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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01년 2월 20일(화요일) 오후 3시
-장소 : 한국과학문화재단 세미나실
-참석자 : 김승익(교육인적자원부), 이양락(한국교육과정평가원) 박종규(예일초등학교 교사), 서인호(잠실고등학교 교사)
-사회 : 이규석(상경중학교 교장)
■ 진행 및 정리/정수정 팀장 ■ 사진/김지균 기자
누가 뭐라 해도 교육은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이다. 그 중에서도 과학은 국가 발전의 초석이 되는 중요한 학문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교육부가 교육인적자원부로, 교육부 장관이 교육부총리로 승격된 마당에도 교육에 있어 순수과학은 외국어와 정보화교육에 밀려 그 중요성이 각인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1997년 12월 고시된 제 7차 교육과정에서 과학 과목은 1∼10학년까지는 국민공통기본교과목에, 11∼12학년(고등학교 2∼3학년)에서는 필수과목이 아닌 선택과목에 편성되어 학생들의 적극적인 채택만을 기다려야 하는 난감한 입장이다.
작년 초등학교 1, 2학년을 필두로 올해에는 초등학교 3, 4학년과 중학교 1학년에서도 이미 제 7차 교육과정이 적용되는 중요한 시기인데 아직까지도 교육 현장에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기만 하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시행에 관해 왈가왈부하기보다는 어떻게 잘 대처해 나갈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할 때다.
이에 본지에서는 교육인적자원부·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과학 담당 연구원, 초·중·고교 과학 교사가 한 자리에 모여 제 7차 과학과 교육과정 시행에 있어서의 문제점과 대안을 생각해보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편집자 주>
정수정 : 바쁘신 와중에도 기꺼이 참석해주신 여러 과학교육 관계자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까지 제 7차 교육과정에 관해서 여러 차례의 토론과 문제제기가 있어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늦게 이런 자리를 마련하게 된 것은 탁상공론을 되풀이하자는 의미가 아님을 우선 밝혀둡니다. 작년 초등학교 1, 2학년을 시작으로 올해에는 초등학교 3, 4학년과 중학교 1학년 학생들에게 이미 새로운 교육과정이 적용되는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더 이상 시행여부를 가지고 왈가왈부할 때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제대로 구체적인 문제점을 짚어보고 좀더 합리적인 방향으로 돌파구를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우리나라 과학교육 발전을 위하는 마음으로 때로는 좀더 신랄한 비판을, 때로는 예리한 분석을 통해 긍정적인 요소들을 이끌어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본 토론회의 진행은 여러 측면에서 교육과정 개편에 많은 관련과 관심을 가져오신 상경중학교 이규석 선생님께서 맡아 주시겠습니다.
이규석 : 안녕하십니까. 사회를 맡은 이규석입니다. 교육인적자원부,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일선 초등·중등 교사 등 교육계의 다양한 위치에서 활동하고 계신 분들이 오늘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 앉았습니다. 먼저 이런 뜻깊은 자리를 마련해주신 월간 『과학교육』에도 감사를 드립니다.
토론을 진행하다보면 논지를 펼쳐나가는 데 있어 다소 듣기 거북한 내용들이 오가는 경우가 생길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모두 우리나라의 과학교육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염두해 주셨으면 합니다.
특히 이제는 비난을 위한 비난, 문제 제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기된 문제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를 거쳐 나름대로의 대안까지도 궁리해 볼 수 있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토론에 들어가기 앞서 오랫동안 교육과정 개편에 관계해 온 제 의견부터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론 많은 비판이 쏟아지고는 있지만 그래도 5차보다는 6차 교육과정이, 6차보다는 7차 교육과정이 좀더 개선된 안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좀더 개방적인 방향으로 변모해왔고 7차의 경우에는 각 학교의 재량권이 상당히 많아지고 교육 프로그램이 훨씬 다양해졌습니다. 이제는 이런 이상적인 것들이 얼마만큼이나 현장에 적용될 수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문제제기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먼저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생각나는대로 지적해 주시면 전반적으로 검토한 다음 중요한 사항들을 몇 가지만 추려서 다시 구체적으로 짚어보고, 각자의 의견이나 대안을 제시하는 방법으로 진행하겠습니다.
7차 교육과정이 고시된 이후 지금까지 각계의 목소리를 취합하여 교육인적자원부에서 정리해 놓은 문제점도 100여 가지가 넘는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각각의 문제점들에 대한 대안도 마련해 놓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교육인적자원부는 그에 만족하지 않고 이런 다양한 기회를 통해 직접 현장의 목소리도 듣고, 앞으로의 운영에 반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맨 먼저 잠실고등학교에서 화학 과목을 맡고 계신 서인호 선생님의 말씀부터 듣도록 하겠습니다.
