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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羽化)를 꿈꾸며 디자인한 언어의 세계
이동희
시인,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전주대학교사범대학 겸임교수, 시집-『빛더듬이』등 8권, 수상록-『숨쉬는 문화 숨죽인 문화』 등 3권, 시해설집-『시의 지문』등 3권. 문학평론집에 『문학의 두 얼굴』 등 4권
프롤로그
사람들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볼까? 이 단문에는 네 가지 요소가 함축되어 있다.
첫째는 주체로서의 ‘사람’이 하나다. 그 사람이 있어 비로소 문장이 성립되고 의미의 주체가 확립된다. 이때의 사람은 주체일 수도 있고, 객체일 수도 있다. 그 사람이 주체라면 자아의 안목에 대한 발상일 것이고, 그 사람이 객체라면 세계의 일부로서 관찰의 대상이 될 것이다. ‘누가’ 보느냐에 대한 대답은 결국 사람이다.
둘째는 대상으로서 ‘세계’가 하나다. 주체인 사람이 무엇을 보느냐면 바로 세계를 본다. 이 세계 역시 주체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객체적 대상이지만, 주체자인 사람을 대상으로 본다면 사람 역시 세계의 일부가 되는 것은 자명하다. 내가 나 아닌 밖을 볼 수도 있고, 내가 나를 볼 수도 있다. 그래서 세계는 주체와 대립각을 이룬다.
셋째는 바라보는 방법으로서 ‘어떻게’가 하나다. 주체인 사람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에는 몇 가지가 있다. 오온(五蘊)으로 본다면 필연적으로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을 통해서 얻어지기 마련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육근(六根)이라고 일컬어지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감각기관을 통해서 세계를 바라본다. 그런데 그런 바라봄이 결국은 최종 수단인 언어라는 도구를 통하지 않고서는 봐도 본 것이 아니게 된다. 그래서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결국 언어로 바라본다는 뜻일 터이다.
넷째는 주체의 구체 행위인 ‘보다’가 하나다. 이는 앞의 모든 함축적 요소들이 귀결되는 지점이다. 구체성의 행위에 해당한다. 한 문장에 동원된 요소들은 결국 그 문장의 용언[서술어]에 걸리게 되어 있다. 이를 풀어내면 다음과 같은 진술이 가능하다. ‘사람이 보다’ ‘세계를 보다’ ‘언어로 보다’라는 요소들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진술될 수 있다.
“사람들은 언어를 통해서 세계를 바라본다.” 자문에 대한 자답이지만 ‘어떻게’를 ‘언어를 통해서’라는 진술로만 바꾸었을 뿐이다.
이렇게 바꾸고 보니 세계를 보는 사람은 결국 언어를 부리는 일이 되고 만다. 하긴 언어를 부리지 않고서는 세상과 소통할 수 없고, 세상에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존재와 소통의 길이 언제나 삶에서 중요한 대목이 된다. 이 대목을 사람들은 존재의 필수불가결한 핵심 요소인 언어 때문에 상처받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언어 덕분에 세상을 살만한 낙원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을 법하다.
이를테면 존재의 불안과 고통 속에서도 언어로부터 위안과 대안을 찾아가는 철학자와 사상가들, 종교인이나 수행자들, 학문을 탐구하는 학자들, 독서를 삶의 반려로 여기는 순수한 독자들이라면 ‘언어 덕분’에 존재의 위기를 극복하며 세상과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는 반대로 언어와의 싸움으로 날을 지새우는 저널리스트들 혹은 그런 저널리즘으로 상처받는 불특정 다수의 독자들, 발로 뛰어 진실을 찾기보다는 입으로 허장성세를 일삼는 정치인들 혹은 그런 정치이념으로 아파하는 무력한 민초들, 무책임한 유비통신과 익명의 그늘에 숨어 독버섯처럼 망언을 쏟아내는 나쁜 댓글러들의 ‘언어 때문’에 존재의 위기 앞에서 세상과 소통하는데 어려움을 실감할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 ‘언어 때문’에, ‘언어 덕분’에와는 조금 결이 다른 입장에서, 언어로 세상을 바라보는 만만치 않은 세력이 있다. 바로 시인-작가들이 그들이다. 시인-작가들은 그들이 겪는 존재의 불안과 위기마저 그들이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기를 유보하는 듯한 입장을 지닌다.
보통사람들은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언어를 수단으로 여긴다면, 시인-작가들은 ‘사람’과 소통하기 위해 언어를 수단이 아닌 존재 그 자체로 여긴다는 점에서 결이 다르다. 혹자는 그럴 것이다. 사람을 통해서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나, 세상을 통해서 사람과 소통하는 것이나 결국 그게 그것이 아니겠느냐고 힐문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사람은 주체이고 세상은 객체일 수밖에 없다. 주체의 육근으로 세상을 보는가, 객체의 오온으로 사람을 보는가, 만큼이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또한 언어를 소통의 수단으로 여기는 것과 언어가 존재 그 자체가 되는 것은 더 큰 다름이 있다. Homo sapiens라는 학명에 포함된 ‘언어적 인간’이라는 뜻에서 언어가 삶의 수단이 되는 것과 언어 그 자체가 바로 존재의 모든 것이 되는 것 같은 다름이다. 시인-작가들은 오로지 언어적 존재다. 시인-작가들이 체험하는 존재의 위협과 삶의 고통은 그대로 세계가 겪는 불안과 아픔으로 변용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세계가 겪고 있는 불안과 아픔을 그들 자신이 체험하는 공포와 갈등으로 치환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인-작가들은 자아와 세계를 넘나들며 현실과 매우 닮아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현실세계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형상화한 언어세계, 시와 소설을 생산해 낸다. 그러므로 이때의 시와 소설은 시인-작가에게는 존재 그 자체의 결과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와 소설이 그들의 존재 수단이 아니라, 시와 소설이 바로 시인-작가들의 존재 그 자체가 되는 까닭이다.
