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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욕관을 떠나 칠채산七彩山으로 갔습니다. 칠채산은 작은 민둥산으로 그 지층이 드러나 일곱 가지 색으로 나타난다는 곳입니다. 비가 오면 그 색이 찬연히 빛난다고 하지만 그렇게 아름다운 곳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황무지를 관광지로 잘 개발해놓았다는 느낌 밖에 없었습니다. 칠채산 관광 후에는 장액張掖으로 가서 일박하고 다음날 아침 고속철을 타고 우루무치 방향으로 되돌아 선선鄯善으로 올라갔습니다.
장액에서 선선까지는 1,136km로 고속철로 6시간 넘게 걸렸습니다. 저녁 7시경에 선선에 도착했는데, 가이드가 내일 일정이 많다고 하며 한 가지 일정을 앞당겨 쿠무타크사막으로 우리를 안내하였습니다. 해가 늦게 지기 때문에 관광은 충분히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쿠무타크사막은 돈황의 명사산과 똑 같은 모래산이었습니다. 단지 차이점은 명사산에서는 낙타를 타고 모래산 위에 올라가보는 것이고, 쿠무타크사막에서는 4륜구동 자동차를 타고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현지여행사가 옵션으로 돈 벌기 위한 일정일 뿐이었습니다. 황무지와 사막을 관광지로 개발하는 중국인의 사고방식이 놀라웠습니다.
다음날 아침 여행사 버스를 타고 투루판(吐魯番)으로 이동했습니다. 이동 중에 가이드가 이곳의 고도가 얼마나 될 것 같으냐고 물어서 몇 사람이 천 미터, 천오백미터라고 대답했더니, 가이드가 웃으며 –66m라고 하였습니다. 투루판은 분지라 해수면보다 낮은 지역이라고 합니다. 투루판에는 역사 유적도 많고 일정도 많았습니다.
1. 고창고성高昌故城
처음 방문한 곳은 고창고성이었습니다. 高昌은 위구르어로는 카라호자라고 불리며 기원전 1세기에 건설된 실크로드의 중요한 도시였으나 14세기에 전쟁으로 파괴되었고, 고창왕국의 궁성인 고창고성은 투르판에서 3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고창왕국高昌王国은 460년에 건립되었으며, 9세기 중·후반에는 위구르인이 이곳에 위구르고창왕국(回鹘高昌王国)을 세웠습니다. 13세기 중엽 이후 天山 북쪽의 몽골 유목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高昌을 에워싸고 공격을 계속한지 반년이 지나 高昌왕이 전사하면서 전쟁은 끝나고, 고창고성은 함락되었습니다. 고창국은 당나라보다는 돌궐족과 가까워 651년 당태종이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고창을 정벌하게 하였습니다. 657년 소정방은 서돌궐까지 항복시킴으로써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은 모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에 예속됩니다. 결국 고창국은 100여년의 역사로 멸망하고 이슬람과 몽골의 침입을 받아 성이 완전히 소실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성터의 흔적만 남긴 채 사라지고, 고대 고창의 흔적은 고창고성과 베제클리크 천불동千佛洞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현장법사玄奘法師가 천축국天竺國(지금의 인도)으로 불경을 구하러 가는 길에 고창국 광무왕光武王 국문태麴文泰의 초대를 받아 630년 2월경에 고창국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법회를 열어 한 달 동안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을 설법했는데, 그때 법회를 열었던 건물은 복원되어 있었습니다. 현장법사는 고창국왕의 융숭한 대접을 받고, 노잣돈으로 많은 선물을 받았는데, 그 후 10여 년 유학을 끝내고 불경을 가지고 다시 고창국에 들러 당나라로 귀환하려고 했으나, 그때는 이미 당나라에 의해 멸망한 뒤였기 때문에 현장법사는 고창국에 들르지 않고 바로 당나라로 귀환하였다고 합니다.
