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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한 공기의 사랑
이 책의 원래 제목은 『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이지만, 「밥 한 공기의 사랑」이라고 제목을 바꿔보았다. 이유는 공기가 밥공기인지, 숨 쉬는 공기인지 잘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책 속으로 들어가 보면 이해가 되는데 여기서 말하는 한 공기는‘밥 한 공기’를 의미한다.
책은 2020년 7월, 나도 좀 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은 철학자 강신주 교수가 EBS에서 강의하면서 - 삶·사랑·행복·인간관계와 관련된 구체적 질문들을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 보려고 하면서 - 질문자들의 고뇌를 함께 하려고 하면서 – 청중들과의 대화 시간이 항상 너무 짧거나 촉박했다고 느끼면서 – 마음에서부터 애절함을 담아내려고 하면서 - 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흔히‘거리의 철학자’라고 소개되는 것의 부끄러움이 아직은 대학 근처나 배회하는 철학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괴감이 들기도 하고, 서라벌 저잣거리에 녹아들었던 원효를 생각하면 부끄러움마저 감출 수 없었다.”고 하고, 이 책에 대해서는 “우리 이웃들의 삶과 마음에 적중할 수 있는 책을 완성한 것일까?”스스로 묻고 “내가 우리 이웃들의 삶과 마음을 겨냥했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고, 이제 화살은 시위를 떠났다. 과연 표적에 제대로 적중할 수 있을까? 화살은 표적 근처에라도 닿을 수 있을까? 모를 일이다.”라고 하는 것으로 자신과 책을 소개했다.
“책상에는‘앉아서 책을 보는 것이 본질’이고, 목불木佛에는‘경배를 드려야 하는 본질’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보수주의자가 되고 만다. 책상은 우리에게 앉으라고 명령하고, 목불은 자신을 경배하라고 명령하는 형국이다. 사물의 명령을 듣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는 자유가 있을 수 없다. 자유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제법무아(諸法無我)’이 네 글자를 가슴에 새겨라. 모든 존재에는 우리가 반드시 따라야 하는 본질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액체를 담는 것을 컵의 절대적인 본질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야 컵에 꽃을 꽂아둘 수도 있고, 예쁜 구슬을 담아 둘 수도 있다.”
본문 중 일부다. 이런 경구(警句)들이 이 책에는 가득 담겼을 것이라고생각되지만 그것을 제대로 음미하고 이해해서 여기에 담고, 다른 누구? 아니면 후손에게 전해진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고 나는 생각하게 될 것 같다. 이제 10월도 하순으로 접어들어,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에 어제까지 더웠던 날씨가 그리워지는 것에서 인생은 그렇게 세월과 세상의 변화에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도 해 본다.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곧 고통의 시작’이다. 불교의 관념이다. “태어날 때의 울음을 기억할 것, 웃음은 울음 뒤에 배우는 것, 축하한다. 삶의 완성자여, 장열한 사랑의 노동자여!”라고 노래 한 김선우 시인의 「고쳐 쓰는 묘비」를 인용하며 저자는 말한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정말로 즐거워 이렇게 말했다. ‘너랑 있으니 너무 좋다.’외로움이 충분히 완화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친구가 ‘그럼 나 너희 집에서 일주일 동안 같이 지낼까?’하고 말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순간 친구는 한 공기의 밥이 아니라, 두 공기, 세 공기의 밥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존재에게 ‘한 공기의 밥만큼만’사랑해야 한다. 스스로 사랑이라고 믿지만, 두 공기, 세 공기의 밥이 되는 순간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가중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아(無我)’와 비슷한 말로‘무상(無常)’이라는 말이 있다. 요즘처럼 스마트한 세상에도‘인생무상’이라고 하는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직장에서 조기 퇴직이나 정리해고를 당했을 때, 애지중지 키운 딸을 시집보낼 때, 예기치 않게 좌절하거나 실패를 경험했을 때, 인생이 무상하고 인생사가 ‘일장춘몽’같다면서 ‘인생무상’을 말하곤 한다. 삶이 봄꿈처럼 허무한 것인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으나, 삶의‘소중함’과‘세상의 충만함’을 가르쳐 주는 것이‘무상’의 의미다.
