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 17: 1-8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1. 본문 1절은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입니다.
1) 1절 초에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라는 말씀에서 모세는 아브람의 생애 13년 간을 그냥 지나칩니다.
그 이유는 그 동안에 전혀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의 뜻에 따라서 알려져야 할 가장 필요한 것들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의 출생에서부터 이삭이 약속된 기간까지 지나간 시간의 길이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람이 결국에 가서는 배척 되어질 그의 아들에게 만족함을 가지고 오랫동안 지내왔다는 사실과 거짓된 외모로 인하여 현혹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교훈하기 위해서 그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편 우리는 순회되는 과정에서 여호와께서 그를 인도하셨던 것을 보게 됩니다.그리고 그가 성급하게 두 번째의 결혼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의 잘못으로 그가 이 일을 지연시키게 된 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그런 것을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결 문제로 남겨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확실한 것만 받아들이는 것으로 만족하여야 합니다.
이를테면 자기 독자로 만족하고 있는 아브람은 다른 자식을 갖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전에는 자손이 없어서 그로 하여금 계속하여 기도하게 하며 한숨을 자아내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들이 그의 마음 속에서 너무도 굳게 자리잡고 있었으므로 그는 그 약속의 성취를 향하여 계속 열심히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자기 소원을 이루었다는 잘못된 추측으로 그는 육신에 의한 자기 아들로 인하여 점점 딴 길로 인도되고 있습니다. 영적인 아들을 얻어야 된다는 기대에서 점점 멀리 떨어져 나가고 있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놀라운 선하심이 아브람 자신의 기대와 욕망에서 분기하여 나와서 새로운 소망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갑자기 자기 마음 속에 지금까지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간구 할 제목이 그에게 허락되었다는 사실에서 과시되고 있습니다.
만약 그가 이 복을 위하여 날마다 번거로운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면, 이 사실에서 우리는 아브람이 그 복을 생각하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은 때에 그것이 그에게 주어진 것처럼 마치 그 복이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선물로 내려진 것이라고는 분명히 여기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삭에 대하여 언급하기 전에 그 말들의 순서와 관련성을 주의해 보아두면 상당한 대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2) 모세는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하여 그 말씀이 은밀한 계시로 선포된 것이 아니고 동시에 이상이 그 말씀에 부가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그 이상에도 첨가되어 있는 말씀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서 아브람의 신앙이 유익을 보게 하셨습니다. 이제 그 말씀이 요약적으로 하나님이 아브람과 함께 언약 관계로 들어가셨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기에 수반되어 있는 증거들로 확실한 인을 치고 있습니다.
3)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는 말씀에서 능력이라는 말에서 기원된 히브리어 EL(엘)은 여기서 하나님을 표현하려고 언급되었습니다.
그와 동일한 언급이 수반되고 있는 (샤다이) 라는 말에 적용하여 마치 하나님이 아브람을 보호하시는 데에 충분한 능력이 있으시다고 선언하고 계시는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 믿음이 하나님의 보호만이 우리들에게 충분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확신할 때에만 굳게 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구원에 반대하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진정으로 무시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분 자신 안에 숨겨진 그 능력을 자랑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분이 자녀들에게 나타내 주신 것에 대하여 자랑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아브람이 그 사실에서 확신 할 수 있는 자료를 뽑아내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와 같이 이 말씀에도 약속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4)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 하라” 에서 언약을 체결하시면서 하나님은 그분의 종의 입장에서 순종하도록 약정을 맺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 자신이 ‘전능하신 하나님’ 이라고 선언하신 전체를 헛되게 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분의 능력으로 자기 백성을 도와 주신다는 선포를 헛되게 하신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아브람이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에게만 헌신하게 하려면 그는 먼저 모든 도움이 되는 수단들로부터 완전히 철수시켜야 되는 것이 필수적인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자신을 하나님에게로 나아가게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피조물들을 그들 본래의 장소에다 유지시키고 계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자만이 자신을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할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권능이 인정된 곳에는 우리로 하여금 감탄으로 넘치게 해 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이 그분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충만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경배하는 데에 아무 것도 우리를 방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시선은 마음 속에 있는 신앙과 진실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조들에게 그 영예를 주시려 하지 않으셔서 그의 아들이 오실 때까지 지체하였다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람은 성실함을 목표로 삼고 나아가라고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아브람을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기만성이 없고 이중 성격자가 아니며 오직 신실하고 정직하게 행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성실은 위선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확실히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가질 때는 일치되지 않은 요소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이제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직접 자신을 위하여 한 교회를 이루신 그 목적을 알게 됩니다. 