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재학의 한국산사 목공예 걸작] 5. 왕실의 만수무강 축원한 오색장엄
5. 완주 송광사 대웅전 목조 삼전패
완주 송광사 삼전패, 현존 중 최대 크기
주상-228cm 왕비-212cm 세자-210cm
삼전패 중 유일 보물 무량사 삼전패보다
더 오래 되고 더 크고 더 완전해 가치 커
완주 송광사 대웅전 목조 삼전패(1644~1649).
전패, 세상에 기이한 보배
패(牌)는 불교의례나 유교의례에 사용하는 의례 장엄구의 하나다. 보편적인 패가 영가의 신위를 새긴 위패(位牌)다.
패 중에선 특별한 것도 있다. 불패와 전패, 원패가 그런 경우다. 불패(佛牌)는 불보살의 명호를 새긴 패이고, 전패(殿牌)는 왕과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는 패다. 원패(願牌)는 발원 내용을 새긴 패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시방삼보자존’명 패는 불패에, 통도사 성보박물관의 ‘왕비전하수제년’명 패는 전패에 해당하고, 안성 칠장사와 울진 불영사의 ‘우순풍조 국태민안’명 패는 원패의 일종이다. 불영사 전패 뒷면에 묵서 기록이 있다. 전패와 불패를 일러 ‘세지기보(世之奇寶)’라고 표현했다. ‘세상에 기이한 보배’라는 의미다. 패는 대부분 나무로 만든 목조다. 현존하는 패는 대략 250여 점에 달한다. 그중 왕실의 무병장수를 축원하는 전패는 100여 점에 이른다.
전패는 왕을 상징한다. 왕의 진영과 다를 바 없었다. 조선시대 지방행정 관아에는 의전공간으로 객사(客舍)를 뒀다. 객사 구조는 가운데에 정당(正堂)을 두고 좌우에 익실을 대칭적으로 펼친다. 솟을삼문처럼 가운데 정당은 익실보다 더 높게 지었다. 객사 정당엔 반드시 궐패와 전패를 배치했다. 궐패엔 ‘궐闕’자를, 전패엔 ‘전殿’자를 새겼다. 평택 진위향교에서 실물을 소장하고 있다. 궐패는 왕이 있는 궁궐을, 전패는 왕을 상징했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궐패와 전패를 봉안한 객사에서 왕이 있는 궁궐을 향해 배례를 올렸다. 그 의식을 ‘망궐례(望闕禮)’라 부른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 등 잇따른 전쟁을 치루면서 숭유억불의 조선사회에 불교사찰에 대한 재인식이 확산했다. 호국사찰의 중건과 망령천도 수륙재에 왕실 후원이 이어졌다. 사찰 중건과 불사 과정에서 왕실의 후원이 지속된 원당사찰, 혹은 호국사찰을 중심으로 왕실을 상징하는 전패가 법당의 불단 위에 모셔졌다. 그 과정에서 17세기 들어 삼전패(三殿牌) 형식이 확산하고 정형화됐다.
객사에 배치한 궐패와 전패는 비석 모양이거나 사각형 형식으로 비교적 간단하고 소박한 형태였다. 불교 법당 안으로 들어온 전패는 경전을 모신 경패나 15세기 석보상절 발행 원패, 범종에 새긴 위패, 명나라 전패 등과 흡사한 형태로 정착했다. 법당 안으로 들어온 전패는 불패와 마찬가지로 삼전패 형식으로 보편화됐다.