“시쓰기는 그런 점에서 언어의 기술로 그치지 않는다. 시쓰기를 통하여 언어의 고수가 되었을 때, 그때 시인의 언어는 시인의 발효된 몸의 연장(延長)이 된다. 이때 시는 언어로 쓴다기보다 몸으로 쓰는 것이 되고, 언어는 문명어라기보다는 한 존재의 삶의 절실한 기혈(氣血)이자 호흡(呼吸)이 된다. 좋은 시에서 우리는 언어라는 도구가 시인과 온전히 하나가 되어 전일적인 율동으로 피어나는 현실을 볼 수 있다.” -(정효구 『붓다와 함께 쓰는 시론』)
따라서 좋은 문학작품이 바로 작가의 존재 그 자체가 되는 이유다. 언어가 사회 소통의 도구가 되고, 세상이 언어가 이룬 문명의 결집체라 할지라도 문학작품에서만은 언어적 산물이라기보다는 그 시인과 그 작가의 삶, 존재 그 자체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랬을 때 비로소 문학작품은 언어라는 소통의 도구에서 벗어나 독자인 나의 세계를 승화시키는 존재의 울림이 될 수 있다.
이쯤에서 ‘사람들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까?’라는 처음 질문으로 돌아간다. 이를 패러디하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시인-작가들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까?’ ‘독자들은 문학작품을 어떻게 바라볼까?’라는 두 가지의 질문에 이르게 된다. 마침 이 소고의 대상인 시인 양소은이 보내온 ‘체험적 시론’에는 이를 의역할만한 단서들로 채워져 있다.
양 시인은 ‘경계의 여백’이라는 제목으로 진술한 체험적 시론에서 한 편의 시로 보아도 좋을 사유를 펼쳐 보인다. 시로 쓰는 시론인 셈이다. 이 소론의 전개에 도움에 된다고 판단하여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사다리를 타고 높은 곳을 오르는 꿈을 자주 꾼다. 언제나 마지막 발판을 딛고 올라서다 결국은 사다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지고 마는 꿈, 현실에서 나는 높은 곳을 두려워하는 버릇이 생겼다. 다음에는 꼭 올라서야지.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바닥에서 나는 나비가 되고 싶다. 사다리 끝은 시처럼 낭떠러지를 품고 있다.
언어는 형상을 입어야 한다. 가시화해야 한다. 시적 효과를 주기 위해서는 언어의 경계를 넘고 기존의 틀을 깨야 한다. 깊이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형상화하지 못한 채 밖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나뭇잎들이 비에 젖어 반짝인다. 겨울로 가는 길목에서 나무가 가지를 비워낸다. 빈 벤치와 주인 잃은 녹슨 자전거 위로 나뭇잎들이 날아든다. 풍경을 펼치고 날아드는 또 하나의 침묵, 이 이미지의 공간을 관찰이라고 하자. 새로운 시각으로 언어의 세계를 창조하는 진술과 묘사에는 의미가 숨어있다.
시는 언어의 옷을 입히는 것이다. 나는 도발적이며 개성 있는 시를 디자인 하고 싶다. 독특한 감각으로 객관적인 세계를 언어로 표현하고 싶다. 깊이 있는 울림과 이미지를 찾아 시는 내 삶을 오르내리고 있다.
*(각 단락 앞의 기호는 집필의 편의를 위해서 필자가 붙였음)
산문다운 진술이지만 시적 은유가 짙게 깔려 있다. 하긴 시인이 쓰는 산문 역시 시적 메타포를 지닌다는 것은 전혀 낯선 일이 아니다. 그런데 필자는 이 체험적 시론에서 앞에서 언급했던 ‘사람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볼까?’라는 필자의 질문을 마치 예견이라도 한 듯이 그에 대한 대답을 들려주고 있다.
㈎에서 시인은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바닥에서 나는 나비가 되고 싶다”고 했다. 현실[세계]에서 갖는 두려움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시인은 ‘나비’를 꿈꾼다. 이어지는 진술에서 그런 꿈이 결국은 시적 완성을 위한 과정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사다리 끝은 시처럼 낭떠러지를 품고 있다”는 진술이 이를 뒷받침한다. 양소은 시인은 세상을 나비의 꿈으로 바라보겠다는 선언으로 읽힌다. 나비의 꿈으로 세상을 읽는 시인이 자연스럽게 오버랩 되는 대목이다.
㈏에서 시인은 추상과 관념으로 얼룩진 개념의 나열이어서는 안 된다며, 스스로 시적 언어의 경계선을 설정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나는 아직도 형상화하지 못한 채 밖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고 고백한다. 양소은 시인이 지적한 밖은 어디일까? 역시 ‘세계’를 인식한 진술로 보인다. 세계를 형상화된 언어로 보고 싶은데 그 진경에 이르지 못하고 있음을 자각한 발언으로 보인다. 하긴 누가 있어 완성과 무류를 장담할 수 있겠는가. 모든 시인-작가들은 결국 천의무봉(天衣無縫)한 완성을 위한 도정에 있는 존재일 뿐이다.