서인호 : 참석을 부탁받고 나서 여기 오는 동안, 바로 조금 전까지도 여러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과연 어떤 얘기부터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생각 끝에 제가 내린 결론은 현장에서 실제로 경험하면서 느꼈던 어려운 상황들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려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제 경험이나 생각이 모든 고등학교 과학 교사들의 생각을 대변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7차 교육과정을 접하게 될 일선 교사들이 현장에서 느끼는 고민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조금 전에 이규석 선생님께서는 5차보다는 6차 교육과정이, 6차보다는 7차 교육과정이 훨씬 발전된 형태이며 개방적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론적인 면으로나 세심한 부분까지 따져본다면 그런 표현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 사적인 견해로는 6차 교육과정과 비교해 7차 교육과정이 근본적으로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더군다나 현실적인 면을 고려해 볼 때 7차 교육과정이 이상적으로 실행되기에는 무리가 따를 것이 분명하고 그런 면에서 6차 교육과정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6차 교육과정이 이제 겨우 정착 단계에 있는 시점에서 7차 교육과정을 새롭게 실시해야 한다는 것은 시기적으로도 무리입니다. 7차 교육과정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심화·보충과정을 실시하기에는 학급당 인원이 너무 많고, 단일한 형태의 수업도 어려운 비좁은 교실이나 실험실에서 두 가지 형태의 수업을 진행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7차 교육과정을 학교 현장에서 적용하기 위한 교사의 연수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7차 과학과 교육과정을 지금 시행하는 것은 오히려 교육의 질을 저하시킬 것이라고 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교육인적자원부나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서도 충분히 알고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차 교육과정의 시행을 밀어붙이는 것은 행정적인 편의주의이며, 교사와 학생을 기만하는 처사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7차 교육과정의 시행을 연기하고 수업 여건의 개선을 위한 재정적인 지원과 교사에 대한 연수가 선행된 후에 이를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이규석 : 잠시 후 이 두 가지 문제에 관해서는 심도있게 거론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교육인적자원부 김승익 연구사님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본인이 직접 운영 주체에 속해 있는데 문제점을 말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테지만 나름대로 인정하는 문제점을 스스로 지적해 주시고, 그뿐만 아니라 오히려 교육부 쪽에서 교사에게로 향하는 문제점도 제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승익 : 현장에서 우려하는 것처럼 선택 중심의 교육과정이 되었을 때 과연 과학 분야의 4과목 즉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이 얼마나 선택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가장 심각하다고 봅니다. 이렇게 될 경우 반드시 과학교사의 과원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학생들의 학습량을 30% 정도 감축한다고 했는데 오히려 수준만 더욱 높아진 경향이 있고 아직도 실제 학습량은 많은 편입니다. 4개 과목의 통합으로 감축을 유도해보기도 했지만 제대로 된 통합의 양상도 보이지 않습니다. 중학교의 경우 각각 독립된 과목(물리, 화학, 지구과학, 생물)으로 구별하지 않고 주제별, 단원별로 구성하였지만 하위 4개 과목은 내용상 그대로 단절, 독립된 채로 존재하기 때문에 결국 실질적인 학습에 대한 부담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변명 같지만 교육부 내에서 과학교육의 위상도 몹시 저하된 실정입니다. 과학교육만 담당하던 부서는 아예 사라져버렸고, 국가적으로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 언어(외국어)교육이나 정보화교육에 밀려 기초과학의 중요성조차 인식되지 못하고 있는 처지입니다.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데 저희로서도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양락 : 저는 교육과정에 관한 문제와 교과서 통합에 관련된 문제 이렇게 두 가지 정도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중학교 교육과정을 검정하다 보니 시수는 3단위가 줄었지만 강의중심이 아닌 탐구중심이기 때문에 교과서에 실린 실험만 모두 한다 해도 시간이 턱없이 부족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과서 내용도 통합한다고 했지만 이상한 문제만 야기시켰습니다. 저희도 교과서 검정을 할 때 교육과정에 나와있는 순서대로 하지 않고 좀더 통합하여 구성한 팀에게 높은 점수를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해서 교과서를 채택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에 생겼습니다. 채택된 교과서의 저자들이 다시 내용을 합쳐 원래의 교육과정 순서대로 나열할 것을 제의했습니다. 시도 교육청이나 국가에서 시행하는 시험을 치를 때 시험범위를 정하기 어렵고, 입시를 위한 모의고사 준비가 어렵다는 이유에서입니다. 결국 이론적으로는 좋은데 현실에서 적용되기에는 무리였다는 거죠.
