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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부자의 인생 (눅 12:16-21) 16. 7. 24
[서 론]
오늘 본문에는 한 부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옛날에는 부자의 크기를 창고에 쌓은 곡식으로 했습니다. 창고에 쌓은 곡식이 많을수록 큰 부자인 것입니다. 오늘 부자의 고백을 들어볼까요? 17-18절을 읽어 봅시다.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바꾸어 말하면 그는 사업 투자를 잘해서 몇 년만에 엄청난 돈을 벌었습니다. 매스컴을 보면 년 매상이 10억이 넘는 음식점들도 나옵니다. 오늘 부자는 은행에다 자기 가 번 돈을 모두 저축해 두었습니다. 통장의 돈을 볼 때마다 즐거웠을 것입니다.
그는 이제 일하지 않고 놀고 즐겨도 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19절을 읽어 볼까요?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그 부자는 세상적으로 볼 때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부자를 다르게 평가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를 성공한 자가 아니라 어리석은 자라고 불렀습니다. 20절을 읽어 볼까요?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왜 하나님은 그 부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불렀을까요?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부자가 어떠한 사람인지 그려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부자의 모습은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오늘 부자가 보여주는 그의 인생은 어떠한 인생입니까?
[본 론]
1. 나만 생각하는 인생입니다.
18-19절을 읽어볼까요?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부자의 말을 보면 ‘나’ 라는 말밖에 없습니다. ‘우리’ 라는 말이나 ‘이웃’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 말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이 부자는 자기만 아는 인생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의 마음과 생각 속에는 오직 ‘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무슨 말을 했습니까? ‘많이 쌓아 두었으니 이제는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는 자기 혼자서만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 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오직 자기만을 위해 재물을 쌓아 두고, 쓰겠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가 이웃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말 가운데 이웃에 대한 배려의 말이 있을 것입니다. ‘내 재물을 이웃을 위해 이러이러하게 쓰리라’라는 말이 있을 것입니다. 삭개오가 그러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 하지만 오늘 부자의 입에서는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만을 위하여 쓰겠다고 했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이 부자와 같은 그런 인생을 삽니다. 나 자신 밖에 모릅니다. 내 가족밖에 모릅니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라는 공동체 의식이 사라지고, ‘나’ 라는 개인주의가 팽배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공동체 활동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고, 자기 개인의 활동에만 깊은 관심을 갖습니다.
[이런 현상은 교회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교회는 주의 몸의 지체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실상 교회는 개교회주의입니다. 내 교회만 잘 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교회가 무너져도 관심이 없습니다. 어려운 교회를 힘껏 도와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나’ 중심보다 ‘우리’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 4:32)]
‘나’만 잘 되고,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은 결국 죄악을 낳습니다. ‘나’만 생각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이웃이란 어떤 것입니까? 단지 자기 이익을 위한 수단이나, 자기 목적을 이루고자 이용할 대상 밖에 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수많은 범죄들을 보면 대부분 ‘나’만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짝뚱(가짜)의 나라는 중국이라고 합니다. 그 나라는 못만드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계란도 가짜로 만들어 팔기도 하고, 환자에게 필요한 링게르까지도 가짜를 만들어 판다고 합니다. 왜 그런 일을 저지릅니까? 남이야 살든 죽든 나만 살면 된다는 생각때문입니다. 이처럼 나만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디 그들 뿐이겠습니까? 우리 주변에도 나만 생각하고, 이웃이나 남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한밤중에 괭음을 내며 달리는 오토바이들, 길가면서 담배공초를 버리는 사람들,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사람들, 질서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 등등...
하나님은 ‘나’ 밖에 모르는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부자와 거짓 나사로의 이야기를 알고 계십니까? 그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죽었는데 거지는 낙원에 가고, 부자는 음부의 불못에 들어가 고통을 당했습니다. 거지도 들어가는 낙원에 부자가 왜 못 들어갔습니까?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날마다 잔치를 벌려 즐기면서도, 대문 밖에서 배고품과 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거지 나사로에게는 무관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낙원에 있는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눅 16:25) 그는 이웃을 모르고 자기만 아는 부자였기에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나’ 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이웃에게 관심을 갖고,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그런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이익이나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사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부자처럼 ‘나’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이웃’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33)
나는 지금껏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부자처럼 ‘나’만 잘 되고, 잘 먹고, 잘 벌고,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살지라도,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처럼 이웃을 생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나만 생각하지 말고 남을 생각할 줄 아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나만 보지 말고 아웃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만을 위해 모으거나, 쓰지 말고 이웃에게 베풀며 살아야 합니다. 나만 아는 인생, 나의 유익만을 위해 사는 인생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어리석은 자라고 불립니다.
이제 우리는 ‘나’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라는 생각을 항상 가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웃과 더불어 사는 인생이 되어야 하고, 남을 먼저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아름다운 인생이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2. 세상에 쌓아두려는 인생입니다.
