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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8. 묵상글 (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 비어서 깨끗한? 채워서 더 깨끗한!.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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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8.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비어서 깨끗한? 채워서 더 깨끗한!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어제 예수 성심 대축일에 이어 오늘 티 없으신 성모 성심 축일을 지냄은
당연하다고 여러분도 생각하실 것이고 그 이유도 여러분이 다 아실 겁니다.
예수님 가신 길을 가장 완전히 따르신 분이 어머니 마리아시니
예수 성심과 제일 많이 닮은 분도 당연히 어머니 마리아시지요.
그런데 거룩한 마음이라는 면에서는 두 분의 마음이 같지만
그 거룩함이 조금은 다른 것 같습니다.
성모 성심에는 ‘티 없이 깨끗하신’이라는 말이 붙으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모 성심은 깨끗하심/정결에 방점이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깨끗하신 성모 성심은 주님을 위한 거룩한 마음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 성심이 주님께서 인간의 죄 때문에 마음에 상처받으시면서도
인간구원을 위해 당신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마음 곧
인간을 향한 마음인 데 비해 성모 성심은 주님을 향한 마음입니다.
주님을 향한 마음이고,
주님을 위한 깨끗한 마음이라고 하니 즉시 생각나는 것이 빈 구유입니다.
비어서 깨끗한!
주님께서는 더러운 것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안에서 곧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그런데 성모님 마음에는 이런 것들이 일절 없어서 깨끗한 마음입니다.
이런 것들을 마음에서 다 비어내어 깨끗한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을 모셔서 깨끗한 것입니다.
빈 구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주님을 모신 것이 중요한 것처럼.
그러므로 저는 오늘 강론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비어서 깨끗한!
채워서 더 깨끗한!
욕심을 비어서 깨끗한!
사랑으로 채워서 더 깨끗한!
주님을 모셔 들여서 더욱더 깨끗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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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8.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배우자와의 잦은 다툼으로 이혼을 염두에 두고 있는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지금 얼마나 힘든지를 친한 친구에게 말했는데, 그 친구가 집단 상담을 권유합니다. 그곳에 한 다섯 번만 나가보고서 결정하라는 것이었지요.
집단 상담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람들이 모두 자기의 어려움을 인정해 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힘든지 그래서 이혼할 수밖에 없음을 맞장구 쳐 줄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자기 생각과 달랐습니다. 그들 대부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이유로도 이혼해요? 자매님이 더 잘못했네요.”
뜻밖의 대답에 자기를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자기 배우자에게 문제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더 문제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만나면 자기 이야기만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말을 듣는 상대방은 이야기의 확장이 싫어서 그냥 맞장구만 쳐 줄 뿐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함께 이야기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나 중심의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야 상대를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이런 마음을 갖기 위해 우리가 모범을 삼아야 하는 분이 있습니다. 결코 자기 생각을 내세우지 않으셨던 분,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요셉 성인은 관습에 따라 파스카 축제 때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축제가 끝나고 다시 돌아가다가 당시 열두 살이던 예수님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지요. 그리고 사흘 만에 성전에 율법 교사들과 토론하고 있는 예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의 마음을 생각해 보세요. 성모님과 요셉 성인의 마음이 얼마나 새카맣게 변했을까요?
더군다나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화가 날 만도 합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는 자기 애타는 마음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을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이에 대해 복음은 이렇게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나 중심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나만 옳고 너는 틀렸다는 마음을 품는 순간, 상대의 뜻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물론 내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의 뜻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의 마음을 기억하고 그 마음을 우리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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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나에게 두 다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는 없었다(제니퍼 브리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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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8.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루가 2, 51)
우리는 어제 ‘예수님의 성심’을 기린 데 이어, 오늘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 성심’을 기립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 성심”은 두 가지 의미로 묵상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소명과 관련’하여, 성모님께서는 특별한 은총과 특권으로 티 없이 깨끗하십니다. 이에 대해서 <교회헌장>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온전히 거룩하신 분, 죄의 온갖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신 분”(56항)
특히 교황 비오 9세께서는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원죄 없으신 잉태).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잉태되시는 첫 순간부터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특권으로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다”
또한, 이를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493항).
