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수적인 성향을 지녔다. 한국 대기업들에 대해서는 우호적이지만 쌍용차 해고노동자 사건에 대해서는 분개한다.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편 대북관계에 대해서는 강경책보다 유화책을 옹호한다. 경제 면에 있어서는 성장보다 분배를 중시하기 때문에 공정한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에 화가 난다.”(40대 중반 오모씨)
"학생운동에 가담했던 386세대다. 진보세력를 지지하지만 우리나라 진보주의자들의 방향성에 동조하지 않는 면이 많다. 친북좌파적인 급진주의자들에게 거부감이 일고, 직업데모꾼처럼 보이는 극렬 세력들도 불편하다. 한편으로는 한강의 기적을 이룬 박정희 대통령의 공을 높이 사고 한국 자본주의의 토대를 다진 기업가 1세대들을 존경한다.”(50대 초반 송모씨)
"나는 전쟁세대다. 어린 시절 6·25전쟁을 겪었고 군인 출신이다. 애국심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다.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을 존경하고 독재자 박정희 대통령은 좋아하지 않는다. 북한도 싫지만 일본이 더 싫다. 미국에 대해서는 그저 그렇다. 젊은 사람들은 나를 보수주의자라고 하는데, 한국의 보수는 잘못됐다. 최근 세 차례의 대통령 선거에서 모두 민주당을 뽑았다.”(80대 박모씨)
이들은 보수주의자일까, 진보주의자일까? 우리 사회에는 ‘보수=반북=친미=친자본=성장=자유’, ‘진보=친북=반미=친노동=복지=평등’이라는 프레임이 견고하다. 이 프레임으로 보면 이들은 그 어느 쪽도 아니다. 사안에 따라 진보와 보수를 오간다. 지역주의에 기반한 양당구조에 염증을 느낀 이들은 스스로 진보주의자로도, 보수주의자로도 불리길 거부한다. 그렇다고 당당하게 중도주의자를 표방하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촛불vs태극기로 나뉘어 대립각을 세우는 최근 상황이 불편하다.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가 정점에 이른 지난 2월 “촛불이냐, 태극기냐?”의 이분법적 선택을 강요받는 분위기에서 수그러들 때가 많았다. 여기에서 촛불파와 태극기파는 단순히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의 차원이 아니었다. 정치적 보수주의자인가, 진보주의자인가의 질문이었다. 보수도 진보도 아닌 이들이 설 곳은 없었다. “사안에 따라 다르다”는 중도파의 목소리는 힘을 잃는다.
극보수·극진보의 입장에서 본 중도는 비겁한 회색분자나 박쥐, 우유부단한 사람이나 일관성 없는 기회주의자로 비쳐진다. 자연히 주목을 끌기 힘들다. 중도주의를 표방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양극단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보다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중도주의에 이런 우호적인 시선은 드물다.
"나라가 점점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는 목소리가 거세다. 정익중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극단의 끝자락에 있는 것 같다. 조금 더 극단으로 내디디면 전쟁이라도 터질 듯 불안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미래가 불투명해지면 양극단으로 몰리는 경향이 있다. 사회생활에서는 회색지대가 많고, 개인적 성향으로도 극단주의보다 중도주의자가 많다. 그런데 한쪽에 서지 않으면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경험들이 쌓이면서 점점 극단으로 치닫는 것 같다.”
정 교수는 최근 태극기집회와 촛불집회가 극단사회를 부추겼다고 말한다. 중도주의자들은 두 집회 이후 이분법적 선택을 암암리에 강요받는다. 노선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양쪽 모두에서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무성의한 사람으로 비쳐진다. 태극기집회 측이나 촛불집회 측이나 모두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같다고 하지만, 중도주의자들 역시 나라 위하는 마음은 같다는 시선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누가누가 더 양단의 끝에서 자극적인 목소리를 내는지 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이고, 센 목소리를 낼수록 애국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선동정치꾼, 분노의 정치가 힘을 얻는 시대다.