불교에서 무상은‘영원한 것 혹은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가르침이다. 영원과 절대를 뜻하는 ‘니트야(nitya)’에 부정어 ‘아(a)’가 결합 된‘아니트야’를 한자로 번역한 것이‘무상’이다. 그러나 불교가 덧없음, 허무함을 가르치려고 무상을 말한 것은 아니다. ‘일체개고(一切皆苦, 모든 것은 고통)’와 마찬가지로 무상은 자비라는 애틋한 사랑의 감정과 그런 감정을 갖도록 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자신과 세상이 무상하다고 제대로 아는 순간에 우리는 자신과 세상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된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말은 역설적이지만, 우리에게 내일이 없다면서 오늘을 집요하게 추구하고 사는 사람은 ‘인생 전체를 행복하게 살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우리에게 내일이 있다’면서 내일의 행복만을 목적으로 오늘을 수단으로 희생하는 사람은 불행과 우울로 점철되기가 싶다. 오늘이 즐겁고 유쾌한 사람은 내일도 그렇게 살 가능성이 높은 반면, 오늘 슬프고, 불행하고 우울한 사람은 내일도 그렇게 살아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오늘을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떤 삶을 영위하고 있는지 한 번쯤 진지하게 돌아볼 일이다.
불교에는 무상을 제대로 직면하기 위해 ‘백골관(白骨觀)’이라고 하는 수행법이 있다. 사람이 죽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든 구멍, 즉 코, 귀, 입, 항문 등이 모두 열리고 몸 안에 있던 이물질이 조금씩 쏟아져 나온다. 가만히 두면 악취가 진동하고 시신은 점점 부패한다. 이 과정을 마음으로 생생히 그려보는 수행법을 백골관이라고 하는데 이를 제대로 수행한 수행자는 헛구역질을 할 정도라고 한다. 이렇게 ‘제행무상’을 간접적으로나마 수행한다는 것은 처절하다. ‘고개 돌리지 말고 똑바로 직면’하라고 한 싯다르타의 마지막 가르침은 온몸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무상은 본질적으로 늙음과 죽음과 직접적으로 관계하기 때문이다. 영원永遠에 대한 집착이나 헛된 갈망은 꽃이 지지 않고 영원히 피기를, 젊음이 무너지지 않고 영원히 그대로 이기를, 애정이 식지 않고 영원히 뜨겁기를, 뭉개 구름이 흩어지지 않고 보석처럼 그대로 있기를, 부모님이 노쇠해지지 않고 영원히 건강하기를, 심지어 죽음을 영원히 미루고 살 수 있기를, 영원한 것이 없다면 반드시 만들어지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무상을 설파했던 불교도 극락과 정토라는 영원을 이야기한다. 인간은 관념적으로 ‘영원의 세계’를 날조하고 그것에 모든 정신을 집중하면서 자신의 삶에 몰려드는 무상과 변화를 피하려고 한다. 그것을 피하는 아주 근사한 방법이, 자식과 돈과 관련된 현실적인 집착이다. 자신이 죽더라도 자식과 후손을 통해서 자신의 핏줄이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는 ‘피의 형이상학’에 ‘돈의 형이상학’이 결합되면 그것은 완전해진다. 돼지고기나 과일은 금방 썩어버리지만 돈은 그렇지 않다. 상품은 무상의 세계에 속하고, 돈은 영원의 세계에 속한다. 오늘날 돈은 그야말로 완전한 영원성을 구가한다. 그러나 영원을 꿈꾸는 순간 시간에 대한 가치평가는 완전히 달라진다. 현재는 수단이면서 목적이라는 시간관이 아니라,‘현재는 수단, 미래가 목적’이라는 노동의 시간관에 지배 받기 때문이다.
“지금 나의 삶이 뭐가 중요해, 내 아들 내 손자들이 잘살게 해줘야지. 지금 행복이 뭐가 중요해. 10년 뒤, 아니 늙어서는 모아논 돈이 있어야해”모든 생각과 감각이 내일에 쏠려 있는 사람이 현재 벌어지는 다양한 마주침과 그로부터 유발되는 감각과 사유에 집중할 여지가 있을까? 없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무상의 세계보다 영원의 세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사실 무상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한다. 그들도 부모님의 얼굴, 남편의 흰머리, 아내의 주름, 반여동물의 노쇠, 간난 아기의 미소에서 무상을 본다. 하지만 무상을 얼핏 본 뒤에 바로 미래의 세계와 영원의 세계로 고개를 돌리니, 풍성하고, 아름답고 찬란한 ‘무상’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뿐이다.
