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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
행복은 고통의 부재에 지나지 않는다
출생 1788년
사망 1860년
국적 독일
대표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목차
헤겔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독일의 민간 철학자. 염세주의 철학의 창시자.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칸트의 직계라고 자임하면서 세계를 표상으로 간주했다. 헤겔과는 견원지간이었으나 칸트를 흠모하여 아침형 인간이 되는 것만 빼고는 모두 칸트를 본받았을 정도다. 학자를 꿈꾸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뒤늦게 김나지움에 입학했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학문을 시작했다. 철학 교수와 여성들을 혐오했고, 의심 많은 성격 때문에 말년에는 오직 개 한 마리와 고독한 여생을 보냈다. 인간과 자연, 세계를 움직이는 근본적인 원동력은 무의식적이고 맹목적인 의지라고 주장했다.
쇼펜하우어
상인의 견습생 노릇을 하다
쇼펜하우어는 독일의 단치히(현재 폴란드 중북부에 있는 도시)에서 부유한 상인의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고지식하고 교양이 없었던 데다 추남이었다. 이에 반해 그의 어머니는 문필가로서의 뛰어난 재능을 가진 미모의 작가였다. 그녀는 19세 때 20세나 더 많은 남편과 결혼했다.
프로이센을 몹시 증오한 쇼펜하우어의 아버지는 프로이센이 단치히를 점령했을 때, 적지 않은 손해를 보면서도 자유를 찾아 독일 최대의 항구도시 함부르크로 이주했다. 장사에 상당한 재능이 있던 아버지는 하나뿐인 아들(쇼펜하우어) 역시 고귀한 인품을 지닌 훌륭한 상인으로 키우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정작 쇼펜하우어 본인은 학자가 되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머니와 교제하던 유명한 문인들이 그의 집에 자주 드나든 데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아버지는 '학자'와 '가난'을 동의어로 생각하여 아들의 마음을 돌리려고 책략을 썼다. 아버지는 쇼펜하우어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온 가족이 유럽의 여러 나라를 오랫동안 여행하려 하는데, 만일 네가 학자가 되려거든 라틴어를 배우기 위해 함부르크에 남아 있어야 하고, 상인이 되겠다고 한다면 지금 따라나서도 좋다."
이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쇼펜하우어는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상인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2년 동안의 유럽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쇼펜하우어는 함부르크의 유명한 상인에게 가서 견습생 노릇을 한다. 그러나 장사하는 일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틈나는 대로 책을 읽거나 시내에 나와 강연을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이 잘못된 인생 항로를 따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17세 되던 해의 4월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쇼펜하우어는 이 일에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애초부터 돈만 바라보고 애정 없는 결혼을 한 어머니는 막대한 유산을 챙겨 연애 생활에 가장 적합한 바이마르1) 지방으로 옮겨가서는 방탕한 생활에 빠져들었다. 쇼펜하우어는 어머니의 이런 모습에 강한 혐오감을 느껴 어머니와 한바탕 싸우고 나서 서로 헤어져 살았다. 이때부터 그는 정해진 면회 날짜에 여러 사람들 사이에 끼어 손님 중 한 명으로서 어머니를 만나야 했다.
어머니를 고소하다
쇼펜하우어는 21세의 성년이 되자 어머니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 유산의 삼분의 일을 받아냈다. 쇼펜하우어는 그 유산 덕분에 평생 풍족하게 살 수 있었다. 물론 생계를 짜임새 있게 꾸려나간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는 비상한 재능을 발휘하여 유산을 불려나가기까지 했다. 그 때문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직업을 가져야 할 상황에 놓여본 적은 없었다.
그는 아버지가 세상을 뜬 후에 가급적 그 유지(남긴 뜻)를 받들고자 상업 견습을 가기도 했다. 그러나 점점 갈등만 깊어져 마침내 김나지움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공부에 열중한 덕에 대학에 들어갔을 때는 다른 학생들에 비해 결코 실력이 뒤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 입학할 때의 전공인 의학에서 철학으로 진로를 바꾼 그는 나이도 많이 든 데다 성격이 괴팍해 학우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그 때문에 오직 학문에만 전념했다.
