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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명신 장군이 평생 묻어둔 비밀 …
< 적장이 맡긴 고아, 교수로 키웠다>
30일 오후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의 제2 병사묘역.
지난달 25일 별세하면서 ‘장성묘역 대신 병사묘역에 묻히기 원한다’는 유언을 남긴 베트남전의 영웅 고(故) 채명신 장군의
삼우제가 치러졌다.
부인 문정인 여사와 아들·딸을 비롯한 유족들, 베트남전 참전 노병들이 추모 예배를 하며 고인을 기렸다.
이 자리에선 4일장으로 치러진 채 장군의 장례 기간 내내 빈소를 지키며 조문객들을 맞았던 채 장군의 동생 채모(76)씨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나흘간 밤샘하며 쌓인 피로를 걱정해 “삼우제는 직계가족만으로 치를 테니 나오지 말라”는 문정인 여사의 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생 채씨는 채 장군이 60년 넘게 숨겨온 또 다른 미담의 주인공이다.
채씨는 채 장군이 1951년 초 강원도에서 생포한 조선노동당 제2 비서 겸 북한군 대남유격부대 총사령관(중장) 길원팔이
아들처럼 데리고 다녔던 전쟁고아였다.
당시 육군 중령이던 채 장군은 유격부대 ‘백골병단’을 이끌며 강원도 내에서 암약하던 북한군 색출작전을 펼쳤다.
채 장군에게 생포된 길원팔은 채 장군의 전향 권유를 거부하고 채 장군이 준 권총으로 자결했다.
그러면서 “전쟁 중 부모 잃은 소년을 아들처럼 키워왔다. 저기 밖에 있으니 그 소년을 남조선에 데려가 공부시켜달라”고 부탁했다.
적장(敵將)이지만 길원팔의 인간됨에 끌린 채 장군은 “그러겠다”고 약속하고 그 소년을 동생으로 호적에 입적시켰다.
이름도 새로 지어주고 총각 처지에 그를 손수 돌봤다.
소년은 채 장군의 보살핌에 힘입어 서울대에 들어가 서울대 대학원에서 이학 석사,·박사 학위를 받은 뒤 서울 유명 대학에서 교수를 지냈다. 채 교수는 10여 년 전 은퇴했다.
두 사람은 채 장군이 숨질 때까지 우애 깊은 형제로 지내왔다고 한다.
채 장군의 자녀들은 그를 삼촌으로, 채 교수의 자녀들은 채 장군을 큰아버지라고 부른다.
문정인 여사는 지난달 29일 서울 동부이촌동 자택에서 중앙SUNDAY 기자와 만나
“채 장군이 길원팔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채 교수를 동생으로 맞은 것”이라며
채 장군이 생전에 길원팔 칭찬을 많이 했다고 한다.
적장이긴 하지만 사나이 중의 사나이라고 했다고 설명했다.
문 여사는 “채 장군이 채 교수를 (아들이 아닌) 동생으로 입적한 건
채 장군의 나이(당시 25세)가 젊었고, 채 교수와의 나이 차도 11세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채 교수가) 형님이 별세하신 데 대해 크게 슬퍼했다.
나흘 내내 빈소를 지켰다”고 말했다.
채 장군은 총각 시절 본인이 손수 소년을 돌보다 그가 고교생이 됐을 무렵 문 여사와 결혼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주변 사람에게 소년을 맡기고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 서울대에 진학하도록 도왔다고 한다.
채 장군은 북한군 고위 간부가 데리고 있던 고아 소년을 입적시킨 사실이 문제가 돼
군 생활이나 진급에 불이익을 당할 가능성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채 장군에겐 친동생 명세씨가 있었다.
하지만 51년 채 장군이 연대장으로 복무하던 5사단의 다른 연대에 소대장으로 배속돼 북한군과 교전을 벌이다 전사했다.
이에 따라 채 교수는 형제자매가 없던 채 장군에게 유일한 동생이 됐다.
채 장군 본인도 지난 5월초 고인의 마지막 언론 인터뷰가 된 중앙SUNDAY의 ‘이광재가 원로에게 묻다’
대담 당시 비보도를 전제로 “길원팔이 자결하면서 데리고 있던 10대 남녀 아이를 돌봐달라고 내게 부탁했다.
여자아이는 전쟁통에 숨졌으나 남자아이는 아들처럼 키웠다.
사랑으로 키웠다고, 대학 교수가 됐다”고 밝힌 바 있다.
채 장군은 당시 “그(채 교수)의 인생이 중요하니 비밀로 해달라”고 당부했다.
문 여사도 29일 인터뷰에서 “우리는 이런 사실을 절대 주변에 알리지 않고 지내왔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라며
기사화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본지는 적장이 아들처럼 데리고 다닌 소년을 동생으로 입적시켜 대한민국 엘리트로 키워낸 채 장군의 선행이
이념 갈등 해소와 남북 화해의 귀감이 될 것으로 판단해 기사화를 결정했다.