쉽지만 어려운 말 같은데, 풀어보면 이런 말 아닐까? 올해 핀 벚꽃은 작년에 핀 벚꽃도 내년에 필 벚꽃도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무언가에 홀린 듯 벚꽃 아래로 걸음을 옮기고, 꽃을 마음에 담고, 카메라에 담으려 고 한다. 지금 뵙고 있는 부모님은 작년에 뵈었던 부모님도, 내년에 뵐 부모님도 아니다. 부모님의 얼굴에서 무상을 보게 되면, 부모님을 떠나지 못하고 부모님에게 말할 것이다. “엄마, 아빠! 지금 나가서 근사한 가족사진 한 장 찍어요”바로 이것이 무상의 힘이다. 사랑할 수 있는 힘, 쓰다듬을 수 있는 힘,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아름다움과 애틋함과 무상함을 분출하게 되면서 우리는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이나 카메라를 꺼내 그 모습을 담으려고 한다.
찬란하게 흩날리는 벚꽃의 군무, 휘날리는 진눈깨비, 계곡물까지 자기(瓷器)빛으로 물들이는 단풍, 아이의 위태로운 첫걸음, 심장이 고동쳤던 첫키스 등 무엇이라도 좋다. 지금 이 순간이 무상이면 충분하다. 사진을 찍는 이유는 그것이 반복되지 않을 무상의 순간이자, 찬란한 아름다움의 순간 혹은 살아가는 현재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사진이 없더라도 가슴에 새겨졌으면 이미 세상을 떠나 더이상 볼 수 없는 부모님 얼굴, 아파트를 새로 지으면서 잘려 나가 지금은 없어진 벚꽃의 군무를 생각하는 것으로 절로 미소가 번질 것이다. ‘무상의 순간’들은 허무하게 망각 되어지는지나가 버린 순간이 아니라 ‘영원한 순간’,‘절대적 순간’으로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
불교의 핵심 가르침은 ‘제법무아(諸法無我)’다. 법이란‘다르마’를 한역한 것인데 ‘구별해서 지각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제법은 ‘지각되는 외부 대상이나, 생각되는 관념까지 포함한 모든 존재’를 가르킨다. 또 무아는 ‘자아가 없다’는 것으로‘아나트만’을 한역한 것인데, 영원불변한 본질이나 실체를 가르키는‘아트만’을 부정하여 만든 것으로 ‘영원불변한 것은 없다’는 말이다. 무아라는 의미는 단순히 ‘자아가 없다’라고 번역하면 뜻이 협소해진다. 단순히 자아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이 죽어도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과도 같은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의미로 넓게 보아야 한다. 불교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개념이 공(空)인데, 모든 존재에 ‘자성(自性)이 비어 있다’는 뜻으로 줄여서 ‘무자성’이라고 한다. 즉 무아=무자성=공이라는 것이다.
세상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지금 당장 지려는 벚꽃을, 기력이 떨어져 가는 어머니를, 외로움에 방치된 친구를, 노안이 찾아온 선생님을 뵈러 갈 일이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무상에 사무쳐보도록 하자. 덧없고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것은 없다. 그러니 벚나무 아래 누워 꽃향과 자태에 취해 볼 수도 있고, 어머니와 함께 산책을 나설 수도 있고, 친구와 함께 설악산에 오를 수도 있고, 선생님을 만나 옛날을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중도의 삶이자, 사랑의 삶이고 자비의 삶이다.
옛날에는 유리거울 대신에 청동으로 만든 청동거울을 사용했다. 이를 명경(明鏡)이라고 하는데, 쉽게 녹이 슬기 때문에 계속 닦아내야 했으며 양반이나 귀족들만 사용하는 사치품이었다. 그래서 대부분 여성들은 그냥 맑은 물에 자신을 비춰보며 머리와 얼굴을 다듬었다. 그것은 그릇에 담긴 물일 수도, 빨래터 근처의 잔잔한 냇물일 수도 있었다. 이것이 고요한 물, 지수(止水)다. 사유(思惟)하는데 명경과 지수가 다른 점은 명경은 헝겊으로 표면을 싹싹 문질러야 하지만, 물은 그렇게 하면 오히려 고요해지지 않는다는 점과 명경은 외부 충격에 찌그러지지만 지수는 쉽게 복원력을 가진다는 점이다. 외부 충격에 민감하게 반응하나 흡수할 수 있는 회복력을 가진 마음을 지수에 비교되는 이유다. 둘을 합쳐서 명경지수다.
동아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정(靜)’의 마음을 강조했던 것도 바로 이 지수와 관련이 있다. 마음을 안정되게 하는 것, 마음을 안정되게 하려는 것은 세상을 냉담하게 관조하는 명경이 아니라 아주 작은 움직임에도 파문이 일어나는 민감한 지수처럼 마음을 만들기 위해서다. 마음을 명경의 이미지로 하느냐, 지수의 이미지로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은 확연히 달라진다.
