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Ⅲ-63]실패한, 성공한 축구맨 ‘손웅정’의 책
최근 3개월 사이 의식하지 못한 ‘이상한 일’이 생겼다. ‘큰 일’이라고 할 정도의 이상한 일은 도무지 책 한 권을 제대로 읽지 못하게 됐다는 것이다. 나로선 평생 처음 있는 일인 듯, 은근히 걱정도 됐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신드롬(독서 슬럼프)이 계속 되면 어떻게 하지? 3개월새 몇 권이나 읽었을까? 왜 책을 잡으면 머리 속이 하얘지고 읽고 싶은 마음이 나지 않은 걸까?
어제는 임실군립도서관에 3주 전에 빌린 <독일교육 왜 강한가>(박성희 지음)라는 책을 몇 쪽 읽지도 않고 반납을 했다. 독일교육이 세계 최고라는 말을 지식소매상 유시민과 김누리교수 그리고 최동석 인사조직연구소장 등으로부터 수도 없이 들어서 알고자 빌렸는데, 우째 이런 일이. 이런 일은 난생 처음이었다. 나 자신을 나름 ‘글쓰는 남자’가 아닌 ‘책 읽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소위 대한민국에는 내로라하는 ‘독서가讀書家’들이 많이 있다. 유시민, 장석주, 강준만 등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발가락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늘 책을 가까이 했으므로 최소한 ‘독서인讀書人’이라고는 할 수 있지 않을까. 몇 만 권을 소장한 ‘장서가藏書家’도 아니고, 어느 작가의 빠끔이인 ‘전작주의자’도 아니다. 그렇지만 ‘수불석권手不釋卷’(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은 오랫동안 나의 트레이드마크였다. 그렇다고 안중근의사의 휘호처럼 ‘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생긴다)은 아니다. 글 속의 사진처럼, 최근 두어 달 전 직접 선물받은 정민 교수의 책 <고전, 발견의 기쁨>과 그의 또다른 저서 <성대중처세어록> <다산어록청상>을 머리말조차 읽지 못하고 있어 저자에게 송구할 따름이다.
아무튼, 석 달여 동안 책을 거의 읽지 않은 것은 처음인 것같다. 특별한 이유도 없는데 왜일까? 정신이 산란하기 때문일 터인데, 왜 산란한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두 달은 손자 케어에 조금 신경썼다지만, 정신이 집중이 안되니 책이 읽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다 지난 19일, 판교도서관에서 우연히 두 권의 책을 통독하고 반성을 많이 했다. 솔직히 나처럼 구기종목에 손방이고, 스포츠 문외한은 드물 것이다. 손흥민의 아버지가 손흥정(62)이라는 국가대표 축구선수였고, 부상으로 은퇴한 후 두 아들을 축구지도했다는 것도 맹세코 처음 안 사실이다. 첫 번째 눈에 띈 <나는 읽고 쓰고 버린다>라는 책제목을 보고 ‘버린다’에 필이 꽂혀 슬슬슬 읽는데, 손웅정씨가 어느 시인과 대담하는 내용의 책이다. 그 책은 좀 가벼워 특별한 것을 느끼지 못했는데,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2021년 펴냄)는 책은 정독하며 심각하게 많은 것을 느꼈다.
그는 알고보니 ‘책읽는 남자’였다. 1년에 최소 100권을 읽는다는데, 사흘에 한 권꼴이다. 한 권을 보통 3번쯤 읽으며, 중요한 부분, 자기가 꼭 알아야 하고 외워야 할 부분은 밑줄을 치니, 어떤 부분은 밑줄이 색색별 3번 그어진 것도 있다 한다. 그런 후 책은 어떤 미련없이 버려버린다(폐기처분)는 것이다. 무소유, 좋은 생각이다. 어릴 적부터 습관이라는데, 머리가 멍청하기 때문에 여러 번 읽고 밑줄을 친다며 겸손을 떠는데 기가 질렸다. 운동선수가, 그것도 국가대표 시절에도, 그야말로 수불석권, 손에서 책을 놓아본 적이 없다는 것이 믿어지는가. 한마디로 그는 ‘독종毒種’이었다. 개똥철학자가 분명한 ‘오기傲氣의 남자’이었다. 그리고 또 한없이 겸손했다. 그 아들이 아버지를 닮지 누구를 닮겠는가. ‘자식농사’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농사 중에 최고의 농사가 자식농사가 아니던가. 오죽했으면 나도 두 아들에게 이 책을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겠는가. 줏대(주체성, 아이덴티티)가 뚜렷한 사람은 부귀영화나 출세에 관계없이 훌륭한 사람이라는 게 나의 지론이었는데, 손웅정은 딱 거기에 해당되는 사람이었다. 두 권에 몰입한 3시간은 값졌다. 그날밤 아내에게 손웅정을 아느냐? 손흥민의 아버지라는데 그의 책 두 권을 읽고보니 사상가가 따로 없더라 하자,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해 멋쩍었다. 아, 나만 모르고 있었구나. 아내는 책도 읽지 않고 어떻게 안 것일까? 나는 한번도 보지 못했는데 방송을 많이 탄 때문일까? 방송을 탈만한 외모도 아닌 것을(흐흐).
<기본에서 시작한다>라는 책의 부제副題가 “실력도 기술도 사람됨됨이도, 기본을 지키는 손웅정의 삶의 철학>이었다. 순진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는 그의 삶의 철학에 박수를 여러 번 보냈다. “나의 축구는 순전히 아버지의 작품이다”는 세계적인 스타 손흥민의 고백이 어찌 빈소리일까. 두 아들을 축구선수로 키울 생각은 한번도 하지 않았는데, 어느날 두 아들이 축구를 가르쳐 달라고 해 “너무 힘든 길인데, 그래도 갈래?”로 시작된 축구인상 3부자 이야기는 무척 흥미로웠다. 집중까지 되었으니, 두어 달 지속된 ‘독서 슬럼프’에 탈출구가 생긴 것일까? 그렇다면 다행인데, 여전히 머리가 멍하다. 귀향 후, 황금들판이 쑥대밭(멸구떼가 온 들판을 훑었다)이 된 것도 이유는 될 듯하지만, 독서의 계절이라는 가을이 왔는데, 이 상태가 계속되면 멘붕이 걸릴 듯해 나 자신도 두려운 요즘이다. 휴우-.
아무튼, 실패했지만, 또 성공한 손웅정 삶의 철학은 일독一讀해 볼 일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