들은 버려두고 제멋대로 사는 사람이 더 누리고 사니 속이 뒤집어집니다. 그래도 당신의 섭리를 믿어야 하나요?
인간의 힘만으로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어둠의 세력을 이길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루신 모든 위업은 너무나 훌륭하고 그분의 모든 분부는 제때에 이루어지리라. 아무도 ‘이게 무어냐? 어찌된 일이냐?’ 고 말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은 제때에 풀리기 때문이다. 그분의 말씀으로 물이 모여들고 그분의 말씀으로 한마디로 그 물이 저수지가 된다. 그분께서 명령하시면 뜻하시는 바가 모두 이루어지고 아무도 그분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막지 못한다”(집회39,16-18). 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겁내지 말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어려움을 이겨냅시다. 주님과 함께!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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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의 여정>
-기도와 회개와 함께 가는 믿음-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편 51,12)
지난 저녁 수도형제에게 떼제공동체 마르코 수사님이 향년 92세로 1월19일 선종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한결같은 믿음으로 사셨던 분이고 여기 요셉 수도원을 참으로 사랑했던 분이시며 특히 동정녀 공통 저녁 성무일도중 셋째 후렴을 참 좋아했던 분입니다.
“나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자리잡았도다.”
그리스도 안에 자리 잡고 한결같은 정주의 믿음을 살아가는 우리 요셉 수도원의 수도자들입니다. 누군가 저에게 어떻게 사는가 묻는 다면 저뿐만 아니라 믿는 이들 대부분은 “믿음으로” 살아간다 말할 것입니다. 저는 이에 덧붙여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말할 것입니다. 흡사 첩첩산중 하루하루 산을 넘는 듯, 살아 갈수록 힘든 것 같습니다. 특히 평생 매일 강론을 쓰며 갖는 느낌입니다.
바로 끝이 보이지 않는 삶을 살아가려면 하루하루 겸손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길뿐일 것입니다. 이제는 죽음이 조금씩 보이는 듯 합니다. 성 베네딕도는 물론 사막교부들은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 말씀하였습니다. 이래서 몇해전부터 많이 피정강의나 매일강론중 강조해온 말마디가 일일일생, 일년사계로 인생여정을 압축했을 때 어느 시점에 와있느냐의 확인입니다.
이런 시도가 하루하루 깨어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합니다. 2014년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온지 벌써 10년째입니다. 그동안 참 많은 강론 주제가 “-여정” 이었고 오늘 강론 제목도 주저없이 “믿음의 여정-기도와 회개와 함께 가는 믿음-”으로 정했습니다.
믿음도 보고 배웁니다. 희망도 사랑도 모두가 배움의 대상입니다. 육신은 날로 노쇠해가도, 믿음은 날로 보고 배워 살아있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성장 성숙했으면 좋겠습니다. 믿음의 참 좋은 교과서가 바로 오늘 복음과 제1독서 다윗의 일화입니다. 흡사 오늘 복음의 걷잡을수 없이 일어나는 풍랑의 현실이 우리 주변이나 내 마음 상태를 상징하는 듯 합니다. 요즘 시국을 보면 총선을 앞두고 얼마나 치열한 경쟁인지 흡사 내전상태를 방불할만큰 혼란스럽고 뜨겁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예수님께서는 이런 거센 풍랑속에서도 배 고물에서 태연자약(泰然自若),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십니다. 얼마나 깊은 믿음의 표현인지요! 제자들의 안절부절 못하는 혼란한 반응과 예수님의 침착한 대처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흡사 눈에 보이는 듯 생생한 장면입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이 되지 않으십니까?”
제자들은 물론 그대로 믿음 부족한 우리의 모습같습니다. 정말 늘 함께 하시는 주님께 대한 철석같은 믿음이 있었다면 차분하게 대응했을 것입니다. 잠에서 깨어나신 주님은 권위있는 말씀으로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명령하시니 그대로 하느님의 전능하신 모습입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바람은 멎고 고요해지니 얼마나 통쾌한 장면인지요! 제자들의 충격에 이어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제자들은 믿음 부족을 절감했을 것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제자들의 다음 반응은 오늘 우리가 하루 내내 품고 묵상해야할 화두입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참으로 이런 주님과 함께 하는 믿음이라면 천하무적의 믿음일 것입니다. 새삼 우리 삶은 믿음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복음의 제자들 역시 이런 사건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크게 믿음을 배웠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믿음의 여정에 참 큰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됐을 것이며 우리 역시 믿음의 여정에 항구해야 함을 배웁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다윗의 승승장구하던 믿음의 여정에 급제동이 걸리는 충격적 장면입니다. 하느님 앞에 완전범죄는 불가능함을 배웁니다. 쥐도 새도 모르게 감쪽같이 밧세바의 남편을 제거하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아내로 취한 다윗의 사악함이, 잔인성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사람이 유혹에 빠지면 얼마나 악해질수 있는지, 그렇게 믿음 좋다는 다윗인데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참으로 방심할 수 없는 믿음입니다.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다윗의 범죄에 하느님의 실망이 얼마나 컷겠는지요! 주님은 나탄을 통해 적절한 비유를 들면서 다윗의 죄상을 폭로하고 죄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할지 길게 열거합니다. 그렇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었는데 이런 큰 죄를 지었는지 다음 말씀이 주님의 실망을 반영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너는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주님이 보시기에 악한 죄를 저질렀느냐?”
