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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10월 10일
제8차 세계화상대회(世界華商大會) 개막
세계 28개국 2500여명의 중국계
기업인과 500여명의 국내 기업인이 참석한 제8차 세계화상대회가 10일 서울 강남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리고 있다.
제8차 세계화상(華商)대회가
10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개막했다.
‘화상과의 동반성장, 지구촌의 평화번영’
을 주제로 열린 이번 대회 개막식에는
세계 28개국 2500여명의 중국계 기업인
과 500여명의 국내 기업인들이 참석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격려사를 통해 “한국과 중국은 국교수립 이후 비약적인 관계 발전을 이뤄왔다”며 “한·중 협력을 해외 화상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국내 기업인들 중에는 최태원 SK㈜
회장,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 김쌍수 LG전자 부회장, 설영흥 현대차그룹 부
회장 등과 이철상 브이케이 사장 등 중국 진출 중소기업인들이 참석했다.
중국 중화공상업연합회 황멍푸(黃孟復) 주석은 축사를 통해 “세계는 협력을 필요
로 하며, 협력해야만 경제번영과 사회발전, 세계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전경련 강신호 회장은 이날 황멍푸 주석과 만나 한·중 경제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접견에는 류촨즈(柳傳志)
중국 롄샹그룹 회장 등 10여명의
중국 기업인들이 참석했다.
개막식에 이어 열린 투자설명회에는 경제자유구역청과 9개 지방자치단체 대표들이 참석, 화교 기업인들을 대상으로 관광·레저 등 18개 사업 프로젝트를 소개하고 투자유치 활동을 벌였다.
IT(정보통신)·BT(바이오)·
CT(문화콘텐츠) 포럼도 개최됐다.
황창규 삼성전자 사장은 IT포럼에 참석, “반도체가 단순한 전자부품에서 벗어나 MP3P·태블릿PC 등 새로운 디지털 기기를 창조하는 변수로 발전하고 있다”고 말해 화상들의 주목을 받았다.
제8차 화상대회는 12일까지 계속됐다. 11일에는 화상대회 참석자들이 한국의 산업·문화 시찰을 하고, 12일에는 한·화상 리딩CEO 포럼, 일대일 비즈니스 미팅 등의 행사가 열렸다.
▶ 2010년 세계적 소프라노 조안 서덜랜드 별세
▶ 2010년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 별세
선군사상'과 함께 북한 양대 통치이념인 '주체사상'의 최고 이론가인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국제비서가 2010년 10월 10일 자택에서 숨진채 발견됐다. 발견 당시 반신욕 중이었으며, 특별한 외상은 없는 것으로 미루어 사인은 고령으로 인한 자연사인 것으로 추정된다.
2010년 10월 10일 서울 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빈소에서 조문객들이 황 전 비서의 영정에 애도를 표하고 있다.
1923년 1월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태어난 황장엽은 1997년 2월 망명하였다. 그는 망명 전까지 북한 김일성 김정일의 측근으로, 주체사상을 체계화하고 김정일 후계자 이미지관리를 전담해온 사상이론가였다. 또한 최고인민회의 의장직을 10년간 맡으면서 70년대 중반 북한의 비동맹권 국가와 미수교국에 대한 외교를 지휘했다.
1997년 2월 12일 "인민이 굶어죽는데 무슨 사회주의인가"라며 베이징 한국 총영사관을 통해 망명한 그는 이후 13년8개월 동안 김정일 정권을 공개 비판해왔다. 망명 후 남한에서 북한의 실상을 알리기 위한 다양한 국내외 활동을 해왔으며,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간의 대북정책인 ‘햇볕정책’을 “북한 인민들을 더 큰 고통으로 몰아넣고 김정일만 살린 반역정책”으로 비판하였다. 최근에는 후계자 김정은을 '그깟 놈'이라고 부르며 3대 세습에 대해 날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김정은이 노동당 창건 65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등극 행사를 하던 날 눈을 감았다.