채명신 장군이 김일성의 오른팔로 불렸던 북한군 간부 길원팔이 맡긴 소년을 동생으로 삼은 건
채 장군과 길원팔의 짧고도 극적인 만남 때문이었다.
51년 3월 25세 때 북한군 후방에 침투하는 한국군 최초의 유격부대 ‘백골병단’을 지휘하던
채 장군(당시 중령)은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의 군량밭이란 마을을 급습했다.
“인민군 거물 길원팔이 숨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직후였다.
채 장군은 그곳을 지키던 북한군들에게 평안도 말씨로 “중앙당에서 나왔다.
조사할 게 있으니 협조해달라”고 말해 안심시킨 뒤 그들을 전원 사살했다.
이어 세포위원장 집에 숨어있던 길원팔을 붙잡았다.
그에게선 김일성 직인이 찍힌 작전훈령과 전선 사령관들에게 보내는 친필 서한 등 특급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채 장군은 방에서 길원팔과 단둘이 마주보고 심문에 들어갔다.
채 장군의 질문에 침묵을 지키던 길원팔은 “네 놈은 누구냐”고 되물었다.
“대한민국 국군 유격대 사령관 채명신”이라고 답하자 “그 썩어빠진 이승만 괴뢰도당 중 이곳까지 침투할 놈은 없다.
반란군 아니냐”고 쏘아붙였다.
채 장군은 자서전에서 “길원팔은 조금도 당황하거나 불안한 기색 없이 침착하고 당당했다.
그는 확실히 거물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채 장군은 “당신 같은 사람은 나와 함께 남쪽으로 가면 영웅 대접을 받을 것”이라며 전향을 권유했다.
그러자 길원팔은 “썩어빠진 땅에 왜 가느냐”며 일축했다.
이어 “부탁이 있다. 김일성 동지에게 선물받은 내 총으로 죽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소년(채 교수)을 거둬달라는 부탁과 함께였다.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한 채 장군은 길원팔의 총에 실탄을 한 발 넣어 건네주고 몸을 돌려 방을 나왔다.
잠시 후 총소리가 났고 길원팔은 책상에 머리를 숙인 채 숨졌다.
훗날 “혹시라도 길원팔이 뒷통수를 쏠 것이란 걱정은 안 들었나”는 주변의 질문에
채 장군은 “늘 하나님이 방패가 되는 걸 믿었기에 두려움이 없었다”고 답했다.
채 장군은 양지바른 곳에 길원팔을 묻고 ‘길원팔지묘(吉元八之墓)’란 묘비를 세운 뒤 부하들과 함께 경례했다.
채 장군은 자서전에서 “적장이었지만 그는 충분히 경례를 받을 만한 장군이었다”고 적었다.
강찬호 기자 stoncold@joongang.co.kr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었다
최근 작고한 채명신 전 주베트남(주월) 한국군사령관이 1991년 11월10일 서울 힐튼호텔 설악산홀에서 베트콩 수도지구 사령관을 했던 쩐박당(오른쪽)을 만나 포즈를 취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39세의 반공 원정사령관
채명신 장군이 살아나간 길은 그의 말마따나 ‘사선을 넘고 넘은’ 군인의 길이었다.
그의 부친은 옥고를 치른 항일운동가였다.
그는 북한 땅에서 평안도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했다가, 분단 한반도의 숙명을 타고 단신 월남하여 반공(反共)의 군인이 되고
냉전의 한국전장에서 피 흘리며 싸웠다.
그를 대표하는 최고의 경력은 불과 39세의 나이로 초대 주월한국군사령관에 임명되어 4년 8개월 간 복무한 것이다.
육사 5기로 졸업하고 9사단에서 박정희를 만나고
5?16쿠데타에 가담하여 혁명5인위원회와 국가재건최회의에 가담했기에 최초의 한국원정군 사령관이 될 수 있었을 터이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당초 박정희 대통령이 베트남 참전 의사를 꺼냈을 때 반대했다고 한다.
그는 또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반대하여 3성 장군으로 예편 당했다.
이런 일 때문인지 훤칠한 키의 채명신은 지장(智將)의 풍모를 보였다.
베트남 전설의 노장 보응우옌잡이 타계한 것은 채명신 장군보다 55일 앞선 지난 10월 4일이었다.
장군 보응우옌잡이 잠시 고등학교 교사를 지낸 경력은 채명신과 같더라도 그가 채명신 사령관의 적장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는 1910년 생으로 채명신 장군보다 한 세대 앞서 태어났을 뿐 아니라 일평생을 바쳐 항불전쟁과 항미전쟁,
그리고 통일전쟁을 모두 지휘했다.
그가 상대한 프랑스 적장은 원정군 사령관인 앙리 나바르 등 7명, 미국 적장은 사령관 웨스트모어랜드, 에이브럼스, 웨이언드 등
3명이 꼽힌다.