“성모님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일생 동안 어떤 죄도 범하지 않았다”
<또 하나>는 ‘믿음과 관련’하여, 성모님께서는 티 없이 깨끗하십니다. 곧 성모님께서는 믿음에 있어서 한 점 의혹이 없는 갈림이 없는 마음, 온전한 마음으로 티 없이 깨끗하신 성심을 지니셨습니다.
이를 <교회 헌장>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교회 헌장 56항 참조).
‘성모님께서는 온전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당신 아드님의 인격과 활동에도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셨습니다.
그리하여 아드님 밑에서 아드님과 함께 구원의 신비에 봉사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모님의 마음 안에는 믿음이 가득 차서 희망을 노래하셨습니다. 언제나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신명 나셨습니다. 언제나 야훼 하느님께 대한 갈망이 가득 차 있었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희망하셨습니다. 당신을 ‘하느님 뜻’ 안에 가두시고, 말씀이 당신 안에서 이루어지기만을 고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비록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할 때마저도,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루가 2, 51). 이토록, 믿음을 품으셨습니다. 말씀을 품고 간직하셨습니다. 가슴 속 품은 하느님의 뜻에서 희망을 길러 올리셨습니다. 참으로, 믿음과 희망에 있어서 티 없이 깨끗하신 성심이셨습니다.
우리의 마음 역시 성모님의 ‘티 없으신 성심’으로 채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믿음의 ‘피앗’이 흘러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니, 성모님의 ‘그리스도를 품으셨던 그 주물의 틀’에 우리가 가두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태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오로지 말씀께 희망을 둘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오직 하느님의 뜻만을 간직하며 신명 나기를 바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
티 없으신 성모성심이여!
믿으셨으니 참으로 복되십니다.
당신께서 오로지 당신 아드님께만 믿음과 희망을 두셨듯이,
저희도 오로지 당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만 믿음과 희망을 두게 하소서.
오 어머니시여,
당신 아들 예수님을 품었던 그 주물의 틀에 저희를 받아들이시어
저희도 당신 아들의 성심 안에 흠뻑 젖어들게 하소서.
오늘 제 형제들을 당신 성심의 가슴으로 끌어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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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8.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어머니, 성모님의 마음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성모마리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모마리아를 가득 채워준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또한 성모마리아는 그 말씀의 기쁨을 몽땅 전달해 주십니다. 성모마리아는 경청의 달인이셨습니다. 만일 우리도 경청하는 습관을 몸에, 배게 했다면 매우 많은 문제를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루카복음 2장19절에는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였다.” 2장 52절에는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루카2,52).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오묘한 뜻 앞에서 성모님께서 얼마나 깊이, 겸손하게 서 있었는가를 잘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을 내세우지 않으십니다. 성모님은 언제나 하느님의 뜻 안에서 고요하게 움직이시는 사려 깊은 분이십니다.
성모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하셨고, 성령께서 당신을 완전히 차지하시고 당신 안에서 원하시는 대로 활동하실 수 있게끔 자신을 성령의 손에 내어 드리신 분이십니다. 성모님의 겸손과 경청, 의탁의 자세는 우리 믿음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 앞에 가난하고 겸손한 자로 서 있을 때, 우리 마음속에서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유롭게 일하실 수 있게끔 내맡길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서도 성모님 안에서와 같은 위대한 업적을 이루십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선물에 자신을 맡겨야 하겠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운동을 하였습니다. 지금은 왜소하게 보이지만 초등학교 때에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키가 큰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운동을 하게 되었는데 마라톤도 하고 씨름을 하였습니다. 시합을 앞두고는 늦게까지 연습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연습 후에는 찐빵과 만두가 준비되어 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시합에 ‘이겨라’ 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시합 날 입고 간 속 팬티에는 어김없이 헝겊 한 조각이 붙어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갓난아기 때 입었던 ‘배냇저고리’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부적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습니다. ‘이겨라’고 말씀은 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꼭 이길 것이라는 간절한 믿음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몰랐었지만, 지금은 어머니의 기도와 큰 사랑으로 받아들입니다. 어머니께서 92세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그것의 일부를 여전히 가지고 계셨고, 이제는 제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사랑의 흔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어머니 성모님의 마음을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낳으신 후 그 지상 삶의 여정과 죽음에까지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그분의 모든 것을 지켜보시고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시며 오로지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다리신 어머니의 마음, 아들 구세주 그리스도의 협력자로 일생을 봉헌하시고 아들의 십자가 밑에 서 계셨던 어머니, 주검을 품에 안으셔야 했던 어머니,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기도에 전념하셨던 어머니의 마음을 기억합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부모는 길 잃은 예수님을 찾아 사흘이나 헤맸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을 찾아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습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루카2,48-50). 사실 요셉이 아버지인데 또 아버지가 따로 있다니 정말 뚱딴지같은 소리였습니다. 