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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복음: 마르 4,21-25
우리 각자의 얼굴에는 스승 예수님의 얼굴이 반영되어야 합니다!
요즘에야 찾아보기가 힘들어 골동품 가게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데,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시절,
중요한 가재도구 중에 하나가 밤을 밝히는 등잔이요 등잔을 얹어두는 등경이었습니다.
제 어린 시절 전기는 들어왔지만, 전력 수급이 여의치 않아 자주 정전이 되었습니다.
그럴 때 마다 선친께서는 다락방에서 등잔을 꺼내 불을 붙이고 높은 곳에 위치한 등경 위에 올려두었습니다.
하필 그럴 때, 라디오에서는 처녀 귀신, 몽달 귀신, 달걀 귀신 등 각종 귀신들이 총 출동하는 전설 따라 삼천리가 흘러나왔는데, 듣지 말아야지 하면서 듣다가 화장실도 못가고 끙끙대던 일이
엊그제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등불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무엇을 강조하고 계시는지, 조금 아리송합니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마르 4,21-23)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등불은 다른 무엇에 앞서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당신 존재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따라서 당신께서는 거듭되는 박해와 살해의 위협 앞에서도 당신의 신원을 드러낼 수 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또 다른 그리스도로 살아야 하는 우리도 마찬가지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그분의 가르침으로 인해 어떤 소중한 깨달음이나 깊은 통찰을 얻게 되었다면, 그것은 나만 비밀스럽게 간직해야 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 꽁꽁 숨겨 둬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 소중한 은총을 동료 인간들, 그리고 세상과 나누고 공유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께서 선물로 주신 복음, 즉 구원의 기쁜 소식을 자신 안에 붙들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 만민 모두가 아무런 차별없이 골고루 혜택을 받도록 그분의 복음을 적극적으로 전파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비밀리에 가르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회당에서, 광장에서, 공개석상에서, 공적으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분 가르침의 진의(眞意)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이 종래의 지도자들과는 달리 판이하게 신선했고 파격적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열두 사도들 가운데서도 최측근 제자들과 아주 소수의 특정인들만 그분의 말씀을 이해했고,
하늘나라의 신비를 정확히 파악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결코 소수의 특정한 사람들만의 것이 절대 아닙니다.
복음은 이스라엘을 넘어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할 보편적인 가르침입니다.
복음은 모든 인류에게 비춰져야 할 큰 빛입니다.
‘가톨릭’이라는 용어가 지니는 의미는 ‘공번되다.’ ‘보편적이다.’ ‘두루두루 광범위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가톨릭교회 공동체가 지향하는 바는 열린 교회입니다.
너그럽고 관대한 교회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우리끼리, 마음에 드는 소수의 사람들끼리만 비밀리에 운영되는 공동체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거나 파벌을 형성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는 세상 속에서 하느님 현존의 구체적인 표지가 되어야 하며,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을
증거해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특별히 불림을 받은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제자 자신들에게 큰 영예고 은총이지만, 그것을 자신들 안에 가둬두고 자신들의 영광으로만 돌린다면, 큰 죄악이 되고 맙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값진 보물입니다.
그러나 그 보물은 인류를 위해 사용하라고 맡겨놓은 보물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깨달음은 공동체와 인류를 위해 봉사하라고 주신 선물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등불 같은 존재여야 마땅합니다. 활활 타올라야 하고, 동료 인간들의 어두운 삶을
환히 비춰줘야 합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스승 예수님의 얼굴이 반영되어 있어야 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내 안의 작은 불꽃 발견하고 키우는 법>
복음: 마르코 4,21-25
오늘 복음은 두 주제가 하나로 합쳐진 내용인데, 그 내용 전체의 의미를 올바로 깨닫기는 쉽지 않습니다. 첫 번째 주제는 이것입니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두 번째 주제는 이것입니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이 관계 없어 보이는 두 주제를 하나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 안에 분명 작은 빛 하나는 있습니다. 이 빛은 등경 위에 올려지면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능력입니다. 그런데 만약 등경 위에 올려져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 불빛은 더 커질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닐까요? 능력이 없어 감추어두면 있는 것마저 꺼져버릴 것이란 말씀이 아닐까요?