정치권은 그에 대해 훌륭한 애국자, 분단시대의 영웅, 주체사상을 세운 학자이자 민족에 대한 열정을 가진분,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반영한 분단시대의 초상 등으로 평가하며 일제히 애도하였다. 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안치된 그의 빈소에는 탈북자 일반 시민 등 조문행렬이 이어졌다.
▶ 2009년 100년 앙숙 터키-아르메니아 국교수립
▶ 2005년 제8차 세계화상대회(世界華商大會) 개막
(서울 코엑스)
▶ 2005년 북한 조선노동당창건 60주년 기념행사
(김일성 광장)
▶ 2004년 영화 ‘슈퍼맨’ 주인공 미국 배우
크리스토퍼 리브 사망
▶ 2000년 세계최초 여성 총리 바다라나이케
前 스리랑카 총리 사망
▶ 1998년 국악신동 유태평양군 `흥보가` 3시간 완창
▶ 1997년 뮤지컬 퍼포먼스 `난타` 초연
▶ 1995년 로버트 루카스, 노벨경제학상 수상
미국 시카고대 교수인 로버트 루카스(58)가 1995년 10월 10일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그는 1970년 이후 현대 경제학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한 미국 경제학계의 거물이다. 20년 전부터 노벨 경제학상 후보로 꾸준히 거론되어온 루카스 교수는 역대 경제학상 수상자 중 최연소의 기록을 세웠다.
그는 케인즈 학파의 계량경제학의 맹점을 질타한 `루카스 비판`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합리적 `기대이론`을 보다 정교화시킨 이코노미스트로 평가받고 있다. `루카스 비판`의 핵심은 과거 경험에 입각한 계량모델을 사용, 경기를 예측하고 그에 따른 경제정책을 쓸 경우, 당초 기대한 정책효과를 얻을 수가 없다는 것. 경제주체들이 과거의 경험을 기준으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주어진 정보를 가지고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는 시장경제원리에 맡기고, 인위적인 경제개입을 줄여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합리적 기대 이론은 1961년 루스 교수에 의해 처음으로 제기되었으나, 본격적인 거시경제학에 합리적 기대이론을 도입한 것은 루카스 교수의 공헌이다.
▶ 1995년 이탈리아 패션 디자이너 파올로 구치 사망
▶ 1994년 `넷스케이프 내비게이터` 첫 출시
▶ 1993년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그리스 총리로 당선
▶ 1993년 서해페리호(110t급) 침몰
1993년 10월 10일 오전 9시40분쯤 전북 부안군 위도면 파장금항을 떠나 격포항으로 향하던 (주)서해훼리 소속 서해훼리호(선장 백운두, 1백 10t급)가 출항 20여분만인 오전 10시쯤 임수도 부근 해상에서 파도와 돌풍에 휩쓸려 침몰, 승객 292명이 사망하고 65명은 위도 주민을 비롯한 어민들이 구조했다.
10일 오전 위도를 떠나 격포로 향하던 서해훼리호는 4.6㎞ 지점에서 삼각파도에 휩쓸린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삼각파도란 연이은 파도로 배에 호깅(Hogging, 배의 선수와 선미가 공중에 뜨고 배의 아랫부분 중간에 파도가 걸리는 것) 또는 새깅(Sagging, 배의 선수와 선미가 파도에 걸리면서 중간부분이 내려앉는 것)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사고 후 침몰사고를 수사한 전주지검은 13일 사고 원인을 과승 및 과적, 운항 부주의로 결론짓고 수사를 종결했다. 사고 당시 사고구간인 위도~격포노선은 관광객이 몰리는 여름엔 하루 3회 왕복하고 있으나, 그외의 계절엔 하루 1회 왕복에 그쳐 주중엔 별 문제가 없으나 낚시꾼과 내왕객이 몰리는 주말엔 정원초과 등으로 항상 위험을 안고 다녔다.
이날도 207명 정원인 서해훼리호엔 정원을 훨씬 넘는 2백수십명의 승객들이 짐과 함께 가득 들어차 있었다.
https://youtu.be/nGfA83q0vaA
이때 제대로 고쳤다면! 또다른 똑같은 사고가 발생되지 않았을텐데~ㅠ
▶ 1991년 서울대 규장각, 국내最古의 지도로 추정되는 동국지도 공개
▶ 1991년 오늘,
소련 비밀공작기구 KGB 해체.