따라서 그 신비로운 진실을 알아듣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때를 기다리며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도 순종의 생활로써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 지금은 잘 알아들을 수 없으나 아들에 대한 한없는 사랑은 한결같았습니다.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아들을 찾아 헤맨 사랑의 울타리 안에서 또한 모든 것을 마음속에 간직한 어머니의 큰 품에서 아들은 커갔습니다. 루카복음 사가는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루카2,52)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하느님과 동료 인간들의 총애를 받았고 그분은 자라면서 사회 안에서 당신의 자리를 잡아나가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아들에 의해 어머니의 마음도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어머니의 믿음은 추호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어머니 성모님은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기에 복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믿음도 어머니를 닮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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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8.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나무에는 좋은 열매가 열리고, 나쁜 나무에는 나쁜 열매가 열린다.” 비슷한 말씀으로 밀과 가라지의 비유가 있습니다. 농부가 밭에 밀을 심었는데 밀밭에 누군가 가라지를 심었다고 합니다. 농부는 밀과 가라지를 구분하지 않고 키운다고 합니다. 가라지를 뽑으려다 밀을 뽑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추수의 때가 되면 가라지는 버려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숨’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 하느님의 숨을 받은 사람은 분명 좋은 나무입니다. 하느님의 숨을 받은 사람은 분명 알곡을 맺는 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사람은 자유의지에 따라서 좋은 나무인 하느님의 숨을 나쁜 나무로 만들기도 합니다. 사람은 자유의지에 따라서 밀인 하느님의 숨을 가라지로 만들기도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마치 반도체와 같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면 은총의 불이 켜집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은총의 불이 꺼집니다.
아직은 그 실체가 잘 규명되지 않지만, 미래의 세계를 주도할 수 있는 학문 중의 하나가 ‘양자역학’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는 물질은 어느 한 공간과 시간에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물질이 존재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합니다. 관찰자가 바라보면 물질이 존재하다가, 관찰자가 시선을 돌리면 물질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양자컴퓨터와 인공지능이 만나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새로운 세계를 볼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마음은 물질로 계량화할 수 없습니다. 무게를 잴 수도 없고, 부피를 알 수도 없고, 크기를 측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이 사람을 좋은 나무로 만들기도 하고, 사람을 나쁜 나무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이 알곡을 맺는 밀이 되기도 하고, 쭉정이로 버려지는 가라지가 되기도 합니다. 마음먹기에 따라서 상황이 바뀌기도 합니다. 긍정의 마음을 가지면 극한의 환경에서도 희망의 빛을 볼 수 있습니다. 부정의 마음을 가지면 풍족한 환경에서도 근심의 어둠이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제 마음을 잘 드러내는 말이 있습니다. ‘잘했네! 잘될 거야!’ 저는 입버릇처럼 하는 말인데 그렇게 하면 엉킨 실타래가 풀리듯이 어려운 문제들이 해소되곤 했습니다.
오늘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기를 원하셨을까요? 십자가의 무게가 무거워 3번씩이나 넘어지면서도 끝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시기를 원하셨을까요? 옆구리를 창에 찔리시기를 원하셨을까요? 제자들도 다 도망가고, 혼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하시기를 원하셨을까요? 아니면 평범하게 직장을 구하고, 좋은 여자 만나서 가정을 이루기를 원하셨을까요? 손자, 손녀들의 재롱을 보면서 살기를 원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의 마음을 헤아려서 그렇게 고난의 길을 가셨을까요? 예전에 학생운동을 하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좋은 대학교에 입학했고, 졸업만 하면 좋은 직장에 취직할 수 있던 친구들입니다. 그런 친구들이 민주화를 외치며, 데모했고, 데모하는 과정에서 형사들에게 쫓기게 되었습니다. 학생들은 수배자가 되었고, 감옥에도 가게 되었고, 학교에서 제적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좋은 직장은 구할 수 없게 되었고, 그들이 그렇게 바랐던 민주화는 이루어졌지만, 많은 학생은 아직도 고문의 후유증을 겪고 있으며, 가난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 학생들의 어머니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자식의 건강, 성공, 출세, 결혼을 바랄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생각입니다. 하지만 어떤 아들은 세상 것들을 추구하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 불의한 일에 저항하는 일,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일을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을 먼저 하였던 예수님을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억울하게 비참하게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아드님을 가슴에 묻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님의 마음을 티 없으신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시고,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복되시고 영화로우신 동정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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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8.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성모님의 모습을 두 개의 단어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저는 사랑과 인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성모님은 사랑의 표본입니다. 예수님을 잉태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또한 인류에 대한 사랑도 드러내십니다. 성모님께서 엘리사벳 성녀와 함께 노래하신 부분에서 그 모습은 너무나 잘 드러나 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시며 제자들을 돌보셨을 성모님의 모습을 통해서도 우리는 우리를 돌보시는 성모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또 다른 대표 이미지는 ‘인내’입니다.