돌이나 나무토막, 쇳덩이 등이 던져졌을 때 고요한 물은 충격을 받지만 충격을 해소하며 자기 표면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무거운 것은 가라앉히고 가벼운 것은 흘려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청동거울은 충격을 받으면 닦아도 지워지기 어려운 흔적을 남긴다. 충격의 흔적으로, 과거에 생긴 흔적으로, 굴절되어 반영한다. 현재를 왜곡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여기서 우리는 상대에게 “당신은 청동거울이 아니라 물과 같습니다. 바람도 조약돌도 잎사귀도 당신에게 흔적을 남기지만 흔적은 곧 사라지고 다시 고요해지는 물과 같습니다. 고요해져야만 다시 파문이 일어날 테니까요.”라고 말해 줄 일이다.
불교는 싯다르타의 가르침을 배우는 종교다. 그런데 거기에 너무 많은 텍스트(소통 목적의 인공물)들이 있는 것 같다. 삼장(三藏)이라고 하는 경·율·론이 그것인데, 싯다르타의 가르침을 직접 들은 제자들이 편찬한 경전도 많지만, 가르침을 들었다고 우기는 이들이 편찬한 경전 수는 훨씬 더 많다. 싯다르타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치명적 장애가 되기도 한다. 중도와 자비의 삶을 살면서 보시하고 살아야 하지만 불경을 읽느라 인생을 허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이 고苦라고 하면서 그것을 제거하는 처방을 내놓지 않는다면 이 또한 맹탕일 것이다. 그러니 점점 더 길어지고 많아진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제부터는 진짜 긴 이야기? 해 볼까 한다. 7세기 들면서 중국에서는 싯다르타의 말씀을 따르는 교종에서 벗어나 스스로 부처가 되려고 하는 강력한 의지를 담은 선종이 일어난다. 선종 경전 『육조단경』은 선종의 여섯 번째 스승인 혜능(惠能, 638∼713)이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와 그의 설법을 담은 책인데, 싯다르타의 설법이 아님에도 경經으로 불린다. 여기에는 혜능이 육조가 되는 일화가 실려있는데, 다섯 번째 스승, 즉 오조 홍인(弘忍, 601∼674)이 앞으로 종단을 이끌어 갈 후계자를 뽑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경지를 나타내는 글을 지어 절간 벽에 붙이도록 하고 그것을 보고 자신의 가사와 바라를 물려 주려고 했다. 일종의 대관식으로 선종 특유의 전통이었다. 이로 인해 황매산 자락의 동선원(東禪院)이라는 작은 절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오조의 제자들 중 육조 제목으로 꼽히던 신수(神秀, 606?∼706)는 자신만만하게 “마음은 명경의 틀/ 날마다 힘써 깨끗이 닦아야 하리라/ 때가 끼지 않도록(心如明鏡臺,時時勤拂拭,勿使惹塵埃)”이라고 써서 벽에 붙였다. 신수는 유식불교의 정수를 짧은 게송으로 요약한 것이었다. 모두들 ‘역시 신수야’라고 했으나, 홍인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신수의 기세에 눌렸는지 다른 제자들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때 땔나무를 해오던 신출내기 혜능이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고, 글을 모르는 그는 신수의 글을 읽어달라고 한 뒤 게송을 듣자마자 “글 쓴 사람은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다”고 하고는 동료 승려에게 자신이 말하는 것을 적어 붙여달라고 부탁했다. 그것은 “명경은 틀이 없다/ 본래 아무것도 없는데/ 어디에 때가 끼겠는가!(明鏡亦非臺,本來無一物,何處惹塵埃)”였다.
때가 끼지 않고 틀도 없는 명경, 이것이 마음이라면 그의 마음은 어떤 이미지인가? 혜능은 이 대목에서 지수를 말한 것이다. 돌맹이가 던져지면 순간적으로 깨진 거울처럼 파문이 일지만, 다시 고요한 물로 돌아오는 것. 날마다 힘써 닦아야 하리라는 신수에게 자비는커녕 결백증과 편집증에 입각한 이기주의를 본 홍인은 혜능에게 타인의 때를 기꺼이 감당하고 타인의 손을 어루만져 줄 자비를 본 것이다. 수행은 내가 만난 타인에게 내 때를 묻히지 않겠다는 의지가 아니면 안 되는 것이다.
