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강해 제 7장 구원받은 사마리아 성
이스라엘에 대한 아람의 2차 침공을 기록한 전장에 이어 본장은 아람 왕 벤하닷의 침입과 사마리아에 닥친 기근으로 인해 굶주림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받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본장의 핵심은 예언된 여호와의 말씀의 성취라는 것으로 1절에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16절에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고.’ 17절에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되었으니’라는 구절에 잘 드러난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하신 구원의 약속은 어떠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성취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취하시는 구원의 방법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며 아무 조건도 없이 다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거저 주시는 것이다.
1. 엘리사의 예언과 장관의 불신 (7:1-2절)
아람 왕 벤하닷의 침공과 포위로 인하여 사마리아 성에 심한 기근이 임하고 성중이 크게 주려서 여인들이 자기가 낳은 자식을 삶아 먹는 최악의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에 왕이 분노하고 이 모든 사건의 전말에 대한 책임을 엘리사에게 돌리며 엘리사를 처벌하기에 이른다. 엘리사를 죽이기 위해 달려온 왕의 사자가 집 문 밖에서 서서 말하기를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겠느냐.’고 소리 칠 때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사에게 임하였고 엘리사는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들을지어다.’에 해당하는 ‘쉐마’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사용하는 말인데 엘리사는 이 말을 처음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르시되’라는 말 ‘아마르’ 역시 여호와의 확신적 선언임을 표현하는 말이다. 즉 여호와의 말씀은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한다.’는 것이다. ‘때’라는 말 ‘카이로스’는 어떤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는 시점을 가리킨다. ‘한 스아’는 한 에바의 1/3에 해당하는 부피로서 7.3리터 정도이다. 이 물가는 평상시에 비하면 대단히 비싼 고가에 해당한다. 지금의 화폐로 환산하면 밀가루 3되에 50,000원 정도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근이 막심한 지금의 형편으로는 기적에 해당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비둘기 똥 사분의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을 하는 때문이다. 따라서 성 안에서 기근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선포로 들렸을 것이다.
엘리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왕의 한 장관이 대답하기를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오.’라고 하였다. 이 장관은 왕이 그의 손을 의지하는 자였는데 그렇다면 나아만 장군과 같은 직급에 속한 중요한 고위 관리였다. 이 사람은 엘리사의 말의 진실성을 의심하였고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지자를 심히 조롱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정죄를 받아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엘리사는 이 장관을 향하여 두 번째 예언을 선포했는데 그것은 이 장관이 그 광경을 자기 눈으로 보지마는 그 밀가루를 먹지는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 말은 내일 이맘때에 장관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아 죽는다는 것이다.
2. 문둥이들이 전한 기쁜 소식 (7:3-11절)
엘리사가 예언한 첫 번째 예언의 성취이다. 즉 사마리아 성의 경제 회복에 대한 예언의 성취인 것이다. 이는 죽기를 각오하고 아람 진영으로 들어갔던 네 명의 문둥이들에 의해 사마리아 성에 아름다운 소식이 전하여 지는 대목이다. 당시 사마리아 성은 인간적 관점으로 볼 때 회복이 전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사의 예언이 성취된 것은 사람의 힘이 아니라 완전한 신적 능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시62:11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당시 사마리아 성의 백성들로부터 냉대와 멸시를 받던 문둥이 네 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은 존재들이라고 하여 공동체에서 격리되었고 성 밖에서 살았다. 그러나 당시 성 안에는 식물이 결핍되었고 문둥이는커녕 일반 백성들도 먹을 수 있는 식물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그러므로 문둥이들은 양식을 구할 방법이 전무하였고 며칠을 굶었기 때문에 단순히 주린 정도가 아니라 너무나 배가 고파서 기운이 모두 탈진한 상태가 되었다. 이들은 죽기 전에 서로 의논하기를 여기서 앉아서 죽기보다는 아람 군대에 가서 항복하자는 것이었다. ‘항복하다’라는 말 ‘나팔’은 ‘넘어가자’라는 뜻이며 70인 역은 ‘들어가자’라는 말 ‘에이셀데인’이라고 번역하였다. 즉 문둥이들이 군인들처럼 항복한 것이 아니라 양식을 구하기 위해 상대편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적군에게 항복하는 것이라면 아람 진영에서 우대할 수 있을 것이나 문둥이들이 자기들의 양식을 구하기 위해 온다면 정녕 돌로 칠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문둥이들이 아람 진영으로 들어가는 것은 자기 목숨을 스스로 버리는 어리석은 일인 것이다.