잉태의 순간부터 수많은 고난과 고통을 인내하셔야 했던 분이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인내가 성모님만의 힘이 아니라 기도와 하느님에 대한 의지 안에서 힘을 얻고 있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머니로서 성모님은 잃어버린 어린 주님을 찾아다닙니다. 아마도 입이 바짝 마르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성전에서 주님을 찾았을 때 성모님은 마음속에 다시 한번 사랑과 인내의 불이 타올랐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불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티 없으신 성모 성심’은 고난과 고통이 없었던 모습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 때문에 인내해 온 모든 마음을 표현하는 말일 것입니다.
오늘은 성모님의 사랑을 생각하고 기도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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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삶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다 보면
방향을 잃기도 합니다.
삶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다 보면
좌초되기도 합니다.
난파되기도 합니다.
그때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런 말입니다.
나는 언제나 네 편이야.
괜찮아!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곳이 너에게는 있단다.
다치지는 않았니!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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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바닥을 쳐도 내가 돌아갈 곳이 있다는 믿음이 바로 우리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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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8.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모성심의 사랑과 지혜
“그 어머니에 그 아드님이구나!”
어제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에 이어 오늘은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기념일”입니다. 대축일과 기념일이 극명한 대조를 이룸에서 성모님의 겸손을, 또 그 어머니에 그 아드님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갖게 됩니다. 부전자전이기보다는 모전자전같습니다. 저절로 예수성심 신심과 성모성심 신심을 비교하게 됩니다.
성가숫자만 보면 성모님에 관한 성가들(235-279)이 45곡, 예수성심에 관한 성가들(199-210)이 11곡이니 성모님에 관한 성가들 숫자가 압도적입니다. 얼마나 전통적으로 교회의 사랑을 받아온 성모성심 신심인지 깨닫게 됩니다. 사실 성모님의 적자들로 상징되는 역대 교황님들을 보면 한결같이 열렬한 성모신심을 대하게 됩니다.
오늘 성모성심 기념일의 유래를 간략히 나눕니다. 무엇이든 뿌리 확인이 우선입니다. 성모성심은 공경은 17세기 성 요한 에우데스가 시작하였는데, 이는 예수성심을 공경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입니다. 성모성심 공경은 19세기에 따로 날을 잡아 기념하기 전까지는 예수성심 공경 미사에서 기억하는 형태로 전례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다가 교황 비오 12세는 1942년, 성모님의 파티마 발현 25주년을 맞아,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께 세상을 봉헌하고 이 기념일을 온 교회가 지내도록 합니다. 이어 경신사성은 1996년 1월1일자 교령으로 “예수성심 대축일” 다음 토요일인 바로 오늘 선택 기념일로 지내 오던 이 축일을 “의무 기념일”로 지내게 된 것입니다.
성모성심은 무엇입니까? 오늘 복음 및 제1독서에서 잘 드러납니다. 저는 사랑과 지혜의 마음이라 정의하고 싶습니다. 사실 참된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지혜와 함께 가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품성인 자비와 지혜가 함께 가듯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유명한 “예수님의 소년 시절”일화입니다. 해마다 파스카 축제때 마다 예루살렘에 아들 예수님을 대동하던 예수님의 부모를 통해 그분들의 깊은 신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다가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큰 일이 생긴 것입니다. .부모는 소년 예수님이 함께 있으려니 여겼는 데 하루 여행길 후에야 비로소 예수님이 없음을 뒤늦게 알았을 때 얼마나 놀랍고 당황스러웠겠는지요!