KGB 출신 푸틴 3월 26일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됨으로써 사실상 KGB 부활 움직임이 가속되고 있다.
▶ 1990년 남북한영화제 개막(~14일, 뉴욕)
▶ 1985년 영화배우 율 브리너 사망
`왕과 나`로 유명한 영화배우 율 브리너가 1985년 10월 10일 폐암으로 사망했다.
율 브리너의 본명은 타이제 칸이고 1920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몽골인 광산 기사와 루마니아 집시 부모밑에서 태어난 러시아 출신 미국배우다. 청소년기에 클럽에서 발라드를 불렀고, 그 후에는 서커스 곡예사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유랑극단 배우로도 활동했다.
TV 디렉터로 활동하다가 브로드웨이에 입성, 뮤지컬 `왕과 나`의 주연배우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246회나 되는 연속공연으로 연극의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토니상을 수상했다. 영화로 된 `왕과 나`에도 출연,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왕과 나`는 태국의 왕 샴과 그의 가정교사인 영국인 안나와의 만남과 갈등, 사랑, 왕의 죽음으로 인한 이별을 그린 고전물이다. 훗날에도 `왕과 나`는 연극과 뮤지컬로 많이 공연되었고, 최근에는 주윤발과 조디 포스터가 리메이크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율 브리너의 대표적인 작품은 `십계` `아나스타샤` `황야의 7인` `타라스불바` 등이 있다.
Yul Brynner 출연작 - Futureworld(1976), Westworld(1973), Fuzz(1972), Romance of a Horsethief(1971), The Long Duel(1967), Triple Cross(1966), Return of the Seven(1966), Invitation to a Gunfighter(1964), Kings of the Sun(1963), Taras Bulba(1962), The Magnificent Seven(1960), Once More, with Feeling!(1960), The Journey(1959), Solomon and Sheba(1959), The Brothers Karamazov(1958), The Ten Commandments(1956), The King and I(1956)
http://www.imdb.com/name/nm0000989/ http://en.wikipedia.org/wiki/Yul_Brynner
▶ 1983년 영국의 연극, 영화배우 랄프 리처드슨 사망
▶ 1981년 서독 본에서 30만명 반핵집회
▶ 1981년 시아가 자메이카수상 방한
▶ 1980년 알제리 대지진
▶ 1980년 이라크, 북한과 단교발표
▶ 1980년 북한 제6차 노동당대회 10년 만에 개막
▶ 1980년 충북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 3년산성에서 국내최고인 5세기경의 서문터(4.8m×3.3m) 발견
▶ 1980년 공직자 재산등록제 실시검토 발표
▶ 1979년 청평 양수발전소 완공
▶ 1975년 어린이대공원에 어린이회관 개관
▶ 1973년 스피로 애그뉴 미국부통령 탈세혐의로 사임
▶ 1973년 해병대, 해군에 통합
▶ 1971년 서울 북악터널 개통
▶ 1970년 피지, 영국으로부터 독립
▶ 1967년 알제리에서 저개발국 77개국회의 개최
▶ 1964년 제18회 도쿄올림픽 개막
유럽에서 탄생한 올림픽이 처음으로 아시아에서 개막됐다. 제18회 올림픽이 일본 도쿄에서 1964년 10월 10일 개막된 것이다. 94개국 5586명의 선수가 출전한 도쿄올림픽 개막식에는 7만5천4백여명의 관중이 운집했다.
4년전 소련에 뒤졌던 미국은 금메달수에서 다시 소련을 제치고 스포츠강국으로 부상했다. 미국이 얻은 금메달중 가장 화제에 오른 것은 1만m에서 우승한 빌리 밀스였다. 밀스는 수우족 인디언의 혈통을 물려받은 해병대원이었다. 전통적으로 북유럽선수가 강한 1만m에서 미국선수가 금메달을 딴 것은 밀스가 처음이었다. 맨발의 마라토너 아베베도 2시간12분11초의 세계신기록으로 2연패했다. 또한 홍보용 포스터는 많은 외국인을 유치한 광고로 평가 받았다.
