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
박연준 X 장석주
걸어본다 일곱번째 이야기는 시드니를 향해 있다. 누군가는 걸어본 곳이고 또 누군가는 처음 걷는 곳이라는 시드니.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는 시드니를 경험한 한 남자와 시드니를 경험하지 못한 한 여자가 한국을 떠나 처음으로 외지에서 함께 걸어본 기록을 한데 모은 책이다.
여자와 남자라는 차이점, 둘 다 시인이라는 공통점을 껴안은 채 그들은 시드니에 사는 한 지인이 빌려준 집에서 한 달을 살아보게 된다. 연애와 결혼의 차이는 아마도 그 '살이'에 있을 텐데, 한 집에서 한 '살이'를 함께하면서 그들은 남자와 여자가 얼마나 다른가, 그럼에도 그 차이를 '사랑'이라는 것이 어떻게 극복하게 해주는가, 낱낱이 기록을 해나갔다. 그리고 이렇듯 한 권의 책으로 그 결과물이자 증거물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말하자면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는 글이 만들어낸 결혼, 책이 거행시켜준 결혼식의 다른 이름이다. 이 소박한 잔치의 두 주인공. 남자이자 신랑은 장석주 시인이고 여자이자 신부는 박연준 시인이다.
김민정 (시인) : 연준이 우리 연준이. 피를 나눈 것도 아닌데 내 동생이야, 건드리지 마, 누가 말도 못하고 누가 욕도 못하게 두 팔 벌려 막아서며 언니 노릇 해온 것이 벌써 10년 가까이 됩니다. 당연했어요. 예뻐하면 예뻐할 짓만 골라 한다더니 연준이가 딱 그랬습니다. 일단 연준이가 써대는 글이 원초이자 태초였어요. 그 누구도 쓰지 못하는 스타일의 상상력이 연준이를 휘감고 있음을 귀신같이 알아차릴 수 있었어요. 질투가 아니었어요. 대견함이었어요. 식물성의 원시림과 동물성의 아마존, 그 냉수와 온수를 넘나드는 데 주저함이 없어 그런지 나날이 연준이의 피부는 하얘져갔고 탱탱해져갔으며 그 흔한 나이듦의 헛발인 모공 하나 보이질 않았어요. 그랬어요. 그랬는데 어느 날 연준이가 검은 한복을 입고 머리에는 흰 핀을 꽂은 채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저를 맞았어요. 그때 언니라는 제 입에서 철없이 툭 튀어나온 말이 뭔지 아세요? 이것도 소복의 일종이지? 너 근데 진짜 검은 한복 잘 어울린다, 야…… 위로의 방법을 잘 몰랐으니깐요. 죽음에 대해서는 천진무구가 딱 저였으니깐요. 그래요, 언니? 연준이는 대파 쪼개지듯 가늘게 웃었어요. 족히 백오십은 살아낸 여자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를 여유롭게 넘나드는 찰나에 지을 수 있는 웃음이었어요. 딸을 ‘처제’라고 잘못 부를 만큼 정신이 혼미해져가는 아버지의 마지막을 두고 보면서 연준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요 망할년, 요 다 아는 년, 요 안쓰러운 년, 년, 년, 그래왔는데 이제 더는 연준이를 ‘년’이라 하기에 애매한 상황이 벌어졌네요. 결혼을 하면 흔히들 어른이라 하는데 글쎄 연준이가 누군가의 아내가 되겠다잖아요. 대번에 단박에 한방에 그 신랑자리를 맞춰버린 건 으쓱해도 좋을 일, 그러나 좀 심술을 부려봐도 좋을 일, 어린 내 동생 아깝다고 3박 4일 지랄해대도 마땅할 일, 연준이의 신랑이자 나의 제부가 될 그를 보자마자 특유의 제 말법대로 말을 딱 깔았어요. 이제부터 장제부라 부를래요. 동생 남편더러 제부라고 하는 거 맞잖아요. 그날 이후 연준이는 제 남편 욕이라도 좀 할라치면 언니 장제부가요, 하면서 그의 순진함과 그의 순정함과 그의 사랑스러움을 낱낱이 고하고는 해요. 사랑하는구나, 아주 그냥 미치게들 사랑해 죽는구나. 닭살을 넘어 갓 튀긴 닭튀김처럼 바삭바삭 입천장을 까지게 만드는 독한 사랑의 현장을 목격한 기분이라지만 사실 저는 장제부를 잘 몰라요. 시인이자 저술가이자 한때 청하라는 이름의, 지금도 내가 헌책방에 가면 책 제목이 아니라 저자 이름이 아니라 검색어에 출판사 ‘청하’를 쳐서 일단 다 사들여버리는 책들의 주인이던 그는 알아요. 언제나 우와, 하고 감탄했던 그에게 에걔, 하고 내가 혀를 차는 날이 올 줄 그 누가 알았겠어요. 내리는 눈은 모두 희듯, 흰 눈은 애초에 하나이듯, 두 사람이 부부가 되는 오늘이 크리스마스이브가 될 줄 이 둘도 알았겠냐고요. 음, 알았을까나요. 연준이 울리면 장제부는 나한테 혼날 거고요, 연준이 웃기면 장제부는 나한테 칭찬 받을 겁니다. 10년 동안 지독한 사랑으로 서로를 결박해온 두 사람의 인내에 박수를 보냅니다. 두 사람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