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첫 수필 문학은 11세기 초 헤이안 시대의 궁녀 세이 쇼나곤의 《마쿠라노소시(베갯머리 서책)》라고 알려져 있다. 천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이어져 와 지금까지도 많은 일본인들에게 읽히고 있는 만큼, 수필이 일본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아온 문학 장르인지 알 수 있다.
일본의 수필은 일상의 소재를 가지고 그저 생각나는 대로 자유롭게 쓴 것이 많다. 일본 3대 수필 중 하나인 《쓰레즈레구사》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무료하게 온종일 벼루 앞에 앉아, 마음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시시한 것들을 생각나는 대로 쓰고 있으니……”라는 유명한 구절은 일본 수필 문학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데, 그 속에서 자연과 일상을 대하는 일본인의 태도와 삶의 방식을 느낄 수 있다.
화려한 귀족 문화를 꽃피웠던 헤이안 시대에 시작된 만큼, 일본의 수필 문학은 섬세하고 기교적인 면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대상에 주관적으로 몰입하면서 공감을 나누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객관적이고 관조적으로 자연과 사물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세속을 벗어난 불편함 속에서 한적함과 여유로움을 느끼기도 하고, 덧없고 쓸쓸함 속에서 삶의 본질적인 모습을 보기도 하고, 죽음을 앞둔 이의 체념과 비애 속에서 당연한 듯 누리는 하루하루의 소중함을 되돌아보기도 한다.
나쓰메 소세키, 다자이 오사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등을 비롯해, 도쿠토미 로카, 구보타 만타로 등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 총 열아홉 명의 수필 마흔다섯 편을 통해 일본 고유의 정취, 특히 애절함, 쓸쓸함, 무상함, 소박함, 한적함 등 일본 특유의 정서와 미의식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늘 가까이에 있는 일상과 자연이라도 찬찬히 바라보고 가만히 귀 기울이면, 뜻밖의 발견과 새로운 생각을 던져줄 때가 있다. 그러한 것들이 무미건조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삶을 여유롭고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수필을 청한(淸閑)의 문학이라고 했다. 이 책을 읽는 독자 한 분 한 분의 마음속에, 삶 속에, 한 줄기 맑고 한가로운 바람이 불어들기를 바란다.
이제 서른일곱 살이 됩니다. 얼마 전에 어느 선배가, 자네, 용케 그럭저럭 살아왔군, 하고 진지하게 말했습니다. 나 자신도 서른일곱까지 살아왔다는 것이 거짓말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 다자이 오사무 「봄」 중에서
그는 이 글을 쓰고 나서 얼마 후 〈점귀부〉, 〈겐카쿠 산방〉에 이어 〈갓파〉를 쓴 것이다. 그리고 그 후, 그는 죽었다. ……
어쩌면 그때, …… 이미 그때 그는 죽음을 의식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싸우기라도 하듯 힘껏 수레를 미는” 그의 모습은 너무도 비참하다. 흐린 하늘 아래,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어떻게 하면 자신을 단단히 붙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까? …… 울려고 해도 이제는 눈물이 다 말라 버린 해협의 공허한 눈을 들고, 그저 멀리 앞길을 지켜보는 그의 뺨의 납과 같은 차가움이여…….
--- 구보타 만타로 「연말」 중에서
그래도 희망의 축소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앉는 것은 고사하고 한 시간만이라도 고통 없이 편안히 누워 있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기쁠까” 하는 것이 어제오늘의 내 희망이다. 작은 바람일까?
이제 내 희망은 더는 작아질 수 없을 만큼 작아졌다. 이 다음 차례는 희망이 영 (零) 이 되는 시기다. 희망이 영이 될 때, 석가는 이를 열반이라 하고, 예수는 이를 구원이라 하겠지.
--- 마사오카 시키 「묵즙일적」 중에서
나는 지금까지 소위 선종 (禪宗) 의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을 오해하고 있었다. 깨달음이란 어떠한 경우에도 아무렇지 않게 죽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깨달음이란 어떠한 경우에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 있는 것이었다.