▶ 1963년 부분핵실험금지 조약(PTBT) 발효
▶ 1963년 서울가정법원 개원
▶ 1963년 헤롤드 맥밀란 영국총리 사임 결정
▶ 1962년 인도, 태평양지역 10차 수산(水産)이사회 조선호텔서 개막
▶ 1962년 한국-아이슬란드 국교 수립
▶ 1962년 약의 날 제정
▶ 1961년 미국, 쿠데타로 새로 수립된 시리아 신정부 승인
▶ 1957년 육당 최남선 사망
변절자 육당 최남선 사망.
최남선은 1890년 서울에 비교적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나 불과 18세라는 어린 나이에 (1907년) 문화사업에 착수하였다. 그래서 월간잡지 소년을 창간한 것이 19세 때인 1908년에 일이었다. 그 뒤 1910년에 조선광문회를 조직하여 역사지리연구를 간행하고 1914년에는 청춘지를 발간하였다.
그리고 1919년에 이르러서는 삼일 독립선언서를 기초하여 유명한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공약삼장'의 글귀를 지어 일약 독립운동가로서 이름이 났다.
최남선의 나이 30세 때 일이었고 이 사건으로 1921년 10월까지 2년 6개월 간이나 옥고를 치렀다. 그러므로 이때까지 최남선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것이 '가출옥'이라 약간 의심스러운 절차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
이외에는 그가 변절 했다는 아무런 증거도 없다.
출옥 후 그는 동명사라는 출판사를 창립하고 동명이라는 잡지를 간행하였다 그리고는
동명지(1호~ 11호)에 '조선민시론' (1923)을 발표했으며 1925년 불후의 논문 '불함문화론' 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뒤인 1928년 그는 돌연 조선총독부의 역사왜곡 기관인 '조선사편수회' 편수위원직을 수락함으로써 변절자라는 지탄을 받기 시작하였다.
3.1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최남선이 아닌가! 그런 그가 왜놈에게 붙다니 이럴 수가 있는가. 최남선을 민족의 양심으로 알고있던 당시의 지식인들은 한결같이 개탄했다.
그러나 자열서에서 최남선 자신은 이것을
변절이라 하지않고 방향전환에 지나지 않았다고 변명하면서 단지 그것은 '돈'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최남선은 일제의 관변어용 역사단체인 조선사편수회위원으로서 위원회에 관여했을 뿐 아니라 실무자로서도 직접 편찬업무에 참여해 적극적인 친일의 길을 걷게 된다. 일제는 조선사35권 편찬작업을 통하여 삼국사기를 한국 고대사의 기본사료로
못박고 삼국유사의 기록은 사설로
제껴버림으로써 한국사를 2,000년 역사로 축소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최남선은 조선 사회 국조 단군에 관한 기록이 수록되지 않은 점에 대해 항의했으나(짜고치는 고스톱!)
책은 이미 인쇄되어 배본 중이었으므로
그의 의사는 전혀 관철되지 않았으며 그도 당초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요컨대 최남선은 일제의 역사왜곡 작업에 들러리 역할을 제대로 했던 것이다.
지식인의 배반은 보통사람의 배반보다 수백배,수천배 더 나쁘다!
지식인이나 예술가가 가장 위대하다고 하는것은 '선'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악'에
대해서도 강력한 영향을 끼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 1946년 말레이지아연방 독립선언
▶ 1945년 김일성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1945년 10월 10일 창설됐다. 김일성의 권력 장정이 그동안 수면 하에서 진행됐다면, 분국 창설은 그것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33세의 새파란 김일성이 노련한 정치가 박헌영과의 담판에서 분국 창설이라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다는 것 자체가 북한 권력의 향방을 예고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1945년 9월 19일, 김일성(오른쪽)이 평양에 입국해 활동을 시작했다.