마침내 그는 예나 대학에서 〈충족이유율의 네 가지 근원〉이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이 논문이 출판되자 많은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을 받았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의 어머니는 아들이 학위 논문을 가져오자 비웃기만 할 뿐이었다.
"이건 약제사에게나 필요한 책이로군."
이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응수했다.
"어머니의 소설이 헛간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될 때, 그때에도 제 글은 읽힐 거예요."
이 말을 듣고 어머니는 이렇게 대꾸했다고 전한다.
"그런 책은 앞으로도 수없이 쏟아져 나올 텐데 뭘."
어쨌든 결과적으로 두 사람의 말은 모두 적중한 셈이 되었다. 그 사건 이후로 쇼펜하우어는 영영 어머니와 헤어졌고, 이후 모자는 더 이상 만나지 않았다.
"어떤 철학을 선택하느냐는 바로 그가 어떤 사람이냐에 달려 있다"고 한 피히테의 말은 쇼펜하우어에게도 해당된다. 쇼펜하우어의 인품이 특이하게 형성된 것은 가정환경 탓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지독한 에고이스트(이기주의자)이자 지칠 줄 모르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던 쇼펜하우어의 비관주의는 벌써 이때부터 그 터전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철학 교수와 여자를 증오하다
그가 증오하는 첫 번째 대상은 철학 교수들이었다. 쇼펜하우어 자신도 한 번은 시도한 적이 있는 그 직업의 사람들에게 그는 지독한 독설을 퍼부었다. 그는 모욕할 대상을 고르는 데 신중을 기하기 위해 법적인 자문까지 받았다. 그의 신랄한 인신공격의 대상은 그 누구보다도 헤겔이었다.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 헤겔은 '사기꾼'이자 '정신이 썩어빠진 추악한 남자'였으며, 헤겔의 학설은 '정신병자의 수다'에 불과했다. 그는 피히테에 대해서도 헤겔 못지않게 나쁘게 평했다. 피히테의 말 역시 궤변에 지나지 않으며, 기껏해야 '요술쟁이의 주문'일 따름이었다.
반면에 자기 자신이야말로 '철학의 숨은 황제'이며, 더 나아가 철학적 종교의 창시자라고 했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을 따르는 몇 명의 추종자들을 '사도2) '라거나 '복음사가'라고까지 불렀다. 같은 시대의 사람들이 그를 인정하지 않는 데 대해서는 '후대의 평가에 호소한다'며 매우 태연한 척했다.
대학 교수 다음으로 쇼펜하우어가 경멸한 대상은 여성이었다. 어머니와 관계가 좋지 않았던 탓에 여자를 인간적 불행의 근원으로 생각했다. 그는 여자들의 특징을 미치광이에 가까운 낭비벽과 본능적인 교활함, 뿌리 뽑기 어려운 거짓말 습관이라고 보았다. 여자란 어디까지나 하위의 존재로서 어린이와 남자 사이의 중간 단계에 속해 있다며 여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적 충동으로 이성이 흐려진 남자들만이 키가 작고 어깨가 좁으며 엉덩이가 크고 다리가 짧은 이 여자라는 존재를 아름답다고 말한다. 당연히 여자라는 족속은 속된 존재라고 불러야 한다. 여자들은 음악에 대해서도, 시에 대해서도, 조형미술에 대해서도 아무런 참된 감정이나 이해력이 없다. 만일 그들이 그런 능력이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면, 그것은 남자들의 마음을 끌려는 의도로 꾸민 가식일 뿐이다."