예루살렘에 되돌아온 후 사흘 뒤에야 부모는 성전에서 율법교사들과 너무나 태연자약하게 대화를 나누는 아드님 예수를 발견한 것입니다. 율법교사들과 대화중 듣는 이들은 모두 소년 예수님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했고, 이를 발견한 부모는 무척 놀랐다 합니다. 바로 여기서 성모성심의 사랑과 지혜가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성모님과 예수님의 대화가 실감나게 전달됩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모두가 알아듣지 못하였고 바로 여기서 성모성심이 유난히 돋보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는 대목이 중요합니다. 고결한 영혼의 특징은 담아두는 능력에 있다 합니다. 성모님의 반응은 조건반사적 감정적 대응이 아닌 인격적 응답의 반응입니다. 사태의 진실을 모를 때는 섣불리 건들이지 않고 그냥 놔둔채 깨달아 알 때까지 기다리며 묵묵히 바라보는 무관심의 관심의 사랑과 지혜가 제일입니다.
성모님의 침묵의 사랑, 인내의 지혜가 빛납니다. 분명 지극한 인내로 참아견디며 침묵중에 때를 기다리며 하느님의 뜻을 찾았을 성모성심입니다.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知者樂水)”, 말마디처럼 어진 사랑이 산처럼 높고. 지혜가 바다처럼 깊었을 성모성심입니다. 다음 예수님의 성장과정이 성모성심의 사랑과 지혜를 그대로 보고 배웠음을 입증합니다. 순종하는 예수님에게서 순종의 사랑, 순종의 지혜임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
성모님께서 얼마나 하느님께 잘 협조하여 소년 예수님을 키우셨는지 성모성심의 사랑과 지혜를 엿볼수 있는 대목입니다. 아마도 늘 하느님의 시선과 마음으로 아드님 예수님을 대하려 노력했을 것입니다. 성모성심에 결정적 도움이 되었을 찬미와 감사의 삶과 기도입니다.
성모님은 찬미와 감사의 사람이요, 영성적으로는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인 아나뷤의 후예였음이 분명합니다. 이들이 지닌 재산이라고는 찬미와 감사의 노래 기도뿐이겠습니다. 성모님의 찬미가 마니피캇을 기억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전 화답송은 동병상련처럼 생각되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찬미가입니다. 그리고 이사야서의 찬미가는 그대로 성모님의 마니피캇을 연상케 합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
변질되거나 부패됨이 없이 늘 푸르른 성모성심을 유지할 수 있던 비결이 바로 여기있습니다. 바로 한결같은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이 성모성심은 물론 우리의 사랑과 지혜의 성심의 형성에도 결정적 기여를 한다는 것입니다.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아나뷤의 후예답게 날마다 시편공동전례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노래하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소년 예수님과 율법학자들과 대화를 나누던 장면처럼 저는 흥미로운 장면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세계 최고의 지성이자 연로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로마의 아파트 차고에서 30가정의 남녀노소의 사람들과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장면입니다. 누구보다도 교황님의 성모님 공경은 해외 사목차 출국과 귀국시 꼭 성모경당에서 인사드리는 모습에서 잘 드러납니다. 대부분 메시지에서도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기사 제목은 “교황 프란치스코 로마 아파트 차고에서 교리교수를 하다”였습니다. 교황님은 안락의자에 앉아있고 평범한 남녀노소의 사람들은 교황님을 에워싸고 주고 받는 대화입니다.
“여러분 좋은 저녁입니다. ‘폭풍들(storms)’에 의해 좌절케 해서는 안됩니다. 좋은 관계를 위해 본질적인 세 말마디를 잊지 마십시오. 미안합니다(sorry), 좋습니다(please), 감사합니다(thank you).”
“유일한 것은 증거(testimony)를 통해서이다. 여러분은 역사를 전달할 책임이 있다. 젊은이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것중의 하나는 그들이 곧바로 일어선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삶에서 실패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미끄러진채 머물러 있지 않는 것이다.”
“아이들 목소리가 들려지지 않는, 노인들이 무시되는 교구는 진짜 신자들 공동체가 아니다. 잊지 마라. ‘노인들은 기억이고 아이들은 약속이다(the elderly are the memory and the children are the promise)’”
“증거(testimony)이다. 주로 사람은 가정에서 태어난다. 첫 조언은 부모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아이들이 부모가 서로 사랑함을 느낄 필요가 있다. 만일 너희들이 다툴일이 있으면, 아이들 앞에서 하지 말고, 아이들을 침대로 보내고 너희들이 원하는 만큼 다투라.”