17-18절을 읽어볼까요?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부자는 여러 해 동안 풍년이 들어 곡식 쌓을 곳이 없자 어떻게 하겠다고 했습니까? 자기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모든 곡식을 새 곳간에 쌓아 두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이 부자는 이 세상에 쌓아 두려는 인생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차고 넘치는 소유물을 자기를 위해 쌓아 두려고만 했습니다. 넘치는 자기 소유를 어려운 이웃에게 베풀겠다는 생각을 갖지 않았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은 이 부자처럼 세상에 많이 쌓아 두려고 합니다. 그리고 많이 쌓은 사람, 많이 모은 사람이 성공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세상 창고에 많이 쌓아 놓기만 하고, 꺼내어 쓸 줄을 모르는 인생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재물의 복을 주시는 것은 쌓아두라는 주시는 것이 아니라, 쓰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부자는 어떠했습니까? 그는 이웃을 위해 자기의 소유를 쓸 생각은 하지 않고, 곳간을 넓혀서 채워 넣으려고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재물을 모으지만 말고 선하게 쓰라고 하십니다.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고,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은 후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는 것이니라.”(딤전 6:18-19)
창고에 내 소유를 쌓아 둔다고 항상 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눈을 부릅뜨고 지켜도 사라지는 것이 우리의 소유입니다.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잠 23:5)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독수리처럼 날아간다고 했습니다.
내가 재물을 주식과 보험과 은행에 잘 쌓아 두었다고 붙들어 둘 수 없습니다. 병으로 날아가고, 사고로 날아가고, 사기당해 날아가고, 투자 실패로 날아갑니다. 그러므로 재물이 내 손에서, 내 창고에서 스스로 날개를 내어 날아가기 전에 써야 합니다. 모을 줄만 알고 쑬 줄을 모르면 어리석은 것입니다.
[미국에 베티 그린이라는 구두쇠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는 돈을 모을 줄만 알았지 쑬 줄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평생 찬물과 찬 보리죽만 먹고 살았습니다. 죽을 데우면 연료값이 들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아들이 사고로 다리를 다쳤습니다. 헌데 노파는 무료 진료소만 찾다가 치료 시기를 놓쳐서 아들을 평생 불구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할머니는 불을 안 땐 집에서 오들오들 떨며 자다가 갑자기 몰아닥친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끝내 동사하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그토록 쓰기 아까워했던 돈은 누구의 것이 되겠습니까? 더 이상 자기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쌓을 줄만 알고 쓸 줄 모르는 부자에게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20절)]
또한 나를 위해 이 세상에 많이 쌓아 둘지라도 그 소유를 다 쓰지도 못합니다. 자기 자신이 쓰지도 못할 것을 쌓아두려고 헛되이 애쓰는 것입니다. 단지 눈으로 재물만 보고 즐기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재물을 많이 쌓아도 그것이 나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합니다.
[대기업 삼성의 이건희 회장을 보십시오. 그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부자입니다. 그의 가족이 아니라 그 개인의 재산이 무려 14조나 됩니다. 그는 우리나라에 최고의 병원도 세웠습니다. 하지만 현재 그는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그의 나이는 75(42년생)세입니다. 75세 나이의 사람들은 대부분 건강합니다.
그런데 최고의 부자인 이건희 회장은 2년 전에 병으로 쓰러져 지금까지 혼수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자기가 세운 최고의 병원과 의사들도 그를 고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가 모은 많은 돈도 이제는 그에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가 건강할 때 그 많은 재산을 이웃을 위해 많이 썼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지금은 그렇게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모을 줄만 알고 쓸 줄 모르는 인생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우리는 나의 재물과 소유물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마 6:19-20) 우리 자신을 위하여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도 재물을 쌓아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정반대로 행동합니다. 곧 자기를 위하여 하늘에다 재물을 쌓지 않고 세상에다 재물을 쌓아둡니다. 그런데 이 땅에다 재물을 쌓아두면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좀이 먹거나 녹슬어 못 쓰게 되고 도둑이 와서 훔쳐 갈 것이다.”(마 6:19)
그 말대로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세상에다 재물을 쌓아두지만 어떻게 됩니까? 그 재물이 이런저런 일로 빠져나가 결국에는 남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늘에다 재물을 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늘에다 보물(재물)을 쌓으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나의 소유를 움켜쥐려고만 하지 말고 선한 일에 쓰라는 것입니다. 어려운 사람에게 베풀고, 선한 일에 아낌없이 쓰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너희 자신을 위해 낡아지지 않는 주머니를 만들어라. 그것은 없어지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것이다.”(눅 12:33)
나는 지금껏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부자처럼 나를 위해 세상에 쌓아두려고만 애쓰고 있습니까?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내가 선한 일에 재물을 쓰지 않고 나를 위해 쌓기만 하면 하나님이 머지않아 불어 버리십니다. 결국은 남는 것이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위해 쌓아 두는 인생이 아니라 베푸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이며, 상급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세상에 더 많이 쌓을 것인가를 생각하기 보다는, 나의 소유를 어떻게 선하게 쓸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쓰라고 재물을 주시는 것이지, 쌓아두라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아름다운 인생이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3. 죽음을 잊은 인생입니다.