2. 아스타나고분(阿斯塔那古墓)
다음에는 아스타나고분에 갔습니다. 아스타나고분은 당나라 때 이곳 투루판 분지의 중심이었던 고창고성 부근 포도밭 한 가운데에 위치한 고창국과 당나라의 무덤군입니다. 1959년부터 수차례의 발굴을 통해 456기의 무덤이 발굴되었습니다. 일부 무덤은 수직으로 구덩이를 파 시신을 놓은 수혈식이지만, 대부분은 지하로 내려가는 경사진 길과 시신을 놓은 묘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곳에서 발견된 미라들은 현재 우루무치 신강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이곳에서는 벽화를 비롯하여 비단, 마포, 종이에 그린 회화, 문서, 직물, 나무와 흙으로 만든 인형, 토기, 나무 그릇, 금속기, 화폐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아스타나’는 ‘휴식’을 의미하는 위구르어로, '영원히 잠든 묘지' 또는 '휴식의 장소'라는 뜻입니다. 투루판에는 일찍부터 한족 집단이 형성되었던 까닭에 아스타나고분 출토품은 중국적인 요소와 중앙아시아적인 요소가 혼합되어 있습니다.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복희씨와 여와씨를 표현한 그림 복희여와도伏羲女媧圖가 이곳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중앙에 있는 두 神의 상반신은 사람, 하반신은 뱀의 모습을 하고 등장하며, 왼쪽이 여와씨, 오른쪽이 복희씨입니다. 각각 컴퍼스와 구부러진 자를 들고 있는데, 이는 둥근 하늘과 네모난 땅으로 이루어진 중국의 전통적인 우주관과 관련된 상징물입니다. 배경에는 해와 달, 별자리가 그려져 있어 하나의 소우주를 재현하고 있습니다. 중국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얼굴과 손에 보이는 음영 표현, 해와 달의 형상화 방식에서 중앙아시아적인 특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3. 화염산火焰山 천불동千佛洞
다음은 화염산 천불동입니다. 베제클리크(Bezikelik) 천불동이라고도 합니다. 화염산은 천산산맥 황무지 산의 붉은 사암 언덕으로 북쪽으로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경계와 동쪽으로는 투르판과 가까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화산 활동에 의해 오랜 세월동안 침식되어 형성된 협곡과 산으로 용암이 녹아서 산 아래로 길을 내었고, 화염산의 불타는 형상을 갖추게 했습니다. 화염산은 총길이가 98km이고, 너비는 9km이며, 타림 분지를 동에서 서로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화염산의 평균 높이는 500m이며, 여름에는 50°C 이상 극도로 기온이 올라가 중국에서 가장 더운 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천불동은 화염산 근처 절벽에 위치한 5세기에서 9세기에 걸친 불교 벽화가 있는 석굴 유적입니다.
베제클리크 천불동에는 77개의 사암을 깎아 만든 석굴이 있는데, 대부분 사각형의 공간에 둥근 아치형 천장을 가지고 있으며, 종종 불화 석벽이 있는 네 부분으로 나뉜 것도 있습니다. 이 동굴들에는 전체 천장이 수천 점 불화가 그려진 벽면으로 되어 있기도 하고, 어떤 천장은 인도인, 페르시아안, 유럽인으로 둘러싸여 있는 대규모의 부처를 채색한 불화도 있다고 합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걸쳐 많은 부분이 도굴되고 파손되어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어 대부분 문을 잠가 놓고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화염산은 16세기 명나라 시대에 나온 소설 서유기에서 삼장법사에 의해 이름이 지어졌다고 하며, 이 소설은 서기 627년 경전을 가져오기 위해서 인도로 간 삼장법사의 이야기를 극화한 것으로 삼장법사는 손오공 등을 데리고, 불경을 가지러 인도에 가다가 서역에서 거대한 화염에 부딪치는데, 이때 손오공이 파초선을 빌려 불을 끄게 되는 곳이 바로 화염산입니다.
4. 소공탑蘇公塔
소공탑은 투르판에 세워진 위구르 모스크(이슬람 사원)입니다. ‘에민탑’ 또는 ‘에민 미나레’라고도 부릅니다. 탑의 높이는 44m로, 중국에 있는 이슬람식 탑 미나레 중 가장 높다고 합니다. 청나라는 1750년대 이슬람 지역에 있는 몽골과 위구르에 대한 대대적인 정벌 전쟁을 벌이고, 정복자로서 청나라는 이 지역 사람들과 이슬람 종교에 대한 너그러운 통치 정책을 펼쳤다고 합니다. 이 소공탑은 청나라 건륭제 때 1777년에 완성되었고, 이 지방 호족의 재정지원을 받아, 이 지역의 투르판 장군이었던 에민 호자를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으므로 탑 이름도 ‘에민’이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남쪽 신강지역의 건조한 생태는 실크로드와 같은 역사적인 무역로를 통해 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오랫동안 연결해 왔고, 이 교차로 주변 지역의 땅은 신강에서 위구르 이슬람 건축물이 세워지는 지역이 되었다. 소공탑은 다른 위구르 모스크와 미나레와 같이 이슬람 전통 양식과 토속 위구르 전통 건축 양식의 결합을 반영하였다고 합니다.