대죄를 지었지만 즉각적인 회개가 역시 다윗의 믿음을 반영합니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아마도 이 대사건은 다윗의 믿음의 여정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좌초하여 무너지기 보다는 심기일전 겸손한 믿음의 계기로 삼아 분투의 믿음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을 다윗입니다. 문득 인도의 성자 간디는 “I was wrong!(내 잘못했다!)의 명수(名手)였다”는 일화가 생각나네요. 정작 공동체내 관계에서 “고맙다, 감사하다”란 말마디보다 더 필요한 말마디가, 앙금을 말끔히 씻어내는 “미안하다, 잘못했다, 죄송하다” 란 회개의 말마디라는 생각이 듭니다.
복음의 제자들처럼 다윗의 믿음의 여정은 다시 시작됩니다. 죄는 용서받았지만 치뤄야할 보속은 첩첩산중이요 다윗의 위대한 점은 앞으로 보겠지만 이 죄과로 무너지지 않고 끝까지 죽을 힘을 다해 믿음으로 버텨내고 견뎌내면서 잘 통과했다는 것입니다. 정말 믿음으로 끝까지 보속을 다한 다윗입니다.
다윗의 믿음은 이런 고난과 시련을 통해 더욱 겸손하고 순수하고 견고해졌을 것입니다. 새삼 삶의 여정에서 발생하는 온갖 어려움을 믿음의 여정중 믿음 성숙(成熟)의 계기로, 겸손과 비움의 계기로 삼는다면 전화위복일 것입니다. 바로 오늘 화답송 시편 51장 다윗의 통회 시편은 다윗이 지은 대죄에 아파할 때 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평생 기도로 바쳤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애당초 타고난 믿음도, 평탄대로의 믿음도 없습니다.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중에 끊임없는, 한결같은 기도와 회개와 함께 가는 믿음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처방보다는 예방이 백배낫습니다. 하루하루 평생 날마다 바치는 찬미와 감사, 회개하는 마음으로 온힘을 다해 바치는 미사와 시편성무일도 공동전례기도보다 우리 믿음의 여정에 큰 도움이 되는 수행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죄없는 의인’보다 ‘회개한 죄인’을 더 사랑하십니다. ‘부패한 성인’은 없어도 ‘회개한 성인’은 많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그 인생 부패해져 아무 쓸모도 없어집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 모두의 믿음을 북돋아 주시고 우리 안팎의 풍랑을 고요하게 하시어 성공적 인생항해여정중 마침내 천상 고향에 이르게 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 구원의 기쁨을 돌려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저를 받쳐주소서.”(시편51,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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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졸지도 잠들지도 않으시는 분>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호수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는 얘깁니다.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이것은 우리 인생 얘기입니다.
우리 인생은 호수 이쪽 곧 이 세상에서 저쪽 곧 천상으로 가는 인생이지요. 그리고 가는 동안 큰 풍랑 곧 역경을 만나는 것 또한 우리 인생입니다. 그런데 다른 복음에선 제자들만 건너는데 마르코복음에선 주님과 함께 건너는 것이 다행입니다.
흔히 인생살이는 고해를 건너는 것이라고 비유하는데 실로 얼마나 많은 인생이 주님 없이 바다를 건넙니까? 그러니 주님과 함께 건너는 것은 참 다행이지요.
그렇긴 한데 돌풍으로 배에 물이 가득 차 제자들이 죽게 되었는데도 주님께선 주무시고 계십니다.
이 또한 우리 신앙인들이 실제로 겪는 상황이지요. 우리가 죽게 되거나 큰 역경을 겪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 주무시는 것처럼 느낄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래서 실제로는 주무시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함께 아니 계신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요.
부재감(不在感).
어두운 밤.
하느님은 부재중(不在中)이 아니십니다. 부재중인 것처럼 우리가 느낄 뿐입니다.