㈐에서 시인은 “이미지의 공간을 관찰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언어의 세계를 창조”하겠다고 선언한다. 양소은 시인의 ‘바라봄’이라는 구체 행위에 대한 언급이다. 이미지를 구축하려는 사전 작업으로 ‘이미지의 공간’을 관찰하겠다는 것, ‘진술과 묘사’를 통한 언어 세계의 창조를 바라봄의 구체 행위로 인식한다. 그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안(詩眼)이 어디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에서 시인은, 시는 결국 언어의 옷을 입히는 작업임을 자각하면서 동시에 ‘도발적이며 개성 있는 시를 디자인’하고 싶다고 선언한다. 현대는 디자인(design)의 시대다. 이 디자인에는 매우 다양한 하위 개념들이 내포되어 있다. 이를테면 설계하다, 안(案)을 세우다, 계획하다, 밑그림을 그리다… 등의 방법으로 대상을 실용성 있으며 아름다운 모습을 갖추도록 변형-변용시키는 일체를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정치 행위는 국민의 행복을 위한 디자인 활동이며, 경제 행위는 보다 효율적인 재화의 획득을 위한 디자인 활동이며, 학문하는 일도 결국은 진리 탐구를 위한 디자인 활동이라고 해서 나쁠 것이 없다. 시를 쓰는 것 역시 언어를 활용한 디자인 활동으로 의역해도 마땅하다. 양 시인은 ‘어떻게’의 시적 방법론을 디자인의 개념을 차용하여 진술한다.
이 글 첫머리에서 필자가 언급했던 “사람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볼까?”를 빌어서 그에게 질문을 던진다. “양소은 시인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볼까?” 이에 대한 대답을 위에서 살펴본 체험적 시론에 근거해서 다음과 같은 대답을 끌어낼 수 있었다.
양소은 시인은 우화(羽化)를 꿈꾸며 디자인한 언어의 세계를 통해서 세계를 바라보고 있으며, 그런 작업의 결과가 바로 자신의 시세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그의 작품들로 대변한다.
나비춤을 추는 시심의 세계
번데기가 엄지벌레가 되려면 반드시 탈각하고 날개가 돋아야 한다. 둥지의 어린 새끼 역시 날개가 돋지 않고서는 감히 하늘을 나는 성체가 될 수 없다. 이를 우화(羽化)라 한다. 이를 비유하여 존재 자체가 하등 차원에서 보다 높은 단계로 승화되는 것을 우화에 빗댄다.
그래서 우화등선(羽化登仙)이란, 도교에서 추구하는 인간의 이상적인 단계로 ‘몸에 날개가 돋아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음’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인간은 생로병사의 온갖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도가적 수행을 통해서 비로소 신선이 되어 승천하는 모양은 바로 탈각의 상태이며, 불교적으로는 득도의 순간이 될 것이다. 환골우화(換骨羽化) 역시 도가적 발상이다. 인간의 속된 됨됨이를 바꾸어 몸에 털이 나고 비상할 수 있는 단계를 말한다.
이런 꿈은 인간의 오랜 소망이다. 다음 작품에서 그렇게 오래된 인간의 꿈이 어떻게 우화할 수 있는지 살펴본다.
휘청거리는 간격만큼 거리가 무너져요
얼굴과 얼굴이 안전선 밖으로 허리를 꺾어요
안간힘을 쓰는 잔가지들이 부러져요
나는 태풍에 떨어지지 않으려는 과일, 무게를 내려놓고 붙잡고 서 있을 거예요 무럭무럭 자라나는 직립이 흔들리고 있어요
바람 속으로 주저앉아 본 적 있나요 이파리들은 줄기가 되고 싶어요
기사 아저씨는 알알이 밀어넣어요 뒤로 좀 들어가세요 열매를 빈틈없이 매달아야 좋은 포도송이가 되지요
손잡이에서 가지가 자라나고
온종일 흔들리는 거리와 새순처럼 돋아나는 춤사위
과수원과 종점 가는 불빛과 허공 속으로
별들이 하루살이들이 들락거려요
손 베개를 해야 생각하는 사람과
애벌레처럼 잠이 드는 사람
껍질이 갈라터진 과일마냥
죽은 뒤에 오지요, 우는 남자와 눈가를 닦아주던 여자가
어젯밤에는 뒤따라오던 달이 얇게 웃었지요
어둠에 익어가는 포도송이
밤하늘에 이어폰을 대고 별을 들어요
수평이 꺼졌다 일어서는 버스
포도 꽃처럼 얼굴과 얼굴들이 얼기설기 피어있어요
- 양소은 「나비춤」 전문
나비가 흔들리며 끊임없이 춤을 추는 것은 추고 싶어 추는 춤이 아니다. 생활이라는 버스에 실려 가는 시적 대상들은 어쩔 수 없이 무력한 나비춤사위처럼 흔들릴 수밖에 없다. “기사 아저씨는 알알이 밀어넣어요 뒤로 좀 들어가세요 열매를 빈틈없이 매달아야 좋은 포도송이가 되지요”에 모든 상황이 은유되어 있다. 사람들은 세상을 어떻게 읽을까? 여기에 그 대답이 있다. 만원 버스나 지하철[혹자는 지옥철이라고도 한다]에서 부대껴 본 사람이라면 이런 진술이 어떤 상황인지 짐작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형편은 단순히 시적 상황을 드러내기 위해서 동원되지 않았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돈벌이의 수단으로 보고, 환물가치의 도구로 보는 발상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주저리주저리 매달려 환물가치를 셈하는 수확물[포도송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로 본다. 무력한 나비처럼 흔들리며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의 영혼이 어떻게 고귀하고 존엄한 존재가 될 수 있겠는가.