기본적으로 통합이라는 것 자체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외국의 교과서를 보면 물리인데 화학의 내용이 잠깐 들어간다거나 화학인데 광물의 생성에 관한 지구과학 내용이 약간 가미된다거나 하는 식입니다. 우리처럼 물리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화학도 아닌 이상한 통합교과서는 본 적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교과서에서 문제점을 발견했을 때에도 함부로 고칠 수도 없습니다. 예전에는 연구원들이 모여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수정, 보완하는 작업을 거쳤는데 이제 집필 실명제가 되어 책임 여부를 엄격히 구분하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저자가 많아져 의견 통합도 점점 어려워집니다. 아마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두고두고 논의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우리는 통합을 너무 이상론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국에 가서 중학교 과정 통합 연수를 받는데 그들의 생각은 우리와 전혀 달랐습니다. 실험을 하면서 기구를 쓰는 것도 과학과 기술 과목의 통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이제는 과학 안에서의 통합에만 연연할 것이 아니라 과학과 기술의 통합, 과학과 체육과의 통합 등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처럼 물리도 아니고 화학도 아니고 생물도 아닌, 이상한 조합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고등학교에서 교육과정에 있어서의 문제점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과거에는 인문계에서는 몇 단위, 자연계에서는 몇 단위 하는 식으로 과학 과목의 안배가 명확히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교사가 미리 프로그램을 구성해 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각 시도 교육청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과정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더군다나 국민공통교과목은 단위수가 줄어들고 선택과목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학생들이 선택하지 않는 특정 과목의 경우에는 반 자체를 운영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지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이규석 : 이양락 연구원께서는 교육과정 시수 감축과 통합교과 등에 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박종규 선생님의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박종규 : 아무래도 제가 오랫동안 초등학교에 근무해온 관계로 초등학교 과정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7차 과학과 교육과정에 관해 아주 높고 후한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약 97점 정도? 100점을 다 줄 수도 있겠지만 이런 것들은 조금만 더 신경써 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3점만 깎고자 하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1점을 깎아야겠다 생각한 것이 교육목표에 관한 사항입니다.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6차 과학과 교육과정의 목표가 상당히 좋았습니다. 그 목표로 제시된 것 중 하나가 ‘창의적 문제해결력을 기르는 것’으로 창의력을 굉장히 부각시키고 있었는데, 이번 7차 교육과정에서는 해설에서조차 완전히 빠져버렸습니다. 현재 모든 사회 체제가 창의력이나 사고력 개방 체제로 흘러가고 있는데 다른 과목보다도 더욱 창의력을 중요시해야 할 과학에서 그에 대한 언급이 빠져버린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 대신 들어간 것이 ‘자연 현상과 사물에 대하여 흥미와 호기심을 가지고… 올바른 자연관을 가진다’는 항목으로 오히려 지나치게 과학적인 목표로 한정되고, 과학일변도로 가고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또 1점을 빼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먼저 한 교사의 반응을 그대로 전해보겠습니다. 바로 “왜 바뀌었지?”하는 반응이었습니다. 도대체 바뀐 것이 무엇인지 확실한 차이를 느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개편을 위한 개편이 아니었다면 교사들에게조차 확실한 차별성을 인식시키는 작업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또한 6차 교육과정이 겨우 정착되어 가는 단계에서 다시 7차 교육과정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도 부담스럽게 작용합니다.
마지막으로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1점은 내용 면에서입니다. 좀 껄끄러운 얘기가 되겠습니다만, 왜 우리 교과서가 왜색이 짙은지 모르겠습니다. 좀 전에 통합과정에 관한 얘기도 있었습니다만, 미국에서 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못 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에서 하는 교육방법이 절대적으로 좋은 것도 아닐뿐더러 오히려 그런 사항에 관한 자체적인 논의를 해오지 않은 것을 반성해야 합니다.
이규석 : 좋은 여러 가지 지적들을 해주셨습니다. 네 분의 얘기를 종합해본 결과 대략 다섯 가지 정도의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첫 번째로는 교육과정 개편의 시기적인 문제, 두 번째는 국민공통기본교과목과 수준별·심화보충 과정, 세 번째는 과학교과의 통합문제, 네 번째로는 교육과정의 영역별 안배 문제, 네 번째로 교육과정 측면에서의 시간 단축에 의한 교사 수급의 문제, 마지막으로 교과서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이제부터는 자유롭게 이에 관련된 논지들을 펼쳐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서인호 : 선택형 수준별 교육과정의 시행 과정에서 학생들의 희망의 편중으로 인하여 교사 수급에 문제가 생기고, 과학은 선택이 적을 것이라 예상되는 물리 영역의 교사들이 전담하는 사태가 발생할 것입니다. 이럴 경우 물리 교사들이 타 영역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과학 교과의 수업을 진행하게 되면 과학교과의 수업의 질이 저하될 우려가 있습니다. 따라서 사전에 학생들의 희망에 따른 충분한 조사가 이루어지고 이를 바탕으로 과학교사의 연수 계획이 수립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6차 교육과정에서 공통과학 교과 과정이 5년여 시행되었지만, 학급수가 많은 도시의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과학을 영역별로 쪼개어 가르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것은 타 영역에 대한 공통과학연수가 교사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과학교사 1인이 공통과학 전 단원을 가르치기에는 현실적으로 역부족이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박종규 : 그렇다면 일선 교사나 전공 교수들이 몰랐을 리도 없고, 진작 문제삼아 거론하였을 텐데 왜 그냥 지나쳤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흔히 교사들에게 공부도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이런 대책 없는 행정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답답해지는 현실 속에서 한숨만 나옵니다.