홍인은 단호히 혜능을 육조로 인정하고 선종의 미래를 그에게 맡긴다. 그런데 제자들이 자기처럼 육조를 받아들일지가 문제였다. 특히 신수를 중심으로 강력한 조직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민을 거듭한 홍인은 잠든 혜능을 불러 자신의 가사와 발우를 전하며 급하게 대관식을 치르고 그길로 남쪽으로 떠나게 했다. 땔나무나 하던 하급 승려를 제자들이 경배하기는커녕 혜능을 해치고라도 가사와 발우를 탈취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한밤중에 동선원을 떠나 대유령(大庾嶺)이란 큰 고개를 넘을 때 혜능을 쫓아온 승려가 있었다. 출가 전에 장수였다는 혜명(惠明)이었다. 혜능은 혜명이 바라는 것이 홍인의 가사와 발우이고 자신이 그 물건을 가지고 있다가는 죽임을 당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서둘러 돌 위에 스승으로부터 받은 그것을 내던지며 혜명에게 말했다. “이것들은 불법을 물려받았다는 징표이니 힘으로 빼앗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가져갈 수 있다면 가져가도록 하라!”혜명이 그것을 들고 가려고 했으나 산처럼 붙어 움직이지 않자, 혜명이 말했다. “제가 온 것은 불법을 구하기 위한 것이지 가사 때문은 아닙니다. 행자께서는 제게 불법을 보여주십시오”
혜능이 말했다. “선(善)도 생각하지 않고, 악(惡)도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바로 그러한 때 어떤 것이 혜명 상좌의 원래 맨얼굴(本來面目)인가?”혜명은 크게 깨닫고 온몸에 땀이 흥건했다. 육조에 오른 혜능의 첫 설법은 이렇게 바람과 구름마저 숨을 헐떡이며 넘는 서늘한 대유령에서 처음 이루어졌다.
혜능의 설법은 놀랄 만큼 간결하고 충격적이다. 선과 악을 마음속에서 깨끗이 비워버려라. 정말 선과 악을 생각하지 않았을 때 너 자신의 맨얼굴을 보라는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인데도 부모님이나 선생님, 혹은 사회가 선이라고 해서 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좋아하는 것인데도 외부에서 악이라고 해서 주저하며 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혜능은 이런 선과 악에 지배받지 않아야 한다고 먼저 강조한다. 아니 외부에서 강요한 선과 악이라는 선글라스를 벗고서 자신과 세계를 보라는 것이다.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바로 그러한 때 어떤 것이 혜명 상좌의 원래 맨얼굴인가?”라는 혜능의 말은 “니 뭣고?”라는 질문과 다름없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네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육조다운 혜능의 첫 번째 질문이자 설법이었다. [육조 혜능 - 따로 붙임]
이래저래 어렵다고 하는 불교에는 ‘고집멸도’라는 사성제와 ‘삼인법(三法印)’이란 게 있다. 첫째가 제법무아(諸法無我), ‘모든 존재에는 불멸하는 실체가 없다’ 둘째가 제행무상(諸行無常), ‘만들어진 존재는 영원하지 않다’ 세 번 째가 열반적정(涅槃寂靜), ‘번뇌로부터 자유로운 마음 상태, 열반은 편안하고 고요하다’는 뜻이다. 여기에 일체개고(一切皆苦), ‘모든 것은 고통스럽다’까지를 추가해 사법인이라 하기도 하는데, ‘번뇌’와‘망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것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겠다.
결국 열반에 이른 사람은, 모든 것에는 불멸하는 실체가 없다는 것을, 만들어진 존재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모든 것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온몸으로 알게 된다는 말이다. 싯다르타의 가르침을 온몸으로 아는 순간, 우리 마음에는 사랑과 자비가 차오르게 된다. 어머니나 고양이, 벚꽃이 무상하다는 걸 직면하는 순간, 우리는 어머니나 고양이, 벚꽃에서 쉽게 발걸음을 뗄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열반에 이르면 편안하고 고요하다고 하지만 ‘열반에 이르러 생긴 편안함과 고요함은 순간적일 뿐, 열반에 이르렀다면 열반에 머물 수 없다.’고요한 물은 고요할 수 없는 법이다. 부처는 모든 고통에서 벗어난 존재도, 불변하는 불성을 실현한 존재도, 변화를 넘어서 불변하는 존재도 아니다. 부처는 타인의 고통에 너무나 아파하고 타인을 너무나 사랑한 존재일 뿐이다.
