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3시 30분 집을 떠나 8세때 부모를 따라 이곳으로 이민 오신 김준형 목사님을 통역으로 태우고 4시간 걸려 로사리오로 들어오는데 파라과이에서 세 번째로의 국도로 7년 전 쯤부터 생긴 고속도로로 신학교로 들어가는 비포장도로는 신학교가 생기게 되면서부터 그때의 부통령이 자기의 고향으로 들어오는 길을 포장하겠다고 공약으로 약속하면서 포장이 되기 시작했는데 사모님의 기도 응답이라고 한다.
비가 오면 길을 막아 들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어서 애를 태우게 된다고 한다. 신학교를 세우면서부터 일주일에 한번은 꼭 들어가야 하는데 개스비만 100불이 들어가고 비포장도로를 다녀오면 차가 엉망이 된다고 한다. 너무 힘들어 신학교를 포기하려고 하면 주님이 물질을 보내주시고 차도 고쳐주시고 꼭 하게 하셔서 운영을 하게 되었는데 40명의 신학생이 공부하고 있고 그 넓은 지역에 23개의 교회가 개척되어 있어서 꼭 필요한 학교이고 작년에 세워졌는데 외부 교수로는 우리 목사님이 처음으로 들어가서 강의하게 되었고 교회에도 외부 강사님을 모셔 본 적이 없어서 성도들이 새벽 5시부터 모였고 모두 흥분해 있다고 한다.
아들이 먼저 가서 준비하고 있는데 대학을 나온 아들이 앞으로 신학교를 다시 공부해서 아버지를 도우려고 한다고 하다. 이곳의 로사리오 마을의 으꾸아빈또 삼덕교회를 세운 지는 17년이 되었는데 이 교회는 두 번째 세운 교회로 첫 번째 세운 교회의 성도 세페리노 아래발로씨는 목사님이 파라과이에 온 지 6개월 만에 만나 전도해서 아순시온 신학교에서 장로교, 오순절교회 신학교 등을 공부하고 오순절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지금 로사리오 교회에서 헌신적으로 사역을 하게 된 첫 열매이다.
이 목사님이 고향의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 오지에 교회를 세우게 되었고 이곳의 목회자가 된 것이다. 새벽에 달려가다가 가게에 들러 현지인이 식사한다는 뜨거운 차와 빵 한 개로 아침식사를 하는데 차는 달았고 빵은 모래가 들었는지 서걱거렸다.
양쪽으로 나무가 있고 숲이 있는데 흰 소떼들이 놀고 있는데 흰 소를 보기는 처음이다. 파라과이 면적은 남북한을 합친 것의 두 배인데 인구은 500만 명 정도이고 땅은 끝없이 넓은 들판으로 산도 바다도 없는 대륙으로 답답할 것 같은데 목사님은 땅, 물, 공기가 좋고 사람들이 너무 순박하다고 하시며 파라과이 사랑을 나타내신다. 두 분이 24년째 목회하시는데 두 아들은 20개월, 5개월 때 데리고 들어오셨고 막내딸을 이곳에서 낳으셨다.
이곳 대통령은 신부 출신이고 누나가 영부인노릇을 하고 있지만 알려진 자식만 7명이라고 하는데 이 나라는 그런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고 모든 문화가 한국과는 정반대로 생각하면 된다고 한다. 계절부터 이곳은 겨울은 한국의 여름이고 모계사회이고, 부모는 막내딸과 함께 살고 장모는 큰 소리치고 시어머니는 며느리 눈치를 본다고 한다.
강대국 사이에 끼어 100년 전쟁을 해서 남자가 귀하고 300명의 상류층 부자들이 나라를 움직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아무 소망이 없는 가난한 백성들이고 무지한 천주교 나라이기도 하다. 통역하는 목사님은 이곳에 어릴 때에 이민오셔서 자랐고 한국에 가서 신학교를 다니며 그곳에서 아내를 데려와서 한국말을 잘하게 되었다고 하다.
7시30분에 로자리오 교회에 도착해서 아침식사를 하고 교회에서 아침 9시부터 목사님이 신학교 강의를 하시고 한 시간은 이 장로님이 간증설교를 하시다. 점심식사를 하고 목사님의 강의를 다시 듣고 오늘 강의는 끝내고 저녁에 다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기로 하고 그곳 농장을 구경나서다.
오래 전에 자녀 학비로 시어머니께서 주신돈 5,000불에 10 ha(100,000 평방미터)의 농장을 사셔서 성도들에게 1핵트알(ha)씩 마음대로 농사를 지어 살게 해서 6명이 하고 있고 한 개는 교회 것으로 공동으로 일해서 교회 비용으로 쓰게 했는데 믿음이 좋은 사람의 밭은 더 잘된다고 한다.