채명신 중장은 이들 가운데 주월미군사령관인 웨스트모어랜드 대장과 크레이튼 에이브럼스 대장 2명과 동맹하여
북베트남군 및 베트콩군과 싸웠다.
채명신 장군의 가장 중요한 적장의 하나는 수도지구(사이공?지아딘 지구) 베트콩(베트남민족해방전선) 사령관이던 쩐박당이다.
베트콩 적장 쩐박당
1991년 11월 어느 날, 필자는 안희완 전 주월한국대사관 영사의 연락을 받았다.
그는 전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씨와 전 베트콩 수도지구(사이공-지아딘 지구) 사령관 쩐박당 씨가 만나도록 주선한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1926년생 동갑으로 당시 64세였다.
베트콩은 1968년 1월 말 남부 베트남 전역에서 총공세를 폈다.
이것이 유명한 ‘떼트공세’인데 이때 수도지구 사령관이던 쩐박당이 서울에 온 것이다.
마침 떼트공세 때 채명신 사령관의 부인과 아이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배려로 사이공의 사령관 공관에서
한 달 동안 체류하고 있었다고 한다.
채명신 사령관 부인은 당시 포탄이 공관 주변에 비 오듯이 쏟아지는 데 남편은 가족에게 조심하라는 말 한마디 없이
작전을 지휘하러 비행장으로 가는 것을 보고 허망한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베트남전의 적장들이 서울에서 포옹하도록 주선한 안희완 전 영사는 1975년 사이공 패망이후
공산베트남 당국에 체포돼 5년 동안 사이공 치화(志和)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다.
교전 당사자였던 두 사령관이 퇴역 육군중장과 공산당 자문역(사회과학원 부위원장)이 되어 만나는 장면을 보고
‘해빙’과 ‘국가이익’이 과연 많은 것을 바꾸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적장은 힐튼호텔 설악산 홀에서 만나 점심식사로 한식을 함께했다.
이 식탁에는 떼트공세 때 주월한국대사였던 신상철 씨와 사이공 패망이후 현지에 남아 이대용 공사와
안희완 영사의 옥바라지를 한 교민회장 이순흥 씨,
<한국일보> 특파원으로 사이공 최후의 새벽을 취재한 필자가 동석했다.
1991년 11월 10일, 두 사령관은 2시간 40분 동안 마주앉았으나 지난날의 혈전 얘기를 하는 것은 되도록 삼갔다.
군복 냄새가 나는 카키색 사파리 셔츠를 입고 온 베트콩 사령관 쩐박당 씨가 말했다.
“우리는 사령관으로서 명령에 따라 총을 잡고 총을 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현재와 미래가 중요하다.” 그는 피차간에 전쟁에서 싸운 과거를 청산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채명신 사령관은 이런 말로 답했다.
“나는 제일 먼저 가고 싶은 곳이 고향인 이북의 평양이다. 두 번째 가고 싶은 곳이 남베트남의 사이공이다.”
사이공 남부의 비엔호아초등학교를 다닌 학력밖에 없는 쩐박당은 어릴 때 대장간에서 일하면서 16세 때 공산혁명 활동에
참가했다. 1961년 남부해방을 위한 베트콩 창설위원 겸 대표가 되었고 1965년 수도지구의 공산당 제1서기에 임명되었다.
그는 한국군과 미군이 철수하던 1973년까지 사이공지구 공산당 수석상임위원회 제1서기로 있었고 1980년 이후에는 공산당
자문역을 맡았다. 베트남 공산당에 입당한 후 <남부 베트남인민신문>의 편집장을 맡을 만큼 지적인 인물이다.
두 적장의 만남을 통해 국제정치의 현실은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채명신 사령관은 분단 베트남의 통일 전쟁을 저지하는 세력의 사령관으로써 싸웠다.
이것은 ‘반공을 국시로 하는’ 상황에서 국가이익이라는 명분을 주었다.
동시에 5000명의 장병을 잃은 대가로 압축경제의 토석이 되는 자금(달러)을 조달했다는 도덕적인 대립감이 있다.
그는 냉전시대의 장군이지만 매우 인간적으로 생을 마무리했다.
스스로 베트남전 사병 전사자 묘역의 한 평 땅에 묻혔다.
그처럼 표표하게 떠났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
사람들은 그가 장군의 위세를 내버린 것을 보며, 온통 권력자들이 거들먹거리는 계급사회에 일격을 가했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언론인 안병찬 인권센터명예이사장 (전 <한국일보> 사이공 특파원)
<특별 인터뷰>
79년10월 26일 브라질에서 박 대통령 서거 소식을 들었다.
삼가 참 군인으로 사시다 가신 장군님의 명복을 빕니다,
수고 하셨읍니다,
온 국민, 모두 ~님을 오래오래 기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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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삼가 고인의 몀복을 빕니다.
고운글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