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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만주의 화가들
1) 프란시스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
스페인의 아라곤 지방의 사라고 시에서 아버지가 도금장인 미천한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1763-66년 경에 마드리드로 나와서 미술학교에 지원하였으나 낙방했다. 이때 스페인에는 멩스와 티에폴로(이태리의 바로크 화파의 마지막 거장)가 머물고 있었으므로 이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770-71년에 이태리의 파르마에 있는 미술 아카데미에 지원하여 2등으로 합격하였다. 1773년에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와서 결혼하였다.
이때 벨라스케스와 렘브란트의 영향으로 전통 미술에 대한 반항과, 스페인 기질을 표현하므로 자기의 예술세계를 확립한다. 왕궁과 귀족들의 초상화를 열심히 그리는 동안에 1795년에는 알바 공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후 알바 공작 가문과 인연을 맺는다.)
1792년에는 질병을 앓으면서 청력을 상실한다. 이러한 고통을 겪으면서 오히려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주문을 받는 작품에서는 자신의 상상력과 욕망을 충분히 표현할 수 없다고 불평한 것에서 그의 낭만주의적 예술관을 엿볼 수 있다. 그의 대표작에는 주제가 폭력인 것과, 천민을 주대상으로 하여 표현주의적 기법으로 그린 것이 많다.
그의 초상화 중에는 ‘카를로스 4세의 일가’가 대표작이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 연상되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 표현한 인물들은 대단히 개성적이다. 심리 묘사도 아주 예리하다고 한다. 관례적인 초상화에서 나타나는 이상화와 미화도 없다. 그는 비록 궁중화가였지만 작가인 자신의 주관과 개성을 표현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는 마하(옷을 입은, 옷을 벗은 1798-99)는 종교 재판에서도 논의되었다고 한다. ‘마하’라는 하류층의 여인을 그린 것은 그 시대의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
1808년에 나폴레옹 군대가 스페인을 침공해 왔을 때는 오히려 담당하게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민중봉기와 프랑스 군대의 진압 과정에 보여준 무자비한 학살을 겪고 나서 그는 자신의 예술에 깊은 반성을 하였다고 한다. (방관에서 참여로 바뀌는 계기가 됨) 궁중화가로서 세속 순응적인 그림을 그렸던 그가 인간 내면의 본능을 솔직하게 표현하게 된다.(본능적인 폭력성을) 이때 그린 그의 그림에는 격렬성이 넘쳐난다.(1808년 5월 2일과, 5월 3일은 프랑스 군대의 폭력성을 격렬하게 표현하였다.)
1812년에 부인 호세파 바이유가 사망하자 그도 은퇴 준비를 한다. 1819년 만사나레스 강가에 집을 구입하여 ‘귀머거리 집’이라고 명명한다. 집의 벽을 검은 색으로 벽화를 그렸다. 공포와 억압을 괴물로 상징하여 거칠고, 활달한 필치로 그린 표현주의적 작품을 남겼다.
그의 그림 중에 “보르도의 우유짜는 여인”은 인상주의적 색채가 짙은 작품이다.
고야의 그림을 볼 때 우리는 그를 ‘혁신적인 사실주의 화가’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고야의 작품 세계가 지니는 가장 두드러진 핵심은 진실의 표현이다. 그 진실의 원천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의 작품 1808년 5월 3일에서 죽어가는 자는 종교화처럼 천당을 위한 순교자가 아니다.(이때 총살당하는 사람은 침략군에 반항한 시민이다. 따라서 국가 영웅인 셈이다.) 다만 자유를 위하여 죽어가고 있는 현실의 인간일 뿐이다.
2) 윌리암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
영국의 화가, 판화가, 철학자, 시인이다.
그는 환상을 체험한 후에 신비철학을 표현하기 위해서 상징적 기호를 사용하였다. 그는 신비한 인간관과 우주관을 상징주의 형식으로 노래한 대서사시 ‘4개의 조아’를 지었다. 그는 자신의 시를 출판하면서 ‘삽화’로 그림을 그렸다. 그의 삽화 그림도 당연히 신비적인 상징주의 그림이었다.