“인간의 몸과 영혼은 서로 떼어낼 수 없게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영혼은 살아 있는 몸의 형상이다. 몸이 죽으면 영혼 역시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스밴 브링크만 『철학이 필요한 순간』) 이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다. 존재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 우리[人間]에게 있다고 보았음을 브링크만이 인용하여 설명하는 대목이다. 도구적으로 쓸모 있고, 효용성이 있어 널리 이로운 존재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는 고유하게 그만이 지닌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는 인간관이다. 포도송이처럼 한 송이라도 더 실어야 하는 자본의 욕망에 의해, 혹은 사회의 전도된 가치에 의해 인간은 형편없는 나비춤을 출 수밖에 없는 존재로 전락하는 꼴을 날마다 목격하는 셈이다.
이러한 시적 상황은 결구에서 이렇게 호응한다. “수평이 꺼졌다 일어서는 버스/ 포도 꽃처럼 얼굴과 얼굴들이 얼기설기 피어있어요”와 완벽하게 짝을 이룬다. 인간은 무망한 수평의 꿈을 꾼다. 그러나 그 수평은 언제나 함정이나 험로를 만나기 마련이다. 요철 많은 세상을 요란스럽게 흔들리며 달리는 버스, 요지부동할 수 없는 짐짝 신세가 되어 굴곡 많은 도로를 질주하는 버스에서 뜻하지 않게 나비춤을 추어야 하는 ‘얼굴’들에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잃어버린 고유한 가치 대신, 환물가치로 전락한 포도나무 꽃으로 전락한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사람들은 언어라는 도구를 통해서 세상과 소통하겠지만, 이때 시인은 언어 그 자체가 된다. 화물신세로 전락된 인간, 형편없이 구겨진 영혼의 소유자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작업인 셈이다.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언어의 디자인이 아니라, 시적 화자 자신의 영혼이 어떻게 형편없이 구겨진 상태인가를 디자인함으로써, 현대 물질만능 사회에서 아무렇게나 구겨지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려는 작업으로 보인다.
이 작품이 다른 문명의 흔적들처럼 인간-사회에 대한 일종의 어필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만 보아서는 시가 보여주고 싶은 대목을 놓칠 수밖에 없다. 양소은 시인은 그랬다.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바닥에서 나는 나비가 되고 싶다’고. 이런 진술이 담고 있는 지향점은 무력한 ‘나비춤’이 아니라, 탈각한 뒤에 ‘우화등선’하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그리하여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와 의미가 있는 존엄한 인간의 속성이 회복된 존재이고자 하는데 있다.
삶과 죽음, 오늘과 내일, 현재와 부재, 절망과 위로…… 우리의 현실은 언제나 이 양자적 갈림길에서 헤매기 마련이다. 그럴 때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제쳐두고 유기체적 ‘삶’만을, 불확실한 내일보다는 확실한 ‘오늘’을, 육근으로 확인할 수 없는 존재의 엄숙성보다는 시시때때로 나를 자극하는 오온의 ‘감정’을, 쉽게 마주하는 절망보다는 그보다 더 쉬운 ‘위로’를 남발하며 시대의 질곡을 넘어가려 하는 게 보통 사람들의 일상이다.
그렇지만 시인은 그런 삶에 반역을 꿈꾸는 존재다. [별들이 하루살이들이 들락거려요]잃어버린 이상을 찾아서 하늘나라 방문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손 베개를 해야 생각하는 사람과]밤을 새워 고민하며 어둠을 밀어낼 빛의 사유를 멈추지 않는다. [애벌레처럼 잠이 드는 사람]언젠가 우화를 꿈꾸는 애벌레처럼 오늘의 현실에 좌절하는 대신 날개를 달고 비상할 수 있는 ‘나비춤’을 꿈꾸며 잠이 든다. [죽은 뒤에 오지요, 우는 남자와 눈가를 닦아주던 여자가]비록 현세의 삶이 끝난 뒤일지라도 간고한 존재의 불안과 위협과 두려움에 우는 남자의 건강한 서정과 이를 끝내 외면하지 못하는 건전한 위로의 손길을 기대하며 존재의 됨됨이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우화를 꿈꾸며 디자인한 양소은의 시세계가 보다 선명하게 우리의 독서 등불을 밝히게 됨을 실감할 수 있다. 비록 시대의 불운과 인간 존재의 위협 앞에서, 절망의 시간들[어둠]에 익숙한 나날[어둠에 익어가는 포도송이]일지라도 시적 화자는 어둠의 주파수에 채널을 맞추고 별이 들려주는 이상의 음악을 듣곤 한다.
사람들은 언어를 통해서 세상을 읽는다. 그렇지만 적어도 양소은 시인만은, 아니 세상의 모든 시인들은 언어 그 자체가 되기 위해, 언어 그 본질이 되기 위해 절망의 숨소리를 새겨들으려 밤하늘과 소통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시인들은 자신들이 구축한 언어의 세계 그 자체가 되기 위해 존재의 존엄성을 지켜내려 한다.
시간을 디자인하여 그린 세계
우리말의 묘미는 끝까지 들어보는 데 있다. 말[문장]의 핵심은 서술어에 있기 때문이다. 서술어가 말의 맨 끝에 오기 때문에 끝까지 들어보지 않고서는 발화자의 의도를 짐작할 수 없으며, 한 문장을 끝까지 읽어보지 않고서는 글쓴이의 의도를 건너짚을 수 없다.
그런 묘미 말고도 우리말의 함축성과 서정성이 녹아들어간 경우엔 본래의 사전적 의미와는 엉뚱하게 다른 해석의 길을 내곤 한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의 파장이 어디 우리말뿐이겠는가 마는 말을 어떻게 부리는가에 따라 심지어 시간마저도 디자인할 수 있다고 보는 사람들을 일컬어 시인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은 언어를 통해서 시간을 보려 하지만, 시인들은 시간 자체를 담은 언어를 생산해 내어 그 시간의 존재가 되는 셈이다.
