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6. 15. 큐티
시편 84:1 ~ 6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
관찰 :
1) 고라 자손의 시, 인도자를 따라 깃딧에 맞춘 노래
- 고라는 모세를 대적하여 반란을 꾀했던 레위인이었다. 그는 하나님께 징계받아 그를 따르는 자들과 함께 땅이 입을 벌려 삼켜졌다. 그렇다면 그 자손들은 이스라엘에서 어떤 역할을 감당한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고라의 자손들이 성전을 수종들게 하시고 있다. 또한 고라자손의 시가 시편에 11편 등장한다. 시편 제3권은 아삽의 시가 끝나고 고라자손의 시가 84, 85, 87, 88, 89편으로 이어진다.
- 이 시의 특징은 하나님의 장막에서 예배하는 갈망이 깊게 투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혹자는 이 시를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들이 부른 노래로 분류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시는 시온을 순례하는 자의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소를 마음으로 간절히 사모하는 자의 마음이 담겨진 것으로 보게되는 내용으로 가득 차있다.
- 많은 신학자들은 이 시가 다윗이 압살롬에 의해서 쫓길 때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다윗과 함께 나온 시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구체적으로 이 시의 저자를 알 수는 없지만, 다윗의 때에 다윗과 같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열망을 가진 자들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
2) 주의 장막을 사모함
- 1절.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 시인은 여호와의 장막에서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며 여호와의 임재를 누리는 기쁨을 누린 자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표현을 할 수 없다. 주님과의 영광스러운 교제를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다. 시인이 얼마나 절절하게 주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지에 대해서 구구절절하게 표현되고 있다.
- 2절.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 시인은 여호와의 궁정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곳에 가고 싶지만 가지 못하게 된 물리적인 한계에 대해서 안타까워하면서 하나님을 부르짖고 있다. 시인은 자신의 마음과 몸이 모두 살아계신 하나님과 더불어 여호와의 궁정에서 예배하게 되기를 간절히 갈망하고 있다.
- 3절.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 시인은 하나님을 참으로 살갑게 부르고 있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이 모든 표현은 시인에게 있어서 언제나 하나님을 찾고 부를 때 사용하던 표현들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 시는 참으로 사람들에게 들려주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하나님께 부르고 있는 노래이다. 그렇기에 하나님과 평소에 하던 대화속에서의 표현을 이어서 노래하고 있다.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궁정에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는 나머지, 하나님의 궁정에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는 참새와 제비를 부러워하고 있다. 주님의 제단을 사모하고 또 사모하는 시인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 4절.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 주의 집, 여호와의 성소에 거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고백한다. 그곳에서 주님을 언제나 찬송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다윗의 장막에서는 24시간 365일 하나님을 찬양함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고, 그 상징으로 쉐키나의 불꽃이 지성소에서 꺼지지 않고 타올랐다. 시인은 바로 그러한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주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는 기쁨이 상실된 아픔을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한 감정의 복받침으로 인해서 셀라의 휴지기를 갖는다.
2) 주의 장막에서 예배하는 자의 복
- 5절.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 시인은 주님의 장막을 사모하는 자들이 얻는 복을 노래한다. 이 복은 두 가지로 표현되고 있다. 첫째는 주께 힘을 얻는 복이다. 주님의 임재가 있는 예배를 누리는 자는 주님의 힘을 얻는 자이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두려움이 없고, 그 누구도 그 마음의 평강을 빼앗지 못한다. 하나님과 연합의 관계에 있음으로 말미암은 진정한 복이다. 둘째는 시온의 대로를 소유하는 복이다. 현재 시인의 형편이 시온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장막을 사모하는 자들은 결국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시온으로 나아가게 될 것임을 소망으로 고백하고 있다. 그것은 시온으로 나아가는 진정한 길이다. 그것이 “대로”로 표현되고 있다. 몸은 비록 시온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상황이 일어날 수 있지만, 주의 장막을 간절히 사모하는 자는 주의 장막에 몸으로 나아가지 못해도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는 “시온의 대로”를 얻게 될 것임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성소에 나아갈 수 없다 해도 전능한 능력을 지니신 하나님과 연합하여 있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힘을 발견할 수 있는 한 그들은 결코 핍절 하거나 낙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임을 고백하고 있다.
- 6절.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가 누리는 복이 무엇인지를 노래하며, 그 핵심을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고자 하지만, 수많은 어려움에 노출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것처럼 보여지는 과정을 지나는 성도들이 주님의 장막을 사모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공급을 누리게 될 것임을 노래하고 있다. 하나님의 성전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난관을 예상해야 하며, 이러한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하지 않고는 아무도 영광의 장소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노래하고 있다. 시인은 그러한 눈물 골짜기를 지날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헌신을 받으시고 채워주시는 은혜를 부으실 것을 믿음으로 노래한다. 하나님의 역사 하심은 “이른 비”로 표현되고 있다. 이 “이른 비”는 하나님의 카이로스(시간)에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심이 담겨진 표현이다. 눈물 골짜기를 지나는 여호와의 장막을 사모하는 성도를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임을 시인은 분명하고 명확하게 노래하고 있다.
가르침 :
1) 하나님의 장막에 나아가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 시인의 고백은 많은 것을 담고 있고, 배움을 주고 있다. 오늘 시편 기자의 고백과 같이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될 때, 그렇기에 더욱 간절함으로 주님의 장막을 사모하게 됨으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복이 넘치게 될 것임을 알아야 한다. 주께 힘을 얻고, 시온의 대로가 그 마음에 항상 있게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 약속되고 있다. 그 은혜를 사모한다.
2) 하나님의 성소에 나아가고자 하지만 그렇게 못하는 것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형편과 상황에 처한 성도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눈물 골짜기를 지나는 것과 같은 아픔과 괴로움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자는 주께 힘을 얻고 시온의 대로가 그 마음에 허락이 되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삶을 사는 승리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요한계시록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바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말씀의 핵심이 되는 언약이기도 하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로 승리하게 하셔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승리하게 인도하실 것이라는 언약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주님이 장막을 사모함, 곧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중심이 날마다 언제나 주님께 드려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적용 :
1) 주님의 장막을 사모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힘을 주시고 시온의 대로를 허락하신다. 오늘 주님을 붙잡고 살고자 하는 내가 시온의 대로를 얻게 되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간구하자. 그리고 그 은총이 나에게도 넘치게 되기를 소망하자.
2) 주의 장막을 사모함은 결국은 성전의 완성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자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이다. 그러한 성도가 바로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고 고백하게 되는 자이다. 나의 중심이 그렇게 주님께 드려져서 주의 장막을 사모하는 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주님의 말씀을 더욱 사모하는 자가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