철학에서 왜 불교 이야기가 많은가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것은 저자가 삶, 사랑, 인간관계와 관련된 질문들을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한데서 그 원인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되기는 한다. 이것들에 대해 고뇌하던 싯다르타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본 때문 아니었을까. 굳이 불교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인연을 말한다. 인연(因緣, 산스크리트어: hetu-pratyaya 또는 nidāna)은 원인을 의미하는 불교 용어다. 인(因, 산스크리트어: hetu)은 결과를 낳기 위한 내적 원인을 의미하고, 연(緣, 산스크리트어: pratyaya)은 이를 돕는 외적 간접 원인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는 양자를 합쳐 원인의 뜻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직접적인 원인으로서의 인(因)과 간접적인 원인으로서의 연(緣)은 예를 들어, 씨앗은 나무의 직접적 원인인 인(因)이고, 햇빛·공기·수분·온도 등은 간접적 원인인 연(緣)이다. 그러나 이 모두는 씨앗에서 나무가 나타나게 하는 원인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싯다르타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으로 생겨나고 인연으로 소멸하는 연기(緣起, 산스크리트어: nidāna)의 법을 깨우쳤다고 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세상이 끝난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너무나 쉽게 만성화된 슬픔, 고질화 된 우울 속에 갇히고 만다. 행복과 기쁨은 더이상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앞으로, 앞으로 삶을 밀어붙이면 알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람이 부재하기에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한 인연이 끝나면 다른 사람과 새로운 인연을 만들 수 있다. 처음에는 이별의 절벽으로 떨어지는 수평선처럼 보이나 앞으로 걸어 나가 배를 수평선 쪽으로 밀어 붙이면,‘온세상 어린이 다 만나듯이’새로운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그것을 원하고 또 그것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쳤던 ‘자유’라는게 있다. 그것이 넘치면 방종이 되고, 모자라면 노예나 다름없이 된다. ‘아무거나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유가 아니다. 멈출 수 있는 힘이 자유다’라는 근사가 경어가 있는데, 게임에 빠진 아들에게 엄마가 “야, 게임 좀 그만해라”고 말하면 아들은 “왜 내 자유를 간섭해요. 이제 나도 성인인데”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러면 엄마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니 마음대로 그만두지도 못하면서 그게 어떻게 자유냐?”고. 중독되어 어떤 일을 계속하는 것,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은 자유일 수 없다. 산 위에서,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것이 어떻게 자유일 수 있겠는가? 나무나 바위를 붙잡고 떨어지지 않는 것이 자유다. 멈출 수 있는 사람만이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있고 관계를 단절할 수 있는 사람만이 자기 뜻대로 관계를 만들 수 있다. ‘노’라고 할 수 있어야, 멈출 수 있어야, 그만둘 수 있어야만 한다. 바로 이럴 때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당당해지고 그만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삶을 영위하게 될 것이다.
스피노자(1632∼1677)는 자신의 저서인 『에티카』(윤리학)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기쁨을 정신이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감정으로 이해하지만, 슬픔은 정신이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감정으로 이해한다. 더 나아가 나는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되는 기쁨의 감정을 쾌감이나 유쾌함이라고 하지만, 슬픔의 감정은 고통이나 우울함이라 한다”기쁨과 쾌활함을 주는 관계가 있다면 목숨을 걸고 지속하고, 슬프게 하거나 우울하게 하는 관계가 있다면 목숨 걸고서라도 끊어야 한다.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바로 주인이다. 비극은 슬픔과 우울과 짜증을 주는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데 있다.