20절을 읽어볼까요? “하나님이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나님은 이웃에게 나눌 줄 모르고 오직 자기만을 위해 땅에 쌓아 두려는 부자에게 무슨 말을 하셨습니까? 그의 생명을 오늘 밤에 거두어 가겠다고 했습니다. 죽으면 그가 애써 쌓아 놓은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습니까?
하지만 부자는 자기 생명이 오늘 밤에 끝나리라곤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죽음은 아직 자신과는 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이제는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는 재산을 많이 벌었으니 이제부터는 먹고 마시며 즐기며 살겠다고 했습니다. 재산도 있고, 몸도 아직 건강하니 죽음은 아직 자기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가 그렇게 말한 그날 밤에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죽음이 자기 코 앞에 다가왔음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이 부자는 죽음에 무관심한 인생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부자의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남의 일처럼 여깁니다. 아직 자기는 죽을 때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디 죽음이 나이순으로 찾아옵니까? 병들거나, 나이든 사람보다 젊고 멀쩡한 사람들이 죽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갑자기 사고가 나서 죽고, 자살하기도 하고, 갑자기 심장마비 등 건강의 이상으로 죽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 영동고속도로에서 대형버스가 졸음 운전으로 5중 충돌사고가 나서 4명이 죽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또 독일에서는 도심 쇼핑몰에서 총기난사가 발생해 9명이 죽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또 터키에서는 연이어 세 차례나 폭탄테러 사건이 발생하여 50여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또한 러시아의 민항 여객기가 이집트에서 러시아로 향하던 중 시나이 반도에서 추락하여 탑승자 224명 전원이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어느 누구가 그날 자기에게 죽음이 올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처럼 죽음은 순서가 없습니다. 죽음은 인공호흡기를 단 사람에게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소리도 없이, 예고도 없이, 갑자기 다가옵니다. 그러기에 ‘죽음은 아직 나에게는 멀었어’라고 말하거나,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나의 시간표에 따라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오는 것입니다. 오늘 밤이라도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부르시면 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야 합니다.
사람과 동물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사람은 죽음을 생각할 줄 알지만 동물들은 죽음을 생각할 줄 모릅니다. 그러기에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전 7:4)
초상집에 가면 죽음을 생각해 보게 되지만, 잔치집에 가면 인생을 즐기려는 생각만 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셨습니까? ‘내게 죽음이 찾아온다면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는 어떻게 죽을까? 사고로 죽을까, 병으로 죽을까, 늙어서 죽을까’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라”라는 주의 말씀을 기억하십시다. 죽음은 다른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문제입니다. 내가 아직 젊다고, 할 일이 많다고 죽음이 내게 늦게 찾아오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연기하거나, 죽음을 피해보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죽음은 모든 인간이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일입니다. 배운 자도, 가진 자도, 힘있는 자도, 건강한 자도, 유명한 자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오늘 하루 동안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습니다. 그 죽음이 나에게도 갑자기 찾아올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다. 아직 내가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늘 부자는 죽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었지만 하나님이 그의 생명을 거두셨습니다.
오늘 어리석은 부자처럼 되지 말고 나의 죽음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지혜로운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죽음이 내게 언제라도 찾아올 수 있음을 깨달을 때 사람은 더 보람있게, 더 진실하게, 더 열심히, 더 사랑하며, 더 신앙으로 살 수 있습니다.
[어느날 꿈에 프란시스에게 죽음의 사자가 찾아왔습니다. “너를 데려가려고 왔으니 가자!” 그러자 프란시스가 “내가 한 일도 없는데 어찌 이대로 갈 수 있습니까?”하며 일 년만 여유를 달라고 하니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한 달만이라도 여유를 주십시오.”라고 했더니 “안된다. 너는 이 땅위에서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다.”면서 다가왔습니다.
그때 프란시스는 끔을 깨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생명을 거두어 가지 않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그 후 헌신의 생활을 하여 성프란시스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다면 언제라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시면 언제라도 이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잠시 세상에 내가 살면서 항상 찬송 부르다가 날이 저물어 오라 하시면 영광 중에 나아가리”(492장)
[결 론]
성도 여러분, 오늘 성경의 부자는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부자는 어떤 인생이었습니까? 부자는 나만 알고, 나의 유익만을 위해 사는 인생입니다. 또한 부자는 이 세상에 많이 쌓아 두기만을 좋아하고, 이웃에게 베풀 줄 모르는 인생입니다. 그리고 부자는 죽음이 자기에게 다가온다는 것을 모르는 인생입니다.
이런 어리석은 인생이 되지 말고 좀 더 보람있는 인생을 사십시다. 남을 생각할 줄 알고, 남에게 베풀 줄 알고, 죽음을 생각하며 사는 인생이 되십시다. 20절을 읽어 봅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