10월 5일부터 8일까지 평양에서는 `서북 5도 당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를 위한 예비회의가 열렸지만, 결론없이 대립만 하다 분국 창설의 과제를 10월 8일 밤의 박헌영·김일성 비밀회동으로 떠넘겼다. 결국 분국 창설은 두 사람의 협의로 큰 문제없이 통과됐고 10월 10일 비밀리에 소집된 `서북 5도 당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 본회의에서 마무리됐다. 책임비서에 김용범, 제2비서에 오기섭과 무정이 선출됐고 김일성은 집행위원에 선출됐다. 비록 책임비서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김일성은 북한 공산당을 완전히 장악하기 일보 직전까지 다가갔다.
김일성이 책임비서에 오르지 못한 이유는 박헌영을 비롯한 국내파의 저항이 컸고, 소련도 국내 투쟁경험이 적은 김일성을 전면으로 내세우기에는 아직 지명도가 낮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분국이 설치된 지 2개월 만인 12월 18일 마침내 북한 공산당 조직을 장악했다. 이날 열린 북조선 분국 비밀회의에서 책임비서로 선출된 것이다. 이로써 김일성은 명실공히 분국을 장악하게 됐으며 김일성의 분국은 사실상 북조선공산당으로 행세하게 됐다.
▶ 1938년 오늘,
조선 의용대가 결성되다!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 민족혁명당이 중국 후베이성 한코우(현재의 우한)에서 창설한 무장독립운동단체이다.
1942년 김두봉이 이끌던 조선독립동맹과 연합하여 조선의용군으로 개편 하였는데
이 당시 병력은 최대 8,000여명으로
일제 강점기 동안 존재했던 수 많은 조선인 무장단체들 중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 1935년 거슈인 작곡, 오페라 `포기와 베스` 초연
▶ 1932년 이봉창 의사 순국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대강 맛보았습니다. 영원한 쾌락을 위해 독립사업에 투신하겠습니다.” 1931년 1월, 상하이 임시정부를 찾아간 이봉창(李奉昌) 의사가 김구 선생에게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이렇게 밝혔다.
일본에서 6년간 생활한 적이 있는 이 의사는 1년 전 도쿄에 있을 때 일왕이 지나간다고 길 위에 엎드리면서 “폭탄이 있었으면...” 하고 아쉬워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임시정부도 일왕 제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터라 이 의사의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렸다.
도쿄로 떠나기 전 폭탄을 양손에 쥐고 태극기 앞에서 기념촬영한 이봉창 의사.
1931년 12월에 도쿄에 도착한 이 의사는 때를 기다렸다. 마침 일왕이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알아낸 이 의사는 이날을 거사일로 잡았다. 1932년 1월 8일, 히로히토(裕仁) 일왕이 황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도쿄 경시청 앞을 지날 때 이 의사는 그가 탄 승용차를 향해 폭탄을 힘껏 던졌다. 폭탄은 승용차 뒤쪽에서 굉음을 내며 터졌지만 거리가 멀어 뒤를 따르던 마차만 거꾸러졌다. 현장에서 체포된 이 의사는 대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아 1932년 10월 10일,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 1932년 세계최대 레닌발전소 준공
▶ 1928년 독립운동가 조명하 순국. 일본 육군대장을 칼로 척살하다, 조명하
독립운동가 조명하 의사가 1928년 10월 10일 이국땅 대만에서 스물 넷의 나이로 순국했다. 히로히토 일왕의 장인이자 일본 육군대장인 구니노미야 구니요시에게 독이 묻은 단검을 던졌다는 이유였다.
1928년 5월 14일 오전, 대만에 체류중인 조명하 의사는 일왕의 장인이 대만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 의사가 인파에 숨어있다 던진 검은 구니노미야의 왼쪽 어깨를 스친 뒤 운전사의 등에 맞고 떨어졌다. 구니노미야는 현장에서의 죽음은 모면했으나 이때 입은 상처로 이듬해 1월 27일 사망했다. 조명하 의사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현장에서 체포됐다. 의거는 일본 당국의 보도통제로 한달 뒤에야 신문에 공개됐지만 야마나시 한조 조선총독은 이 사건으로 사직해야 했다.