진보주의나 보수주의처럼 중도주의도 어엿한 노선 중 하나다. 중도는 기계적 중립이 아니다.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가 사안에 따라 모자이크처럼 혼합된 성격을 띤다. 중도주의는 어느 사회에나 꼭 필요하다. 특히 갈등사회에서 중도주의는 양극단의 화합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한다. 민심이 촛불과 태극기로 갈라져 대립하는 형국에서 중도주의는 없어서는 안 될 조종자가 된다.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제대로 된 중도주의를 보여주지 못했다. 촛불의 밝기와 태극기 파워에 부화뇌동하면서 여론 눈치 보기에 급급했을 뿐, 균형 잡힌 시각으로 분열을 수습하려 나서는 모습은 찾기 힘들었다.
사회통합지수 30개국 중 29위
정치를 위협하는가’에서 양극화에 맞서는 중도정치의 방향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제까지 한국 정치는 진보와 보수가 정치적 양극화에 빠져 국민의 실생활과 상관없는 공허한 이념을 선동함으로써 민생을 돌보지 않고 경제적 양극화를 해결하는 데 무능한 모습으로 일관했다. 정치적 양극화에 기반한 진영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21세기 중도정치란 정치적 양극화와 경제적 양극화에 의해 배제당한 중도층과 무당파, 중산층을 복원하는 시민정치운동이다.”
그는 서구에 증가하는 무당파의 속성은 ‘인지적 무관심층’이라고 말한다. 인지적 무관심층이란 정치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충분하면서도 후기산업화, 탈물질주의, 교육과 미디어의 발전 등 새로운 환경에 대응력이 없는 세련되지 못한 정당정치에 만족하지 못하는 무당파를 말한다. 한국의 무당파 내지 중도의 노선을 선호하는 이들 중에도 인지적 무관심층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점점 극단으로 치닫는 사회에 제동을 걸 수 있는 방안은 없을까. 사회통합지수를 조사 연구하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이런 정책방안을 제시했다. △사회통합 정책 영역에서 관리해야 할 자료를 체계적으로 분류 △사회통합과 관련된 지표들의 유기적 관계 규명 △사회통합 수준을 진단할 수 있는 지표 체계를 구축하고 각 지표의 생산방법 및 방법을 구체화 △사회통합과 관련한 개별 지표의 경고 신호에 반응할 수 있는 대응체계 마련 △사회통합과 관련된 개별 지표들마다 정책 목표선 지정 등이 그것이다.
반대의견을 듣자, 데블스 애드버케이트
정치계의 자정 노력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계에는 늘 갈등을 먹고사는 극단의 존재들이 있게 마련이다. 문제는 극단의 존재들의 존재감과 파워가 점점 커지는 현실이다. ‘나만 옳고 너는 그르다’라는 이분법적 태도는 우리 사회의 발전을 저해한다. 나와 다른 의견을 억지로라도 들을 필요가 있다. 어떤 사안을 논의할 때 의도적으로 반대의견을 말하는 데블스 애드버케이트(devil’s advocate)를 두는 것도 한 방법이다.
무엇보다 학교 교육이 달라져야 한다. 정익중 교수는 “다름을 받아들일 수 있는 교육을 대대적으로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교육의 방향이 달라져야 한다. 좋은 학교와 좋은 직장과의 연결성이 깨지고 있는데, 우리는 관성으로 내달리고 있다.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해 무슨 준비를 해야 할까. 인간다움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될 것으로 본다. 나와 다른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정 교수는 구체적인 시스템으로 △초등학교에 인성교육 학기 도입 △공부 안식년제 도입 등을 제안했다. 중학교 자율학기제처럼 초등학교에 인성교육만을 위한 학기를 도입해 교실을 벗어나 다양한 환경과 경험을 접하게 하고, 아이들에게도 직장인처럼 몇 년 공부한 후에 안식년을 부여해 다름의 가치 등 인간다움을 진지하게 고찰할 기회를 줄 필요가 있다는 제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