문둥이들은 해가 질 무렵에 일어나서 아람 군 진영 끝에 도달했는데 그곳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 이유는 문둥이들이 일어나서 걸어갈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움직이는 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적진에게는 병거소리, 말소리, 큰 군대의 공격하는 소리로 들리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의 이적적인 역사였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권자이시며 기적을 창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여호와께서 전일에 아람의 나아만 장군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곤란하게 하신 적이 있지만 지금은 이스라엘의 문둥이들을 통하여 아람 군대를 격파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환상을 보게도 하시며 환각 작용을 통하여 이상한 소리도 듣게 하시고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도록 정신을 어지럽게 하기도 하신다. 문둥이들의 움직이는 소리와 저들이 하는 말이 얼마나 크게 들렸든지 아람 사람은 큰 혼란에 빠졌으며 스스로 판단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아람을 치려고 가나안 족속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용병을 얻어 아람을 공격하고 있다.’고 오판했던 것이다. 얼마나 큰 두려움이 임했으면 저들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 즉 적군의 공격 기능성을 다 열어놓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황급히 줄행랑을 쳤던 것이다.
큰 두려움과 혼란에 빠진 아람 군대는 해질 무렵에 일어나서 달아났는데 이 시간은 문둥이들이 출발한 시간과 거의 일치한다. 아람 군대는 좋은 말과 나귀와 장막을 그대로 버려두고 달아났다. 아마도 너무나 공포에 질려서 군장을 꾸릴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기드온의 공격 앞에서 미디안 연합군이 자기들끼리 서로 죽이고 도망을 쳤던 경우와 흡사하다. 이처럼 하나님의 권능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두려움으로 작용한다.
*시76;12 그가 고관들의 기를 꺾으시리니 그는 세상의 왕들에게 두려움이시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도움이 되시고 피난처가 되신다. 네 명의 문둥이들은 아람 진영의 끝에 이르러 한 장막에 들어갔다. 저들은 먼저 주린 식욕부터 채웠는데 이 식욕은 수면욕과 더불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다. 문둥이들은 이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목숨까지 건 모험을 감행했던 것이다. 일단 식욕을 채운 문둥이들은 그 다음으로 재물욕을 채운다. 사실 문둥이들에게 재물이란 큰 소용이 없는 것이지만 재물에 대한 욕심은 문둥이나 일반 백성이나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인간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욕구를 위해 신경을 쏟지만 그럴수록 탐욕으로 인한 공허감과 불만은 가중되는 것이다.
*시39:6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예수님께서는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비유의 말씀을 하셨는데 씨앗이 가시나무 떨기에 뿌려졌으나 자라지 못하는 것은 말씀을 듣기는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이 막혀 결실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문둥이들은 충분한 재물 즉 은과 금과 의복을 최대한 확보한 후에야 비로소 자신들의 배만 채우는 악한 소위를 뉘우치고 성 안에서 굶주리고 있는 형제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인데 우리가 침묵하고 있는 것은 옳지 못하다. 만일 내일 아침까지 우리가 침묵한다면 하나님의 벌이 자신들에게 내릴 것이라.’고 한 것이다. 문둥이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것은 단순한 조국애, 민족애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닥칠 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문둥이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선하지 못하다.’고 했는데 이 말은 자신들의 행위가 적절하지 못한 행동으로 자신들에 대한 정죄가 아니라 단순한 자기 점검에 불과했던 것이다. 문둥이들은 성 문지기를 불러 사실을 고하였다. 자신들은 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율법의 규례 때문에 아람 군대가 도망했다는 희소식을 문지기를 통하여 전달했던 것이다. 물론 문둥이들은 자기들이 직접 목격한 사실을 조금도 과장하거나 변형시키지 않고 그대로 전했다. 아름다운 소식은 더하거나 빼서는 안 되는 것이다.