1905년 황해도 송화군에서 태어나 ‘6·10만세사건’과 ‘금호문 의거’로 민족의식에 눈을 뜬 조명하 의사는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에 한계를 느끼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도 독립운동에 한계를 느낀 조 의사는 1927년 상하이 임시정부로 가는 길에 경유지인 대만에 머물고 있던 중이었다.
▶ 1919년 손문, 중화혁명당을 개조한 중국국민당 결성
▶ 1914년 오성학교 조선인 야구팀과 용산철도구락부 일본인 팀, 조선이 이기자 경기 후 난투극 벌여
▶ 1914년 조선호텔 개업
▶ 1913년 원세개, 중국대통령에 취임. 일본-러시아-영국-독일, 중국 승인
▶ 1911년 중국 신해혁명
20세기 들어 청조의 몰락은 거역할 수 없는 대세였다. 1911년 10월 10일, 양쯔강 중류지역에 위치한 우창(武昌)에서 혁명파 군인들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시작된 것이다.
신해혁명때 혁명군이 시골 농부의 변발을 자르고 있다.
이튿날 혁명군이 우창·한커우(漢口)·한양(漢陽)의 우한(武漢) 3진(鎭)까지 장악, 혁명의 봉화를 지피자 중국 전역은 혁명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1개월 만에 12개 성이 혁명진영에 가담하자 청조는 베이징 군벌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총리로 임명, 진압에 나섰다. 위안(袁)은 한커우와 한양을 탈환했으나 곧 혁명군과 타협을 모색했다. 임시대총통 자리를 내주겠다는 혁명군의 제의를 받은 마당에 굳이 승산도 불투명한 내전에 뛰어들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혁명군도 힘의 열세를 느끼고 있었다.
1912년 1월 1일, 난징에서 중화민국 수립이 선포되고 쑨원이 임시대총통으로 취임했지만 쑨원은 3월 11일 위안에게 대총통직을 이양했다. 이미 2월 12일에 청조 마지막 황제 푸이가 황제직을 내놓아 286년간에 걸친 청조가 무너진 뒤였다. 그러나 신해혁명은 국민의 참여가 뒷받침되지 않은 미완의 혁명이었다.
▶ 1905년 대한적십자병원 개원
▶ 1905년 노르웨이-스웨덴, 분리법 확정
▶ 1902년 도량형규칙 공포
▶ 1901년 스위스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 출생
▶ 1897년 미국 장로회 선교사 베어드, 평양에 숭실학교 설립
▶ 1883년 부산~나가사키(長崎) 해저전선 부설 착공
▶ 1877년 `모리스` 자동차를 처음 생산한 영국의 너필드 출생
▶ 1861년 노르웨이 탐험가 난센 출생
▶ 1856년 추사 김정희 선생 사망
추사 김정희 선생이 1856년 10월 10일 나이 일흔에 한 세기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예술가로서의 생을 마쳤다. 충남 예산에서 영조의 사위인 김한신의 증손자로 태어난 김정희는 서화와 금석학에 한평생을 몰두해 성균관 대제학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24살 때 청나라 때 대학자를 만나 필담을 나누고 `해동에서 제일 뛰어난 학자`라고 극찬 받았으며 무학대사가 세웠다고 전해지던 북한산 비석이 진흥왕 순수비라는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헌종 6년인 1840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848년 풀려났고 철종 2년인 1851년 헌종의 묘천문제로 다시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대쪽같은 성품으로 귀향살이를 다녀온 그는 이후 과천 토담집에 칩거하며 그림 그리기로 여생을 보냈다.
추사는 조선 500년의 지도이념인 성리학 대신 새로운 사상과 이념이 요구되는 때에 청나라의 고증학을 깊이 체득하여 실사구시의 경학세계를 이루었고 금속학에서 명성을 떨쳤으며 고금의 필체를 수렴, 추사체란 독보적인 경지를 구현했다.
▶ 1816년 현대 공중보건 서비스의 기초를 세운 영국의 의사 사이먼 출생
▶ 1813년 이탈리아 오페라작곡가 주세페 베르디 출생
▶ 1446년 세종, 공문서에 한글 사용
(세종 28년)
https://youtu.be/vitR9ZsKNHI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솦트리종려나무,반가운의 hi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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