옆집 부자집 농장은 농약도 뿌리고 애를 써도 농작물들이 마르고 잘 안되는데 교회 농장은 너무 잘된다고 하고 우리가 가서 보아도 옆집 농장은 노랗고 교회 것은 새파랗다. 깨, 감자, 옥수수 등을 자기 자유로 심어서 십일조만 자기 양심대로 교회에 바치고 자기 가족이 먹고 살게 해서 사람들이 교회가 좋은 일을 하는 것을 보여주게 되었다고 한다. 사모님은 사진관도 해서 기술을 가르쳐주고 봉제공장도 해서 기술을 가르쳐주어 자기들이 일해서 살게 해주고 무조건 도와주지는 않는다고 하니 참 잘하시는 것 같다.
만디오까라는 식물은 잎은 소가, 대는 돼지가, 뿌리는 사람이 캐어 먹는데 하얀 마 같고 감자 같은 이곳의 주식물이다. 빨간 진흙이 찰지고 좋은 땅으로 개미가 사람 무덤같이 높은 집을 쌓은 것이 군데군데 보이는데 가서 발로 차도 끄떡없이 아주 단단하다. 들개가 사방에서 뛰어놀고 있는데 모두 말라빠졌고 아무 소용도 없는 개들이다. 개는 절대로 잡아먹지 않는다고 한다.
소가 많아도 다 수출하고 모두 소를 치는 목자이고 냉장고가 없어서 소고기를 저장할 수도 없어서 얇게 썰어 말려서 먹었는데 요즘은 이상기온으로 다 썩어서 먹지도 못해서 가난한 사람들은 소가 그렇게 많아도 실컷 먹지도 못한다고 한다. 푸른 초장에 소떼, 돼지떼, 닭들이 온통 자유롭게 뛰놀고 있는데 백성들은 모두 가난하다니 참 한심한 나라이다. 돼지들이 풀을 뜯어먹고 살고 주민들은 숯으로 밥을 지어먹고 큰 돌 움막 속에 나무를 넣어 숯을 구워 팔기도 한다. 한국의 70년대 같이 산다고 한다.
양말을 바지 위로 신고 수시로 모기약을 옷 위와 양말 위로 뿌린다. 모기에 물려도 힘들겠지만 검고 작은 벌레가 살 속에 들어가 파먹는다고 하니 끔찍하다. 여기서는 몰랐다가 후에 미국에 들어가면 가렵기 시작하고 상처가 생긴다고 보여주다. 이곳 사람들은 살갗이 두꺼워서 수지 침도 부러지고 안 들어가고 벌레도 안 무는데 외국 사람들은 벌레의 밥이라고 한다. 나는 다리가 퉁퉁 부어서 사모님이 주물러주고 얼음수건으로 찜질도 하다.
도시에 사는 큰 농장 주인의 허락을 받고 우리 일행이 그의 좋은 집에 가서 쉬는데 이곳 성도께서 그 농장을 관리한다고 한다. 냉장고도 있고 좋은 집으로 한 달에 한 번쯤 주인이 아이들을 데리고 온다고 하는 집에서 시원하게 에어컨도 켜고 쉬었다가 저녁 6시에 아마도 목사님(오순절교회 목사님/신학생)댁으로 가서 소고기를 숯불에 소금으로만 해서 구운 담백한 스테이크에 감자와 마 같은 채소로 식사를 하다.
소고기가 담백하고 맛이 있는데 내가 먹기에는 너무 질기다. 저녁집회에 아담한 성전에 가득하게 성도들이 모여서 뜨겁게 예배를 드리다. 캄캄한 가로등도 없는 시골길을 오토바이를 타고 오기도 하고 걸어서 오기도 하는데 어디에서 그렇게 많이들 오는지 모여들고 예배를 마치고 볼을 비비며 서로 뜨겁게 인사들을 하고 헤어지다.
통역하는 젊은 목사님이 통역하면서 자기가 큰 은혜를 받는다고 하고 오늘 아침에 잠깐 비가 오기도 하고 날씨가 바람도 선선하게 불고 너무 시원하고 좋았다고 이럴 수가 없다고 하다. 지난 주에는 너무 더웠다고 하다. 집으로 돌아와서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조그만 수건과 종이 타월로 닦다. 호텔로 간다고 해서 수건을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남편만 이집 큰 수건을 쓰다.
밤 12시가 되어 잠을 자야 하는데 오지 않아 할 수 없이 일어나 일기를 쓰다. 오늘 하루가 참 긴 하루같이 여겨지고 모기와 벌레 때문에 긴장하다. 나는 다리가 부어서 고생이고 그곳에 벌레가 물면 안 되기도 한 형편으로 이제 오지 선교여행은 힘들 것 같다.
부은 다리로 마음이 무겁지만 주님이 나에게 특별히 베풀어주신 은총에 다시 감사하고 내일은 내 간증 차례인데 주님께서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