--- 마사오카 시키 「병상육척」 중에서
뭘 입고 있었는지, 어떤 머리 모양을 하고 있었는지는 거의 알 수 없었다. 눈에 비친 것은 단지 그 얼굴이다. 그 얼굴은 눈도, 입도, 코도, 하나하나 따로 서술하기가 어렵다. 아니, 눈과 입과 코와 눈썹과 이마
가 함께 하나가 되어, 오로지 나 한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얼굴이다. 백 년 전부터 이곳에 서서, 눈도 코도 입도 한결같이 나를 기다려 온 얼굴이다. 백 년이 지나도 나를 따라 어디까지나 갈 얼굴이다. 말없이 말을 하는 얼굴이다.
--- 나쓰메 소세키 「마음」 중에서
봄 안개는 사람의 마음을 칭칭 감아서 사바세계의 한복판으로 데려간다. 가을 안개는 금욕적이고 은둔적인 기분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아직은 가을 안개 쪽을 좋아한다.
가끔은 차분한 머리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 미야모토 유리코 「가을 안개」 중에서
가끔씩 먼지 털듯이 하나하나 집어내는 비평을 받을 때가 있다. 괴롭기도 하고 그런 것에 남보다 곱절은 더 영향을 받는 탓인지, 완전히 넋이 나가 버려 썩은 물고기처럼 이삼일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버린다. 내 작품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나 자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한동안 갈 곳을 잃어버리지만, 다시 책상 앞에 앉아서 한 자 한 자 쓰기 시작한다. 나에게 종교라는 게 있다면, 그저 한 자 한 자 쓴다, 라는 것이다.
--- 하야시 후미코 「생활」 중에서
‘생명’이라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변덕스럽고 헛된 표현을 가진다고 해도, 거기에는 아름다움이 있고,
힘이 있고, 반짝임이 있다. 온갖 사물 중에서 풀로 태어난 생명만큼 겸손하고 소박하고 정직하고 또한 참을성이 강한 것은 많지 않다. 풀은 나에게 그야말로 ‘말’이다. 잠깐이라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신기한 존재이다. 발굽이 없기에 늘 한자리에 서 있는 작은 짐승이다. 목청이 없기에 늘 침묵하고 있는 작은 새이다.
--- 스스키다 규킨 「풀 베는 냄새」 중에서
“도쿄에는 별님이 없어.”
그렇게 우리 집 아이는 자주 말한다.
“아아, 난 서재가 없구나.”
이것은 아이의 아버지인 내가 하는 탄식이다.
--- 기타하라 하쿠슈 「서재와 별」 중에서
인생은 생각하는 인생보다 보는 인생이다. 듣는 인생이다. 보는 것에서, 듣는 것에서, 여러 가지 현상이 그 의미를 풍부하게 했다.
눈만 밝으면 된다. 눈이 감겨 있다면, 귀만 밝으면 된다. 귀도 들리지 않는다면, 만져서라도 인생을 알고 싶다.
--- 다야마 가타이 「아이와의 여행」 중에서
지금은 오후 4시다. 구름 사이로 흘러나와 서쪽의 햇빛이 쨍하고 비쳐왔다. 뜰에 한가득 지기 시작하는 코스모스, 피기 시작하는 국화, 아직 남아 있는 다홍색 맨드라미, 벌과 등에가 떼 지어 있는 팔손이나무의 크고 하얀꽃, 희미하게 노란색을 품은 잔디, 잎이 갈색으로 마르고 시든 싸리나무와 자작나무와 낙엽송, 다들 석양에 쓸쓸히 빛나고 있다. 선명하지만, 울고 있다. 아름답지만, 쓸쓸하다.
오늘은 쓸쓸한 날이다.
--- 도쿠토미 로카 「가을, 쓸쓸하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