그런데 이 어두운 밤과 부재감은 일시적이고 과정적이며 우리의 영적 체험과 은총 체험에 꼭 필요한 그래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어두운 밤과 부재감이 일시적이고 과정적이라는 뜻은 마치 터널을 지나야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데 그 터널 통과의 느낌과 같고, 놀라운 광경을 보여 주기 위해서 잠시 눈을 가렸다가 보게 됨과 같습니다. 우리가 서프라이즈 파티를 할 때 종종 그러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은총이요 매 순간이 은총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늘 쉬는 숨이 은총이 아니고 늘 누는 오줌이 은총이 아닙니다.
일상이고, 일상적인 것은 당연한 것이지 은총이 아닙니다.
그러다가 몸이 망가져 당연한 것이 아닌 체험을 하고 난 뒤에야 그것이 은총이라는 것을 우리는 체험하고 체험적으로 알게 됩니다.
하느님은 주무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무신다고 우리가 느낄 뿐입니다.
하느님은 아니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아니 계신다고 우리가 느낄 뿐입니다.
그래서 시편 121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너를 지키시는 그분은 졸지도 잠들지도 않으시고, 네 오른쪽 그늘이시기에 낮이면 해도 밤이면 달도 너를 해치지 못하시리라.”
우리도 이렇게 노래하는 시인들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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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르4,41)
<(1)믿음과 부활!>
오늘 복음(마르4,35-41)은 '예수님께서 풍랑을 가라앉히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십니다.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가득 차게 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런 예수님을 깨우며 말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 4,38)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 4,39)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예수님께서 당신께 대한 제자들의 믿음과 신뢰를 지적하십니다. 그리고 이 지적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문제, 곧 제자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질책입니다.
제자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거센 풍랑을 가라앉히신 예수님을 두고 서로 말합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르 4,41)
우리가 믿고 따라가고 있는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살아가면서 종종 마주하게 되는 크고 작은 풍랑에서 우리를 다시 일으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삶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고통을 자기에게만 주어진 가장 큰 고통으로 생각하면서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됩니다. 신자가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을 바라보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보다 훨씬 더 큰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과 죽음과 그리고 부활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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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코 4,39)
<(2)풍랑을 가라앉히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수 건너편으로 가시는 도중에 거센 풍랑을 만나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자, 제자들이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을 깨우며 말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합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오늘 우리는 거센 풍랑을 가라앉히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바람과 호수까지도 복종시키시는 예수님,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신성을 지니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거센 풍랑!'
우리는 삶의 자리에서 종종 거센 풍랑을 만납니다. 생태계 파괴로 인한 기후위기문제와 기아와 난민문제, 코로나 팬데믹 등 지금 인류가 마주한 거센 풍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지금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거센 풍랑들이 있습니다. 곧 남북의 분단이라는 풍랑, 이념논쟁과 지역 갈등이라는 풍랑, 선거를 앞두고 너와 내가 격하게 갈라져 있는 거센 풍랑입니다. 그리고 각자의 삶 속에서 만나고 있는 크고 작은 풍랑들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러한 거센 풍랑들을 가라앉히실 수 있는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보다 더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해 있어야만, 이러한 거센 풍랑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개를 들고, 눈을 크게 뜨고, 멀리 바라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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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Wb6osXS2zQ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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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잠잠해져라. 조용해져라!"(마르 4, 39)
이유없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풍랑 뒤에
주님이 계십니다.
풍랑도 모르면
잠잠해져야 할
고요도
모르는 것입니다.
잠잠해져야 할
풍랑의
시간입니다.
잠잠해진
이곳에서
다시 깊어지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은
풍랑을 통하여
깊어집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믿음의
고요입니다.
시끄럽고
요란한
우리 마음을
밀어내는
주님의
평화입니다.
풍랑 때문에
평화가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평화를 배웁니다.
평화는
고집스러운
우리
마음을 내려놓는
순종에서
만납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평화입니다.
풍랑과 함께
살지만
풍랑 속에
함몰되지 않는
주님의
평화입니다.
풍랑도
평화 안에
속해 있습니다.
평화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겁먹지 않습니다.
삶이란
때때로
풍랑의 시간을
지나
고요의 시간으로
이어집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이 풍랑입니다.
그래서
풍랑의 관계를
지나면
고요의 관계가
우리를 기다립니다.
주님과
함께 겪는
삶의 시간
입니다.
주님과
함께 겪는 것이
고요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어
행복한
모든 시간입니다.
풍랑은
아주 잠깐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풍랑의
시간을
봉헌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랑과
평화의
새날입니다.
주님을
깨닫게 하는
풍랑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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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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