그분이 불러주신 그들이 거룩하게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소명(召命)의 기초는 은혜스런 약속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즉시 다음과 같은 조건이 따르고 있습니다. 그분이 선택하여 그분의 특이한 백성으로 삼으신 그들은 하나님의 의(義)에 자신을 완전히 헌신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 조건에 의하여 하나님은 자녀들을 그분 자신의 양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그 대신에 아버지의 자리와 영예를 받으시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거짓말을 할 수가 없으신 것처럼 그분의 자녀들로부터 상호간의 충성을 정당하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을 신실한 성도들에게 나타내십니다. 그렇게 하여 그분이 좋아하시는 대로 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분을 자기들의 일과 사상의 중재자로 모시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경건하게 그리고 공의롭게 사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는 것밖에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2. 본문 2절은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전에 약간 암시하셨던 것을 더 충분히 그리고 완전하게 설명하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람과 맺은 언약에는 두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 첫째 부분은 은혜스러운 사랑에 대한 선언이었습니다. 그 약속에다 행복한 생활의 약속이 첨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부분은 정직한 생활을 하는 데에 진정으로 노력하라고 격려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단지 한마디 말로 그분의 은혜에 대하여 약간 맛을 보여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곧 그분의 소명의 계획으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아브람은 반드시 정직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거기에다 그분의 은혜에 대한 보다 폭넓은 선언을 지금 첨가시키고 계십니다. 그것은 아브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경건하며 정직을 개발하는 데에 더 자진하여 기꺼이 자기의 마음과 생활을 집중시키도록 노력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내가 너에게 얼마나 은총을 베풀고 있는지 보아라.
그것은 단지 내가 나의 권위로만 너에게서 성실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실은 내가 그것을 정당하게 요구할 수도 있다. 내가 너에게 빚진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사실상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러나 내가 은혜를 베풀어 공손히 굽히고 내려와서 너와 상호간의 언약을 체결한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듯이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것을 새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다만 그전에 하셨던 언약에 대한 기억만 상기시켜 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약속의 확실성에 대하여 확증시켜 주며 확립해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말씀을 그렇게 쉽사리 언급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남발하신다면 그전에 하셨던 말씀의 신빙성을 파괴하며 빛을 흐리게 만들며 또한 효력을 약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마치 한가지의 항구적인 취지로 하신 것처럼 그전에 주신 약속들을 계속해서 지속시켜 나가십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으로 하나님은 오직 아브람이 전에 이미 들었던 그 언약이 확립되게 하시고 인준되게 하려는 것 외에 다른 의도가 전혀 없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자손의 번식에 관하여 주요한 요점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계시는데 그 사실은 이후에도 빈번하게 되풀이하고 계십니다.
3. 본문 3절은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입니다.
이것은 고대인들이 경의를 표하는 의식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아브람은 첫째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또 한편 그분의 임재에서는 모든 육체가 침묵을 지켜야 하며 겸손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경건하게 그리고 기꺼이 받아들이며 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만약 이것이 신앙고백으로 의도되고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고 있는 신앙은 순수한 양심에서 절대로 분리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반드시 관찰해야 될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 그에게서 공의롭게 그리고 거룩하게 생활하려는 진지한 의향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아브람이 자신을 부복시키고 있는 가운데서 그 두 가지 생활을 모두 받아들이고 순종하겠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그 신앙의 약정 가운데서 우리의 구원이 놓여지는 은혜스러운 양자가 생활의 갱신(更新)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비록 아브람이 한마디도 언급을 하지 않고 있지만 그는 침묵을 지킴으로 그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큰 소리로 외치며 떠드는 것보다 훨씬 더 충분하게 그 자신의 각오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4. 본문 4-6절은
“④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⑤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라
⑥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입니다.