시간뿐이겠는가. 시적 언어는 시적 정서를 담아내기 위해 저마다 사전의 울타리를 뛰어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의 소통에서 언어는 규범적이기를 소망하지만, 시인들의 말부림은 언어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말의 혁명을 꿈꾼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시의 문장들이 언어를 소통의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고역스러운 난해의 산물이 되고 만다. 그러나 시인들에게는 이런 문장이라야 언어가 소통이 아니라 존재의 그릇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인의 언어들은 물질을 시간으로 변용시키기도 하고, 시간을 구체적인 형상으로 옷을 입히기도 한다. 소위 언어가 시적 진실을 위해 디자인 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양소은 시인의 다음 작품을 접하면서 그런 생각이 굴뚝처럼 일었다.
네게 빠졌다고 했을 때 너는 피식 웃었다
한 번도 빠져본 적 없는 내 눈동자를 빠뜨린다
얼마나 깊을까
숫기 없는 눈을 감아버리자
어둠이 스며드는 투명함
한 발짝 물러선다면
뒷걸음이라면
낯모르는 연인이라면
모두가 낯설어진다면
비 오는 날 너를 만나
어쩔 수 없이 캄캄한 밤을 지낸다면
빈 교실 같은 허공이 끌고 간다
도수 높은 안경
시선이 내려앉는 현기증에
계단이 있다
고요가 깨어지는 추락의 깊이에서
내가 네게 빠졌다고 했을 때
너는 피식 웃었다 별이 많은 곳에서
유리창에 너를 그린다
내 안에 네가 흘러내린다
물결무늬 속으로 아침이 하얗게 오고
나는 붉은 장미로 사라진다
지구가 기울어진다
우주 밖에서 나는 너의 그림이다
- 양소은 「시간의 그림」 전문
양소은 시인이 자선한 대표시 다섯 편에 포함된 작품이다. 우선 언어를 디자인하고자 하는 의도가 잘 드러나 있다. 이런 작품을 대하면서 필자의 고민은 다른 데 있다. 이 작품세계가 담고 있는 섬세하기 그지없는 시적 정서에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완전히 푹~ 빠지고 말았다. 고민은 바로 이 대목이다. 그렇게 시적 정서에 심취하여 음미하고 그 가녀린 감성의 줄타기를 즐기면 그만일 터인데, 이런 감정의 공유상태를 문자화하는 일이 난관인 것이다. 어떻게 시적 화자와 시적 대상 사이에 오고간 감성의 파동을 잡아낼 수 있단 말인가?
그 감성의 파동은 물결보다도 더 부드럽고 잔잔하며, 그 서정의 파노라마는 전파보다도 더 확실한 파동을 지녔으며, 그 섬세한 정감의 지느러미는 물고기보다 더 유연한 유선형을 지녔음에 틀림없다. 시적 화자가 시적 대상에게 건네는 이 파동과 파노라마와 유선형의 서정적 실체를 양 시인은 참 절묘하게도 디자인하여 필자처럼 둔감한 사람들에게도 선명한 그림으로 보여준다.
필자도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이 작품의 열쇠 말은 바로 ‘빠지다’이다. 우리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고 했다. 우리말의 문장은 끝까지 읽어봐야 한다고 했다. ‘빠지다’는 여러 의미망을 거느리고 있다. <①물속이나 어떤 깊숙한 데에 떨어져 잠기거나 잠겨들어 가다 ②정신이 아주 쏠리어 헤어나지 못하다 ③어려운 처지에 놓이다 ④그럴듯한 말이나 꾐에 속아 넘어가다 ⑤잠이나 혼수상태에 들게 되다> 이상은 어문각에서 발행(1992년)한 우리말큰사전에서 풀이한 내용인데, 전체 풀이의 절반도 다 옮기지 못한 내용이다. 이 작품을 정독하기에 필요한 요소만을 발췌해 봐도 이렇게 다양한 의미망을 지닌 채 ‘빠지다’에 빠져 들어간다.
이 작품에서 드러난 시적 진술들이 대체적으로 앞에서 열거한 ‘빠지다’의 의미망에 포착되는 의미역을 지니고 있다. 이 작품의 기본 구도는 이렇다. 《시적 화자[나-A]가 시적 대상[너-B]에게 빠진 시간이 이제는 그림[C]로 남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A가 B에게 빠진 시간들을 시적 화자는 그림[image or design]으로 남겨둔 셈이다. 역시 ‘빠지다’가 문제다. 그런데 그 빠진 상태를 앞에서 국어사전이 열거하는 ‘빠지다’의 의미망 정도로 해석해도 훌륭한 의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를 그렇게 읽는다는 것은 매우 건조한 독서법이다. 지나간 시간, 흘러가버린 옛일, 과거사 등은 돌이킬 수도 없고, 반복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 정서들을 흔히 우리들은 추억이라고 부른다. 추억을 왜 다시 소환하는가? 과거의 시간에 사건이 더해졌을 때 비로소 추억이 될 수 있다. 그 추억을 재 소환하는 것은 사건의 단순한 재구성이나 반복의 심리만은 아니다. 더구나 예술작품에서 추억을 끌어내는 것은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를 지향하려는 심리가 매우 강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추억을 소환하는 심리적 환경 중의 하나가 외로움일 수 있음은 자명하다. 외롭지 않다면 추억을 재 소환하는 일이 흔치 않다. 현재를 주무하기 바쁜 정서는 흘러간 물로 물레방아를 돌리려는 여유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연애의 중요한 한 부분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사랑에 빠진다고 해서 우리의 눈이 멀지는 않는다. 하이데거의 말마따나, 사랑은 우리가 사랑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볼 수 없었을 것들을 ‘보게’한다.”(라르스 스벤젠 『외로움의 철학』)
스벤젠이 하이데거의 말을 인용해서 사랑에 빠진 심리상태를 설명한다. 양소은 시인도 [사랑에]빠지지 않았더라면 볼 수 없었던 ‘시간들’을 다행히(?)도 사랑에 빠진 덕분에 이처럼 섬세한 ‘시간의 그림’을 그려놓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그림들이 이제는 “우주 밖에” 있는 그림이긴 하지만……, 그래도 양 시인은 도무지 볼 수 없는 ‘시간’조차도 한 폭의 액자에 담긴 그림처럼 ‘보게’해 준다.