삼전패, 세자-왕-왕비 만수무강 축원 패
삼전패는 세자-왕-왕비의 세 사람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는 패다. 축원 패를 한 사람 씩 독립적으로 제작한 삼전패 형식이 대부분이지만, 특수하게는 하나의 패에 세 사람을 동시에 새겨 축원하기도 했다. 사정이 여의치 못한 경우엔 삼전패 대신 법당의 창방이나 평방에 묵서 형식으로 새기기도 했다. 삼전에 대한 장수축원 전패는 목조각, 탱화, 법당 묵서, 범종의 양각 새김, 불서 속 목판 판화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현전하는 삼전패 형식들을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
△삼전패: 완주 송광사 삼전패, 부여 무량사 삼전패, 상주 북장사 삼전패, 순천 선암사 삼전패, 원주 구룡사 삼전패, 안동 봉황사 삼전패, 평창 월정사 삼전패, 보은 법주사 삼전패 등
△하나의 전패에 삼전 축원을 새긴 사례: 예천 용문사 전패(‘황상삼전하수만세’), 평창 월정사 전패(*위 삼전패와 다른 전패)
△법당의 창방, 평방에 묵서로 새긴 사례: 안동 봉정사 극락전, 구례 화엄사 원통전, 강화 전등사 약사전 등
△탱화 속 전패: 대구 파계사 아미타설법도, 상주 남장사 극락보전 삼장보살탱 등
△동종: 순천 선암사 소장 보성 대원사 부도암 동종에 새긴 전패, 담양 용흥사 동종, 여수 흥국사 동종, 완주 송광사 동종 등에 새긴 ‘주상삼전무량수복’ 내용의 발원 전패.
△불서 속 전패: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월인석보 (1459년) 내 불경간행 발원 적은 전패
국내 최대 소조불상·삼전패 보유
250여 점에 이르는 목조 불패, 전패, 원패 중에서 보물로 지정된 것은 부여 무량사 삼전패가 유일하다. 2015년 보물로 지정했다.
삼전패는 무량사 전패 묵서명에서 ‘만수패(萬壽牌)’라 기록하고 있다. 무량사 삼전패는 1654년에 철학, 천승, 도균 세 스님이 제작했다. 전패의 크기는 높이 150㎝, 폭 53.5㎝에 이르는 대형 전패다. 전패 중에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한 이유도 제작시기, 제작자가 분명하고 삼전패의 형식성과 예술성, 규모에서의 대형성 등을 판단한 결과였다. 형태가 온전하고 정확한 제작시기와 제작자를 알려주는 묵서명이 있다는 사실은 불전 장엄구 삼전패의 편년과 양식연구의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보물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데 더 오래되고, 더 크고, 더 완전한 삼전패가 현존한다. 완주 송광사 대웅전 불단 위에 봉안돼 있는 삼전패가 그것이다. 제작시기, 중수시기, 중수자를 밝힌 묵서명도 있고, 역사의 스토리텔링도 생생하게 담겨있다. 세자의 전패 뒷면 묵서명에 ‘중수삼전패(重修三殿牌)’라 기록하고 있어 ‘삼전패’라는 고유명사를 확인해준다. 삼전패는 5m가 넘는 한국 최대의 소조삼방불인 아미타불(530cm)-석가모니불(565cm)-약사불(530cm) 사이에 배치했다. 소조삼방불은 1638년부터 1641년까지 벽암 각성의 총괄 아래 4년에 걸쳐 조각승 청헌, 법령 등 17명의 화원이 협업으로 조성했다. 한국 최대의 소조불상 제작배경은 무엇일까? 배경에는 1636년에 시작된 병자호란이 있다. 병자호란 이듬해인 1637년 인조는 삼전도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는 굴욕을 당하며 항복했다.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1993년 석가모니불 복장에서 불상 조성기가 발견됐다. 왕(인조)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축원하고,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조속한 환국을 발원하면서 삼존불을 조성했다고 밝혔다. 당대의 사람들에게 그 발원은 오죽 강렬하였을까? 불상의 크기에서 염원의 크기가 가늠된다. 삼전패도 그 발원의 연장선에서 제작된 것이다. 삼전패는 향좌측부터 세자-주상-왕비의 순으로 배열했다. 각 전패 중앙부 패액에는 주칠 바탕에 금니로 각각 ‘세자저하수천추’, ‘주상전하수만세’, ‘왕비전하수제년’이라는 만수무강 축원 문구를 새겼다. 주칠 바탕에 금니 명문은 왕실 고유의 고귀한 채색원리다.