1) 4절 초에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라는 이 구절을 ‘보라 내가 너와 언약을 세우니’라고 번역하는 자들은 모세가 의미하는 것처럼 신실하게 묘사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그분의 말씀 가운데서 절대적인 권위를 나타내게 하시려고 그분 자신이 화자(話者)이심을 선언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분의 진실성을 떠나서는 그 어느 것에도 근거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우리가 우리들 자신들에게 제안되어 있는 것이 그분의 거룩하신 입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대명사 ‘나’는 나머지 사용들에 대한 서론으로서 별도로 이해해야 될 것입니다. 그것은 아브람이 침착한 마음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전혀 주저하지 않고 제안된 언약에 전념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에서 유용한 법칙이 연역되고 있습니다. 곧 우리의 믿음은 필연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천사들과 사람들이 우리에게 말할지라도 절대로 그들의 말들이 우리의 마음에 확신을 줄 만큼 충분한 것이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이 ‘나다’ 하는 말씀의 소리가 들리기까지는 자리를 못잡고 표류하는 신세가 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에서 카톨릭교가 어떤 종류의 종교라는 사실이 분명히 노출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대신에 인간들의 공상들만이 그들의 자랑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막연하게 계속 동요되는 상태에 자신들을 노출시키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사람들의 말에만 의존하면서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치우치며 의탁함으로 하나님에 대해서는 부당하게 행동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 라는 유일하신 하나님 외에는 우리의 신앙이 근거할 것이 절대로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그들이 외치는 ‘나’ 라는 존재로서는 우리의 신앙이 근거할 기초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신성하신 입에서 나오는 말씀만이 그 기초가 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만약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것을 반대하면서 ‘우리다, 우리다’하고 교만스럽게 외칠지라도 그때마다 이 하나님의 또 한마디 말씀으로 구름 떼 같은 수많은 군중들의 공허한 소리를 철저히 무가치하게 만들어 버려야 합니다.
2) 본문 4절 끝에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제기되는 질문은 이 열국들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확실히 각기 다른 민족들이 그들의 기원을 이 거룩한 족장에게 둔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스마엘이 자라서 큰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지류에서 기원된 이두메 사람들이 널리 널리 퍼져 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그두라에서 난 다른 아들들에게 큰 씨족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아직도 그보다 더 진일보된 미래를 보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육신적으로는 아브람에게 속하지 않은 계열이긴 하지만 그들의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가문에 끼어 들게 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아브람은 많은 민족들의 조상으로 삼으려고 아라비아 사람들이나 이두메인들을 함께 죽어 모은 것이 아니고 조상이라는 이름을 널리 확장시켜서 그것을 전 세계에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면에서는 나그네들인 이방인들이 그리고 서로가 분리되어 있는 이방인들이 사방에서 아브람의 한 가족으로 결합되게 하고 있습니다. 그때 당분간의 열두 지파가 많은 민족들이 될 만큼 많은 수에 달했다는 것은 우리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지막에 가서 아브람의 한 가족으로서 함께 집대성될 그 엄청난 군중들에 대한 서막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중생한 자들로서 그 이름을 취득하여 아브람의 줄기로 옮겨진 아들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은 이런 단 한가지 참작으로도 충분하게 입증되고 있습니다. 아브람의 육신적인 종족은 그 단위에서 떠나간 자들을 즉시 나그네가 되게 하지 않고는 그처럼 상이한 여러 민족들로 나누어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는 이스라엘 사람, 이두메 사람과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고 외국인들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은 그의 자손이 각기 다른 여러 나라로 분리되어야 했기 때문에 열방의 조상이라고 불리어진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많은 민족들이 그에게 결합되어 왔기 때문에 열방의 조상이라고 불려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이 개명된 것도 하나의 표로서 첨가되고 있습니다.여기서 그는 ‘아브라함’ 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그 이름 자체로 아브람 자신이 한 가족의 조상이 아니라 자연적인 공통된 과정을 떠나서 수많은 군중들로부터 자손들이 그에게 집결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로 하여금 배우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이 약속을 빈번하게 새롭게 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그처럼 되풀이하는 것 자체가 일반적인 복이 약속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5. 본문 7절은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입니다.