그래서 시적 화자가 남긴 시간의 그림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시인들이 어떻게 언어적 존재가 되는지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시적 화자가 겪은 실연 스토리를 추적하자는 것이 아니다. “사랑과 우정을 표현할 수 있는 자만이 외로움을 느낄 수 있으며, 외로움을 느낄 수 있는 자만이 비로소 그의 영혼도 절망하지 않기 때문이다.”(라르스 스벤젠) 바로 이 대목에서 언어로 소통하는 사람과 언어 그 자체가 되는 시인과의 차별화가 가능해 지는 것이 아닐까.
A가 어떻게 B에 빠졌는가를 살펴볼 차례다. 그것은 그림 C로 그려져 있다. B의 그림이 외로움의 실체로 그려져 있다. B에게 A의 눈동자를 빠뜨려 봤다. 그랬더니―――
―B는 A를 “어둠이 스며드는 투명함”으로,
―B는 A를 “빈 교실 같은 허공으로” 끌고 간다.
그렇게 해서 A에게 남은 B의 그림 C는 “내 안에서 네가 흘러내린다” “붉은 장미로 사라진다” 그런 그림들은 마침내 “지구가 기울어진다/ 우주 밖으로 나A는 너B의 그림C”가 된다.
사랑의 극단적인 이상화의 대척점에는 냉소주의가 있다고 했다. 앞에서 인용했던 라르스 스벤젠의 탁견이다. 이제는 A가 빠졌던 B의 그림이 현실에서는 도무지 작용할 수 없는[우주 밖] 그림이 되었다면 냉소주의라고 규정해도 변명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양 시인은 전혀 다른 결구를 마련해 두고 있다. 즉 한때 나A가 빠졌던 깊이를 알 수 없는 사랑의 심연 너B가 나의 그림이 아니라, 나A가 너B의 그림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지구가 기울어진, 우주 밖에서 너의 그림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구가 바로 선다고 해도 이제는 내가 너의 그림이 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냉소주의는커녕 당당한 현재의 창조요, 의연한 미래의 비전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복선은 앞에서 잘 마련해 두었다. “나는 붉은 장미”로 사라진다고 선언하지 않았던가! 극적[시적]반전으로 멋진 결구를 이룬다.
언어 그 자체로 디자인된 존재
음악적 리듬감은 시의 생명이다. 당연한 이야기를 새삼스럽게 되풀이하는 이유는 현대 시들이 그 당연한 특성보다는 의미의 깊이로 주제의 깃발을 내세우려는 경향이 짙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다 리듬감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의미의 깃발도 그 색채가 선명한 작품을 만나면 우선 반갑다.
「식탁의 카덴차」가 그런 작품으로 읽혔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cadenza는 협주곡에서 독주 악기 연주자가 오케스트라의 도움이 없는 가운데 연주의 기교를 마음껏 발휘하여 연주하는 부분을 말한다. 작곡자가 카덴차 부분을 작곡하지 않고 독주자에게 맡겨두는 협주곡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작곡자가 이미 작곡해 둔 부분을 연주한다. 그래도 이 카덴차 부분은 독주악기 연주자의 기교를 보여주거나 그 자유분방한 기교를 과시할 수 있어 협주곡의 별미로 여겨진다.
도마에는 도닥도닥 말발굽 소리, 저음의 콘트라베이스가 흘러나오는 전자레인지, 개미처럼 기어 다니는 깨소금, 공인 양 굴러다니는 양파, 라의 목소리를 닮은 냄비
오 헨리의 나뭇잎이 식탁에서 빛난다 솔레미 도, 솔레미 파, 파카글라스 위로 내려앉는 촛불, 창문에 새 울음이 스민다 저녁을 먹을 때마다 관절이 주저앉은 까만 냄비 속으로 투신한 꽃게들, 진정한 식사에 대해 몸을 달군다
숟가락을 쥐고 젖은 눈빛을 던진다 기별 없는 한 끼를 걸어 나와 파도가 건너뛰는 노을, 불빛 따뜻한 밥 한 그릇으로 덮을 수 없는 찔레꽃 이야기를 기웃거렸을 어머니, 헛기침 소리가 텅 빈 몸을 끌고 간다
식탁이 기다리는 저녁, 무반주의 입을 벌리고 신음을 삼킨다 금 간 접시가 음표들 사이에서 틈을 숨긴다 하루의 음계 속 식탁은 얼마나 위대한 무대인가 문득, 어둠 속으로 숟가락을 놓친다
- 양소은 「식탁의 카덴차」 전문
굳이 행복한 삶이라 하지 않고, 조금 유보적으로 말해서 ‘자유롭고 원만한 삶’이란 무엇일까? 식탁이 차려지는 자유분방한 리듬감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다가 얼른 이 망상을 접는다. 유기체는 먹을거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먹는다는 것은 살기 위해 먹기도 하겠지만, 역설적으로 보면 죽음에 대항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먹는다는 것은 먹지 않으면 죽기 때문에 그 죽음에 맞서 싸우는 행위인 셈이다.