가시적인 세계는 가공의 세계일 뿐이다. 그 배후에는 정신적인 진실이 숨어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예술은 정신적인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고 믿었다. 더욱이 숨어있는 진실은 환상적인 상상력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그의 예술에서 상징적 표현을 위해서는 선(線)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는 딱딱한 느낌이 드는 직선의 특징을 살려서 선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다.
이 선적 양식을 영국에서 아르 누보의 전조로 간주하고 있다.
작품 1) 로스 --- 한길 30
2) 네부카드네자르 --- 한길 320
3) 아이쟉 뉴턴 --- 한길 321
4) 그리스도 강림 --- 한길 325
5) 저주받은 영혼의 얼굴 --- 한길 326
6) 옛날 -- 웬디
3) 윌리암 터너 (1775-1851)
터너는 1775년에 런던의 변두리에서 아버지가 이발사인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는 미술 공부를 하였으나 재능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는 여행을 무척 좋아하였다. 그래서 젊은 시절부터 종종 스케치 여행을 떠나고 하였다. 여행에서 그린 스케치 풍경화에서 그의 재능이 나타났던 것이다.
24세 때인 1799년에 왕립 아카데미 준회원이 되고, 1802년에 정회원이 되므로 그는 예상 밖으로 일찍 성공을 거두었고, 명성도 높아졌다.
그는 많은 여행을 하면서 (일생동안 약30회의 유럽 여행을 했다.) 풍경화를 그렸다. 그의 풍경화에는 네델란드 화풍과 로랭의 양식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1800년대가 되면 벌써 그는 자기의 참신한 양식을 확립하였다. 밝은 색채와 대기의 표현에 관심을 쏟으면서 자기의 예술 세계를 형성해나갔다. 그의 그림은 극적인 주제를 다루므로 낭만주의 경향을 뚜렷이 나타내었다.
그의 사생활을 보면 정식 결혼은 하지 않으면서도 여자 관계는 아주 복잡하였다. 이것은 정신병을 앓는 어머니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의 그림은 거의가 풍경화이다. 인물화는 아주 적다.(자화상은 경우 2점이다.) 일부에서는 그의 뎃생 실력이 좋지 않아서 이다 라고 하지만, 글쎄?
터너의 예술을 말할 때는 반드시 “빛”을 이야기 한다.
빛의 효과를 이용하는 것은 유럽 미술의 특징이기도 하다. 고대로부터 양감(조각적 느낌의표현)을 나타내기 위해서 빛을(음영법) 이용하였다. 그러나 바로크 이후에는 빛의 밝은 부분이 음영이 아닌 회화적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서 이용하였다. (회화적 표현이라고 말한다.)즉 이때의 빛은 음영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고, 표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므로 회화적 빛이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햇빛 아래에서 직접 그림을 그리는 외광파들은 빛의 효과를 최대한으로 이용하였다. 이들이 인상파 화가들이다.
터너는 빛과 대기를 주제로 하여 풍경화를 그리므로 장대하고, 로맨틱한 예술을 창조하였다. 그가 창조한 빛은 들라크로아 및 모네에게 큰 영향을 준다.
그의 풍경화에는 역동적인 시의 표현이 있다.
러스킨은 터너의 생애를 이렇게 요약하였다. ‘ 유년시대에는 불행한 가정에서 자랐고, 청년시절에는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 할 벗ㅇ 없었다. 장년기에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사랑도 없이, 희망 없이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풍경화를 보면 대자연의 파괴력 앞에 무참히 쓰러지는 인간의 나약함과 허무가 회화 언어로 독특하게 구사되어 있다.
4) 존 컨스터블 (1776-1837)
터너와 함께 영국을 대표하는 풍경화가이다.
그는 지방의 제분업자 아들로 태어나서 비교적 유복한 유년을 보냈다. 어릴 때에 그림에 재능을 보이므로 칭찬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화가로 인정받기에는 많은 세월이 흘러가야 했다.
1816년에 아버지가 죽자 유산을 물려받아서 경제적인 어려움은 별로 없었다. 또 어릴 때부터 오래 동안 알고 지냈던 마리아 빅널과 결혼하였다. 결혼을 반대한 신부 부모가 나중에 유산을 나누어주므로 생활에 여유가 있었다.