그는 일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그러나 여자를 전혀 만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탈리아 여행 때 한 여성과 깊이 사귄 적이 있으며, 사창가에서 창녀들과 어울리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피해망상증의 대가
쇼펜하우어가 헤겔의 강의 시간과 똑같은 시간대에 자신의 강의를 개설했다가 청강생이 헤겔에게로 몰리는 바람에 한 학기 만에 강의를 포기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그 실패를 자기 탓이 아니라 밤에는 늑대로 변하는, 다른 철학 교수들의 그릇된 증오와 지나친 시기심 탓으로 돌렸다. 물론 동료들은 그를 증오하거나 시기하지 않았으며, 그에 대해 알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쇼펜하우어는 동료 교수들이 자신에게 나쁜 짓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항상 의심스러운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이발사가 면도칼로 자신의 목을 벨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이발사에게 면도를 맡기지도 않았으며, 불이 날까봐 이층에서는 자지도 않았다. 또 잠잘 때에는 권총에 탄환을 넣어 침대 옆에 두고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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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그는 폭력을 휘둘렀다. 언젠가는 바느질하는 어떤 얌전한 여자가 수다를 떨어 자신을 방해했다며 그녀를 바닥에 내동댕이친 적도 있었다. 그 일로 그녀는 평생 불구로 지내게 되었고, 쇼펜하우어 자신도 평생 보상의 의무를 지게 되어 두고두고 자책감과 경제적인 부담으로 괴로워했다.
또 집의 가장 은밀한 곳에 값나가는 물건을 숨겨두었다. 금화(金貨)는 잉크병 속에 집어넣었고, 지폐(종이 돈)는 침대 밑에 숨겼다. 또한 출판업자들과는 자신의 책을 보급시키는 데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고 욕하며 끊임없이 다투었다.
칸트를 흠모하다
인간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경멸은 그의 포괄적인 염세주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사유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염세주의는 물론 고난에 찬 그 자신의 삶에서 형성된 것이 분명하리라. 그는 널리 명예를 얻고자 하는 강렬한 염원과 그에 미치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의 평가 사이에서 한없이 고뇌했다.
"칸트와 나 사이의 중간 단계에서는 단 하나도 가치 있는 문제가 다루어진 적이 없다"고 하며 스스로 천재라고 자화자찬하던 그는 곧이어 세계와 인간에 대한 멸시와 염세주의를 드러내고야 만다.
1819년 쇼펜하우어는 주저에 해당하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출간했다. 하지만 이 책은 전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급기야 초판을 찍은 후 16년이 지난 다음에는 출판업자도 그 원본의 대부분을 폐지로 팔아버릴 결심을 했다. 그럼에도 이 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철학의 역사에서 하나의 행운이라 해야 할 것이다.
1831년 베를린에 콜레라가 유행하자 쇼펜하우어는 이를 피해 멀리 프랑크푸르트까지 달아났다. 그곳에서 방 두 개를 빌려 아내도 자식도 친구도 직장도 조국도 없이, 오직 조그마한 삽살개 한 마리와 고독한 여생을 보냈다. 그의 서재에 있는 장식품이라고는 칸트의 상반신 초상화와 청동불상 하나뿐이었다. 그는 칸트와 석가를 존경했는데, 특히 칸트를 매우 흠모하여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일만 제외하고는 모두 칸트를 본받았다고 한다.
성공의 문턱에서 맞은 죽음
그와 천적(天敵) 관계에 있던 헤겔이 드디어 세상을 떠났다. 헤겔 역시 콜레라를 피해 달아났으나 너무 일찍 베를린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병에 걸리고 말았던 것이다. 헤겔이 죽고 1848년의 시민혁명3) 이 실패로 돌아간 후, 낙관주의적인 헤겔철학이 마침내 종언을 고하고 염세주의적인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이제 쇼펜하우어에게는 헤겔주의자들의 시기심도 더 이상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쇼펜하우어 철학을 처음으로 받아들인 쪽은 대학이 아니라 각양 각종의 직업인이나 개인 연구가, 친구들이었다. 특히 예술 분야나 예술가들에게 직접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바그너의 음악은 적어도 초기에는 음산하고 우울한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에 흠뻑 젖어 있었다. 바그너는 자신의 가극 〈니벨룽겐의 반지〉의 악보 한 벌에 헌사를 적어 넣어서 쇼펜하우어에게 보냈다고 한다. 여러 나라의 학자들과 많은 사람이 직접 쇼펜하우어를 방문하거나 갖가지 글들을 보내왔다. 마침내 성공과 더불어 명성이 찾아들자 그는 의기양양해했다.