요즘 사제가 되지 않으려는 이유 중 첫 번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저는 자기 꿈이나 결혼을 위해서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니랍니다.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원치 않아서라고 합니다. 스마트폰만 보며 살던 아이들이 사람들 앞에 나서서 평가받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것도 하나의 능력입니다. 그 빛을 감추어두면 어떻게 될까요? 사장됩니다. 마치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벙어리 삼룡이’라고 할 정도로 말을 잘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잘하는 편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꺼내어 등경 위에 두기로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조금씩 더 능력이 커지는 것을 느낍니다. 만약 불빛이 작다고 없는 것처럼 덮어버렸다면 분명 꺼져버렸을 능력입니다.
영화 ‘굿 윌 헌팅’에서 주인공 윌 헌팅은 MIT에서 청소부로 일하면서도 비범한 수학적 천재성을 가진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탁월한 지능을 숨기고, 무명의 단순한 삶을 선택합니다. 윌이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는 그의 깊은 감정적 상처와 두려움에 있습니다. 학대적인 환경에서 성장한 윌은 타인에 대한 깊은 불신과 취약함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트라우마는 그가 사람들을 밀어내고, 기회를 거부하며,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거나 실패와 거절의 가능성에 직면하는 상황을 피하게 만듭니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심리학자 숀 맥과이어와의 상담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숀은 윌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가 두려움에 직면하도록 도전합니다. 숀은 윌에게 그의 실패와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온전한 삶으로부터 얼마나 막고 있는지 깨닫게 합니다. 특히 숀의 유명한 대사인 “네 잘못이 아니야”(It’s not your fault)는 윌의 방어막을 허물고, 그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내려놓고 자신을 믿기 시작하도록 돕습니다.
우리 각자 안에는 주어진 ‘빛’이 있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쓰라고 주신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어둠을 비추는 빛처럼 자기 안에서 빛을 찾아 등경 위에 놓고 세상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사용해야 더 큰 은총을 받게 됩니다.
영화 ‘헝거 게임’은 디스토피아 세계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로, 이 세계에서 정부인 캐피톨은 ‘헝거 게임’이라는 잔혹한 이벤트를 매년 개최합니다. 이 게임은 각 지역에서 어린 소년소녀들을 ‘조공’으로 선발해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경기장에서 죽음의 전투를 강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잔혹한 이벤트의 목적은 두려움을 심어 캐피톨의 지배를 유지하는 데 있습니다.
주인공인 캐트니스 에버딘은 그녀의 어린 여동생 프림이 조공으로 뽑히자 그녀를 대신해 자원하여 참가합니다. 이로써 캐트니스는 자신을 희생하며 여동생을 보호하려는 사랑과 내면의 강인함을 보여줍니다. 게임에 참가한 캐트니스는 가혹한 상황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는 강한 도덕성을 가지고 경기에 임합니다.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캐트니스는 자주 이타적인 행동을 하며 다른 사람들을 돕습니다. 그녀는 어린 조공인 루와 동맹을 맺고 그녀를 자신의 여동생처럼 보호합니다. 루가 비극적으로 죽은 후, 캐트니스는 그녀의 시신을 꽃으로 장식하며 존경을 표합니다. 이 행동은 캐피톨의 잔혹함에 대한 반항으로 비춰지며, 이를 지켜보는 각 지역의 사람들에게 희망과 저항의 불씨를 심어줍니다.
게임이 계속되면서 캐트니스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발견하고, 캐피톨의 권위에 도전하는 과감한 결정을 내립니다. 마지막 순간, 그녀와 동맹인 피타 멜라크는 서로를 죽이는 대신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위협하며 캐피톨이 그들 둘을 승자로 선언하게 만듭니다. 이는 캐피톨의 조종과 권위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상징적인 행동이 됩니다.
캐트니스의 여정은 여동생을 구하기 위한 이타적인 행동에서 시작되었지만, 그녀는 용기와 연민, 그리고 자신의 도덕적 불씨를 꺼뜨리지 않으려는 의지를 통해 억압받는 지역들에게 희망과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 잡습니다. 그녀의 작고 선한 행동은 결국 혁명의 불씨를 지피며 거대한 불꽃으로 번져갑니다. 이는 작은 불꽃이라도 목적과 정의라는 연료를 만나면 거대한 화염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주님은 우리 안의 작은 불빛이 이렇게 키우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웃을 위해 무언가라도 도움이 되려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안의 빛이 어떤 능력인지를 알아볼 수 있고 그 능력에 집중하여 더 키워나갈 수 있습니다.