그는 네델란드 화풍의 풍경화를 이어받았지만 빛을 이용한 그의 독특한 기법으로 자기만의 풍경화를 그렸다. 목초지, 나무, 물에 비치는 빛의 효과와, 하늘을 가로지르는 구름의 움직임을 묘사하므로 시골에 대한 그의 애정을 감동적으로 그려내었다. 그는 자연에 대한 직감적 인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의 그림은 정교한 구상화로 그린 완성된 그림보다 스케치화가 더 신선하고 예술적이다 라는 평을 듣는다. 이 스케치화가 프랑스 낭만주의 거장 들라크로아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빠른 붓질로 그림을 그렸다.(화면이 매끄럽지 못하고 거칠다는 뜻이다.) 35세 때에 그린 ‘데드햄 계곡의 아침’은 그가 열정을 쏟아서 그렸지만 동시대의 사람들은 거친 붓놀림으로 표현한 시각적 즉흥성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의 소원은 자기가 모르는 사람이 자신의 그림을 사주는 것이었다. 그림을 그린 지 15년이 지난 해에 그의 소원은 이루어 졌다. 그러나 그림의 구매자는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이내 다른 화가의 그림으로 바꾸어 버렸다.
컨스터블의 거친 그림은 곧 잘 미완성 그림으로 오해를 받았다. 그는 왕립 아카데미의 회원이 될 욕심으로 친구의 권유를 받아들여서 깔끔하게 마무리 된 그림을 그렸다.(배건조)그러나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는 임신과 육아로 힘들어하는 아내를 위해서 1821년에 강변 마을로 이사갔다. 그해에 약 5개월을 걸려서 그린 ‘건초 마차’는 유명한 그림이 되었다. 이 그림은 그가 자연에서 체험하여 얻은 영감으로 그렸다.
1824년에 건초 마차와 ‘데드햄 근처의 스타우어 강 풍경’을 프랑스인이 사갔다. 이 그림으로 그는 프랑스에서 아주 인기있는 작가가 되었다. 이때 프랑스에서 팔린 그림이 그가 영국에서 지금까지 판 그림보다 많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는 영국에서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데 큰 실망을 하고 있었다.
1825년에 그린 ‘뛰어 오르는 말’은 그의 그림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고 한다.
52세 때 그의 아내가 죽자 그는 크나 큰 좌절에 빠졌다고 한다.
그러나 프랑스의 들라크로아는 컨스터블의 그림을 보고 자기의 그림 ‘카오스 섬의 대학살’의 색상을 완전히 새로이 할 만큼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1837년에 ‘아룬델 제분소와 성’을 제작하던 도중에 갑자기 병사하였다. 이때 발표한 사인은 소하불량이라고 하였는데---. 글쎄?
5) 제리코 (1791-1824)
프랑스 낭만주의 회화의 창시자로 생각한다.
루앙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 파리에 와서 유년을 보낸다. 파리에서 샤를 베르네와 피에르 게랑(Pierre Guerin)에게 그림을 배웠다.
21세 때 그린 ‘돌격하는 기병대’는 살롱전에서 금메달을 받았다. 이 그림은 고전주의 회화의 판에 박힌 양식을 벗어나서 아주 사실적으로 그렸다.
‘메두사 호의 뗏목’은 그를 화가로서의 지위를 확고하게 해주었다. 경마를 좋아한 그는 경마장 풍경을 그림으로 많이 남겼다. 이 그림에서 그는 낭만주의의 방향을 제시하였다는 평을 듣는다.
그는 역사화에서 영웅의 모습을 다루는 대신에 현실의 인간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렸다. ‘메두사 호의 뗏목’도 절망하는 인간의 모습을 잘 표현하였다고 하였다. 또 서아프리카 해안에서 좌초한 메두사 호는 왕당파의 권력으로 무능한 선장을 임명한 까닭이라고 하여 사회적으로 시끄럽던 문제를 다루었다. 이 문제를 다루므로 사회 문제에 참여하였다.
그는 경마를 좋아한 만큼, 34세의 젊은 나이에 경마를 하다가 떨어져서 죽는다.