"수많은 철학 교수들이 똘똘 뭉쳐 오랜 세월에 걸쳐 내게 저항했음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해내고야 말았다!"
자기에 관해 쓴 글이라면 빠짐없이 찾아서 읽던 이 노령의 철학자는 이제 의사표시를 하는 데 있어서나 교우 관계에 있어서나 예전과는 딴판이 되었다. 다시 말해 쉽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도 바라던 명성과 경탄의 소리가 그를 감싸게 되었을 때는 이미 죽음의 신이 그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1860년 9월 21일, 쇼펜하우어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냉수욕을 마치고 쉬던 중 식탁에 앉은 채 심장마비로 영영 잠들고 말았다. 그의 모든 재산은 유언에 따라 자선단체에 기증되었다. 오늘날 그의 무덤 앞에 세워진 검은 대리석 묘비에는 외롭게 그의 이름만이 새겨져 있다.
철학 속으로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본질은 사유나 이성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의지에 있다'고 보았다. 우리의 판단은 논리적 사유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식되지 않은 심층부에서 순간적인 착상이나 결단의 형식으로 나타나며, 우리들의 신체적 행동 역시 의지의 작용에 불과하다. 이 의지란 마치 앞을 볼 수는 있으나 몸이 불구인 사람을 어깨에 짊어지고 가는, 힘센 장님과 비슷하다. 인간 행동의 실질적인 추진력은 의지이고, 이성은 단지 그 방향을 제시해줄 뿐이다.
또한 생물계에서 가장 강렬한 의지의 표현은 생식 본능이다. 인간은 인식의 근거지인 뇌보다도 성충동의 본거지인 생식기로부터 더 강한 충동을 받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사랑이란 종족 보존이라고 하는 자연의 유일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성(異性)의 두 사람을 불가항력적으로 끌어당기는 것은 고상한 인격이 아니라, 종족 본능으로 표출되는 삶의 의지다.
정욕이란 원래 종(種)을 위해 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개인을 위해 있는 듯이 보이게 하는 일종의 망상에 불과하다. 육체적 욕정이 충족되었을 때 냉정하게 돌아서는 남성은 인간이 결국 종(種)의 도구임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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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의지는 무한한 데 비해, 그 충족에는 많은 제약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리고 어떤 욕망이든지 채워지고 나면 즉시 새로운 욕망이 일어나고, 어떤 고통도 그것을 벗어났다 싶으면 곧바로 새로운 불행이 찾아든다. 그러므로 고통이야말로 삶의 본래 모습이며 쾌락이나 행복은 고통이 없어졌을 때 잠깐 찾아오는 소극적인 것, 즉 고통의 부재(不在)에 지나지 않는다. 이리하여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삶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한 인생은 고통이요, 이 세계는 최악의 세계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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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비극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없을까? 첫째로 인식은 탈출구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식물보다는 하등동물이, 하등동물보다는 고등동물이 고통에 대한 감각이 더 발달되어 있다. 인간의 경우는 인식의 수준이 높을수록 고통도 더 많게 마련이다. 둘째, 자살 역시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 자살은 의지의 충동을 없앨 수는 있어도 의지 그 자체를 없애지는 못한다. 의지는 즉시 새로운 형태로 나타나므로 자살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오직 두 가지 방법만이 있는데, 첫째는 심미적 해탈이고 다른 하나는 윤리적 해탈이다. 심미적 해탈이란 천재적인 예술가들의 작품 속에서 잠깐 동안 누리는 황홀감을 말한다. 반면에 윤리적 해탈이란 고통의 원인인 의지 자체를 억제함으로써 누리는 영속적인 해탈의 경지를 의미한다. 특별히 쇼펜하우어는 두 번째 방법을 강조하며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더 이상 소망할 것이 없는 열반4) 의 경지에서 우리들 자신으로서 죽을 것! 세상 것들을 멀리하고 십자가를 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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