‘나는 능력 없는 사람이야.’라는 패배주의에 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안에 누구를 막론하고 온 세상을 태울 작은 불씨가 있습니다. 그 불씨는 등경 위에서만 성장합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르 4,21-25: 등불은 등경 위에 둔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21절) 등불은 감춰두지 않고, 사용하여 보게 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고 산 위의 마을이라고 하셨다(마태 5,14 참조). 우리는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고, 구렁텅이에 빠진 이들을 위하여 우뚝 서도록 부름을 받았다. 등불을 함지 속에 숨겨 둔다면 우리는 어둠 속에 있게 되고 사람들이 와서 부딪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등불의 구실을 제대로 못 하게 된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선행이다. 선은 참되고 충만한 것으로 어둠을 사랑하지 않는다(요한 3,21 참조). 선은 드러나는 것을 즐거워하고 눈에 띄는 것을 기뻐한다.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나서지 않는 것을 좋아하지만, 있는 그대로 드러나야 한다. 왜냐하면, 선은 그 자체로 확산되기 때문이다. 선은 그냥 퍼져나간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24절) 우리는 가난한 형제에게 베풀어야 한다. 그 형제는 그리스도이시다. 형제에게 주는 것은 그리스도께 드리는 것이며, 영원히 찬미 받으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주신 것을 우리가 베풀기를 바라신다. 우리가 베푼다고 하는 것 가운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에게 주라고 명령하시는 분의 것을 주는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25절) 우리가 들은 말씀을 온갖 노력을 다하여 기억하고 연구하고 실천하도록 하여야 한다. 말씀을 사랑하고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을 이해할 수 있는 지력이 주어지겠지만, 말씀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비록 타고난 재능이나 학문을 통하여 그 뜻을 이해하는 것 같이 보이더라도, 참된 지혜에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가졌는지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빼앗겨도 무엇을 빼앗겼는지 알지를 못한다. 말씀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미국의 영웅 잭 루카스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군대에 가기 위해 나이를 속이고 서류를 위조해서 해병대에 입대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속한 부대는 1945년 일본 규슈의 이오지마 섬에 상륙했습니다. 그때의 나이가 겨우 열일곱 살이었습니다.
참호 옆에서 근무를 서고 있는 수류탄 두 개가 떨어졌습니다. 그는 옆에 있던 동료를 밀어내고 수류탄 위로 몸을 던졌습니다. 폭발과 함께 그의 몸은 공중에 떠오른 뒤 바닥에 떨어졌고, 배에는 수류탄 파편이 자그마치 250개가 박혔습니다. 이런 상황이었지만 그는 살았습니다.
1961년, 낙하산 훈련 때에는 낙하산이 펴지지 않아 그냥 땅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살았습니다. 1977년 아내가 남편인 루카스를 살해하려 했지만 이번에도 살았습니다. 이 밖에도 그의 삶은 죽음이 늘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결말은 어떠했을까요? 죽음 없이 건강하게 살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2008년 여든 살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죽음이 피해 간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었습니다. 이 죽음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약간의 시간 차이만 있을 뿐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주님께 매달리는 삶이 당연히 필요합니다. 죽지 않는다면이야 그냥 세상 틀에 맞춰 살면 되겠지만, 언젠가는 주님 곁에 갈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등불의 비유 말씀을 해 주십니다. 등불을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는 것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 것처럼, 우리 역시 공동체 안에서 열매를 맺고 주위를 밝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관심과 자기 욕심만을 드러내는 이기심을 지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위를 밝힐 수가 없습니다.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등불을 놓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힘들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틀보다는 세상의 틀에만 맞춰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이 말씀에 커다란 희망을 갖게 됩니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마르 4,24)
지금 삶에서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는 턱 없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이 부족함을 채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주님의 뜻을 따르려는 노력 안에서 주님께서는 부족함을 채워서 더 보태어 받을 수 있도록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갖고, 지금 주님 뜻에 충실한 삶. 그 삶이 우리의 최종목적지를 결정해 줍니다.
오늘의 명언: 한가지 뜻을 세우고, 그 길로 걸어가라. 잘못도 있으리라. 실패도 있으리라. 그러나 다시 일어나서 앞으로 나아가라. 반드시 빛이 그대를 맞이할 것이다(엠마누엘 칸트).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르 4,25)
말씀은
우리에게 지혜를 준다네.