6) 들라크로아(Eugene Delacroix 1798-1863)
비교적 상류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아버지가 유명한 정치인인지, 외교관인지는 논란이 많다.
1816년에 피에르 게랭 화실에서 제리코와 함께 그림을 배웠다.
그는 다비드의 신고전주의 그림보다는 장 그로와 제리코의 그림을 더 좋아하였다.
1822년에 ‘지옥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가 입상하면서 그의 낭만주의적 화풍을 예고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카오스 섬의 학살’과 ‘사르다니팔로스의 죽음’을 발표하였다. 특히 카오스 섬의 학살에서는 전통의 화법과 전혀 다르게 그렸다. 강렬한 원색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도덕적인 덕목도 보이지 않는다. 그때 비평가의 평은 카오스 섬의 학살 뿐아니라 회화의 학살이라는 혹평을 하였다.
그는 색채의 사용을 분할주의적 기법으로 색채 효과를 독자적으로 만들어 내었다. 이것은 인상파의 르노아르, 쇠라, 고호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는 다비드의 반대편에 선 낭만주의자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카오스 섬의 학살에서는 극적인 상황을 나타내기 위해서 강력한 원색의 색채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때까지는 배합을 하여 중화된 색을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니까 전통적인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눈에는 엉터리로 보였을 것이다.
이제는 선이 아닌 색채가 회화 표현의 중심이 되었다. 고전주의 그림이 보여주는 차거운 색감에 비하여 불타는 듯한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므로 인간의 감정을 고양시켰다. 이로서 회화의 혁신을 불러왔다. 그래서 그는 근대 회화의 선구로 꼽힌다.
그는 주장하기를 그림이란 눈을 위해서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위해서라고 하였다.
평가]
들라크루아는 뛰어난 상상력, 날카로운 지성, 예민하고 민감한 감수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19세기에 가장 이해받지 못한 예술가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1850년 〈일기〉에 "아름다움은 발견되지만, 단 한번 특별히 정해진 역사적 순간에만 발견될 뿐이다. 그러므로 그뒤에 오는 천재에겐 너무 불행한 일이다"라고 썼다. 그가 사람들의 오해 때문에 그토록 많은 슬픔을 겪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너무 일찍 태어나는 천재도 불행하다"는 말을 여기에 덧붙여도 좋을 것이다. 그의 천재성은 현대 예술의 섬세함과 비극적 측면을 미리 예시해 주었는데 그가 살아 있을 때 이런 면을 이해한 사람은 시적 직관력을 가진 샤를 보들레르뿐이었다.
들라크루아는 영국 화가인 J. M. W. 터너와 더불어 회화 기법의 대담한 혁신을 가져온 인상파에 직접 영향을 끼쳤고, 현대 표현주의의 선구자였다. 오귀스트 르누아르, 클로드 모네, 폴 세잔, 폴 고갱, 빈센트 반 고흐, 오딜롱 르동, 조르주 쇠라, 앙리 마티스, 파블로 피카소는 모두 자신들이 들라크루아의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했다. 그의 색채사용과 형태표현은 티치아노와 루벤스 못지않았다. 하나의 미학적 운동에 국한시키기에는 너무 폭이 넓은 화가이지만, 1830년경에 낭만주의 화가로 규정되었다. 그는 여기에 불만을 품고 그는 "나는 순수한 고전주의자다"라고 답했다. 그는 미술을 통하여 자기 존재의 시적 감흥을 전달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는 그림을 그릴 때마다 형태와 빛, 그리고 무엇보다 교향곡과 같은 채색을 창조했고, 표현이 풍부한 조화로운 통일체로 완성시켰다
1863년에 독신으로 산 65년의 생을 하녀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마감하였다.
7)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drich 1774-1840)
독일의 낭만주의를 개척한 화가로 손꼽는다. 고펜하겐에서 미술공부를 한 후에 드레스텐에 정착하였다. 가끔 여행은 했지만 조용하게 생활하였다.
