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플러/문정희
춥고 고독한 사람이 어깨에 머플러를 두르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어쩌면 옷의 기원은 오늘날 우리가 머플러 또는 스카프라고 부르는 이 헝겊을 두르기 시작한 것이 그 효시였던 데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을까. 단순한 사각의 천을 두른 것이지만 그것 하나로 체온은 따스하게 유지되고 존재는 더욱 돋보이는 것이 머플러이다.
내가 머플러를 두르기 시작한 것은 나의 뚱뚱함을 가리기 위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갑자기 살이 찌기 시작한 20대 후반, 당황하다 못해 내린 처방이 강열한 무늬의 면 혹은 실크 스카프를 목에다 둘러줌으로서 시선을 위로 유도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 머플러는 패션을 넘어서, 내 이미지의 한 부분이 되었다.
최근에 뉴욕현대미술관(MoMA) 샵에서 산 목걸이처럼 가느다란 것에서부터 담요처럼 큰 머플러까지, 나의 옷장에는 옷 보다 더 많은 머플러가 있다. 외출할 때뿐 아니라 집에서 글을 쓸 때도, 차를 끓일 때도 나의 목에는 몸의 일부처럼 사시사철 머플러가 걸쳐져 있는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잠을 잘 때도, 비행기를 탈 때도 나는 언제나 부드러운 머플러를 휴대한다. 목을 보호하고, 눈부신 빛을 차단하고 싫은 냄새를 차단하는 데 아주 요긴하다.
몇 해 전 겨울, 인디아의 올드델리 후마윤 무덤에서의 일이다. 작은 걸인 노파가 황토 빛 찬란한 무덤가에 앉아 아침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넝마 위에 걸친 인디안 무늬 보라색 머플러는 어느 명품 디자이너의 것보다 빛나고 아름다워 보였다.
와, 정말 멋지다! 나는 크게 감탄을 토했다. 곁에 있던 인디아 여성 시인이 나의 감탄을 힌디어로 그녀에게 전하자 세상에 이런 일이 있나! 노파는 순간 그 머플러를 휙 벗어 내 쪽으로 던지며 “가져라!”라고 외치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걸인 노파는 사라지고 한 사람의 현자, 아름다운 수피가 눈앞에 앉아 있는 것을 목격했다.
지관타좌(只管打坐). 일본 조동종 승려 도겐이 말한 ‘오직 앉아 있음’의 선수행(禪修行)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머플러는 그녀의 수행 도구는 아니었을까.
내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길에 나서면
사람들은 멋있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녀의 상처를 덮는 날개입니다
쓰라린 불구를 가리는 붕대입니다
-졸시〈머플러〉부분
이렇게 시작되는 나의 시〈머플러〉는 아랍 여자의 히잡, 차도르, 부르카가 갖는 보호와 억압, 벗어던져도 좋은 허울을 묘사한다. 그리고 미친 황소 앞에서 펄럭이는 투우사의 붉은 보자기로 이어지다가 결국 머플러는 기억처럼 내려앉은 따스한 노을 같은 잊지 못할 체온이라고 끝을 맺고 있다.
어느 외국 대학 초대 시 낭송에서 나는 이〈머플러〉를 다소 애절하게 대표시의 하나로 낭송했었다.
“나의 몸은 나의 예술의 성전이다.”
그 성전에다 머플러를 둘렀던 무희(舞姬), 그날 운명처럼 비극을 맞이한 이사도라 덩컨의 머플러를 떠올려본다.
바람이 센날, 지붕 없는 부가티 스포츠 카에 오르며 그녀는 “안녕, 영광을 찾아 떠나요!”라고 말한다. 기다랗고 빨간 머플러를 목에 두른 그녀를 싣고 드디어 차가 출발하자 머플러는 스포츠카의 뒷바퀴 회전축에 걸려 천천히 그녀의 목을 조인다. 그녀의 성전은 거기에서 멈춘다.
광적으로 사랑했던 천재 시인 예세닌의 자살과 함께 떠오르는 끝 장면에 등장하는 머플러, 무용의 세기를 바꾼 맨발 보다 더욱 강열하게 등장하는 이 빨간 머플러는 한 예술가의 비극미의 극치를 연출하기에 알맞다. 투우사의 붉은 보자기처럼, 그 보자기에 펄럭이는 피처럼…….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나의 어깨에는 머플러가 둘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