말씀의 지혜가
영혼의 세계를 확장시키고
진리로 충만케 하므로
말씀을
늘 가까이 하고
깊이 묵상하는 이들은
더 많은
지혜의 보물로
흡족해지고
그들의 영혼은 자유롭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습니다.
태양에 반사되어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초승달이든, 그믐달이든, 반달이든, 보름달이든
그렇게 달은 밤마다
자신이 어둠을 밝히는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잘나서 스스로 빛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주인공이시고,
그 말씀을 품고 살아가는,
그래서 말과 행동으로 드러내는 삶을 통해
내가 이 세상을 비추게 되는 것입니다.
많이 비추든 적게 비추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달이 언제나 우리를 비추듯이
언제나 우리가 말씀 안에 살고 있고,
그 말씀을 통해 내가 존재하고 있으며,
주님의 빛이 내 삶을 비추듯
내가 이 세상을 비추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마르 4, 21)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야 합니다.
언제나
만날 수
있는 곳에
등불이
있습니다.
등불은
등불다워야
합니다.
등불을
등불답게 하는
등경이 있습니다.
등불과 등경은
서로 대치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쉽고도
평범한
상식입니다.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자신을
사랑해야 하며
그 자신이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식어만 가는
우리들 삶에
뜨거운 등불로
오셨습니다.
숨겨진
하느님 나라와
감추어진
복음을
드러내십니다.
복음의 빛이
있어야 할
자리는
우리의
삶입니다.
먼저
나 자신부터
정화해야 합니다.
교만한 마음을
버려야 등경은
가장 좋은
등불을
받아들이며
잃어버린 나를
찾게 됩니다.
등불을 아는
사람은
등불의 삶을
따릅니다.
빛을 향한
빛의 실천은
빛으로
되돌아옵니다.
사랑의 빛은
보태고
더 받아
더욱
넉넉해집니다.
등불이신
예수님을
우리의
삶 위에 놓는
사람은
교만에 속지
않습니다.
등불이 있기에
등경이 있고
사랑이 있기에
실천이 있습니다.
빛과 함께하시는
기쁜 날 되십시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연중 제3주간 목요일>(1.30)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마르4,21)
'등불의 의미!'
오늘 복음(마르4,21-25)은 '등불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등불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의 나라를 설명하십니다. 등불은 어둠을 밝히는 빛입니다.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는다는 것은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서의 등불이 될 수 없습니다.
등불의 비유에서 등불은 말씀을 의미하고, 복음을 의미합니다. 복음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이 등불로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복음과 복음이신 예수님을 생명의 양식으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양식을 또한 너에게도 나누어 주어야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르4,24-25)
'가진 자의 의미'가 '이웃에게 잘 나누는 사람의 의미'로, 그리고 '가진 것이 없는 자의 의미'가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지 않는 사람의 의미'로 다가옵니다.
베풀고 나누면 그것도 넉넉하게 베풀고 나누면, 그 이상으로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되돌아올 것을 바라지 않으면서 기쁘게 잘 나누면 하느님께서 그 이상으로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삶의 자리에서 종종 체험하곤 합니다. 이 체험을 한 사람들이 더 잘 베푸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은총의 은총을 입게 되는 것이지요.
'인색'은 죄의 뿌리이면서, 그 자체로 죄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악에 물든 양심을 벗고 깨끗해졌으며,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말끔히 씻겼습니다."(히브10,22)
등불이 됩시다!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그리스도의 등불이 됩시다!
복음말씀
제1독서
<확고한 믿음으로 고백하는 희망을 굳게 간직하고 서로 자극을 주어 사랑하도록 주의를 기울입시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10,19-25
19 형제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피 덕분에 성소에 들어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20 그분께서는 그 휘장을 관통하는 새롭고도 살아 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곧 당신의 몸을 통하여 그리해 주셨습니다.
21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사제가 계십니다.
22 그러니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갑시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악에 물든 양심을 벗고 깨끗해졌으며,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말끔히 씻겼습니다.
23 우리가 고백하는 희망을 굳게 간직합시다.
약속해 주신 분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24 서로 자극을 주어 사랑과 선행을 하도록 주의를 기울입시다.
25 어떤 이들이 습관적으로 그러듯이
우리의 모임을 소홀히 하지 말고, 서로 격려합시다.
여러분도 보다시피 그날이 가까이 오고 있으니 더욱더 그렇게 합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등불은 등경 위에 놓는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을 것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4,21-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1 말씀하셨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22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23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
24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25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