우리는 부모님이 건강하고 사회적 영향력이 있을 때, 아이가 공부 잘하고 원만한 교우관계를 가질 때, 배우자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승승장구할 때, 부모님이나 아이를, 그리고 배우자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들에 대한 사랑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모님이 치매에 걸렸을 때, 아이의 성적이 완전히 추락했을 때, 배우자가 실직했을 때는 마침내 우리에게 사랑을 증명해야 할 위기가 찾아온다. 지금까지 ‘사랑한다’고 반복적으로 말했던 사랑, 속으로도 부모님을, 아이를, 배우자를 깊이 사랑한다고 믿었던 사랑을 증명할 때가 온 것이다. 그러나 치매에 걸린 부모님은 짐처럼 느껴지고 자신의 삶을 가로막는 장벽처럼 느껴지기 시작하고, 공부 못하는 아이가 자기 삶의 오점 인양 여겨져, 아이 이야기는 피하고 싶어진다. 또 실직한 뒤에 축 처진 모습으로 집에만 있으려는 배우자의 모습에서는 점점 짜증이 날 수도 있다. 자신이 부모님이나 아이 혹은 배우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믿음은 밑바닥부터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부모님에 대한 사랑, 아이에 대한 사랑, 배우자에 대한 사랑을 증명해야 할 때 증명에 실패한 때문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가족관계와 부부관계가 흔들리는 위기 상황은 우리에게 사랑의 증명을 요구한다. 그 사랑의 증명은 참혹한 데가 있다. 타인에 대한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이 자기에 대한 사랑이었는지 아니면 타인에 대한 사랑이었는지 확인되는 순간이니까 그렇다. 불행히도 소수 사람들만 사랑의 증명에 성공하고, 많은 다수의 사람들이 사랑을 증명하는데 실패한다. 사랑한다고 믿었던 10년, 20년 아니 50년이 하나의 신기루로 전락한다. 사랑의 증명을 통해 부모님이나 아이, 배우자에 대한 사랑이 단지 자기에 대한 사랑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자각한 사람에게 돌을 던지지는 말자.‘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말했던 것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자각한 사람, 그래서 앞으로 어떤 타자에게도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말하지 못하게 된 사람에게는 너무 가혹한 처사일 수도 있으니까.
우리는 愛자를 ‘사랑 애’로 읽으며 영어 ‘love’와 유사한 의미로 이해한다. 사랑이라는 말이 오늘날처럼 대중화된 것은 100년도 채 되지 않았다. 아마 서양의 기독교 전통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대중화된 듯하다. 愛의 글자 풀이를 보면 ‘사랑한다’는 뜻 외에도 ‘∼을 아낀다’혹은‘∼에 인색하다’라고 되어 있다. ‘너를 아낀다’는 말은 ‘나는 너를 함부로 부리지 않는다’는 의미기 포함된 것이다. 과거? 남자들이 프로포즈할 때 “네 손에 물 한 방울 묻지 않도록 할게”라고 한 말은 “내가 빨래도 설거지도 다 해줄게”라는 의미로 너를 쉬게, 편하게 해주겠다는 뜻이다. 바로 이것이 ‘아낌’의 개념이다. 정서에만 머물기 쉬운 ‘사랑’이라는 개념과 달라지는 지점이다. 아낌은 그 사람 대신에 또는 그 사람을 위해 기꺼이 수고를, 사랑을 증명하는 행동인 것이다.
다시 불교 이야기로 돌아가 임제(臨濟義玄, ?~867, 당나라 시대 선승, 성은 刑씨, 선종인 임제종의 시조 - 隨處作主 立處皆眞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서 있는 곳이 모두 진리다’라는 사자후가 전한다)의 스승인 백장(百丈, 749∼814)은 ‘자비도 아낌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백장 선사는 평생동안 고결한 성품으로 매일 노동으로 수행했다. 남보다 먼저 일터로 나갔는데, 한 스님이 농기구를 숨기고 쉬시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백장은 ‘내가 아무런 덕이 없는데 어찌 남들만 수고스럽게 할 수 있겠는가?’라며 숨긴 농기구를 찾아 나섰다. 한번은 숨겨 논 농기구를 찾지 못하자 백장 선사는 식사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말이 유래했다. 백장의 행동은 싯다르타의 자비를 실천하며 살겠다는 발원에서였다. 자비 혹은 사랑은 타인의 고통을 느끼고 타인의 고통을 줄여주려는 자발적 의지이자 행동이다. 백장은 큰스님이 되자‘승가공동체’를 ‘경제활동 공동체’로 바꿔 자립 의지를 키웠다. 백장은 대중을 ‘애지중지’했기 때문이고 ‘자비’를 실천했던 것이다. [祖堂集 참조 - 중국과 한국 선종의 역사와 선사들의 전기를 기록해 952년에 간행한 불교서]
지금까지 7장의 내용들을 대략 살펴봤다. 요약하면 苦, 無常, 無我, 靜, 因緣, 主人意識과 愛 등으로 무거웠지만 애틋한 주제들이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生’에 대해 볼 차례다. 이 문제는 너무 복잡하고 다난하여서 한마디로 말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저자는 말한다. “반려견에게 사료를 주고 목욕을 시키고 같이 산책도 나갔다고 해서 반려견이 무언가 보답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면서 내 곁에 오래 머물러주기를 기대할 뿐이다. 개는 원래 인간과는 느끼고 행동하는 것이 다르니 그냥 아껴줄 뿐이다. 그러나 사람은 다르다. 어느 순간 아끼는 사람에게 원하는 것이 생길 수가 있다. 이때 비극이 시작된다.”