이양락 : 이 문제는 정치와도 밀접한 관련이 되는 얘기입니다. 국가 정책적으로 개방화, 자율화의 물결을 타고 7차 교육과정에서는 과학도 개방한다고 강제성을 풀어놓게 되었습니다. 아무 제약 없이 풀어놓았을 때 과학을 스스로 하는 나라는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미국에서도 처음 학생들의 자율에 맡겨버렸을 때 자동차수리, 운전, 요리 등에만 사람이 몰렸습니니다. 그래서 국가 차원에서 다시 정책을 바꾸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덜 급했는지 아니면 거꾸로 가는 것인지 이제서야 풀어놓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교육과정도 상대적인 면이 있어 규제가 완화되었던 부분은 다시 묶어 놓고 제약이 심하던 부분은 다시 풀어 놓는 경향이 있거든요.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엄격하게 묶어 놓았다가 풀어놓기 시작하는 입장인데 개방화가 되었을 때 초래하는 문제점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자율화, 개방화를 시키되 아주 중요한 것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강제성을 가지고 묶어 놓아야 하는데 그 완급조절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과학 과목만 중요하니까 필수과목으로 해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랬을 경우 다른 과목들, 특히 과학과 대비되는 사회과에서는 반대 의견이 분분할 것입니다. 과학이 중요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실험을 늘인다거나 실험실 시설을 확충하는 식으로 지원하는 것은 괜찮아도 단위수를 늘이는 것은 반대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 과학은 영어, 국어, 수학과 함께 핵심교과에 속해 있고 특히 강조되는 과목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번 7차 교육과정만 보더라도 직업기술은 강화하는데 과학의 강화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저를 포함한 과학 분야 종사자들이 제대로 정부에 ‘정말 과학이 필요하구나’ 하고 절실하게 느낄 수 있는 정도의 자료를 넘겨주지 못해서 의사결정에 반영이 되지 않은 책임도 져야 할 것 같습니다. 자체적인 반성을 거쳐 8차부터라도 어떻게든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이제 와서 시수 문제를 가지고 논하기엔 너무 늦어버렸고, 이 상태에서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 논의해야겠습니다.
이규석 : 방금 말씀하셨지만 미국의 경우도 과목 선택을 모두 자율에 맡기니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인문계도 반드시 1단위(하루에 한 시간 이상) 배우고 자연계는 2단위를 배울 수 있도록 정부가 개입하여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적극적인 검토 후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처음에 개정 시기에 관한 얘기를 했었는데 제 생각에는 현재 정책보다는 좀더 긴 10년 내외의 기간을 두고 부분 수정을 해나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봅니다. 5, 6년만에 매번 바뀌는 것은 너무 빠르고 예산을 책정하기에도 벅찹니다.
교육과정이 5년마다 한 번씩 바뀌니까 교육과정을 만들거나 교과서를 만드는 사람한테는 죄송한 얘기지만 경험에 의해 축적된 좋은 자료들을 연구할 만한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이양락 : 국가 차원에서 지시가 떨어지면 할 수 없이 개편을 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국가에서는 급격한 과학기술의 변화에 대응한다는 논리로 교육과정 개편도 함께 실행해 왔습니다. 이러한 문제점은 이미 대부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평가원에서도 계속 연구하면서 보완해 나갈 것입니다. 앞으로는 일괄적으로 모든 교과목의 문제점을 분석해서 이규석 선생님 말씀대로 교과서를 부분적으로 수정하다가 교과서 수정으로는 도저히 안되겠다 싶을 정도가 되었을 때 비로소 교육과정이 개편될 수 있도록 하자는 의견들이 많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교과서에 어떤 새로운 내용이 하나 들어간다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입니다. 같은 맥락으로 집필자에게 새로운 내용을 하나 만들어내라는 것도 어마어마하게 힘든 주문입니다. 교사들 입장에서야 현장에서 늘 가르치던 것이니까 한 두 가지 바뀐 교과서를 봐도 이전과 똑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교과서를 쓸 때 아예 기존의 교과서를 덮고 처음부터 다시 쓰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똑같은 결과가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한계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소모적인 방법을 쓰는 것보다는 차라리 기존의 교과서를 한 페이지씩 넘기면서 좋은 내용은 그대로 두고 부족한 것은 보충하는 식으로 하면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오지 않은 이유는 어떻게든 바꿔보려는 의도에서였지만 결국 아무 성과가 없었다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또한 집필자들이 짧은 시간 안에 새로운 아이디어로 새로운 내용을 만들어내기는 여건상 무리입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현장 교사나 교수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입니다. 교사나 교수들이 연구해 놓은 경험자료들을 투입시키는 방향으로 발전시켜나갈 것을 제안합니다. 학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전문적인 학술활동도 중요하지만 학교 중심의 교과활동, 가르치고 만들고 실험하는 것에도 적극적인 지원이 이루어지는 분위기가 자리잡아야 합니다.