5. 교하고성交河故城
다음은 교하고성交河故城입니다. 투루판 북서쪽으로 10km쯤 떨어져 있는 교하고성은 글자 그대로 강물 두 줄기가 만나는 지역에 만들어져서 천연요새의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여의도처럼 흐르는 강물이 교하고성에 이르러서는 양쪽으로 비껴 지나 다시 합쳐지고, 두 강사이로 치솟은 30m 높이의 벼랑 위에 가로 300m, 길이 1650m의 고성 터가 있습니다.
기원전 250년부터 차사전국車師前國의 도읍이었던 이곳 교하성은 흉노와 한나라의 지배를 번갈아 받다가 당나라 때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가 설치되면서부터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장안에서 교하성까지는 몇 만 리 먼 길로 병역의무를 치르는 젊은 군사들이나 처자를 떼어놓고 온 장수들은 황량한 고비사막을 건너 수만리 떨어진 변방 서역 땅으로 간다는 것은 그 자체가 고통이고 희생이었습니다.
당나라 盛唐시기 詩人 이기李頎(690~751)는 이러한 교하고성을 소재로 하여 <고종군행古從軍行>이라는 시를 지어, 아래에 소개합니다. 기다리는 병사는 돌아오지 않고 서역의 특산품인 포도만 들어온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白日登山望烽火(백일등산망봉화) 대낮에는 산에 올라 봉화를 바라보고
黃昏飮馬傍交河(황혼음마방교하) 해질녘에는 교하에서 말에 물을 먹이네.
行人刁斗風沙暗(행인조두풍사암) 모래바람 불어 어두우니 병사들 순라 돌며 치는 징소리
公主琵琶幽怨多(공주비파유원다) 공주의 비파 소리는 원한이 깊다.
野雲萬里無城郭(야운만리무성곽) 들녘에 구름 아득히 멀리까지 떠있는데 성곽 하나 없고
雨雪紛紛連大漠(우설분분련대막) 눈비가 어지럽게 광대한 사막에 이어지네.
胡雁哀鳴夜夜飛(호안애명야야비) 오랑캐 땅 기러기 슬피 울며 밤마다 날아가니
胡兒眼淚雙雙落(호아안루쌍쌍락) 오랑캐 아이 눈물은 두 줄기로 떨어진다.
聞道玉門猶被遮(문도옥문유피차) 듣건대 옥문관은 아직 막혀 있다는데
應將性命逐輕車(응장성명축경거) 마땅히 목숨 걸고 경거장군을 따라야 하리.
年年戰骨埋荒外(년년전골매황외) 해마다 전사자들의 유골은 황량한 사막에 묻히는데
空見入漢家葡萄(공견입한가포도) 한나라 황실로 들어오는 포도를 부질없이 볼 뿐이네.
교하고성 입구로 들어와 다리를 건너고, 비탈길을 오르면 350m에 이르는 벽돌길이 남북에 걸쳐 일직선으로 나 있는데, 대로가 끝나는 곳에 광장과 거대한 大佛寺 사지寺址가 있습니다. 대불사는 남북으로 80m, 동서로 40m, 높이 5m의 사각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북쪽에는 3층으로 된 높이 7m의 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흙벽돌을 쌓아 만든 사각의 탑은 전형적인 인도식이며 감실에는 아직까지 불상의 흔적이 있었고, 사원 앞에 있는 우물도 지금까지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성터의 중앙에는 궁실, 관가, 고급저택이 있고 남쪽은 일반 주택가로 추측된다고 합니다. 이곳은 특이하게 흙벽돌을 쌓아 올리지 않고 개미굴처럼 바닥을 파 내려가는 방법으로 만들어져 고창고성보다 보존상태가 좋다고 합니다. 지하에 만든 집터도 그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6. 카레즈(坎爾井)
다음은 카레즈입니다. 고온 건조한 투루판의 기후에서도 사람들이 생활할 수 있는 것은 카레즈라는 시설이 있기 때문입니다. 카레즈는 페르시아어로 '지하수'라는 뜻인데, 천산산맥의 만년설이 녹아내린 물을 투루판까지 끌어오는 수로시설입니다. 고산의 만년설이 녹아 아래로 흐르면 물이 증발하여 수량이 적어지고 멀리 가지 못하므로 땅속에 수로를 만들어 필요한 곳으로 보내고, 지상에는 군데군데 우물을 파서 물을 퍼 올렸습니다. 매년 20억 톤의 용수를 공급하는 총연장 3000㎞ 길이의 지하 운하로 가장 긴 수로는 30㎞에 달하고, 우물은 보통 20m 간격으로 팠습니다. 한 갈래의 수로를 만들기 위해선 수십 개의 우물을 파야하며 경사지게 이어지는 물길은 상류로 올라갈수록 고도가 높아지므로 우물은 그만큼 더 깊이 파야 했습니다. 그래서 고도가 높은 곳에서는 깊이 30~70m, 낮은 곳이라도 10~20m 정도를 파야 했습니다.