3. 구원받은 사마리아 백성들 (7:12-20절)
본장의 핵심이 그대로 반영되었는데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끝까지 버리지 아니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본문은 엘리사의 두 가지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는 대목으로 문둥이들을 통하여 전달된 아름다운 소식이 왕의 의심으로 인하여 지체되었으나 결국 엘리사의 예언대로 사마리아 성의 경제가 회복되고 이 사실을 의심했던 한 장관은 죽음의 심판을 받게 된다.
문둥이들이 전한 소식을 왕은 즉시 믿지 않고 이것을 아람 사람들의 책략이라고 오판한다. 왕은 공식적인 회의를 통하여 이 같은 사실을 알렸는데 왕이 문둥이들이 알리는 낭설에 휘둘려 판단을 그르친다면 국가적으로 큰 손실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에 중신회의를 소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문둥이들이 전한 말을 믿지 않고 그대로 버틴다고 하여 성 안의 기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왕은 나아만 장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신하에 의해 문제의 해결점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즉 한 신하의 제안은 네 명의 문둥병자와 같이 죽음을 각오하고 결단을 내리자는 것으로 다소의 희생이 있더라도 사태의 진실을 규명해보자는 것이었다. 아직 성 안에는 말 다섯 마리가 있었기 때문에 군인을 보내어 적진을 정탐하자는 것이다. 신하는 병거 둘을 취하고 적진을 정탐하게 했는데 병거 둘을 보낸 것은 하나가 잡히더라도 하나는 급히 돌아올 수 있으며 두 명 이상의 증인이라야 사건의 진실성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람 군대가 요단강을 건너서 본국으로 돌아간 것은 그들이 퇴각할 수 있는 두 길 중에 하나를 선택한 것이다. 즉 하나는 사막을 통과하여 요단강을 지나 얍복 강으로 도망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아람 군대가 엘리사를 잡으러 왔던 길인 도단 계곡의 북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길은 모두 적진을 통과해야 하는 길이기 때문에 퇴각로로는 부적합하였다.
정탐꾼들이 요단강까지 추격을 한 것은 저들이 공격 의지를 버리고 완전히 철수한 것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정탐꾼들이 요단에 이르기까지 길에는 아람 군대가 도망하면서 버리고 간 의복과 병기가 길에 가득하였고 이러한 사실을 저들은 왕에게 목격한대로 보고하였다. 전쟁의 노획물을 모두 거둔 이스라엘 진영에는 엘리사가 예언한 두 가지 사실이 그대로 성취되었다. 즉 경제의 회복이다. 사마리아 성 안에는 밀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에 매매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에 매매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엘리사가 왕에게 예언한 그대로 정확하게 성취된 것이다. 이어서 두 번째 예언인 장관의 죽음이다. 장관이 성문의 출입을 통제하던 중 백성들의 발에 밟혀 죽음으로써 그 곡식들을 맛보지 못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무시했던 장관은 사마리아 성이 구원되는 그 순간에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밟으매’라는 말 ‘이르메수후’는 매우 엄격하고 잔인한 표현의 말로서 토기장이가 진흙을 이기기 위해 짓밟는 것은 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가장 미천한 것을 사용하셔서 역사적 사건을 주관하실 뿐만 아니라 택한 백성의 언약을 이루어 가신다. 사마리아 성의 구원 사역에 네 명의 문둥이가 쓰임을 받았다는 것은 진정 놀라운 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