1) 7절 초에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라는 말씀에서 여호와는 세상의 다른 나머지 족속들로부터 아브람의 종족을 구별시키고 계시다는 사실은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분이 어떤 백성을 의도하고 계신가를 알아야 될 것입니다. 지금 그분의 선택이 여기서만 지적되고 있다고 생각하며 모든 믿는 자들은 무작정 다 포함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 말하자면 육신을 따라서 어떤 백성들로부터 그들이 출생했던 간에 상관이 없이 믿는 자들을 모두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반대로 성경은 아브람의 종족은 직계 후손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특별히 받아들이신 것이라는 사실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거룩한 뿌리에서 나온 거룩한 가지들이라고 하는 사실은(롬11:10) 아브라함의 자연적인 후손에 관하여 가르치고 있는 바울의 분명한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주장을 율법의 그늘에만 국한시킨다거나 풍유적인 것으로 돌리지 못하게 하려고 그는 그 밖의 다른 곳에서도 분명하게 선언하기를 그리스도는 그 할례의 사역자가 되시려고 오셨다고 했습니다(롬15:8).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연적으로 출생한 아브라함의 자손들과 언약을 맺으셨다는 것 이상으로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만약 누가 반대하면서 이 의견은 절대 전자의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서 믿음으로 그의 몸에 접붙임을 받아서 한 가족을 이루는 그들이 바로 아브라함의 자녀들이라고 우리가 말했던 전자와는 모순된다고 한다면 성경의 여러 구절들에서 찾아볼 수가 있는 양자에 대한 확실한 구분으로 그 차이점이 쉽사리 인정될 수가 있습니다.
이 언약에 앞서서 태초에는 전 세계의 상태가 하나였으며 동일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고 말씀하신 즉시로 교회는 다른 열방들로부터 구별되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빛이 어둠에서 나오게 된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양떼로서 그들이 거할 양 우리에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다른 민족들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아브라함의 자손들의 이 숭고성은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되어 있으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양자로 삼으신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속해 있는 것입니다. 만약 바울이 이방인들은 언약에서 떨어져 나가 있는 자들이라는 근거에서 그들에게서 하나님과 영생(永生)을 박탈시킨다면(엡4:18) 결국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교회의 권속이며 하나님의 아들들이며 영생의 상속자들이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인들을 능가하고 있는 것은 자연적인 것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지만 그리고 비록 하나님의 왕국의 상속권이 약속으로 그들에게 임하게 되었으며 육신적인 출생으로 된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그들은 때때로 날 때부터 세상의 다른 민족들과는 구별된 것으로 말해지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15절에서와 그 밖의 곳에서 바울은 그들을 ‘날 때부터’ 성도들이라고 부르고 있으니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연속적인 계승으로 그분의 은혜가 그 모든 자손들에게 내려가게 되기를 원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유대인들 가운데 믿지 않는 자들도 역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나라의 자손들이라고 불려지고 있습니다(마8:12). 이를테면 아브람에게서 난 모든 자들이 합법적인 자녀들로서 존경을 받을 수가 없으니 그들은 모두가 약속의 자녀들이 아니라 단지 육신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롬9:8). 거기서는 그 약속이 하나님께서 선택된 자들에게와 똑같이 그분을 떠나간 타락한 자들에게도 그분의 호의를 내려주셨던 그 외적인 말씀으로 이해해서는 안되며 그 약속은 반드시 그분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 인치신 그런 효능 있는 소명에 국한시켜야 됩니다.