이규석 : 말씀하신대로 그런 지원 체제는 반드시 만들어 가야 합니다. 지금도 마음 맞는 교사들끼리 모여서 소모임을 결성하고 자체적으로 학습 자료를 연구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 부분을 좀더 강화시켜 과감한 투자를 하는 등 멀리 바라볼 수 있는 안목도 길러야 할 것입니다.
김승익 : 그 부분에 대한 말씀을 잠깐 드리겠습니다. 제가 교육부에서 지금 홍보 역할을 맡고 있는데 얼마 후에는 사이트를 하나 더 만들어서 교수학습 자료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그 안에 영역별로 재량·특별활동을 16개 시도별 사이트에 올려서 다운받아 쓸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결국 7차 교육과정은 교수학습자료의 싸움인 것 같습니다. 물론 교사 스스로의 창의적인 구성이 가장 절실히 요구되지만 교사가 직접 자료를 만들 수 있는 여건이 부족하기 때문에 워크숍 등의 검증을 통해 자료를 많이 링크시킬 것입니다. 현재 그 자료들을 현장 교사들에게 손쉽게 조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중입니다.
서인호 : 많지는 않지만 과학교사들간의 자생적인 모임들이 꾸준히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런 모임에서 만든 자료를 현장에 알리는 역할을 중앙에서 해주어야 합니다. 저희도 나름대로 소모임을 결성해서 인터넷 사이트를 구축하는 등 활동을 하고 있지만 한계에 부딪힐 때가 많습니다.
수업지도안이나 교사용 지도서 등의 보편적인 자료들은 시중에 넘쳐날 정도로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교과서가 나온 후 교사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출판사마다 경쟁적으로 보급하거든요. 그러나 교육과정을 개발한다는 문제는 단순한 수업지도안이나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한 기본 자료들과는 또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외국의 경우 ‘이 교과서는 3년 동안 어느 어느 학교에 실제로 적용시켜 보았던 내용이다’라는 식의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면에 있어서도 4판, 5판의 업그레이드 개정판이 계속해서 출간됩니다. 우리 교과서는 그런 게 없습니다. 계속해서 거론되었듯 무조건 새롭게 만들기보다는 기존의 장점은 살린 채 업그레이드시키는 것이 더 좋다는 얘기도 되고, 한편 그런 의미에서 교육과정을 실제 조율할 수 있는 여건들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솔직히 지금 교육부에서는 돈 한 푼 안 들이고 교과서를 만들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도 잘 몰랐었는데 알고 보니 출판사에서 돈을 들여 만드는 것이고 교육부에서는 종이에 교육과정 순서 즉 중학교 1학년 화학의 경우 6줄 정도의 간략한 내용만 제시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지침을 만들기 위해서는 교수들과의 세미나 등 여러 경로를 거쳤겠지만 그래봤자 결국 교과서 제작비용은 출판사에서 자체적으로 마련합니다. 각 출판사들이 과학교육 발전을 위해서 교과서를 만드는 경우는 없습니다. 채택되기 위해 지극히 상업적인 차원에서 제작됩니다. 오히려 교과서가 채택된 후 만드는 부교재 시리즈에 전력을 기울인다는 얘기까지 있을 정도니까요. 그러다 보니 제작한 교과서가 채택될 때까지는 많은 투자를 하지만 그 이후에는 교과서에 관련한 에프터서비스는 전혀 볼 수 없게 됩니다. 때문에 우리나라 교과서에서는 업그레이드판을 내기 위한 제언이나 문제점 등을 체크하는 일도 당연히 없습니다.
이규석 : 어쨌든 교육과정 개편의 시기는 근본적으로 문제점이 있으며, 제고되어야 한다는 데 참석자 전원이 의견을 같이하는 것 같습니다.
이양락 : 앞서 박종규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한 답변을 드리고자 합니다. 초등학교 6차 교육과정에서는 추구하는 인간상에 창의적 인간과 문제해결력을 중요시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저 역시 지금 생각해보니 7차에서 내세운 ‘자연관’이라는 말은 단어 자체가 너무 추상적이고 오히려 지식 위주의 느낌이 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초등학교에서는 지식보다는 탐구 중심의 학습을 지향해야 한다는 면에서 볼 때에도 다음 개편 때에는 다시 바꿔볼 수 있도록 참고하겠습니다.