완주 송광사 삼전패는 먼저 크기에 있어 다른 전패를 압도한다. 주상의 전패는 228cm, 왕비의 전패는 212cm, 세자의 전패는 210cm로 현존하는 전패 중에서 최대의 크기다. 소조삼방불도 최대이고, 삼전패도 최대다. 주상 전패 뒷면에 ‘순치세유청조월재…順治歲有靑鳥月在…’의 묵서 기록이 있다, ‘순치세(順治歲)’는 청나라 연호로서 1644년에서 1661년까지의 시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전패 속 주상은 인조다. 인조의 재위기간은 1623년~1649년이다. 따라서 삼전패 제작 시기는 1644년에서 1649년 기간으로 압축된다. 부여 무량사 삼전패 제작시기인 1654년보다 앞선다. 현전하는 전패, 불패 250여 위 중에서 온전한 형식을 갖춘 삼전패로는 가장 크고 오래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세자의 전패 뒷면에는 ‘건륭57년 중수’라는 묵서가 있어 1792년 수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부드러운 무량사, 역동적인 송광사
전패는 삼단 구성으로 제작했다. 연화 받침대와 몸통부인 패신, 머리 부분인 패두로 구성했다. 받침대와 패신, 패두는 여러 판재와 통나무 조각을 거멀쇠, 못 등으로 연결해서 만들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전패 곳곳의 이음새에 ㄷ자 거멀쇠가 박혀 있음을 알게 된다. 세 전패 중에서 왕의 전패를 보다 두드러지게 조각한 흔적들을 볼 수 있다. 크기부터 다른 두 전패보다 20cm 정도 크다. 왕비와 세자 전패의 받침대는 단순히 복련만 갖춘 데 비해, 왕의 전패 받침대는 앙련과 복련을 두루 갖춘 이단 형식으로 품격을 높였다. 패신과 패두 장식의 중심 소재는 용과 구름이다. 용이 구름 속에서 용틀임하며 휘몰아치는 기세가 대단하다. 왕비와 세자의 전패에는 황룡 세 마리를 표현하였지만 왕의 전패에는 황룡, 청룡, 백룡 등 다섯 마리를 조각하여 조형에 더 강력한 생명력을 불어 넣었다. 조형은 여러 판재로 엮어서 뒷면 바탕 골간을 만든 후 투각으로 입체감 있게 새긴 패신과 패두를 결구하여 본체를 만들었다. 본체를 연화 받침대에 끼워 고정하는 방식으로 해서 조형을 완성했다. 패신과 패두는 타원형에 가깝다. 다만 중간과 양 끝의 흐름을 중괄호처럼 뾰족하게 밖으로 빼서 조형에 우아한 곡선의 아름다움을 갖게 했다. 크기뿐만 아니라 조형의 예술성에서도 주목을 끈다.
송광사 삼전패는 조형의 측면에서도 보물로 지정된 무량사 삼전패와 비교대상이다. 무량사 삼전패의 중심 소재도 용과 구름으로 동일하다. 그런데 조형의 전체 분위기는 단정하고 차분하다. 잔잔하고 부드럽다. 하지만 송광사 삼전패에 눈길을 돌리면 상황이 다르다. 대단히 힘차고 역동적이다. 용, 구름, 보주의 붉은 빛 저마다가 일렁이며 기세등등하다. 서로 얽히고설킨 나선으로 소용돌이치는 기세가 폭풍이 휘몰아치는 거센 바다의 형세다. 한껏 고양되고 급팽창한 에너지가 폭발할 기세다. 너울대는 기운과 선들은 다채로운 색과 결합하여 더욱 변화무쌍하며 무궁무진한 운동에너지로 요동친다. 붉은 색과 청색, 노랑의 물결이 굽이치고 사이사이에 금빛과 초록의 선율이 휘감긴다. 혼연일체의 에너지 덩어리다. 조형 속에 국권회복의 역사의지가 담겨있다. 조형에 역사 스토리와 종교, 예술, 의례가 결집해 있다. 한국산사가 간직한 목조각 전패의 걸작이다.
▶ 한줄 요약
완주 송광사 대웅전 목조 삼전패는 보물인 부여 무량사 삼전패보다 더 오래되고, 더 크고, 더 완전하다. 크기 면에서 다른 삼전패를 압도한다.
부여 무량사 목조 삼전패(1654).
좌측부터 울진 불영사 목조 원패(1678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목조 불패(17세기 후반), 평창 월정사 목조 전패.
완주 송광사 삼전패 중 세자전패 뒷면의 중수 묵서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