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
나타내셨느니라(요1:18)
+ 오늘의 양식은 오늘을 살게 하듯, 시대를 비추어 시대의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제가 도움받고 사랑받았듯이 저도 사랑하고 돕고 싶습니다. 제 손으로 제 맘대로 지어올리려다 무너진 옛 기억 때문에, 조심스럽습니다. 무엇이든 할수 있으나 무엇이든 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아버지께서 일러주시고 이끄시는대로 살고 나가며 들어오기를 바랍니다. 성령님 통해 이끌어 주세요.
묵상
요한복음에 의하면 세상은 어둠이자 몽매하다. 이것은 하나님을 알아보는 부분에 있어서 그러하다는 것일테다. 호랑이나 표범 등은 푸르른 초원과 어울리지 않는 황갈색의 바탕에 얼룩무늬를 가졌다. 그런데 가젤이나 임팔라 같은 동물들은 맹수가 상당히 근접할 때까지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현재 알려진 바로는, 이들의 시력이 가시광성의 총천연색 위주로 보는 인간과 달리 단일한 색상으로 인식하는 구조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주변의 위협을 그토록 경계하면서도 끝내 근접한 위험을 알아차리기 힘든 이유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도, 사람이 지혜나 지식이 없고 관심과 노력이 없어서라고 볼 수는 없다. 서점에 가보면 고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궁극적 존재에 대한 질문과 관심과 저마다의 정의가 산처럼 쌓여 있다. 그러나 색맹의 임팔라(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처럼 인간은 신 존재를 자각하기 힘든 모양이다. 요한복음은 신께서 인간 사이에 내려왔음에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말한다(요1:9-10). 그 분 스스로 자기 신분을 밝히고 증거로써 많은 기적도 일으켰지만 그럼에도 그를 영접하는 자가 많지 않았음을 기록한다(요1:11).
신이 전지하다면 왜 신은 이런 결과를 알면서도 굳이 인간에게 자기 존재를 알리려 한 것일까. 왜 굳이 그들의 눈을 뜨게 해 자신의 품 안에 인간을 품으려 한 것일까. 신이 현현한 것(성육신의 방식으로)에 대해 많은 주해들이 있지만 내가 오늘 주목하는 것은 나 역시 제자라면 이러한 원리의 삶을 살아야 되겠다는 것이다. 오병이어, 칠병이어, 바다위를 걷고 무수한 병자를 고쳐주고 악귀들린자를 해방시켰지만 그분에게 돌아온 것은 배신과 모욕의 십자가 죽음이었다. 나는 물론 그런 기적을 행할 능력은 없지만, 적어도 예수의 뒤를 따르는 삶이라면 내 맘을 다해 사랑을 주고도 모욕이나 배신, 버림받음이 놀랍지 않은 그런 삶이 기다리는 것을 저어하지 않으리라는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닯겠다는 뜻이다.
이런 삶은, 하나님과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삶이다. 하나님만 사랑해서도 불능, 사람만 사랑해서도 불능이다. 하나님만 사랑하면 선방에서 좌정하는 스님의 수도와 다를 바 없고, 사람만 사랑하면 여느 시민활동가와 다를게 없다. 하나님이 드러나지 않거나 사람에게 빛이 흘러가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수도하는 스님이나 시민운동가 등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가치 안에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을 뿐이다.
나는 무엇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드러내는 한 사람의 신도가 될까. 어릴 때 서원했던 목사님도 못 되었고, 중학생 때 가스펠 콘서트에서 즉흥적으로 일어서서 기도했던(아마도 아프리카) 선교사도 못 되었다. 영어도 서툴고 나이도 무거워졌다. 그러나 제자로 부름을 받았다면 어딘가 어디선가 어떤 형태로든 그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갓 회심한 젊고 푸른 날, 나의 어리석음이 이 땅에 초막 셋을 짓고자 하다가 세 개의 초막이 다 실패로 돌아가 낙담하고 낙향하여 짧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렀다. 평범한 신자이자 일개 촌부로써 삶을 마감하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다. 주변을 돕고 선하게 살며 근면하고 성실한 사회구성원으로 사는 일도 값진 일이다.
그러나 그 삶이 내게 확실히 배정되어 있다고도 말할수는 없다. 그렇게 사는게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누가 감히 단언할 수 있는가? 설령 결과적으로 맞다해도 그런 단언은 인간이 인간에게 내릴 만한 것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한치 앞 자신의 길도 모르는 존재이므로.
아직 하나님을 총천연색으로 만나본 적 없는 이들에게도 가서, 독생하신 성자 예수와 만유 위 영원하신 성부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나타내주는 삶이, 찰라라도 허락되기를 바랄 뿐이다. 내 욕심의 초막이 아닌, 예수의 영께서 알려주시는 대로 깨닫게 되고 알아차리게 되어 붙는 불을 다시 한번 만나기를 바랄 뿐이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이가 제자이지, 그 음성과 부르심을 듣기만 한 이들은 제자가 아니다. 부르심을 들은 것 자체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를 들은 것과 다를 바 없다. 그 언젠가처럼 또다시 내 안에 음성이 들려온다면, 나는 다시 달려나가겠다.
첫댓글 아멘 아멘!
숙성된 신앙, 깊은 묵상에서 건져올리는 생수로
영혼이 시원해지네.
많은 지체들이 풍성함 얻을줄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