그나마 초등학교 때에는 과학을 재미있어 하는 편인데 중학교, 고등학교로 올라갈수록 어렵고 재미없다는 반응이 두드러집니다. 왜냐하면 학교급간 교과 수준이 갑자기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 7차 교육과정에서는 국민공통교과목에 한해서 만이라도 그 격차를 보완하기 위해 학교급간의 이동에 있어 교육 내용의 비약 없이 연속적인 변화를 이루도록 노력하였습니다. 특히 초등학교 6학년과 중학교 1학년 사이에서는 질적·양적 격차를 줄이는 데 역점을 두어 과학이 갑자기 어려워진다는 느낌을 최소화하였습니다.
박종규 : ‘만들어가는 교육과정’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초등학교의 경우까지 심화·보충을 교과서에서 너무 구체적으로 안내하면 ‘만들어가는 교육과정’이라는 의미 자체가 퇴색되고 맙니다. 완전히 교사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내용을 제시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할 것입니다.
이양락 : 사실 교과서는 유능한 교사를 위해 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과서를 만드는 제 철학은 ‘어떻게 가를칠 것인가’에 관해서 아직 초보 단계인 초임교사가 구체적이고 쉽게 알아 볼 수 있도록 제시한 최소한의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경험이 많고 유능한 교사들이 스스로 계발한 교육 프로그램으로 만들어가는 교육과정을 해내는 것은 상당히 긍정적입니다. 교과서는 그저 참고 자료일 뿐입니다. 그래서 교과서를 있는 그대로 학습해야 하는 일괄적인 수단이 아닌 ‘일시적인 교수학습자료’라 부르기를 권장합니다. 교과서를 참조하되 교사가 그 이상의 것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박종규 : 음악이나 미술을 전공한 사람들보다 과학을 전공한 사람일수록 너무 과학에 얽매여 지식만을 가르치려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선에서도 종종 아이들에게 과학교수가 강의하는 방식으로 수업을 하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교사들이 개발하고 이끌어가지 않고 그냥 있는대로 한다면 심화·보충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상부에서 지침이나 실례로 제시되는 것들을 보면 차별화가 제대로 되어있지도 않고 학교교육을 더욱 획일화시킬 뿐입니다. 그러니까 일정 부분은 아무 제시 없이 아예 일선 교사들에게 맡겨버리면 급속도로 확산되지는 않겠지만 조금씩 변화가 생겨갈 것이라 믿습니다.
그렇게 일괄적으로 교과서에서 다 제시해 놓아버리면 대책이 서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정서상 최소한 교과서 내용을 다 끝낸 후에 여력이 되면 진정한 의미의 심화나 보충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양락 : 알겠습니다. 그 부분은 십분 이해가 됩니다. 한번은 제가 참관수업을 갔는데 교과서에 제시된 것을 모두 가르치더라구요. 보충도 가르치고 심화도 가르치고 하다 보니 시간이 부족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보충은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고 했더니 그렇게 되면 ‘학부모들로부터 항의가 들어온다’는 재미있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즉 교사들이 교과서에 대한 인식을 바꿨다 할지라도 학부모들이 변하지 않는 한 변화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특히 초등학교에서 7차 교육과정이 성공하려면 무엇보다도 학부모들의 인식이 제대로 바뀌어야 합니다.
김승익 : 그렇잖아도 여러 경로를 통해 학부모들에게 인식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아직은 미약하지만 EBS 교육방송도 적극적으로 활용할 예정이고 이미 반상회나 각 학교의 어머니회 등을 통해서도 홍보하고 있는 중입니다. 교육인적자원부에서도 홍보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절실히 통감하고 있습니다.
박종규 : 그런 정도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기분 나쁘시겠지만 교육인적자원부에서 내려오는 지침서의 경우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시중에서 나오는 일반 자료들은 전문가들에 의해 만들어진데 비해 교육부의 것은 시각적인 면이나 디자인에서 너무 뒤떨어집니다. 심지어 교과서까지도 컬러로 화려하게 꾸며지고 만화가 등장하기도 하는 요즘 세상에 흑백 전단지 한 장을 누가 쳐다나 보겠습니까? 파격적인 홍보방법을 찾아내는 적극적인 자세와 적절한 투자가 필요합니다.
이규석 : 그 부분에 있어 저도 상당히 공감하는 바입니다. 상급 기관에서 내려오는 여러 가지 규정이나 홍보 자료들을 보면 시대에 뒤떨어진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요즘에는 학생들조차도 컴퓨터를 이용해서 훨씬 더 그럴듯하게 만들어냅니다. 학생들은 변하는데 교육 당국이 그에 미치지 못한다면 당연히 문제가 됩니다. 또한 박종규 선생님의 말씀대로 교사들이 재량껏 할 수 있도록 초등학교에서만이라도 심화·보충과정까지도 너무 빡빡하게 많은 내용을 담지 않았으면 합니다. 6차에 비해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내용이 많은 편입니다.