그의 그림은 풍경이 갖는 정신적인 면을 직관으로 통찰하였다.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와 산, 눈 또는 안개에 덮힌 평야, 새벽이나, 황혼 또는 달밤에 빛이 주는 묘한 느낌을 화폭에 담아냈다. 이처럼 그의 작품에는 항상 빛에 전체의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독일에서는
풍경화가들이 진정한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프리드리히도 당시에는 푸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프리드리히는 풍경화를 단순한 묘사를 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과 자연의 교감에서 오는 인간의 정신세계와, 역사성, 종교, 그 밖의 시대 정신을 아우러서 표현하였다.
1774. 9. 5 포메라니아 그라이프스발트~1840. 5. 7 프로이센 드레스덴.
19세기초 독일의 낭만주의를 개척한 화가.
프리드리히가 그린 소묘 <Self-portrait>
자연의 힘 앞에 인간의 무력함을 나타내는 거대하고 신비스러운 풍경화를 그렸으며 숭고미를 낭만주의 운동의 주요개념으로 확립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1794~98년 코펜하겐에 있는 아카데미에서 공부했지만 주로 독학했다. 드레스덴에 정착한 뒤 화가인 필리프 오토 룽게 및 작가인 루트비히 티크와 노발리스 등으로 이루어진 미술·문학 서클에 가입했다. 세피아로 그린 세련된 초기 양식의 데생들은 괴테의 칭찬을 받았으며 1805년 바이마르 미술협회에서 주는 상을 받았다. 최초의 중요한 유화인 〈산중의 십자가 The Cross in the Mountains〉(1807경, 드레스덴 회화관)는 압도적인 고립감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성숙한 양식을 뚜렷이 보여주는데, 이것은 종교적인 그림에서 전통적으로 볼 수 있었던 상징적 표현을 자연에서 끌어낸 상징으로 대체하려는 시도였다. 그밖에 〈북극의 난파선 Shipwreck in the Ice〉(1822, 함부르크 미술관) 같은 상징적인 풍경화들은 그의 숙명론과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을 나타내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자연의 면밀한 관찰에 기초를 두었지만, 채색은 발트 해안과 하르츠 산지에서 그가 느낀 경외스럽고도 불길한 분위기를 반영하며 그의 풍부한 상상력을 거쳐 이루어졌다. 1824년 드레스덴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었다. 오랫동안 그의 작품은 잊혀져 있었지만, 20세기에 들어와서 그의 작품에서 독특한 실존주의적 고독이 인식되면서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8) 까미유 코로(Camille Corot 1796-1875)
26세에 상인이 되기를 포기하고 화가의 꿈을 이루기로 마음 먹었다. 그는 그림을 그리면서 스승인 미살롱이 ‘내 앞에서 내가 보는 모든 것을 재생시켜라’라는 말을 평생 동안 잊지 않았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사실주의 화가인 셈이다. 따라서 그를 낭만주의와 사실주의라는 한 화파로 단정하기에는 문제가 많다.
그는 감정 전달을 목표로 한 폴위에 풍경화나, 바르비죵 화파와, 네델란드 풍경화와도 달랐다. 프랑스 고전주의 기법으로 풍경화를 그렸다. 그는 자연을 사실적으로 그렸으나 밀레나 꾸르베 같은 기법으로 농부를 이상화하지도 않았다. 이런 이유로 코로를 고전주의 화가이냐, 낭만주의 화가이냐를 두고 논쟁도 심하였다.
그는 바깥에서 스케치한 후에 화실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는 스승의 가르침대로 고전주의 기법으로 풍경화를 그렸지만, 그의 그림에는 詩情을 담아서 자기만의 화풍을 정립하였다. 이러한 시정 때문에 낭만주의 화가로도 다루어주는지 모른다. 엄격히 말해서 그는 낭만주의도, 사실주의도 벗어나 있는 화가이다. 그는 자연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지 이상화하여 묘사하지는 않았다.
1850-70년 경에 이르면 그의 풍경화는 점점 더 신비롭고 영묘하게 되어서 흔히 무형식이라는 말도 들었다.
그의 풍경화는 후대의 모든 풍경화가들이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코로는 이후에 사실주의 내지 자연주의 화가를 다룰 때 더 상세히 다루기로 하겠다. 그의 초기 작품과 낭만주의 성향의 그림을 몇 점만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