그런 행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식탁의 평화’가 가능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네 일상은 그런 형편에서 한참 멀다. 시대의 대세는 먹지 못해 굶어죽은 귀신 얼굴보다는 너무 먹어서 비만으로 병든 사람들이 넘쳐난다. 그리고 그런 현상을 부추기기라도 하듯이 오늘도 내일도 소위 ‘먹방’으로 날이 새고 날이 진다. 참으로 저급한 먹방이 시대의 대세가 됐고, 금수강산은 먹을거리 천국으로 전락한지 오래며, 누가 얼마나 많이 먹느냐가 볼거리의 영웅이 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피상적인 소감이다. 이 작품에서 1연에서는 그런 가능성으로 인생의 행복한 삶을 디자인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런 발상과 언어적 장치는 2연에서도 이어진다. ‘마지막 잎새’같은 ‘나뭇잎’이 걸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평화와 안식이 요리되는 식탁 풍경이 매우 리드미컬하다. “솔레미 도, 솔레미 파, 파카글라스 위로 내려앉는 촛불” 등이 동원되어 행복한 식탁이 잘 디자인되어 간다. 여기까지만 해도 그랬다. ‘자유롭고 원만한 삶’이란 이러한 풍경 속에 자리 잡고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3연에 오면서 카덴차는 아연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리듬으로 변한다. “숟가락을 쥐고 젖은 눈빛을 던진다 기별 없는 한 끼를 걸어 나와 파도가 건너뛰는 노을, 불빛 따뜻한 밥 한 그릇으로 덮을 수 없는 찔레꽃 이야기를 기웃거렸을 어머니, 헛기침 소리가 텅 빈 몸을 끌고 간다” 1, 2연과는 사뭇 다른 리듬감이 펼쳐진다. 밥 한 끼의 행복에 젖을 수 없는 빈곤과 허기가 진하게 독주자[시적 화자]의 연주를 비극적 정조로 끌어 내린다. ‘찔레꽃 이야기’에서 절정을 이룬다. 보릿고개가 한창이던 시절 찔레꽃은 굶주림의 상징이었다. 이른 봄 하얀 찔레꽃이 낭만의 상징이 아니라, 극도로 궁핍했던 시절의 상징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른 봄 찔레꽃나무 순으로 허기진 배를 채웠던 시절의 카덴차는 아무래도 행복한 삶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4연에 오면 이런 리듬감과 정조로 이루어진 삶의 실체가 ‘식탁의 상실’로 인하여 무너지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식탁이 기다리는 저녁” “무반주의 입을 벌리고 신음을 삼킨다” “금 간 접시”들 사이에서 틈을 숨기는 사이, “하루의 음계 속 식탁은 얼마나 위대한 무대”인가를 깨닫는 순간, 시적 화자[독주자]는 “어둠 속으로 숟가락”을 놓치고 만다. 유기체의 삶이 가능한 것은 숟가락[먹는 행위]이 있어 가능하다. 그것을 놓치는 순간 더 이상 ‘죽음에 저항’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그래서 그런다. 행복한 삶, 거기까지는 아니되 유기체로서 자유롭고 원만한 삶은 바로 ‘식탁 위의 카덴차[자유분방한 삶의 연주]가 이루어질 때만이 가능한 법이다. 이런 당위적 가치를 그리고자 이 작품이 기여하고 있을까? 그보다는 양 시인의 언어적 디자인은 음악적 연주 행위인 ‘cadenza’가 삶의 생존 행위로 이어질 수 있는, 삶의 리듬감에 대한 자유로운 발상을 그려낸 것으로 보인다.
다음 작품은 말의 소용이 반드시 소통의 의무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디자인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런 의도가 매우 코믹하지만 밀도 높은 정감을 선물하고 있다. 표준어만 일방적으로 존중되던 세계에서 방언의 가치가 조금씩 사람들의 입에서 논의 되고 있는 시점이어서 더욱 시적 울림이 있다.
일례로 제주도에서는 제주도 방언으로 TV뉴스를 전하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우리 같은 뭍의 사람이 이런 방송을 시청한다면 아마도 통역이 필요하거나, 자막을 참고하지 않으면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제주도 사람들에게는 이보다 더욱 친근하고 반가운 뉴스가 또 있겠는가? 그러므로 방언은 낙후되고 미개한 ‘사투리’가 아니라, 한 지방 사람들의 삶이 온전히 녹아들어가 형성된 역사의 산물인 것이다.
한때는 일정 지역의 방언으로 사람을 차별한 시대도 있었다. 지금이라고 이런 부당한 세태가 완전히 개선된 것은 아니지만, 의도적으로 그런 세태를 조장하고 방관했던 획일주의 시대에 비하면 많이 개선된 셈이다. 제주도 방언으로 전하는 뉴스 못지않게 ‘긍게’라는 전라도 방언으로 그려낸 사람살이의 말맛이 감칠 맛 나는 경지를 들여다본다.