서인호 : 저는 현재 남자고등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남학생들도 사춘기이기 때문에 꽤나 예민한 편입니다. 그래서 어떤 기준으로, 어떤 방법으로 평가하여 심화냐 보충이냐를 선택하게 할 지 참으로 난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어떤 식으로든 평가를 하여 “너는 보충을 하고, 너는 심화를 하라”고 얘기했을 때 어떤 결과가 생기겠습니까? 또한 학생들에게 자율적으로 선택권을 맡길 때 복습한다는 의미에서 보충을 선택하는 사람만 많아지거나 혹은 자존심 때문에 실력도 되지 않으면서 심화과정을 선택하는 사람만 많아지는 등 한쪽으로 편중될 여지도 있습니다.
이양락 : 문서상으로는 ‘기본 과정을 학습한 후 평가를 거쳐 심화·보충을 하되 학생의 희망에 따라서 심화도 할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만일 한 학생이 “제가 왜 보충입니까? 저는 심화과정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얘기했을 때 교사가 거절할 만한 근거는 사실 없습니다.
심화활동이 대부분 개념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하나의 과정이기 때문에 과학적 개념을 잘 파악하지 못하는 학생일지라도 재미있게 참여할 수 있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엄격하게 “너는 앞에서 이해하지 못했으니 안되겠다”고 설득하면 좋겠지만 한편으로는 굳이 하고자 하는 학생을 말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평가를 하지 않는다(시험에 출제되지 않는다)고 할 때 학생들이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까봐 걱정입니다.
서인호 :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께서 공부 잘 하는 아이와 못 하는 아이를 함께 자리에 나란히 앉도록 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적 하나만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인성까지도 고려해서 짝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만일 고등학교에서 성적만 평가하여 두 집단으로 나누어 놓았을 때 어떤 현상이 생기겠습니까? 실제로 공부를 못하는 학생만 모아놓으면 오히려 역효과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실험이든 공부든 우수한 학생과 약간 뒤떨어지는 학생이 적절하게 섞여있어야 원만하게 진행도 되고 또 서로 배워가며 자연스러운 보충이 되기도 합니다.
심화·보충을 적용할 때 40명의 학생 중에서 보충할 대상이 5명 정도라면 교사가 보충하고 그 시간에 다른 아이들이 자율적으로 심화학습하면 되겠지만 실제로는 보충해야 될 학생이 30명이 넘는 현실인데 그럴 경우 교사는 감당해낼 수가 없게 됩니다. 교사의 한계를 뛰어 넘는 거죠. 즉 교사에 의존한다기보다는 학생들끼리 일어나는 학습형태가 존재해야 합니다.
종전에 시행되었던 우열반의 경우도 우수한 집단은 더 우수해지고 그렇지 않은 반은 더욱 열등해지는 결과가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학교의 여건을 고려해서 탄력적으로 운영해야 할 것입니다. 심화·보충이라는 카테고리는 최대한 지켜야겠지만 새로운 교육과정이라는 것이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시행된다고 해서 그대로 적용하면 오히려 학생들을 희생시킬 우려가 있습니다.
교육인적자원부에서도 탄력적 운영에 대한 지침을 내려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사들이 새로운 교육과정을 운영하면서 ‘내가 법을 어기지는 않는구나’라는 안도감이라도 느껴야 하니까요.
수행평가만 하더라도 처음에 교육부에서 곧이곧대로 지침이 내려왔을 때는 제대로 해내지 못하다가 조금 탄력적으로 운영되고 나서 제대로 정착되어가는 것을 볼 때 그런 대책마련이 시급하다고 생각됩니다.
박종규 : 교사들의 생각이 많이 바뀌어야 합니다. 전공 영역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훨씬 더 다양한 생각들이 나올 수 있을 텐데 이상하게도 자기 전공만을 고집하려 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리를 전공한 사람은 어떻게든 과학 안에 물리 내용을 많이 담으려 하고, 생물을 전공한 사람은 생물의 비중을 높이려고 애쓰는게 우리나라의 현실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안전사고 방지를 위해 이미 지난 교육과정에서도 일부러 빼버렸던 황산가리가 왜 새로운 교육과정에 버젓이 들어가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양락 : 안전사고 문제에 관해서는 많이 강화가 되었습니다. 반드시 교과서에서도 언급하고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황산가리의 경우는 가루물질 중에 순수물질이면서 색감을 가졌기 때문에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보여줄 수 있는 적당한 물질이 황산가리를 빼고는 없기 때문에 시각적인 효과 측면에서 사용된 것입니다.