아끼는 사람이 무엇인가 해주기를 바라는 순간 아낌의 관계는 무너지고 그 자리에 너저분한 거래 관계가 자리 잡는다. “내가 이만큼 했으면 너도 이만큼은 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니야?”이렇게 되면 아낌의 관계는 막장을 향해 치닫고 만다. 이런 비극을 피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아끼는 사람을 반려견처럼 보는 연습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다.ㅋㅋ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과 그가 ‘노’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을 긍정한다는 의미다. 상대와의 첫 만남을 떠올려보자. 스피노자 말처럼 상대방은 내게 기쁨과 유쾌함과 삶의 의지를 증진 시켜 주었다. 그래서 나는 상대방에게 손을 내밀었던 것이고 그를 통해 내가 더 행복하고 더 자유로울 수 있다고 느꼈다. 다행히 상대방도 나의 손을 잡아주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것은 나를 불쌍히 여겨서도 아니고, 나를 동정해서도 아니고, 상대방도 나를 통해서 더 행복하고 자유로워진다고 느겼기 때문이다. 사랑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스스로 주인공이어야 하고, 동시에 상대방도 주인공으로 대우해야 한다.
이 책은 불교 이야기를 주로 주제로 했지만, 마지막에는 맹자 이야기를 한다. 『맹자』「공손추」에 ‘물망, 물조장(勿忘, 勿助長)’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마음으로는 잊지도 말고, 억지로 자라나게 도와주지도 말라’는 말이다. 어떤 송나라 사람이 벼의 싹이 잘 자라지 않는 것을 보고 논바닥에 심어진 벼의 싹을 조금씩 뽑아 올려주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가족에게 그것을 자랑했다. 아들이 논으로 달려가 보니 벼싹은 말라 죽어 있었다. 벼의 싹이 빨리 자라도록 돕는 것에서 경험을 얻은 농부는 이제 벼를 그냥 방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조장助長의 비극을 보았기에 이제 조장하지 않고 버려둔다면 이것이 망忘이다. 망도 조장과 동일한 오류를 범하는 셈이다.
무언가를 아낀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조장해도 그 대상은 불행에 빠지고, 완전히 방임해도 아끼는 대상은 불행에 빠진다. 그래서 맹자는 ‘잊지도 말고 조장도 하지 말라’고 하였던 것이다. 내 남편, 내 아내, 내 여자친구, 내 남자친구, 내 아들, 내 딸, 내 반려견과 내 화초까지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하면 내가 아끼는 것들이 근사해지고 더 행복해질까 고민될 때 맹자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지혜를 준다. 그렇지만 그것은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다. 조장하지 않으면 아끼는 대상을 잊어버리기 쉽고, 잊지 않으려면 조장하기 쉽기 때문이다. 엄마가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원해야만 한다고 자신이 생각한 것’혹은 ‘언젠가 아이가 원할 수도 있다고 믿는 것’에 문제가 있다.‘망’과‘조장’사이 혹은‘물망’과‘물조장’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그래서 아끼는 일이 힘들다고 하는 것이다.
사랑은 ‘이만하면’이라는 말로 가늠할 수 있는 양적인 문제가 아니라 질적인 문제라는 것도 알아두자. 사랑했거나 사랑하지 않았거나, 제대로 살았거나 그러지 못했거나, 행복했거나 행복하지 않았거나, 자유롭거나 자유롭지 않았거나 이제 ‘이만하면’이라는 말은 우리 삶에서 지우도록 해야 한다. 사랑도 삶도 행복도 자유도 남들 시각이나 평가, 재산과 소비수준과는 무관하게 질적인 것이다. ‘아직 제대로 영위하지 못했다. 아직 부족하다고 말해야 한다’그래야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이 생긴다.
“애인이어도 좋고, 친구여도 좋고, 남편이어도 좋고, 아내여도 좋고, 아버지여도 좋고, 어머니여도 좋다. 고양이여도 좋고, 강아지여도 좋고, 벚꽃이어도 좋고, 화초여도 좋다. 그것이 무엇이든‘기브 앤드 테이크’에서 ‘테이크’를 절단하고‘기브 엔드 기브…’를 할 수 있는 삶을 독자들이 살아냈으면 좋겠다. 그리고 마지막 눈 감을 때 보는 것이 자신의 눈부처(눈동자에 비친 부처의 모습)일 수 있는 기적을 만났으면 좋겠다”- 에필로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