“결코 아이들과 대화를 멈추지 말라. 교육은 대화중에 일어난다. 그들은 혼자 남겨주지 말고 압박하지도 말며, 자유롭게 하라. 삶의 공부는 가정에서 이뤄진다. 무엇인가 아는 것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밖에 있는 누가 아니다.”
다양한 질문들에 교황님의 답변 몇만을 인용했습니다. 교황님의 친절한 사랑과 지혜로운 답변들로 가득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습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끊임없이 한결같은 모습으로 가장 많이 사람들을 접견하고 만나고 대화하는 89세 노령의 사랑과 지혜 가득한 교황님의 성심이 침으로 경탄스럽습니다.
말그대로 그 어머니에 그 아드님처럼, 성모성심을 닮은 예수님 성심이요, 교황님의 성심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찬미와 감사의 미사전례 은총이 우리 모두 성모성심, 예수성심을 닮아 사랑과 지혜로 충만한 내 고유의 성심으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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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8.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지금은 마음으로 당신을 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
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기에
마음으로만
당신을
품습니다
언젠가
이 마음이 곧
내가 되리라 믿기에
마음으로만
품을 수밖에 없음에
슬퍼하지 않고
마음으로나마
품을 수 있음에
고마움과 기쁨으로
살며시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지금은
마음으로 당신을
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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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8.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
하느님께 배우듯이 예수님께 배우시는 마리아
지극히 사려 깊은 여인 마리아, 참지혜의 어머니께서 학생이 되어 아드님께 배우십니다. 그분께서 아드님께 배우신 것은 그냥 아이나 사람에게서 배우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배우신 것입니다. 네, 그분은 늘 아드님의 언행을 묵상하며 사셨습니다. 아드님의 말 하나, 행동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았습니다. 전에 말씀을 잉태하셨을 때 그러셨듯이, 이제는 아들의 언행 하나하나를 가슴에 담아 간직하셨습니다. 지금 당신께서 보는 것들이 장차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기를 기대하고 기다리십니다. 이와 같은 수행을 그분은 평생토록 당신 삶의 규칙이요 법으로 삼으셨습니다.
-존자 베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7 사람은 위대하다
주님의 성령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다(지혜 1,7)
여기서 엑카르트는 인간의 신화를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이 주제를 셜교 25와 26에서 더 충분히 다루게 될 것이다. 인간이 알 수 있는 유일한 쉼은 신적인 근원. 곧 뿌리 내지 씨앗 속에서의 쉼이다. “영혼은 모든 것을 아는 능력이 있다. 때문에 영혼은 만물이 하나가 되는 원초적 형상에 이력까지는 쉬는 법이 없다. 원초적 형상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영혼은 하느님 안에서 쉰다." 모든 것을 아는 영혼의 능력이야말로 사람이 우주를 지은 창조주와 함께 나누어 가지고 있는 우주적인 능력이다. 쉬르만은 이렇게 말한다.
”지성은 우주를 받아들일 수 있다. 지성이 날 때부터 하느님과 똑같은 것은 이 때문이다. 사람이 하느님을 빼닮은 것은, 그가 존재 전체에 열려 있기 때문이다. 전통은 이처럼 활짝 열리는 능력에다 지성이라는 꼬리표를 붙인다 ... 지성은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182)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이슬람 신비주의 수피즘에 니파나는 유일신 신앙
이슬람교의 분파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
현대 종교사회학적 방법을 동원한 비판적 학자들은 시아파의 칼리프 법통 주장은, 종교적 헤게모니와 정치적 권력 투쟁의 종합물이라 본다. 시아파의 출현과 그 세력 강화는 아랍 제국으로 편입된 페르시아인들, 다시말해서 현재의 이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 비아랍계 민족 집단의 정치 경제적 불만과 종교 지도력의 헤게모니 쟁탈 투쟁의 결과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시아파의 둘째 특징은 당연히 <꾸란> 경전 이외의 ‘수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아파가 가장 큰 세력으로 위세를 떨치는 역은 이란으로, 이란에서는 16세기 이후 이슬람교의 시아파가 공식적인 국가 종교가 되었다. 20세기 저 유명한 호메이니를 상징 인물로 내세운 이란의 이슬람 혁명 정부는 시아파 이슬람교의 현대적 분출이다.