박종규 : 바로 거기에서 문제가 비롯됩니다. 초등학교에서 황산가리라는 물질의 특성을 모른다고 해서 탈이 날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위험한 물질을 사용하면서까지 화학이라는 학문 분야에 연연해야 하는 것일까요? 최소한 초등학교에서 만큼은 안전한 범위 내에서 쉽고 재미있게 과학을 접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자기 전공 학문분야에 대한 이기주의만 사라진다면 훨씬 더 풍요로운 학습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규석 : 마지막으로 말씀하시는 중에 빠뜨렸다거나 미흡했던 부분, 꼭 하고 싶던 이야기들을 자유롭게 풀어놓을 수 있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박종규 : 교육 당국은 물론이고 교사들 자체 내에서도 반성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저 다른 사람들만 탓하며 ‘내 잘못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해서 교육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서로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보아야 할 때입니다.
김승익 : 여러 훌륭하신 분들을 모시고 제7차 과학과 교육과정에 대한 고견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과학 교육과정 업무를 맡고 있는 본인으로서는 이 자리가 앞으로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좌담회 주제 성격 탓인지 칭찬보다는 질책이 많았는데 역으로 생각하면 그만큼 제7차 교육과정에 거는 기대가 크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변화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본래의 취지대로 시행되지 않았을 경우 생길 수 있는 문제점을 확대 해석하여 멀리하려 하기보다는,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어떻게 하면 본래의 취지를 잘 살리면서 우려되는 문제점들을 최소화할 수 있는지 노력하는 자세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제7차 교육과정이 교육인적자원부만의 사업이 아니고 전국민 모두가 관심을 갖고 함께 만들어가야 하는 중차대한 사업이기 때문입니다. 원론만을 고집하기 보다 현실적인 여건을 고려하는 탄력성도 앞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서인호 : 여러 가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7차 과학교육과정이 실행될 경우에는 좀 더 실제적인 보완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첫째, 학교의 실험실 여건의 개선을 위한 재정적 지원이 조속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둘째, 학생들이 희망하는 선택 교과에 대한 사전 조사가 이루어져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어떤 영역의 교사가 과학교과를 전담해야 할 지에 대한 기초 자료를 마련해야 합니다. 이러한 기초 자료에 근거하여 교사 연수가 진행되어야 하며, 6차 교육과정의 시행에서처럼 피상적인 형태의 연수가 아닌 새로운 교육과정을 소화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도록 연수가 이루어 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연수시간은 일과시간에 포함시키며, 교사의 업무가 과중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셋째, 보충·심화 과정은 현실적으로 과밀한 학급에서 적용이 불가능합니다. 두 가지 형태의 수업을 진행시키기보다는 한 가지 형태의 수업을 진행시키도록 수정되어야 합니다. 보충 심화과정은 학습한 내용을 보충할 수 있는 과정으로 바꾸어 실시하며 다만 협동 학습, 개별학습, 역할 놀이 등의 다양한 방법을 도입하여 지루한 반복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넷째, 선택형 수준별 수업은 학생들이 어느 특정 영역의 교과를 기피할 수도 있으며, 선택의 폭이 학교나 학생에게 있는 것 같이 포장되었지만 실제로는 일류 대학의 입시제도의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큽니다. 또한 단위 학교의 교사 수급에 따라서 좌우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선택형 수준별 교육과정을 시행하기에 앞서 특정 영역 교과의 기피에 대한 대책, 학생들의 자율적인 교과 선택권 부여, 교사 수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충분한 과학 교사수의 확보 등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다섯째, 과학교사들도 변해야 합니다. 과학의 한 영역만을 고집할 수 없으며, 과학교과를 가르치기 위한 자율 연수에 참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단위 학교별 과학교과 모임이나 각종 과학교과 모임에 참여하여 이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국가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연수의 기회를 요구해야 합니다. 또한 학생들이 과학교과를 어려워하고 기피하는 것만 탓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교과를 흥미 있게 할 수 있는 수업 방법을 적극적으로 개발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졸속행정에서 벗어나 교육만큼은 장기적으로 재정적인 계획을 갖고 학교의 수업 여건을 변화시켜 나갈 수 있기를 교육인적자원부에 바라는 바입니다.
이양락 : 과학을 재미없어 하고 어려워하는 학생에게 과학이 중요하다고 아무리 강조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쉽게도 7차 교육과정도 학생들이 과학을 재미있어 하고 이해하기 쉽도록 구성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는 오랫동안 과학교육과정에 관여해 온 저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최근의 과학교육에서는 각 학생의 관심과 흥미, 경험 등을 고려한 내용과 교수-학습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육과정은 주요 골격만 제시하기 때문에 이러한 사항을 세세히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교사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취지에서 제 7차 교육과정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교육과정을 해석하고 실천하는 교사의 전문적 활동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중한 수업 부담, 많은 학생 수, 힘든 학생 지도 등 어려운 여건에 처해 있는 과학 선생님들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성을 발휘해서 과학을 잘 지도해 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는 것은 선생님들이 과학교육의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입니다.
첫댓글 이건가요? 나도 긁어오기만 하고 읽어 보진 않아서... 한번 읽어보죠
탁상공론의 결정체로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