그 물길 중 한 곳을 개방하여 관광지로 공개하고 있는데, 카레즈의 우물과 포도 건조장 같은 투루판의 상징물들을 배합하여 박물관을 꾸며놓았습니다. 대형 카레즈 모형을 비롯해 카레즈의 굴착 과정과 방법, 공정에 쓰인 공구 등이 각종 사진과 함께 전시되어 있습니다. 전시품을 둘러보고 나서 박물관 지하를 관통하는 카레즈 현장으로 내려가면 깊이 10여 미터에 폭은 1미터 정도 되는 좁은 지하 터널에 아주 찬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史記>나 <漢書> 등에 우물을 파서 물을 통하게 하거나 수로를 파서 물을 솟아오르게 했다는 등의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카레즈의 역사는 2천년이 넘는다고 하겠습니다. 요즘처럼 장비도 변변치 않았던 그 옛날에 이런 수로를 만들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습니다. 인부 3~5명이 한 팀을 이루어 한 갈래를 파는 데 수개월에서 수년까지 걸린다고 하니 숱한 노력과 희생, 지혜로 이루어낸 문명의 귀중한 자산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중국인들은 만리장성, 대운하, 카레즈를 古代 중국의 3대 공사라고 합니다. 아직도 카레즈를 통해 내려온 물은 투루판 사람들의 식수원과 농업용수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지하수는 왜 이용하지 않는지 물으니, 이런 지대에 있는 지하수는 오랫동안 땅 속에 고여 있어 흙 속의 염분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대로 사용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카레즈를 통해 산 아래로 내려오는 담수만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다음날 아침 우루무치로 돌아가 전통시장과 홍산공원紅山公園을 보고 밤 1시 비행기로 귀국했습니다. 이번 여행을 통해 실크로드에 대해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실크로드가 이 한번으로 다 알 수가 없고, 앞으로도 보고 알아야할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교보문고 홈페이지에 ‘실크로드’를 검색하면 백여 종이 넘는 책이 나오고, 우리 집 가까이에 있는 고양시립도서관 한 곳만 검색해도 43종의 책이 나옵니다. 물론 실크로드의 일부만 보았지만 그래도 그 척박한 땅에서 동서 문명의 교류를 할 수 있는 길을 개척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희생을 하며, 한편으로는 찬란한 문화유적을 남겼으니 그 역사 유적을 탐구하는 것도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이런 감동을 친구들과 나누기 위해 이 여행기를 썼습니다만 졸필로 그 감동을 제대로 전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동안 부족한 제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 5부 끝 -
칠채산
고창고성
현장법사 동상
현장법사가 설법한 곳
고창고성
아스타나고분에 있는 복희여와상
아스타나고분 입구
화염산 천불동
화염산 천불동
천불동 석굴
천불동 전경
화염산 아래 만년설 녹은 물이 일년내 흐른다
소공탑과 모스크, 에민 호자 동상
투루판 군왕부 입구
에민 호자 군왕
교하고성 입구
교하고성
교하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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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동안 재마았게 보았네요 감사합니다
연재 하시느라 수고 많았네요. 글도 사진도 실크로드를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좋네요.
가즈아~~~~실크로드로!!!
과찬입니다. 감사합니다
보통은 외국에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갑니다만,
일부러 황막한 사막의 유적지를 적지않은 돈을 들여, 장시간 비행기로, 차로 고생하며 찾아가서
과거의 영화와 번영을 상상해 보는 여행은 아주 드문 기회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뿐 아니라 우리의 인생이 어떤 것인가 성찰하게 된 좋은 경험을
쉬우면서 멋진 글을 통해 공유하게 됨을 감사합니다.
아이고~ 이렇게 말씀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저 제가 좋아하고 공부한 것을 했을 뿐인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