저년은 커서 뭐시 되면 웬만한 사람은 쳐다도 안볼거시여 긍게, 머덜라고 아짐은 애들 쌈박질에 어른이 나선당가요 옴마 쪼깐한 콩새 같은 것이 지들 할매 닮아 저렇게 싸납당께 긍게, 할매가 삼대독자 우리 아버지 혼자서 키웠지라 핫따 작것! 어찌야 쓰까이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거시기 좀 보더라고 긍게, 아짐맹키로 자식 키우면 안 되지라 숨바꼭질하다 지가 술래 되니께 꼬라지 내고 기연시 가잖아요 긍게, 인정 없이 머리끄댕이 땡기고 싸웠지라
미자는 가실지나 철 지난 우체통처럼 공장으로
뙤작뙤작 말꼬리 공구리던 나는
아짐 말대로
인대 깔래 암도 쳐다보지 않는 작것이 되었다
갈대가 피면
뽀짝
바다 쪽으로 몸을 기웃거리는
긍게잉, 참말로
부아가 치밀 때마다
탱자나무 울타리처럼 몸 꼿꼿이 세우는
줄포, 고샅 허리춤을 휘어잡는다
- 양소은 「긍게」 전문
‘긍게’는 ‘그러하니’나 ‘그러하니까’의 준말로 전라도지방에서 흔히 쓰이는 입말이다. 말의 어두에 쓰여 하고자 하는 말을 끌어내는 역할을 하거나, 남이 하는 말의 끝에 붙여 그 사람의 말에 동의하는 경우에 쓰이기도 한다. 앞 내용이 뒤 내용의 이유나 근거가 될 때도 이 말을 먼저 혹은 말끝에 써서 앞뒤 말의 이유나 근거를 강화시키려 할 때 쓰인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그런 언어적 쓰임새가 문제가 아니다. 시적 화자와 시적 대상 사이에 주고받는 말투가 영락없는 전라도 육두문자 그대로다. 마치 판소리 아니리의 한 대목을 듣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이런 말씨로 전하는 뉴스를 통역이나 자막 없이 온전히 알아들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코 전라도 중에서도 전라북도 사람임에 틀림없다. 양소은 시인이 이런 말씨를 거침없이 구사하여 우리네 삶에 진득하게 녹아들어가 있는 혈육 간, 혹은 동네 고샅 이웃사촌끼리 주고받는 농밀한 정감을 그려내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전북사람임일 것이며, 이를 가감 없이 금방이라도 골목길에서 듣는 것처럼 공감하는 필자 역시 전라도 중에서도 전북사람임이 분명하다.(양소은 시인의 쌈터는 전북 부안이다)
말은 이처럼 소통만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긍게’가 디자인하고 싶은 것은 ‘의사소통’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살이의 ‘다채로움’에 있는 것이다. 표준화된 언어의 질서에만 행복이 있고 품격이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색깔과 무늬를 지닌 채, 저마다의 공간과 시간을 지나오면서 삶의 역사를 이루어낸다. 그 구구절절한 인간사를 어떻게 획일화되고 표준화된 ‘질서’로만 그려낼 수 있겠는가?
양소은 시인은 전라도 방언이라는 매우 감칠맛 풍부한 말씨를 통해서 사람살이의 역사를 풍성하게 디자인하는데 성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에 동원된 방언들 하나하나에는 다른 지역에 쌈터를 둔 사람들에게서는 모두지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무늬와 색깔을 지니고 있다. 그 삶의 눅진함과 질박함을 다른 어떤 고상한(?) 표준어로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긍게, 응~!
에필로그
사람들은 어떻게 세계를 바라볼까? 이 질문에 대하여 필자 나름의 대답을 마련해 봤다. 이런 대답을 근거로 양소은 시인의 시세계를 거칠게나마 조망해 봤다. 양 시인은 우화를 꿈꾸며 언어를 디자인하는 방법으로 세계를 바라본다고 전제하였다. 이런 전제에 충실한 응답을 보여주는 몇 작품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어둠에서 벗어나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나는 것은 모든 애벌레[존재]의 꿈이다. 그것을 양 시인은 언어를 디자인함으로써 우리에게 참하고 의미 있는 신세계를 펼쳐 보여준 셈이다.
어느 시인-작가 치고, 그들이 생산해 낸 창작품 치고 신세계 아닌 작품이 어디 있을까마는 양 시인이 견지하고 있는 견고하면서 개성적인 시세계는 전라도 방언 같은 감칠맛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그렇게 천착한 길의 끝이 우화등선(羽化登仙)이건, 환골우화(換骨羽化)건 시인은 언어를 소통의 도구로 여기기보다는 존재의 집으로 여기는 편에 서 있는 존재임을 그의 작품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현실에 대한 부조화와 부적응을 발판으로 시인-작가들은 끊임없이 일탈을 꿈꾼다. 그 일탈이 언제나 자기부정에서 출발하여 존재의 진실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이어지곤 한다. 그런 과정에서 생산된 작품들은 그러므로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존재의 그릇인 셈이다.
양소은 시인이 자선한 대표작 다섯 편과 신작 다섯 편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나아가 그의 처녀시집 『노랑부리물떼새가 지구 밖으로 난다』에서도 아름다움이 사유와 맞물려 문학적 진실로 승화된 세계를 유감없이 만끽할 수 있었다. 그 시집에서 진술한 시인의 말이 인상적이다. “변산반도,/ 가슴을 물리고/ 나를 자라게 하는// 시간을 다 받아 적지 못하고/ 곰소 소금밭을 지나/ 모항 파도소리/ 줄포 갈대숲 바람에 대하여/ 읽고 간다”고 하였다.
그러고 보면 우화를 꿈꾸며 존재의 비상을 디자인할 수 있었던 양소은 시인의 원동력은 결국 시간과 공간이 빚은 도가적 수양 과정이었음을 겨우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런 수행심이 문학적 진실에 한 발 더 다가서는 날개가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