이슬람의 신비주의를 수피즘(Sufism)이 라고 부르는데 , 그 명칭은 이슬람 초기 경건한 무슬림들이 <신약성경>에 나오는 세례 요한이 그러했던 것처럼 양털 가죽(suf)을 걸치고 다닌 데서 또는 ‘정결과 청결(safa)'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이슬람교가 창립된 후 초기 100여 년 동안은 별도로 신비주의가 두드러지게 운동 형태로 드러나지 않았다. 알라의 예언자 무하마드 및 초기 지도자들의 신앙 인격과 경건한 삶 자체가 곧 신비주의가 추구하려던 모든 것을 실제 삶으로 드러내주었기 때문이다.(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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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8.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교회는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의 거룩한 마음을 기념합니다.
예수님의 성심이 우리의 죄로 상처 입으신 마음과 인간에 대한 무한하신 사랑을 뜻한다면, 성모님의 성심은 하느님을 향한 순명과 인간을 향한 깊은 사랑을 뜻합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와 온전히 일치하시고, 그리스도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시면서, 인류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십니다.
성모님의 성심은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세상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닮은 사랑은 자녀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일 것입니다.
자녀를 위해서 조건 없이 무엇이든 다 내주는 그 마음은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서 온 삶을 아드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치셨고, 지금은 그 사랑으로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을 보살피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께 풍부한 은총을 청하여 얻어 주시기에 우리는 삶의 어려움이 닥칠 때, 성모님의 모성에 호소하며 전구를 청할 수 있습니다.
자녀가 육체적, 심리적, 정서적, 지적인 면에서 제대로 잘 성장하려면 아버지와 더불어 어머니의 각별한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신앙 안에서도 모든 인간은 모성적인 사랑과 돌봄이 필요합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저마다 아버지요 어머니이신 하느님의 부성적이고 모성적인 사랑에 자신을 맡기지만, 성모님의 모성적 돌봄을 통한 전구도 청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랑의 체험이 우리 신앙을 성장시킬 것입니다. 그렇게 성모님의 돌봄을 체험하면서, 우리는 성모님의 인류를 향한 거룩한 마음을 닮아 갈 것입니다.
세상을, 특히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돌보시고 그들을 위하여 밤낮으로 전구하시는 성모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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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8.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아들의 이해되지 않는 행동과 말을
마리아는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아들을 잃어버렸다고 생각이 들었을 때
그 마음은 애가 탔다고 마리아는 말합니다.
그에 대한 아들 예수의 대답은
실수로 가족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성전에 남다보니
가족과 함께하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마리아의 애타는 마음은 이제
이해되지 않는 의문으로 바뀝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대화는 이어지지 않고
마리아는 그 마음을 간직하게 됩니다.
루카복음사가는 마리아에게
이 이야기를 직접 들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감정을 세세하게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전해 들었다기보다는
직접 들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루카가 이 이야기를 들을 때
마리아의 심정은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오래전의 일을 떠올리면서
마리아는 그때의 일을 곰곰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제서야 하나하나 이해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우리는
삶 속에서 종종 마주치곤 합니다.
이해되지 않아서 답답한 것도 있지만
세상 속에서 지식이 넘쳐나면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왠지 잘못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으로 바뀌어 갑니다.
그러다보니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부분이 늘어나는 한 편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쉽게 잊히기도 합니다.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서 느끼는 답답함은
그 상황과 연결된 사람을 거부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마치 그 사람 때문에 이해되지 않는 것 같고
이 상황을 잊고 거기에서 벗어나려면
그 사람을 더 이상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기도 합니다.
마리아의 경우 그 대상은 아들 예수였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여기에서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머무는 것을 선택합니다.
애타는 마음, 이해되지 않아서 느끼는 답답함 등이
있었겠지만
그 안에 머무를 수 있던 힘은
아들 예수에 대한 사랑에서 왔을 것입니다.
사랑을 이처럼 이해를 넘어갑니다.
몰이해에서 오는 힘겨움에도
관계를 계속 이어갈 힘을 줍니다.
마리아의 마음을 기억하면서
우리 안에도 사랑의 마음을 키워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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