여호와가 그들 모두를 자녀들로 양자 삼으신 그 약속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에서 영원한 구원이 모든 사람들에게 제공되었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더 이상 외적으로 제공된 은혜에 대하여 논리를 전개해 가지 않고 오직 선택된 자들만이 효과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은혜에 대하여 추론하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특정한 사람들이 그 자녀들 가운데 속한 자로 인정 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가 부인할 때 과연 그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때에는 여기서 교회 안에 두 부류의 아들들이 제공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백성들의 전체 기구가 한 음성과 동일한 진리로 하나님의 양무리로 함께 보아지고 있기 때문에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이런 면에서 자녀들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의 이름이 공통적으로 모든 그들에게 적용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장 깊숙한 성소에서는 그들 속에서 약속이 믿음으로 인가된 자들 외에 아무도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들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비록 이 차이점이 은혜로 선택하신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지만 거기서 또한 믿음 자체도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는 그 자체 안에서 우리가 모르게 숨겨져 있으므로 우리는 신앙과 불신앙이 제각기 지니고 있는 표들로 말미암아 가짜 자녀들과 진짜 자녀들을 구별해 내는 것입니다. 이 방법과 제도는 복음이 선포되는데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가서는 중간의 벽이 헐어져 버리고(엡2:14)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자연적인 아브라함의 후손들과 동등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개혁입니다. 그 개혁으로 전에는 나그네였던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비교를 해볼 때마다 생명의 상속을 전자의 무리들에게 합법적으로 소속되어 있는 것으로서 그들에게 할당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후자들에게는 부수적인 것이라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한편 하나님이 아브라함은 많은 민족들의 조상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그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이전에는 아브라함의 자연적인 아들들은 계속적인 계승으로 그들의 후손들에 의하여 성취된 것이며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복은 자연히 그의 자녀들에게 흘러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원래의 순서를 전도(顚倒)시킴으로 그리스도의 강림은 그전에는 그의 자손에서 분리되었던 자들을 그의 가족으로 들어오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유대인들이 내쫓김을 받았으니 선택된 자들의 감추어진 자손이 그들 가운데 남아있는 것을 제외하고 그것은 남은 자들만이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에 관한 이런 일들을 다시 한번 언급해 두어야 할 필요가 있는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일들의 다음에 계속되는 것을 쉽사리 이해하는 서론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게 될 것입니다.
2) 7절 중간에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후손들의 이 계승은 분명하게 아브라함의 후손은 여기서 그 자녀들이 그들에게 출생되어 장차 동일한 은혜를 받을 상속자가 되게 하려는 방법에서 교회로 간주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이 방법으로 그 언약은 이 세상의 개혁이 올 때까지 지속되는 항구적인 것이라고 불려지고 있습니다. 바로 그 세상의 개혁이 그리스도의 강림 때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 언약은 끝이 없으며 전체 교회가 관련되어 있는 한, 그것은 영원한 것이라고 불려지는 것이 적절하다고 우리는 진정으로 시인합니다. 그러나 시대들의 규칙적인 계승은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인하여 부분적으로 파괴되었으며 변경되었다는 사실은 언제나 고정된 기점으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중간의 벽이 무너지고 자연적으로 아들이 된 자들이 결국에 가서는 상속을 받지 못하게 되었으며 아브라함은 세상의 모든 지역들에서 자기 자신에게 결속된 종족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3) 7절 끝에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는 이 간단한 말 가운데는 이것이 현재 생활에만 국한되지 않고 아브라함이 영원한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셨던 생활에 대하여도 확신을 주고 있는 영적인 언약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하게 배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영적 소망으로 천국에 올리워 갈 그는 확실하고 완전한 복을 굳게 붙잡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그분 자신에게 양자로 삼으신 자들을 그분의 의와 모든 선한 것들을 부여받게 하신 것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의 생명을 상속받은 자로 그들을 세우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언약의 주요한 부분으로 표시해야 됩니다. 죽으신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이신 그분이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신 사실입니다 그것이 언약의 주요한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6. 본문 8절은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입니다.
그 허락을 증대시키는 방법으로 그 뒤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고백하거니와 그 자체보다 더 크고 월등한 것이 가나안의 땅으로 인하여 예시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금 되어진 약속은 “내가 네 하나님이 되며” 라는 주요한 약속에 부속되었다는 사실이 그 말과 상이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비록 하나님이 다시 전과 같이 아브라함 자신에게 그 땅을 주시겠다고 하는 사실을 약속하고 계시지만 아브라함은 전혀 그곳을 통치하는 권력을 소유해 보지 못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거룩한 사람은 자기에게 그 땅의 소유가 허락되지 않았지만 단지 그 소유에만 자기가 임명되는 것만으로도 만족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 지상생활에서 조용하게 하늘나라로 가는 순례자의 길을 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시 반복하시기를 그 분은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하나님이 되셔서 그들 후손들이 이 지상에서 정확하지 않고 보다 차원 높은 것을 위하여 그들 자신들을 단련 받는 것으로 여기게 하셨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